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61
61. 임무 유형, 호위(5)
프리아시스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을 원한다는 것은 잘 알았다. 무 엇을 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러나 그런 이야기를 내게 몇 번이고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더러 널 도와달라는 거군.”
“그렇다.”
“나 같은 놈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만, 황녀씩이나 되면 권력이 아주 으리으리하지 않냐? 잘난 기사님들이 줄을 설 텐데.”
“나는……
프리아시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소녀는 눈을 꾹 감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허수아비야. 황녀라는 이름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아무도 나를 따르지 않는다.”
“돈은 있잖아. 용병이라도 구해.”
“그럼 그대를 용병으로 고용하겠다. 고용비는 원하는 대로 주마. 나는 이름뿐이지만,그래도 금화는 넉넉 하게 있다.”
프리아시스는 드레스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주 머니 속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했다. 나는 내게 주머니를 건네려는 프리아시스의 손을 물렸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여러 가지 있느니라.’’
“거절이다. 다른 사람 찾아봐.”
“이유가 무엇이냐?”
“넌 이유가 뭐지? 난 이곳의 금전 감각은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 돈 이면 다른 뛰어난 놈들을 고용할 수 있을 텐데.”
“그대는 나의 이야기를 비웃지 않 았다.”
프리아시스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믿어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들어주려 하지도 않았지. 하지만 그 대는 다르더구나. 그게 내가 그대를 고용하고자 하는 이유다.”
‘성가신 게 붙어버렸네.’
이 꼬마는 일개 NPC일 뿐이다. 승급식에서 내가 들은 설명이 맞
다면,지금의 스테이지는 타오니어의 과거다. 설사 내가 어울릴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계약은 성사될 수 없다. 이 녀석과 나는 일시적인 관 계였고,임무가 끝나면 헤어질 사이 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인가.”
“사정이 있거든.”
“어떤 사정인 것이냐.”
창문 바깥은 아직 새파랗다.
깊은 밤이 되기까지는 여유가 남아
있다.
나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프리아시스는 진중한 눈빛으로 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쉰 다음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다른 세계?”
“아주 개 같은 곳이지. 거기에서는 임무가 주어지고,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죽어.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그 임무였어.”
“그 무슨 말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
‘역시 이해 못하나.’
나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말을 덧 붙이기로 했다.
어차피 새벽이 올 때까지는 할 일도 없다. 이 꼬마와 어울려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임무의 목표가 호위라는 것과 호위 대상을 지키지 못하면 우 리가 죽는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추 가했다. 말이 끝나자 프리아시스는 혼란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니까 그 대들은 다른 세계에서……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인가?”
”그래. 임무가 끝나면 우리는 강제
적으로 원래 세계에 돌아가. 따라서 네 의뢰는 받을 수 없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구나. 다른 세계라니……
프리아시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함부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지 만 아예 못할 얘기도 아니었다.
누구한테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 을 테고,알려진다 해도 영향은 없 을 것이다. 내 비밀에 관한 사실만 철저히 숨기면 된다.
“날 따돌리기 위한 거짓말이냐?”
“맘대로 생각해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그렇다면 알겠다. 그대의 이야기 를 신뢰하겠다. 그대들은 다른 세계 에서 온 용사란 것이구나.”
나는 약간 황당해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하긴. 꿈에서 본 일을 진지하게 믿는 녀석이다.
“그대가 나의 이야기를 비옷지 않 았듯,나도 그대의 이야기를 경시하지 않겠다.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았느 니라. 더 이상 붙잡지는 않겠다. 그 대는 그대의 일을 하거라. 나는 나의 일을 할 테니.”
“네 일은 뭔데.”
“뻔하지 않느냐. 그 꿈이 현실로 도래하는 일을 막는 것이다.”
나는 임무를 시작할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도시 중앙의 광장에 시민들이 모 여들고 있었다.
“광장에 사람을 불러모은 건 너냐?” “백은의 신전 말인가. 그렇다. 내가
부탁했다.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왜 연설을 하려 했던 거지?”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지. 지금의
나는, 오라버니에 비하면 밤톨과 다 름없는 신세니 말이다.”
‘영향력이라.’
원래대로라면 이 꼬마는 십중팔구 여기서 뼈를 묻었을 것이다.
픽 미 업의 임무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프리아시스 알 라그나라는 이 NPC는 되살려낼 만한 가치가 있 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스터로서 내가 했던 니플헤임의 임무를 되짚었다.
얼핏 떠올렸을 때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영웅과 NPC들이 대화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장면은 볼 수 있었지만,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도 뒤죽박죽이었다. 하 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임무들 사이에서 이어지던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미 계약은 이뤄졌는지도 모르 겠군.’
나는 픽 웃고는 말했다.
“내 이름은 한이다.”
“한.”
프리아시스는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이나 속삭였다.
“고맙구나.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아직 안 끝났는데.”
“그런가.”
“놈들이 널 죽이려 하는 이유는 짐작 가는 게 있나?”
“•…”그건 모르겠다.”
“모르면 됐어.”
프리아시스는 머리를 숙였다. 물어볼 만한 정보는 대강 얻은 것
같았다.
다시금 기다림이 시작됐다.
나는 집을 재차 둘러보기로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란한 일가족이 살았을 것 같은 주택이었다. 곳곳에 생활감이 머물고 있었다.
2층의 옷장에서 나는 허름하지만
나름 깨끗한 옷을 발견했다.
1층의 거실에 내려와 반쯤 졸고 있는
프리아시스에게 옷을 내던졌다. “갈아입어라.”
프리아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옷감을 바라보았다.
때가 타고 기운 흔적이 있는,낡은 셔츠와 치마였다.
“넌 너무 눈에 띄어. 걸어 다니는 광고판도 아니고.”
“광고판?”
‘용어를 잘못 썼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프리아시스의 복장은 이목을
끌기 쉽다. 더러워졌다고는 해도 황 금의 관과 백은의 드레스는 어둠 속 에서도 반짝인다. 앞으로의 행동에 방해가 될 것이다.
“이 옷을 입으라는 것인가? 그렇 다면 내가 입고 있던……
“그건 버릴 거야. 밖에 쓰레기통이 있더군.”
“그,그렇구나.”
”싫은가?”
프리아시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었다.
“아니다. 이쯤은 각오했느니라. 다
만
“다만?”
“혼자 있게 해다오.”
“그러지.”
나는 거실로 향하는 복도에 나왔다. 사르륵, 하고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약간의 흐느낌이 섞여 들었다.
‘울고 있는 건가.’
아무리 이름뿐이라 해도 황녀다. 나이도 기껏해야 10대 중반. 난데
없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으니 받아 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거실에 돌아갔을 때,프리아 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게 드레스와 관을 내밀었다. 나는 고급스런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를 받았다. 그 위에 관이 올려진다.
함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집 밖을 나와 그것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거실로 돌아왔다.
황녀는 자신이 입은 낡은 치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감촉이 이상하구나.”
“이상할 만도 하지. 벌레가 알을
까고 있었거든.”
“뭐라!”
“농담이 야.”
“그런 농담은 하지 마라!”
나는 피식 웃고는 프리아시스를 살폈다.
은발 때문에 여전히 눈에 띄지만, 한결 나아졌다. 체구도 작으니 몸만 제대로 숨긴다면 어지간해서는 들 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실 위의 의자에 앉아서 말했다.
“두세 시간 후에 출발할 거다. 잠 이나 자둬.”
“식사는……
“배고프냐? 먹을 건 없는데.”
“알았다. 조금만 쉬겠다.”
프리아시스는 다시 벽에 기대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행동량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피곤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달빛은 거의 없었고,집 내부와 바깔도 깜깜해졌다. 보는 것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이곳 에 오기 전 각성한 스킬인 심안 덕 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나는 사물의 윤곽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 안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에디스가 복귀했다.
에디스는 쿨쿨 자고 있는 프리아 시스를 보고는 짧게 웃었다.
에디스도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잘 자고 있네.”
“출구는?”
“찾았어.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에디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정해진 루트 외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바깥에 나가보려 했으나 투명한 벽이 가로 막고 있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꼼수는 안 된다는 건가.” “성문으로밖에 못 나가는 것 같아.” “성문은 지키고 있을 게 뻔한데.”
일이 귀찮아졌다.
여유가 있다면 한 번 더 탐색을 해
보겠지만, 아론이 언제까지 버틸지 장담할 수 없다. 병사의 수색이 닿을 가능성도 있었다. 늦어도 오늘 새벽이 끝나기 전에는 도시를 탈출해야 했다.
‘어쩔 수 없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프리
아시스를 깨웠다.
프리아시스는 곧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 지금부터 움직인다.”
“아,알았다.”
“바깥은 상당히 어두울 거다. 내
뒤에 꼭 붙어서 따라와.”
프리아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심안을 가진 나도 집중하지 않으면 위치를 잃을 정도였다. 길 곳곳에서 횃불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에디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순찰하는 병사들이야.”
“아주 잘 보이는데.”
횃불을 피하기만 하면 병사와 마
주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에디스의 안내에 따라 골목
몇 번을 빙빙 돌면서 대로로 나왔다.
나는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 상체를 낮춘 채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햇불이 잔뜩 모여 있었고,횃 불이 발하는 노란 빛이 주위를 밝혔다.
성문의 외관이 드러났다. 나는 성문 근처에 서 있는 적의 숫자를 재빨리 살폈다.
[인간 병사 Lv. 11] X 21 [인간 기사 Lv. 21]인식과 동시에 적의 출현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많이도 모였군.’
합쳐서 스물두 명.
둘이서 처리하기에는 지나치게 수가 많다. 거기에 성문 앞에 우뚝 버티고 선 검은 갑옷의 기사. 저놈의 레벨이 심상치 않다. 21레벨이면 내가 상대한 기사들보다 최소 5레벨 이상 높았다.
“다른 성문으로 갈까?”
“시간 낭비야. 거기도 비슷하겠지.”
출구는 많지 않다.
그리고 줄구마다 저렇게 적이 경 비를 서고 있다.
나 혼자 뚫는다면 어떻게든 수를 내겠지만, 뒤에는 호위 대상이 있다. 이 녀석이 출구 바깥으로 나가야 임무
성공 판정을 얻을 수 있었다.
‘선택을 잘못했나.’
그때 아론을 버리고 강행 돌파로 들어갔다면,임무는 어렵지 않게 성 공했을 것이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는 내가 가진 패 중에서 최선의 수를 내야 했다.
“에디스. 아론 파티의 위치는 알아?”
“아니,거기까지는.”
“이 도시의 구조는 파악했겠지?”
에디스는 수긍했다.
정보 수집의 기본은 지리다. 출구를 찾기 전 에디스는 도시의 구조를 분석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내를 확실하게 할 수도 없었을 테니.
“부탁 하나만 해야겠다.”
“알았어.”
“에디스. 우리가 있던 집으로 돌아가. 그 옆의 쓰레기통에 꼬마의 드레스와 관이 있다. 그 옷을 가지고 아론들과 합류해. 제나에게 그걸 입혀라.”
“……설마.”
“유인책을 쓸 거야.”
현재 시각은 깊은 밤.
제나와 프리아시스의 체구는 비슷 하다. 옷만 입혀놓으면 아주 가까이서 보지 않는 한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제나가 옷을 입으면,들키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개판을 쳐. 그럼 저기 의 병력 중 대부분이 빠져나가겠지. 그 사이에 내가 꼬마를 데리고 길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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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넓다고는 하지만 숨을 곳은 한정되어 있어. 할 수 있겠지?”
잠깐 고민하던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나는 방패를 건물 구석에 내려놓 은 다음 장검이 든 칼집을 오른손에 쥐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방패는 빛을 반사할 우려가 있었다.
[‘아론(★★)’이 맹독 상태에 걸렸 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 합니다.] [영웅의 중독이 심해지고 있습니다!]‘후.’
물약으로 대응 가능한 시간이 한계에 달한 것 같다.
적의 이목을 끌면서 아론을 지킨다. 다소 난이도가 높지만,잘해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길어야 한 시간.
그 안에 끝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