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63
63. 가치와 무가치(1)
시공의 틈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원형의 방. 나는 칼집을 벨
트에 걸고 방패를 들었다. 상처와 독은 깨끗이 날아간 상태였다. 다만 회복의 여파로 강한 불쾌감이 맴돌 고 있었다.
“으아! 죽는 줄 알았네!”
제나가 어깨를 두드리며 일어났 다. 나를 보더니 불을 부풀렸다.
“이상한 옷을 입으라는 거,오빠가 시켰죠?”
“기분 안 좋디? 무지 비싸 보이던 데.”
“옷도 옷 나름이죠. 움직이기도 불 편하고. 쓰레기통에 박혀 있던 건 데. 거기다 병사들이 미친 듯이 저 만 죽이려 달려들었던 거 아세요?”
제나는 투덜거리며 활을 등에 걸 쳤다.
나는 픽 웃고는 광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대기실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뒤의 파티 원을 살펴봤다.
에디스는 바닥에 떨어진 투척용 단검을 칼집에 수납하고 있었고, 이 올카는 초췌해진 표정으로 숨을 고 르고 있다. 제나는 화살통의 화살 개수를 세어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론은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멀쩡한 놈은 별로 없군.’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만, 제나조차도 화살을 세는 손이 미세 하게 흔들렸다.
유일하게 침착한 녀석이라면 에디
스 정도.
예상한 바였다.
클리어가 1분이라도 늦었다면 사 망자가 나올 법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녹화 완료!] [영상 저장이 완료되었습니다. 해 당 영상은 갤러리에 저장됩니다. 인 터넷에서 다른 유저와 함께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나는 위를 보았다.
하늘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들 어가서 클리어까지 걸린 시간은 약 6시간. 지금까지 종료하지 않았다면 암케나도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봤 던 셈이다. 만약 늦은 저녁에 접속 했다면,밤을 샜을지도 몰랐다.
[마스터,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녹화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뜨 기 무섭게 암케나는 접속을 끊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광장으로 나
가는 문 너머 장비 제작소로 출근하 는 보조직 인원들의 모습이 엿보였 다.
‘벌써 아침인가.’
나는 말했다.
“다들 수고했다. 아무도 안 죽고 보스 스테이지를 클리어했군. 특히 에디스. 네가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 을 거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에디스는 싱긋 웃었다.
사실상 이번 임무의 MVP는 에디 스였다.
도시의 지리를 빠르게 취득했고,
정확한 정보를 파티에게 제공했다. 병사를 따돌리는 것도 파티를 둘로 나눠 유인책을 실시했던 것도 에디 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너는 이제 2파티로 돌아가겠지?” “그럴 예정이야.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고. 마스터가 나를 대신할 사 람을 충원해줄 테니까.”
“그렇군.”
‘아쉬운데.’
유능한 도적은 구하기 쉽지 않다. 전투도 전투였지만 그 밖의 임무
에서 도적 클래스는 파티에 필수적 인 역할이었다. 제나가 비슷하다고
는 하지만 궁수 타입이기도 했고, 아직 전직을 거치지 못했다. 에디스 보다 여러모로 부실한 면이 있었다.
“먼저 갈게.”
단검을 벨트에 수습한 에디스가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에는 어셔와 디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의 동료를 대동한 채 에디스가 숙소로 돌아갔 다.
“매번 피를 말리는군요.”
이올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돌아가서 쉴래요. 밤을 꼴딱 샌 거 같은데. 피부 상한 것 같아
요.”
“맘대로 해. 너도 고생 많았다.”
“당신도요.”
이올카는 고개 숙인 아론을 살짝 보고는 시공의 틈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시공의 틈에는 나와 제나, 그리고 아론이 남게 되었다. 제나는 채비를 거친 뒤 아론에게 다가갔다.
“아론 오빠,상심 마요. 운이 안 좋 았을 뿐인데. 폐를 끼친 것도 아닌 걸요.”
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저도 가볼게요. 내일 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까지 시공의 틈에서 사라졌 다. 나도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다. 일단 잠을 자서 체력을 회복한 뒤 다음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광장으로 나가려는데,아론의 목 소리가 들렸다.
“형님.”
“뭐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잘 아는데.”
나는 빙글 웃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번 임무에서는 아론 때문에 많은 손해를 봤다. 녀 석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위기를
겪을 필요도 없었다. 다만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었다. 만약 전멸했더라 도 내 판단력이 부족한 탓이지,아 론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두 번은 안 살려줘.”
“그게,다음부터 제가 그러지 않는 단 보장이 있을까요.”
“또 무슨 개소리야?”
“형님은 절 끝까지 끌고 가실 생각
입니까?”
아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깊
게 숙인 아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
다.
“아무리 노력해도,따라잡을 수 있 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는 것 같습니 다. 이올카 양과도, 제나 양과도,그 리고 형님과도.”
“그래서?”
“……죄송합니다. 헛소리를 한 거 같습니다.”
아론은 머리를 흔든 다음 터벅터 벅 걸어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시 공의 틈을 빠져나갔다.
광장으로 나오자 훈련소로 들어가 는 아론의 뒷모습이 보였다.
‘과연.’
어떤 고민을 하는지는 잘 알았다. 아론의 현재 레벨은14제나와
같고,나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상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꽤나 큰 격차가 있었다. 일단 아론 의 성장치는 1성 때부터 최하급인 4 였다. 나와 제나는 도중부터 5에 진 입했고,나는 때때로 6까지 오르지 만,아론은 승급해도 변하지 않았 다.
스킬로 따지고 들어가면 더욱 심 하다.
아론이 가진 스킬은 하급 창술과
고통 내성, 화염 저항. 물론 스킬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론은 숙련도가 높지 않았다. 가장 높은 레벨의 스킬인 하급 창술이 고 작 4였다. 무기술의 기본은 탄탄하 지만. 이를 응용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
당분간은 어찌어찌 어울릴 수 있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결국,아론은 파티에서 열외되거나 능력 부족으 로 죽을 것이다.
재능이 부족했다.
내가 해줄 말은 없다.
아론에게 약간의 애착이 생긴 것
은 사실이다. 아니라면 중독됐을 때 망설임 없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멤버를 파티에 끼워 넣을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
‘저 녀석과도 얼마 안 남았군.’ 따라오지 못하면 버린다.
아직도 유효한 사실이었다. 버린다기보다는 다른 역할을 찾아
준다는 거겠지만.
마침 훈련소의 교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론이라면 잘해낼 것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훈련소에 모인 멤버에게 나는 자 율 훈련을 지시했다.
지금껏 반강제적인 훈련 스케줄을 따르고 있었으니,사실상의 휴가 선 언이었다. 기간은 사흘. 암케나도 얼마간 우리를 전투에 출전시키는 일을 자제할 것이다.
“정말이죠? 안 뛴다고 해서 감자 만 먹이거나 그러진 않죠?”
“아니라니까 그러 네. 속고만 살았 냐?”
이올카는 기쁨의 환성을 지르더니 곧바로 훈련소를 뛰쳐나갔다.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다. 바로 자 기 방. 그곳에는 연구의 대가로 받 은 여러 귀중품들이 놓여 있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거냐?”
“아예 쉬기는 좀 그래요. 버릇이 돼버려서. 저녁까지만 하고 쉬려구 요.”
제나는 모래주머니를 양 발목에 매달고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트랙을 달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론도 그 옆에서 몸을 가다듬고 있 었다.
“이거 원. 하지 말라고 해도.”
”오빠도 똑같으면서.”
정작 나도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있었다.
무게는 약 10kg. 모래주머니보다 는 철덩어리와 비슷하다.
사실상 이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 불가능해졌 다. 정자세로 팔굽혀펴기를 수백 번 할 수 있고,100m를 8초대에 끊을 수 있다. 맨손으로 나무토막을 부술 수도 있다. 이미 내 신체는 인간의 한계와 맞닿아 있었다.
간섭력.
그것은 영웅에게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원천이기도 했
다.
이셀은 그렇게 설명했었다. 확실 히 간섭력이 아니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반년도 안 되어 나는 인간을 반쯤 벗어난 괴물이 되 어버린 것이다.
트랙을 따라 달리면서 나는 훈련 소를 둘러보았다.
훈련 중인 영웅은 로데리크와 어 셔,디카. 2파티의 소속원들이다. 그 리고 벨키스트와 네리사가 보였다. 태생 2성이자 최근 빠르게 치고 올 라오는 3파티 소속의 유망주였다. 저 둘 중 한 명이 우리 파티에 들어
올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1파티 3명,2파티 3명,3
파티 2명.
총합 8명. 훈련소의 인원은 이걸 로 끝이었다.
나는 열린 문 너머로 광장을 보았 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수대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십 명. 그들은 벤치에 앉거나 산책을 하면서 두런두런 대 화를 나누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그 늘이 없었다.
저들은 내가 공략본을 암케나에게
건네준 다음부터 소환된 하급 영웅 들이다.
최초의 솎아내기를 거칠 때는 빠 릿빠릿했지만,시간이 지나면서 풀 어지기 시작했다. 훈련장에 있는 시 간은 거의 없었으며 보조 스킬을 배 우려는 이도 적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암케나가 합성을 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었 고,일과의 대부분을 휴식으로 보냈 다.
퉤!’1
벨키스트가 침을 뱉었다.
상처가 새겨진 한쪽 눈이 불쾌감
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녀석도 2세대였으나 변종이었
다. 합성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자발 적으로 훈련에 뛰어든 것이다. 훈련 강도 또한 아론에 비 길 정도로 독했 다. 재능도 탁월했다.
성격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트랙을 세 바퀴 돌았을 즈음, 광장
에서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재밌는 농담을 터뜨린 모
양이었다.
”.흐.’,
벨키스트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내가 대기실에 왔을 때,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지.”
나는 뜀걸음을 멈췄다.
나를 비롯한 다른 멤버도 잠깐 동 작을 멈춘 상태였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벨키스트 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네가 누구였든 상 관없다. 귀족이든 쓰레기든. 살고 싶다면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하라. 자신의 가치를 내보여라.”
벨키스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갈기늑대를 숙청했을 때의 얘기인 가.
비슷한 말을 하긴 했었다. 다만 이 녀석이 오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 말을 들려줬을 때,나는 흥분했었소. 내 가치를 증 명하기만 하면 뭐든 가능한 곳이 아 닌가. 목숨을 건 싸움도 즐거웠어.”
“밖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들 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군.”
“개돼지라니.”
디카가 인상을 구겼다.
“개돼지 맞잖아? 처먹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안 그렇소, 선 배님들?”
벨키스트는 칼집에서 검을 반쯤 뽑았다.
“선배님들이 어떤 임무를 거치며 고생해왔는지는 잘 들었어. 아주 짜 릿했겠더군. 늦게 와서 아쉬워. 하 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스룽.
벨키스트는 칼집에서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날을 혀로 핥았다. 눈빛
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선배님들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교육을 좀 하고자 하는데,괜찮겠 소?”
벨키스트는 재능도 뛰어나고 열의 도 있지만,이런 문제가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죽이지만 않으면 될 거 아닌가?” 나는 말없이 검을 뽑았다.
벨키스트는 실실 웃더니 칼집에
검을 넣었다.
”무서워서 못 가겠구려. 나대서 미 안하오. 하지만 답은 해주셔야지.
선배의 그 말은 구라였나?”
“가치를 증명하라는 거 말인가?’’ “내가 보기 엔 가치를 증명하든 않
든 상관없는 거 같은데. 듣기론 쓰 레기들을 처분하는 합성이란 아주 좋은 제도가 있었다는데,이상하게 도 마스터가 쓰지 않는 것 같군.”
‘합성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니플헤임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원
척이었다.
내가 공략을 게시했을 때,많은 마 스터들이 이 원칙을 따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공포는 영웅의 행동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였다. 합성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영웅
들은 마스터의 말을 듣지 않는다. 게을렀으며, 제멋대로 움직이고 명 령을 거부하는 일도 허다했다. 영웅 의 수에 비해 활동 인원이 극히 적 은 지금의 상황도 원인은 비슷했다.
“할 일이나 해라. 곧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거니까.”
“정말이오?”
“그래.”
“두고 보지. 기대되는군.”
벨키스트는 훈련소 구석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는 바깥을 살
폈다.
여전히 광장의 사람들은 웃고 떠 드는 중이었다.
‘그 문서를 봤다면.’
암케나에게 전해준 나의 플레이
기록.
거기에는 이 현상에 대한 고민이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