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93
93. 니플헤임(5)
이튿날.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나는 기억을 되돌렸다.
이곳은 모집생을 수용하는 별관
중에서도 5층.
별관의 최상층이자 방이 유달리 적은 곳이었다. 방이 적은 이유는
간단하다. 교관을 위한 층이기 때문 이다.
‘……유르넷.’
본래 내게 배정된 장소는 4층이었 다. 그러나 방에서 알 수 없는 화재 가 나서, 나는 반강제적으로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이 5층의 복도 끝에 있는 이 방.
침구류를 대충 정리하고 일어섰 다.
방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침대와 책상, 옷장은 새것인 양 윤기가 흘 렸다.
‘참 잘도 해줬네.’
다른 곳을 살펴봤지만,이런 식이 아니었다.
방을 통째로 뒤엎은 것 같았다. “계십니까?”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그래.”
“실례합니다.”
니슬레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허리를 깊이 숙이더
니,침대를 흘껏 바라봤다. 소리 없 이 침대에 다가간 니슬레드는 베개 와 이불을 완벽한 각으로 정리했다.
“머무는 데 불편하신 점은 없으심
니까? 많이 누추합니다만. 원하신다 면 13층으로……
“됐다.”
책상에 놓인 칼집과 방패를 집었 다.
나는 벽의 구석에서 꼿꼿이 서 있 는 니슬레드에게 말했다.
“내 정체를 말하진 않았겠지?” “당연합니다. 소란을 원치 않으신
다 하셔서.”
니슬레드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해는 갑니다. 여기 계신 분이
로키 님이라고 밝혀지시면,전 니플 헤임에 난리가 날 테니까요.”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무슨 안타까운 말씀을.”
철컥.
마지막으로 갑옷의 끈을 조인 다 음,나는 방문을 열었다.
“수행하겠습니다.”
니슬레드의 몸이 흐려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은밀한 몸놀림의 최상위 스킬인 잠행. 니슬레드는 기척을 지우는 능 력을 갖고 있었다.
‘귀찮군.’
동행을 극구 거부했으나,이대로 돌아가면 혼난다는 니슬레드의 말
에 별수 없이 허락했다.
조건은 나의 정체를 일반 영웅들
에게 누설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 의 모습을 숨긴다. 첫 번째는 몰라 도 두 번째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와 달리 니슬레드는 마스터 어쌔신이자 6성 만렙. 순수 서열로 만 100위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다.
복도로 나온다.
교관들이 휴게소에서 잡담을 나누 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으나 무시 했다. 4층으 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던 두 명과 만날 수 있었다.
“오빠,왔어요?”
제나가 손을 흔들었다.
옆에서 아론이 내게 머리를 숙였
다.
“잠은 잤냐?”
“우리 것보다 시설이 좋더라구요, 덕분에 푹 잤어요.”
“저도 잘 잤습니다.”
‘잘 잔 것 치고는 안색이 안 좋은
데.’
나는 아론의 얼굴을 보고는 픽 웃 었다.
생각이 꽤나 많겠지. 내가 누구인 지,니플헤임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
지,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지금으로써는 해줄 말이 없다. 나중 에 기회가 올 것이다.
나는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우리 말고도 모집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주 화제는 니플헤임이었다. 대기실의 규모와 시설에 대한 감
탄. 성적 우수자는 니플헤임에 넣어 준다는 에클테의 발언. 그리고 자신 이 알고 있던 니플헤임에 관한 소문 들. 쑥덕거리는 여자 2인조를 보고 있던 제나가 말을 꺼냈다.
“어제 다른 언니들이랑 얘기를 나
눠봤는데,이곳이 그렇게 대단하대 요. 사람 수도 엄청나고,시설도 죽 여주고,강한 사람들도 많고.”
제나가 내게 속삭였다.
모집생들은 이곳 소속이 아니면서
도 니플헤임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널
리 퍼져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니플헤임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데요?”
“누가 그래?”
“그냥 다들 그러던걸요.”
“저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무적
이라고.”
아론이 덧붙였다.
‘한 번도 안 졌다.’
임무 실패는 많이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임무를 제외한 얘기인가.’
마스터 간의 전투를 말하는 듯했
다.
그런 의미라면 부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였으니까.
”많이들 니플헤임에 들어가고 싶
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적 우수자가 돼서 말이냐?” “예. 합성될 걱정도, 임무에서 죽
을 걱정도 없다더군요. 복지는 완벽
하고,공에 대한 평가도 훌륭하다고 합니다. 다른 곳 출신이라고 차별하 지도 않고요.”
나는 다시금 모집생을 둘러보았
다.
백이면 백은 아니지만,많은 모집 생의 표정에서 기대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너희는 어떻지?”
“말이라고 하나요. 당연히 돌아가 야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명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다.
그렇겠지. 돌아가야 할 목적이 있
다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 집생들도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 다.
‘문제는 마음대로 되느냐.’
니플헤임에 들어가거나, 혹은 원 래 장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100% 가능한 게 아니다.
일단 에클레가 내건 영주권 조건 은 3위 이내.
97명은 미달자가 된다. 이들은 자 신이 원해도 니플헤임에 들어갈 수 없다.
두 번째는 성적 우수자가 영주권
을 받고 싶지 않은 경우다.
이런 일이 간혹 있다. 하지만 이들
은 99% 돌아갈 수 없다. 그때쯤이 면 이미 협상은 끝나 있고, 마스터 는 그 영웅을 니플해임에 팔아넘기 게 된다.
‘제나가 그렇게 될 수도 있군.’
이 녀석의 재능은 특별하다.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케이스가 될 확률이 높았다.
내버려 둘 생각은 없지만.
슬슬 시간이 됐다.
우리는 교관의 안내에 따라 별관
의 1층 홀로 집합,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 는 최초의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어제가 입소식 및 숙소 배정이라고 한다면 오늘부터가 진짜 교육이었 다.
우리는 별관 건너편의 큰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는 일 을 반복했다. 커다란 철제 대문이 열리자, 우리는 교단과 의자가 놓인 천장이 높은 방에 도착할 수 있었 다. 바로 눈치했다.
‘강의실이다.’
모집생들은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
리면서 착석했다.
인원 확인이 끝난 뒤 다른 교관은
모두 퇴장, 엘더킨 한 명만이 남았 다.
엘더킨은 교단에 서서 모집생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제군들은 이제부터 이론 수업을 받게 된다.”
……이론?”
“제군들이 거칠 교육의 반절은 임 무와 전투에 관한 이론 습득,응용 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상세한 전투 기술은 교육의 후반부에서 실시한 다.”
사람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 다.
엘더킨이 말을 이었다.
“제군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겠지. 이 세계는 현실과 법칙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겠나?”
대답하는 모집생은 아무도 없었 다.
“그것은 정보다.”
VI
“제군들은 이 세계의 법칙을 알아 야 한다. 제군들의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가 어떤 의미인지. 스탯은 무엇
이고 스킬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활용하여 전투에 적용시키는지. 이 런 기본적인 것부터.”
엘더킨이 말했다.
“길게는 임무의 유형과 공략법,오
브젝트의 활용법,적의 종류와 상 성,진형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우리가 제군들에 게 가르 쳐줄 것이다.”
“스탯,스킬,임무. 어디선가 들어 본 말 같은데.”
제나가 중얼거렸다.
그야 그렇다. 내가 직접 설명했으
니까.
‘이들도 알고 있었나.1
하긴.
몰랐을 리 없다.
고참이 신입에게 자신의 기억을 전해주는 듯한 장면은 몇 번이나 봤 다.
그토록 오래 구르고 겪었다면,체 계가 잡혀 있어야 정상이었다. 나도 그걸 가정하고서 운영했다.
”제군들이 알아야 할 최우선은,우 리가 현재 이 세계에서 처한 위치 다.”
엘더킨은 교단 아래에서 어떤 물 체를 꺼냈다.
흑백으로 덧칠된 사각형의 장난 감.
체스였다.
“제군들의 영지에도 하나쯤 있겠 지. 체스라는 게임이다.”
엘더킨이 체스판 옆에 있는 말을 올려놓았다.
둥그런 흑색 말. 최하급 말인 폰이 었다.
‘플레이어와 체스말의 비유인가.’ 숙소의 휴게실은 웬만한 마스터라
면 설치하고 있다.
휴게실에 체스가 기본 용품이라고
한다면 저 게임을 모르는 영웅은 없
을 것이다.
“마스터는……
엘더킨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소 사족이 많이 붙었지만,비유 의 핵심은 간단하다.
영웅들은 마스터에게 부려지는 일 개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살아남 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충격을 받은 듯한 사람들 은 없다.
그들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집생들은 갓 소환된 병아 리가 아니다.
임무와 합성,변환은 대기실 운영 의 기본. 이런 시스템 내에 생활하 면서 깨달은 점이 없다면 바보였다.
엘더킨은 모집생이 반쯤 자각하고 있었던,영웅의 포메이션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해주고 있었다.
지루한 강의는 이어졌다.
“……쿨.”
벌써부터 조는 녀석이 나온다.
다들 몸을 움직이는 훈련에 익숙 해졌기 때문에,
몇몇 영웅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I나도 그런가.’
지루하기보다는 시시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줄줄이 읊
고 있으니.
오후가 되어서는 수업 내용이 바 뀌었다.
이번에는 스탯과 스킬의 정의. 그 리고 레벨과 경험치에 대해서.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강의 실의 출구를 바라봤다.
니슬레드가 서 있었다.
입이 움직인다. 입 모양으로 봐서
‘나오셔도 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2주 내내 이런 식이라
저녁.
별관에 돌아온 뒤, 방문을 열었다.
차원문이 열려 있다.
안개 너머로 정원이 비쳤다.
‘따로 할 일은 없나.’
식사는 끝마쳤고,제나와 아론, 두
명을 딱히 부를 이유도 없었다. 현재 시간은 이른 저녁.
어제 못다 한 재회를 끝마치기에 는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나는 차원문 너머로 발을 옮겼다. 익숙한 정원이 나를 반겼다. 테이
블 위에는 과자와 찻잔이 놓여 있 다. 입구에는 어느새 니슬레드가 서 있다. 그리고 유르넷이 다리를 접은 채 앉아 있었다.
“기다렸습니다,마스터. 오늘 하루 는 어떠셨는지요?”
“별로였지.”
“교육 일정을 모두 취소하면 되겠 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아무 소득이 없지만, 제 나와 아론에게는 다르다.
정보의 중요성은 몇 번이나 실감 했던 일이다. 아마 이번 기회가 없 었다면 내가 직접 시간을 내서라도 설명했을 것이다.
“그보다 할 말이 있다. 그것도 아 주 많아.”
“말씀하시길.”
나는 모바일 게임을 하는 도중,지 구에서 뫼비우스로 떨어졌다.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내가 플레이하고 있던 계정까지 올 수 있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꽤 있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복잡한 질문이군요.”
유르넷이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 대해선 대강 눈치첸 거
같더군.”
“예. 제가 장기 말이라는 것도,마 스터의 유희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 도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도 아는 것 같고.”
그렇지 않다면 파견 게시판의 모 집 글을 설명할 수 없다.
유르넷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지구의 문물이란 것 도 학습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도 움이 되더군요.”
“내가 이곳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인터넷으로는 불가 능했을 텐데.”
“마스터,어제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유르넷과 나눈 대화는 한둘이 아 니다.
그래도 문맥을 따져서 유추할 수 있었다.
“마스터와 영웅의 연결은 깊다.”
,,잘 아십니다.”
유르넷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스터께선 간섭력을 알고 계신 지요?”
“알고는 있어.”
“그렇다면 간단하겠군요. 저희가 가진 힘의 원천은 모두 마스터에게 서 비롯된 것. 등급이 올라갈수록, 힘이 강해질수록 마스터와 영웅의 연결은 강해집니다.”
유르넷이 오른손을 펴자 책이 생 겨났다.
백색의 가죽 커버 위에 산양이 그 려져 있다.
나글파르. 5신기 중 하나인 환영
의 마도서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저희 다 섯 명은 마스터가 뫼비우스에 떨어진 순간,이를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운명처럼 말이죠.”
‘애매한 말을 쓰는군.’
운명 같은 단어는 마음에 들지 않 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법칙은 13계층의 인원한테만 적용되는 것 같은데.”
“그릇의 차이란 것이지요.”
유르넷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