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11
10. 유료 5연 뽑기
* * *
며칠 뒤.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디카(★)’가 ‘1파티’에 합류합니다!]메인 파티에 디카가 합류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디카는 굳은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지드와 한슨이 죽은 뒤로는 한동안 우울한 모습을 보였으나, 어떻게든 회복한 모양이었다. 요즘에는 나와 아론을 따라서 훈련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늘은 빛나고 있다.
마스터가 접속해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요일 던전이 아니군요.”
아론이 긴장한 듯이 창을 바로잡았다.
이셀에게 불린 멤버는 나와 제나, 그리고 아론과 디카. 현 대기실의 주력 전투원이라고 할 만했다.
디카는 나와 비교하면 한참 약했지만 다른 멤버들보다는 낫다. 그들은 대부분 1층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요일 던전을 갈 때는 서브 멤버를 섞기 때문에 이 녀석들도 마스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열려라, 시공의 틈!]광장 중앙의 문이 덜컹 열렸다.
일행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항상 여유를 부리던 제나마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뭘 그리 쫄아?”
“5층이 그렇게 힘들었잖습니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론이 울상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별거 없어.”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대답에 틈이 있는 거 같은데요!”
서브 스테이지에 고난이도 임무가 걸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100% 확답할 수는 없다. 그것이 픽 미 업의 룰이었다.
나는 성큼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곧 세 명이 따라왔다.
규정 파티는 채우지 못했지만 관계없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탑을 등반, 세상을 구원하라!] [메인 던전 : 현 등반 층수 – 5]시공의 틈에 있는 왼쪽 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메인 던전의 입성을 알리는 신호였다. 파티원의 안색에 다시금 긴장이 떠올랐다. 특히 디카는 검과 방패를 움켜쥔 채 덜컹덜컹 떨고 있었다.
지드와 한슨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곧 빛이 사라졌고 우리는 낯선 장소에 들어섰다.
[플로어 6.] [임무 유형 – 탐색] [목표 – 낯선 장소를 수색하라!]‘필드는 숲.’
탐색이라니.
또 드문 임무가 등장했다.
일단 나는 부근을 살폈다.
적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만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혀, 형님. 적이 안 보입니다. 이거 설마 5층처럼……!”
“조용.”
아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높이지 마. 다들 머리는 낮추고 몸을 숙여라.”
“…….”
“몸을 숙이라고 했지 엎드리라고는 안 했어.”
파티원들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여긴 별거 없으니 긴장 풀어. 조건만 채우면 무사히 깰 수 있어.”
“네.”
“잠깐 기다려. 곧 돌아올게.”
세 명을 풀밭에 숨게 한 다음 나는 길옆으로 빠졌다.
어느 정도 나서자 앞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통행 불가 지점이었다.
‘일자형 맵이군.’
필드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벤트 지점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온 나는 파티에게 길이 아닌 쪽으로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어디 잠입이라도 하는 거예요?”
제나가 머리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는 길옆으로 난 풀숲에 몸을 숨긴 채 나아갔다.
시력이 가장 좋은 제나가 선두에 섰고 내가 그 뒤였다.
“비슷해.”
“이런 건 내 성미가 아닌데.”
구시렁대며 제나는 풀숲을 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나타났다.
길 위에서 고블린 세 마리가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케르, 캬르락!”
“키라, 키라로로!”
고블린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중이었다.
‘뭐라는 거야.’
놈들은 그동안 싸웠던 고블린과는 달랐다.
얄팍했던 팔목에 근육이 붙어 있고 체구도 커졌다.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던 옷차림도 달라졌다. 허술하게나마 가죽 갑옷을 입었고 나름 날이 선 칼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고블린 Lv.8 X 3]“저놈들을 죽이면 됩니까, 형님?”
아론이 창을 굳게 쥐었다.
“기다려봐.”
다시 고블린의 복장을 살폈다.
허리의 가죽 벨트에는 작은 뿔피리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풀숲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나. 저기 나무 보여?”
“네, 보여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뭐가 있는지 봐봐.”
제나는 재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잠시 뒤 돌아온 제나가 말했다.
“고블린 부락이 있는 거 같은데요. 목책 안에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놈들이 잔뜩 모여 있었어요.”
“몇 마리나?”
“글쎄요. 한 백 마리쯤?”
구성은 파악했다.
일종의 함정 패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웅들이 길을 따라가다 고블린을 만나고, 바로 싸움을 건다. 그 이전 스테이지에서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제나, 가장 오른쪽의 고블린. 신호하면 한 번에 쏴 죽여.”
“네.”
“아론, 내가 유인하면 그놈 대가리에 창을 박아.”
“알겠습니다.”
“너는…….”
디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만일의 상황이 생기면 우릴 도와라.”
“예…….”
역할을 주고 싶어도 남은 게 없다.
어차피 탐색은 경험치도 거의 안 준다.
나는 엎드린 채 풀숲에 굴러다니는 작은 조약돌을 집었다.
퍽.
조약돌은 우두커니 서 있던 고블린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키?”
돌을 맞은 고블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풀숲을 향해 걸어왔다.
툭툭.
나는 칼집으로 약하게 흙바닥을 두드렸다.
소리를 감지한 고블린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고블린의 익숙한 노린내가 코끝에 다가왔을 무렵.
“지금!”
제나의 화살이 가장 오른쪽에 있던 고블린의 미간을 뚫었다.
아론의 창이 풀숲에 내밀어진 고블린의 얼굴을 정면에서 관통했다.
남은 고블린은 기겁하며 뿔피리를 빼들었다.
풀숲에서 뛰쳐나온 나는 달려나가 고블린의 얼굴을 방패로 후려쳤다. 고블린은 부러진 이빨을 흩날리면서도 어떻게든 뿔피리를 잡아 불으려 했다.
“뿝……!”
나는 뿔피리를 발로 걷어찬 다음 왼쪽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고블린은 비명도 못 지른 채 축 늘어졌다.
검을 뽑자 끈적한 피가 달라붙었다.
“끄, 끝난 겁니까?”
디카가 풀숲에서 나왔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충은.”
나는 대답하고 나서 검날의 피를 털었다.
세 마리 고블린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뿔피리를 부는 데 성공한 녀석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뿔피리를 발으로 건들며 말했다.
“이 피리를 불게 냅두면 아까 부락에서 지원군이 떼거지로 몰려나올 거야. 그럼 꽤 귀찮아졌겠지.”
토벌 임무인 줄 알고 무작정 달려들면 함정이 발동하는 식이다.
임무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 – 5,000G] [MVP – ‘한(★)’]점차 빛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라, 벌써 끝?”
제나가 눈을 깜빡였다.
우리는 천천히 빛에 휩싸여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나는 길을 따라 달려나갔다.
광장으로 돌아가기 전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이번 임무가 탐색으로 불리는 이유.
‘정보를 얻는다.’
바로 다음 스테이지에 대한 힌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탐색이 등장한 이상 단일 임무일 리 없다.
랜덤 구성이라지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의 임무를 토대로, 배경과 환경을 토대로 어떤 필드와 임무가 나타날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탐색은 초보에게는 거저 주는 듯한 같잖은 임무에 불과하지만, 고수에게는 다르다.
나는 전력으로 달리며 근처를 살폈다.
몸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그 안에 최대한의 힌트를 얻어야 했다.
과연. 아무리 뛰어도 앞이 막히지 않았다.
길 양옆으로 들쭉날쭉 솟은 나무 사이로 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5m가량의 허술한 목책이었는데, 그 틈새 사이에 허름한 움막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움막집 근처에서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서성거렸다.
‘고블린 부락이군.’
제나가 보았던 그 마을이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고블린 부락이 등장했다.
‘고블린 대량 서식지인가?’
이번 마을에서는 고블린이 늑대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저 늑대에 고블린이 탑승하면 고블린 라이더가 된다. 특유의 기동력으로 고블린 시리즈 중에서도 꽤 골치 아픈 개체였다.
“키!”
마침 한 고블린과 눈이 마주쳤다.
고블린은 살기를 띄우며 내게 달려왔지만 투명한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나도 저기로 갈 수 없지만, 놈도 이곳에 올 수 없다.
지금 저 부락은 간섭할 수 없는 배경에 불과하지만, 다음 임무에서는 아닐 것이다.
길을 따라 계속 달렸다.
곧 숲이 걷히고 평원이 나왔다.
시야가 트이니 확실해졌다. 숲 전체가 고블린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부락보다는 전초기지에 가까운 느낌이다. 고블린들은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입고 늑대를 길들이는 등 무언가를 바쁘게 준비하는 중이었다.
맵의 경계선에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달라붙어 있다.
놈들은 벽 안쪽의 나에게 이상한 괴성으로 소리쳤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봤다.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이다.
나는 속도를 한 단계 더 올렸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니, 곧 저 멀리 세워져 있는 한 도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시공의 틈으로 돌아왔다.
“아까 왜 혼자 달려가신 거예요?”
“바깥 구경 좀 하러.”
정보는 얻을 만큼 얻었다.
이제 방금 본 광경을 기초로 연계 퀘스트의 테마를 예측, 전략을 구상할 차례였다.
흔히 말하는 ‘클리어 견적’을 잡는 것이다.
아무 전조도 없이 튀어나오는 특수 던전의 경우 선발대를 출진시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지만, 메인 던전은 힌트가 나오는 경우가 꽤 많다.
이렇게 탐색전부터 시작되는 연계 퀘스트의 흐름을 스트림(Stream)이라고 부른다.
스트림을 분석하는 것 또한 마스터의 역량이었다.
‘답답하군.’
내가 본 것이 암케나에게 잘 전달됐을지 모르겠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시설도 영웅도 부족한 이 시점에서는 별수 없겠지만.
아직은 스트림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시기가 빨랐다.
광장으로 나오니 클로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하, 한 씨, 큰일 났어요!”
“뭔데?”
매 10인분 이상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클로에는 광장으로 나오는 일이 적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클로에 언니?”
“저, 그게……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이상한 사람들이 오는 게 한두 번이냐?”
아무래도 암케나는 우리가 임무를 나간 사이 뽑기를 한 것 같았다.
저번에 했던 10연 뽑기 외에도 암케나는 종종 한두 명씩 1성 영웅을 데려오고는 했다.
그래도 임무 진행이 되고 있는데 뽑는 건 아니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메인 던전을 하는데 한눈을 팔다니. 좋지 않은 버릇이다.
“그 사람들은 뭔가 좀 다른 거 같아요. 무기도 가지고 있고, 분위기가 이상해요.”
클로에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셀!”
[무슨 일이야?]“내가 임무를 나간 사이에 있었던 시스템 로그를 보여줘.”
[오케, 기다려봐!]곧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과거의 일을 출력하고 있는 것이다.
목공소에 나뭇가지 가공을 지시했고 3명으로 이루어진 서브 파티를 2층에 출격시켰다. 그리고.
나는 로그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지금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당장 결제하세요!] [뫼비우스가 마스터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뉴비 포텐 패키지!’를 선택하셨습니다.] [패키지 구성품 – 2,500젬, 5만 골드, 하급 광석, 목재, 가죽 X 10] [이 모든 것을 단 50,000원에!] [해당 금액은 익월의 핸드폰 요금에 합산되어 청구됩니다. 정말 결제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암케나의 두 번째 과금이었다.
저번의 패키지에서 얻은 5,000젬은 시설 건설로 날려버렸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상품이 우편으로 지급되었습니다. 확인해주세요!]‘올 것이 왔네.’
[영웅 소환!] [골드나 젬으로 영웅을 소환합니다. 뫼비우스 서먼으로 소환되는 무한의 영웅들을 뽑아보세요.] [마스터, 고급 소환을 시작합니다! 5연속 고급 소환을 선택하셨습니다. 총 2,500젬이 소모됩니다. 소환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마스터, 고급 소환을 시작합니다. 어떤 영웅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탈칵, 두루루루.] [투쾅!]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아반트(★★★)’를 습득하셨습니다!]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자켄(★★★)’을 습득하셨습니다!]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웨이프(★★★)’를 습득하셨습니다!]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베이그닌(★★★)’을 습득하셨습니다!]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에디스(★★★)’를 습득하셨습니다!]오히려 예상보다 늦었다.
나라면 5층 등반 전에 뽑아서 파티에 끼워 넣었을 것이다.
어쨌든 메시지로만 보면 다섯 명 전부 3성이다.
다만 아래에 이색적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띠링!] [소환된 다섯 명에게서 강한 연결이 느껴집니다.] [인연 ‘갈기늑대 용병단’이 생성되었습니다!] [Tips/연속 뽑기를 할 경우, 매우 낮은 확률로 서로 인연이 있는 영웅이 소환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같은 파티에 소속될 때 혼자보다 더욱 강한 전투력을 발휘합니다.]‘인연.’
이것도 희귀한 시스템이다.
인연이란 일종의 세트 개념으로써, 같은 파티에 섞어 내보내면 전투력 보너스를 받는다. 연속 뽑기에서도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는 케이스였다.
암케나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직접 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여길 구경한다면서 둘러보고 있어요.”
“넌 주방으로 돌아가.”
“그분들은…….”
“널 잡아먹거나 하진 않아. 특이한 놈들이라서 그래.”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숙소로 총총 들어갔다.
“형님도 그 사람들과 비슷한 겁니까?”
“난 다르지.”
나는 검을 칼집에 넣고 방패를 등에 멨다.
“파티는 여기서 해산! 특이한 신입이 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하던 대로 지내면 돼.”
“수고하셨습니다!”
아론과 디카는 내게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훈련소로 들어갔다.
광장의 시계는 저녁을 가리키고 있다. 부지런한 놈들이었다.
“오빠는 그 사람들 살펴보러 가는 거죠?”
“일단은.”
“저도 같이 갈래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현재 대기실에 설치돼있는 시설은 숙소와 훈련소, 무기고와 장비 제작소. 이렇게 네 곳이다.
일단 가장 가까운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비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나가 다짜고짜 그 여자에게 다가가 외쳤다.
벽난로를 보고 있던 여자는 놀라더니 우물쭈물 답했다.
“아, 안녕…….”
“저는 제나 시라이!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에디스 칼렌.”
“잘 부탁해요!”
제나가 손을 내밀었다.
에디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이쪽의 잘생긴 오빠는 한. 무뚝뚝하지만 속은 따뜻한 남자예요.”
“시끄러.”
나는 로비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에디스라고 했지.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 있냐?”
말하면서 나는 에디스를 살폈다.
갈색 눈. 검고 긴 곱슬머리가 늘어져 있다.
새까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벨트에는 단검 두 자루와 작은 단궁이 걸려 있었다.
‘상태창.’
[에디스 칼렌(★★★) Lv.1(Exp 0/10)] [클래스 : 도적(Thief)] [힘 : 13/13] [지능 : 10/10] [체력 : 14/14] [민첩 : 17/17] [보유 스킬 : 하급 단검술(Lv.3), 하급 궁술(Lv.1), 재빠른 몸놀림(Lv.1)]과연 3성답게 직업을 달고 나왔다.
힘과 체력이 낮고 민첩이 높은 대표적인 도적 타입이다.
가지고 있는 선행 스킬은 세 가지. 하급 단검술과 궁술, 그리고 재빠른 몸놀림. 제나와 비슷하지만 활보다는 단검 위주였다.
제나가 물컵 두 잔을 가져왔다.
“일단 앉아.”
“…….”
에디스는 반대편 소파에 쭈그려 앉더니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선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 대해 알아?”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지. 넌 어떤데. 어디까지 알고 있지?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는 기억하냐?”
“그것까진 나도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건 난…….”
에디스는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싸우기 위해…… 이곳에 소환됐다는 거.”
“싸우기 위해 소환이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왜 그런지 이유는?”
“떠올리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서…….”
‘하아, 꽝인가.’
나는 한숨을 쉰 다음 말을 이었다.
“합성 같은 건 알고 있나?”
“합성…….”
에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남을 제물로 바쳐 강해진다.”
“알고 있군.”
그 밖에도 질문을 이어갔다. 마스터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
한참을 생각하던 에디스는 이 장소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개념은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소환에 대해서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벨과 스킬 같은 세부 개념은 모르는 듯했다.
나는 처음의 셰이부터 지금의 에디스까지 소환됐던 사람들의 인상을 되짚었다.
제나와 아론을 비롯한 1성들은 왜 소환됐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이곳에 들어왔다. 4성인 셰이는 왜 싸워야 하는지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의 에디스는 왜 소환됐는지까진 모르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마스터에 대한 개념도 잡고 있었으며 합성까지 알고 있었다.
‘소환된 등급에 따라 정보 격차가 나뉜다.’
간단히 결론을 내린 나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용병이었나 본데.”
“갈기늑대 용병단이었어.”
“갈기늑대? 이름 폼 나네요.”
제나가 내 옆에 앉아 싱글 웃었다.
“할세아에서 용병업을 하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어.”
에디스는 갈기늑대 용병단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주로 어떤 일을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자면, 용병 중에서도 꽤나 높은 수준인 것 같다. 같은 용병이지만 2성이었던 몰몬트와는 격차가 나는 듯했다.
“멋져요! 로망이 있네요.”
“그, 그래?”
제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에디스는 쑥쓰러운 듯 목을 수그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냐.”
그럼 말하지 말든가.
“오빠는 반응이 왜 그래요? 숙녀의 과거 이야기는 천금을 줘도 못 얻는 보물인데.”
“그러냐.”
“정말 둔탱이라니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들을 얘기가 많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적어도 어떻게 소환됐는지는 알고 싶었는데.
나를 이곳에 처박은 놈에 대해 알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잠이나 잘란다. 네가 알아서 안내해.”
“자자, 우리 여자끼리…….”
[아반트, 자켄, 웨이프, 베이그닌, 에디스!]광장에서 이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소로 들어가려던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은 못 자겠네.’
튜토리얼 이후 처음으로 뽑은 고급 영웅인 만큼 시운전을 하고 싶었나 보다. 식당 입구에서 어떤 거한이 나타났다.
“누구야! 누가 내 이름을 불러?”
남자는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 컸고 어깨가 떡 벌어져 있다.
에디스와 같은 가죽 갑옷을 입었으며 등에 커다란 도끼를 차고 있었다.
상태창을 살피자 자켄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힘과 체력 위주로 분배된 전사 클래스였다.
몸을 보면 안 봐도 알 것 같다.
“마스터가 부르는 거 같아.”
에디스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고기였는데, 그 양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그래!”
자켄은 에디스와 함께 광장으로 나가버렸다.
구운 사슴 뒷다리 고기를 든 채로.
나와 제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거는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하는 건데!”
식당에서 클로에가 달려나왔다.
나는 클로에에게 물었다.
“뭔 일이냐?”
“저분이 고기가 먹고 싶다면서 다리 한쪽을 통째로 들고 가 버렸어요. 잘만 요리하면 다섯 명은 먹을 수 있는데…….”
“그럼 돌려달라고 하죠!”
제나가 주먹을 쥐며 일어섰다.
“기다려봐.”
“왜요?”
“일단 광장으로 나가보자.”
우리는 광장으로 나왔다.
드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기실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들은 구석에서 웅성거리며 소란의 원인을 바라보았다.
나도 적당한 벤치를 골라 앉았다.
광장 중앙에는 다섯 명이 서 있었다.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다섯 남녀들.
[‘5파티’의 이름을 ‘갈기늑대’로 수정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암케나는 고정 파티를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맘에 든 모양이다.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아반트(★★★)’가 ‘갈기늑대’에 합류합니다!] [‘자켄(★★★)’이 ‘갈기늑대’에 합류합니다!] [‘웨이프(★★★)’가 ‘갈기늑대’에 합류합니다!] [‘베이그닌(★★★)’이 ‘갈기늑대’에 합류합니다!] [‘에디스(★★★)’가 ‘갈기늑대’에 합류합니다!] [‘갈기늑대’ 팀의 리더로 ‘아반트(★★★)’를 설정했습니다!] [열려라, 시공의 틈!]덜컹.
광장 정면의 문이 열렸다.
“바로 보내는 건가?”
일행의 중앙에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오른쪽 눈에 세로로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빠르게 놈의 상태창을 훑었다. 이름은 아반트 데지크. 스탯과 스킬로만 보면 한손검을 쓰는 속도 위주의 전사다.
‘저 녀석이 리더군.’
다른 네 명이 은근히 아반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자자, 신입들, 들어가! 들어가! 마스터가 기다려!]“말 안 해도 알아.”
“어디 한 번 날뛰어볼까!”
아반트가 가장 먼저 시공의 틈으로 들어갔다.
자켄이 뼈만 남은 뒷다리를 집어던지며 뒤따랐다.
그 뒤로 웨이프와 베이그닌, 최후방이 에디스였다.
‘마법사가 없네.’
연구가 개방되어야 서로 편해지는데, 아직은 운이 안 따르는 모양이다.
갈기늑대 용병단은 전사 넷과 도적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섯 명이 모두 들어가자 시공의 틈이 닫혔다.
“하, 한 씨!”
앉아 있던 내게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숲의 요일 던전에서 만났던 조프리였다.
“뭡니까?”
“저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요? 뭔가 이상하오!”
“모르는 사람들인데.”
“무기를 차고 있지 않소!”
“무기는 저도 차고 있습니다.”
“그게 느낌이…….”
“좋은 사람들인 것 같진 않다?”
“그렇소!”
나는 웃었다.
소란의 원인은 그거였다.
좋은 사람들인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다.
“제나, 네가 보기엔 그 사람들이 어떨 거 같냐?”
“갈기늑대 용병단이요? 글쎄요? 에디스 언니는 착해 보이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르겠네요.”
나는 조프리를 되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조프리 씨,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보호라도 해달라?”
“그래주면 고맙겠소만…….”
“공짜로?”
“그, 그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그 눈동자는 조프리와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지키고 싶으면 스스로 강해지면 되잖아. 설렁설렁 훈련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해? 쪽팔리지도 않아? 거기다가, 저놈들이 너희를 해친단 보장은 있냐? 이거 순 쫄보만 모였네.”
“당신은 강하잖소!”
“강해 보이면 빌붙어서 굽실거리는 게 너희들의 생존 방식인가?”
여기 모인 대부분의 1성들은 아론은커녕 디카에게도 한참 모자라다.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제 한 몸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럼에도 저들은 훈련장에 나와 하는 둥 마는 둥 검을 휘두르다가 돌아가, 제나가 사냥하고 클로에가 요리한 고기를 처먹는 게 일상이었다.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원한다면 남는 시간에 클로에나 장인들한테 기술을 익힐 수도 있었을 텐데도.
이놈들은 아주 교묘했다.
암케나가 자세히 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열심히 하는 척만 하면서 합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갈구거나 괴롭힐 생각은 없다.
어차피 마스터가 요령이 생기면 자연스레 사라질 놈들이다.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지.
“꺼져라. 내가 화나기 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흩어졌다.
광장에 남은 건 나와 제나, 아론, 그리고 디카.
6층에 갔던 4명 그대로였다.
“아론.”
“예, 형님.”
“네가 다리 잘리고 피 철철 흘리면서 죽어갈 동안, 쟤네들은 고블린 한두 마리 깔짝대면서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표정 좀 펴. 보기 안 좋아.”
“예…….”
나는 디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디카, 뭔 일이 있었냐?”
“무슨 말씀이신지…….”
“뭔 일 있었냐고. 방금 싸웠잖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얼굴이 눈탱이 밤탱이가 됐는데 모를 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광장에 나올 때만 해도 디카의 얼굴은 푸르죽죽하게 부풀어 있었다. 명백한 구타의 흔적이었다.
디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단순한 대련이었습니다. 새로 온 분이 대련을 요청했길래, 싸우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정말 그거뿐이냐? 아론, 너도 옆에서 봤겠지?”
주먹을 쥐고 있던 아론을 눈을 꾹 감더니 말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알았다. 들어가 쉬어.”
“형님은…….”
“난 그놈들 구경 좀하고 가려고.”
시간이 많이 늦었다.
아론과 디카는 내게 허리를 숙이고 숙소로 돌아갔다.
“넌 왜 안 돌아가?”
제나는 내 옆에서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얼마 뒤 갈기늑대 용병단이 돌아왔다.
“이거, 약해빠진 잡것들밖에 없었구만!”
자켄이 도끼날을 혀로 핥았다.
사상자는 없다.
당황한 기색도 없다.
당연한 듯이 들어가, 당연한 듯이 돌아왔다.
그 사람들이 겁을 먹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놈들은 1성들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무언가 날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는 누구지?”
눈에 흉터가 진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반트였다.
나는 답했다.
“난 신경 안 써도 돼.”
“어이, 넌 뭔데 말투가 그렇게 건방지냐?”
“먼저 반말한 건 그쪽이잖아요.”
“이 계집은 또 뭐야?”
“그만!”
아반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마에 핏대를 세우던 자켄이 조용해졌다.
“나는 아반트 데지크. 갈기늑대 용병단의 단장이다. 넌?”
“한.”
“너도 무기를 차고 있군. 용병이었나?”
“아니. 농부였는데.”
“농부라고?”
아반트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쳐 가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아반트가 말을 이었다.
“아까 모인 인원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전부냐?”
“그런데, 왜?”
“그거면 됐어.”
[잠깐!]숙소로 향하던 아반트는 걸음을 멈췄다.
급하게 나온 이셀이 말했다.
[기다려! 마스터가 아직 너희한테 용건이 있으니까.]“용건?”
[아무튼, 함부로 가면 안 돼!]제나는 내 귀에 입을 바짝 붙인 채 속삭였다.
“오빠, 아까 저한테 저 사람들이 어떤 것 같냐고 물었죠? 의견 정해졌어요. 안 좋은 쪽으로요.”
“이유는?”
“눈빛이 이상해요. 에디스 언니는 착한 거 같은데…….”
“그러냐.”
[마스터, 10연 소환을 시작합니다. 어떤 영웅이 나올지 기대되네요!]예상하지 못한 메시지가 시야에 떠올랐다.
이런 시기에 뜬금없이 10연 소환이라.
‘그렇군.’
아니, 이런 시기니까 소환한 것이다.
나는 허리춤의 칼집을 매만졌다. 까끌한 감촉이 손끝에 달라붙었다.
소환소의 문이 열렸다.
나도 제나도, 갈기늑대 용병단 전원도 그곳에 눈길을 향했다.
얼마 뒤 제각기 다른 10명의 남녀가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이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마스터, 합성을 시작합니다.] [합성하고자 하는 영웅에게 제물로 바칠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제물이 된 영웅은 소멸합니다.] [이런 빡대가리가 또!]암케나의 의도를 알아챈 이셀이 얼굴을 구겼지만, 한 번 내려진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셀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자켄, 디만, 렉시글! 합성소로 들어가!]“너, 넌 누구냐! 내 이름을 어떻게 알어? 우리를…….”
“마스터가 들어가라잖아! 입 닥치고 들어가라고! 디만, 렉시글! 너희들 중 누구냐? 빨랑빨랑 나와!”
자켄이 손목 관절을 뚜둑 꺾으며 나왔다.
제나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 설마야.”
“아무리 그래도 방금 왔는데!”
‘유료 뽑기가 처음이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지금 암케나는 큰 실책을 범하고 있다. 1성의 대부분이 쓸모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중에는 분명 귀중하게 쓰일 인재도 많다. 그런데 놈은 아무런 검증도 없이 갓 뽑은 1성들을 갖다 박으려 하고 있었다.
“네가 디만인가? 딱 보면 너인 거 같은데!”
“나, 나는…….”
“따라와! 따라오라고!”
자켄은 우악스런 팔으로 남자를 움켜쥐더니 합성소로 끌고 갔다.
“자켄! 한 명 더 끌고 가라. 렉시글은 누구냐?”
노인 한 명이 헛숨을 들이켰다.
자켄은 씨익 웃더니 반대편 팔으로 그 노인을 잡았다. 두 명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합성소로 끌려갔다. 문이 닫혔다.
잠시 후.
[합성 완료!] [‘디만(★)’과 ‘렉시글(★)’이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자켄(★★★)’, 레벨업!]“하핫, 이거 강해진 기분이 팍팍 드는구만!”
자켄은 양 팔을 빙글 돌리며 합성소에서 나왔다.
[아반트, 소리올, 다닐!]“뭐, 뭐야! 뭘 하려는 거여!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못 도망치게 막아!”
아반트의 명령에 의해 용병단이 무기를 뽑았다. 서슬 퍼런 칼날에 사람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광장 구석에서 떨었다.
“넌 뭐하지? 같은 갈기늑대 아닌가?”
아반트는 장검을 뽑은 채 뒤의 에디스에게 말했다.
에디스는 무기를 뽑지 않은 채였다.
“…….”
에디스는 머리를 숙인 채 입술을 꾹 물더니 단검을 뽑았다.
제나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건 잘못됐어요!”
[‘제나(★)’가 방금의 행위에 불만을 표시합니다!]“넌 뭐야? 다치기 싫으면 찌그러져 있어!”
“최소한의 기회는 줘야죠! 이런 법이 어딨어요! 오빠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게 옳다고 보세요? 이건 아니잖아요!”
“…….”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온 뒤로 많은 일을 겪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정말. 사람이 변할 만큼.’
나는 눈을 떴다.
“이셀, 대답해라!”
[응, 말해.]“마스터에게 팁을 띄워. 어떤 1성이라도 안 써보면 모른다고 해.”
[어? 그건…….]“알았어, 몰랐어?”
[자, 잠깐 기다려!]이셀은 당황한 듯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사라졌다.
[Tips/어떤 1성이라도 써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함부로 합성하는 것보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요?]마스터의 조작이 멈췄다.
얼마 뒤, 합성소의 문이 닫혔다.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던 용병들이 한순간에 굳었다. 자켄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넌 뭔데 방해하는 거냐?”
“방해? 충고했을 뿐인데.”
“충고라고 했냐?”
“뭐, 꼽아?”
“이 새끼가 미쳤나!”
도끼를 휘두르던 자켄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제나의 화살촉이 놈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우리한테 무기를 들이댄 건가?’
아반트가 중얼거렸다.
나는 싱긋 웃은 다음 칼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똑바로 아반트의 얼굴에 겨누었다.
“아반트.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시간도 늦었고…….”
“넌 닥치고 있어!”
아반트는 에디스를 거세게 밀친 뒤 내게 물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나 있나?”
“잘 알지. 저거잖아.”
나는 광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뼈다귀를 가리켰다.
“저게 뭐지?”
“쓰레기다.”
순식간에 검을 뽑은 아반트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검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멈춰 있었다.
[그만둬!]이셀이 나와 아반트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반트의 검날은 투명한 막에 부딪혀 도중에 멈추었다. 아반트는 눈을 번뜩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켜라. 다치기 싫다면.”
[영웅 간의 싸움은 금지야! 마스터한테 혼나고 싶어?]“금지가 아닐 텐데.”
내가 말했다.
‘그걸 쓸 때인가.’
[‘아반트(★★★)’가 ‘한(★)’에게 적의를 표시합니다!] [‘자켄(★★★)’이 ‘한(★)’에게 적의를 표시합니다!] [‘웨이프(★★★)’가 ‘한(★)’에게 적의를 표시합니다!] [‘베이그닌(★★★)’이 ‘한(★)’에게 적의를 표시합니다!] [‘한(★)’과 ‘갈기늑대’ 팀 사이에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영웅 사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세요!]에디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나는 아반트에게 시선을 향한 다음 말했다.
“야, 솔직히 말해. 너희 용병단 아니지?”
“무슨 헛소리냐. 우린 엄연히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용병이다.”
“구라치지 마. 도적단이잖아.”
“보자 보자 하니까 말이 심하구나! 토막 나고 싶냐!”
이제 와서 정의의 용사 행세를 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런 놈들은 있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가끔 이렇게 등급과 관계없이 악 성향의 영웅이 소환되고는 한다. 그들은 대기실을 들쑤시며 각종 난리를 피운다. 대기실의 질서를 해치고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범이었다.
즉, 솎아내야 할 쓰레기인 것이다.
이것이 솎아내기의 두 번째 의미이자 진정한 의미였다.
나는 이런 놈들을 한 파티에 모아 상급 던전의 선발대로 내보내고는 한다. 그들은 대부분 전멸했다.
내가 마스터라면 그렇게 해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영웅의 신분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을 쓸 시기였다.
“이셀, 결투를 열어라.”
[겨, 결투라고?] [‘한(★)’이 ‘아반트(★★★)’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Tips/결투는 영웅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양측의 동의에 따라 특수한 조건을 걸 수 있습니다.]“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우리가 너한테 무슨 피해를 줬다고 이러는 거냐.”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이런 놈들의 습성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상대가 자기보다 약할 것 같으면 사정없이 깔아뭉갠다. 나한테 방금 모인 인원이 전부냐고 물어본 것도 탐색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약 자기보다 강한 놈이 여기에 있다면 곤란하니까.
내가 없다고 답하자 판단을 내렸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갓 뽑은 1성을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가. 그렇지 않아?”
“오호. 네가 제물이 되어주겠다는 건가?”
“날 이긴다면.”
“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간단해. 내가 이기면 저놈을 먹고, 저놈이 이기면 나를 먹는다.”
“그거 재밌네.”
[‘아반트(★★★)’가 결투를 수락했습니다.] [각 영웅이 제안한 결투 조건은 ‘합성’입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Yes / No(선택)]‘거절인가.’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다시.’
[‘한(★)’이 자신감을 표합니다!] [‘한(★)’과 ‘아반트(★★★)’의 결투를 수락하시겠습니까?]잠깐 고민하던 암케나는 결정을 내렸다.
[Yes(선택) / No] [‘한(★)’과 ‘아반트(★★★)’의 결투가 시작됩니다!]“아반트, 네가 나설 필요는…….”
“쫄따구는 빠져 있어. 너희한텐 용건 없다.”
“뭐라!”
나는 광장 구석에서 떨고 있는 1성들을 보았다.
“제나, 저 사람들 데리고 숙소로 들어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질 것 같냐?”
“그건 그렇네요!”
제나는 활을 접고 신입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겁먹은 눈으로 제나를 보았다.
“여긴 위험하니까 절 따라와요.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줄게요.”
제나의 안내에 따라 생존자 8명이 숙소로 돌아갔다.
용병단은 기가 막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만 에디스만이 입술을 씹으며 바닥을 보고 있었다.
“둘 중 한 명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이 나오면 승부는 끝. 동의하냐?”
“원하는 대로 해주지. 죽이지는 않으마. 싱싱한 제물이 필요하니까.”
“이셀. 다른 놈들이 끼어들지 않게 잘 감시해.”
[정말로 괜찮아?]“난 안 져.”
“하, 거참.”
아반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서 검을 빼든 채 내게 돌진했다.
녀석의 상태창은 이미 살폈다.
레벨은 2. 힘이 벌써 20에 가깝다. 하급 검술도 3단계에 다다라 있다. 단순히 능력으로만 보면 키워봐도 괜찮을 재목이었다.
그러니까.
[‘한(★)’이 광폭 상태에 돌입했습니다!]나는 아반트의 머리를 붙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얼굴이 부딪힌 자리에 피가 튀었다.
단숨에 검을 빼들고는 아반트의 오른쪽 날개뼈에 꽂았다. 검날은 가죽 갑옷을 뚫고 뼈를 관통해서 금속 바닥에 박혔다.
“끄, 끄아, 끄아아아아아아!”
아반트는 광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이빨이 몇 개 나갔는지 비명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상태창.’
[한 이스라트(★) Lv. 9(Exp 11/7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28/23 + 5] [지능 : 1/11 – 10] [체력 : 26/21 + 5] [민첩 : 26/21 + 5] [보유 스킬 : 하급 검방술(Lv.5), 고통 내성(Lv.2), 침착성(Lv.3), 광폭성(Lv.1)] [현 상태 : 광폭화(Lv.1)]못 먹는 감이었던 광폭화에 돌입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머리 한쪽이 타는 듯 뜨거웠지만, 알 수 없는 감각이 그 열기를 중화시켜주고 있었다.
나는 아반트를 내려다보았다.
레벨 차이가 몇인데 개겨. 스킬도 나보다 부족하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놈한텐 이런 꼴이 제격이다. 아반트는 엎드린 채 꿈틀거렸다.
“으아, 끄아, 끄허헉!”
“움직이면 더 아파.”
머리나 심장을 단숨에 터뜨리지 않는 이상 죽지는 않을 것이다.
힘을 너무 줬는지 오른손이 뻐근하다. 나는 손목을 돌리면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반트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켄이 도끼를 번쩍 들더니 달려왔다.
이셀이 자켄 앞으로 날아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이셀의 오른손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도끼를 잡고 저 멀리 내팽개쳤다.
나는 히죽 웃고는 아반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항복이라고 말해라.”
“항…….”
나는 아반트의 등에 박힌 검자루를 발로 걷어찼다.
“끄악, 끄아아아아악!”
“똑바로 말해야지. 안 들리잖아.”
“그만 멈춰. 우리가 졌다! 아반트를 내버려 둬!”
“내버려 둬라?”
나는 검자루의 끝을 잡은 채 돌렸다.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상처가 벌어졌다. 아반트는 꺽꺽거리는 신음만 질렀다.
“너희들은 방금 사람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나? 잡아먹고 싶어서 의욕이 넘치던데.”
“그, 그건 관계가 없지 않나!”
“내가 관계있다면 있는 거야. 그리고 서로가 합의한 결투인데 너희들이 왜 왈가왈부해? 그만둘지 말지는 당사자들이 결정해야지. 진 놈이 졌다고 말하면 끝나는 거잖아.”
“항보…… 읍!”
나는 아반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 안 하면 안 끝나는 거지만.”
용병단은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반트의 등 위에 걸터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아픈지 아반트는 몸을 비틀었다.
“이놈은 내 먹잇감이야. 죽든 말든 신경 꺼라. 잠이나 자러 가.”
“미친 새끼!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거 같냐!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갈기늑대 용병단이라 했던가?”
나는 에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나는 물었다.
“에디스, 갈기늑대는 정말 용병단 맞냐?”
에디스는 눈을 꾹 감고는 말했다
“옛날에는 그랬어. 지금은, 지금은 그냥…….”
“도적단이라는 거군. 아니면 의뢰주 뒤통수나 치고 다니거나. 내 그럴 줄 알았다. 넌 뭔데 저놈들이랑 어울려 다녀?”
“나, 난 아버지 부탁으로…….”
“에디스. 신중히 생각해. 저런 쓰레기하고 어울려 다닐 거냐. 아니면 이쪽으로 올 거냐.”
“나는…….”
“이년이 어디서 적한테 엉덩이를 흔들려고 해! 죽고 싶냐!”
“송사리가 시끄러운데.”
“이 자식이……! 에디스, 네년이야말로 신중히 결정해라. 배신자의 말로는 알고 있겠지?”
“쓰레기의 말로는 이렇고.”
나는 아반트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이쪽으로 와라. 마침 한 명이 필요했는데, 잘됐네.”
“배신의 대가는 알고 있겠지, 에디스!”
“…….”
에디스는 결심한 듯이 눈을 치켜뜨고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줄을 잘 타야 돼.”
[‘에디스(★★★)’가 ‘갈기늑대 용병단’을 탈퇴합니다!] [인연 ‘갈기늑대 용병단’이 해산됩니다.]“이런 망할…….”
“나머지한텐 볼 일 없어. 너희들은 꺼져.”
“항…….”
“그런데 정말 말해도 괜찮은 거냐? 넌 나한테 먹힐 텐데.”
아반트는 오른팔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반트의 검이 떨어져 있다. 나는 그 손등을 지긋이 짓밟았다.
“끄윽, 헉! 너, 나, 날 건드린 걸 후, 후회하게 될…… 끄아아아악!”
나는 아반트의 날개뼈에 박힌 검을 잡고 마구 돌렸다.
“이제 귀찮아. 빨리 말해.”
“싫다, 싫다! 으헉, 크어어억!”
“이, 이놈이! 이놈이이이이!”
세 명이 무기를 빼든 채 달려들었다.
이셀이 그 앞을 막았다.
[결투 안 끝났어! 끼어들면 안 돼!]“쥐새끼는 비켜, 방해하면 죽인다!”
자켄이 이셀의 정수리에 도끼를 휘둘렀다.
다른 두 명도 창과 검을 옆에서 찔렀다.
그리고.
‘걸렸군.’
“잘 가라.”
[‘자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웨이프(★★★)’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베이그닌(★★★)’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돌연사!] [사인 –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끼어들지 말라니까. 두 번은 안 봐줘.]머리가 잃은 시체 세 구가 광장에 널브러졌다. 이셀은 무감정한 눈으로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날아들었다.
[로키, 나 어때! 방금 멋졌어? 잘했어? 어땠어!]“잘했어.”
[조아써!]이셀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서 사라졌다.
나는 아반트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반트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동료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항…… 복…….”
아반트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한(★)’이 광폭 상태에서 해제되었습니다.]나는 축 늘어진 아반트를 질질 끌어 합성소로 데려갔다. 놈은 반항하지 않았다.
[‘한(★)’이 ‘아반트(★★★)’와의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반트는 합성될 것입니다.]마스터의 조작창에 여러 개의 파문이 떠오른다.
화면을 아무렇게나 터치하고 있는 것이다.
‘취소하고 싶겠지.’
그럴 거면 애초에 허락을 하지 말았어야지. 결투라는 시스템이 있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합성 완료!] [‘아반트(★★★)’가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한(★)’, 레벨업! ‘하급 검방술’, ‘고통 내성’ 스킬 상승!] [영웅이 한계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더 레벨을 높이고 싶다면 등급을 올리세요!] [Tips/등급은 승급석, 혹은 같은 등급, 일정 레벨 이상의 영웅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승급은 최대 7성까지 가능합니다.]광장으로 나온 나는 웃었다.
처음으로 뽑은 고급 영웅들을 제대로 굴려보지도 못하고 잃었다. 오로지 합성을 위해 무료 10연 뽑기를 한 것을 보면 상당히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나. 꽝이었는데.
어차피 키워봤자 손해만 난다. 일시적인 전력 상승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런 놈들이 나대면 대기실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는다. 나중에 실상을 알게 되면 나를 고맙게 여길 것이다.
‘내가 원인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나는 레벨 10이다.
4개의 스킬을 갖고 있으며 이미 스탯 종합치는 3성에 육박한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MVP를 획득했다.
지금의 암케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C급의 장비를 만들었고 요일 던전에서 희귀 재료를 잔뜩 수집했다.
‘갈 거면 갈아.’
이 상황에서 나를 갈아버릴 정도로 멍청하다면, 어차피 탑 등반은 불가능하다.
광장에 있던 시체는 점차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에디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료애라도 있었냐?”
“아니, 그래도 나는 한패였으니까…….”
크게 상관은 없다.
과거일 뿐이다. 나도 깨끗하게만 살아오진 않았다.
“진정되면 들어와. 빈방은 알아서 찾고.”
나는 에디스를 지나쳐 숙소로 돌아갔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문을 열자마자 로비에 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사람이 잔뜩 모여 있었다.
‘뭐야.’
“역시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디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이 초롱초롱했다.
‘하아, 진짜 못 말려.’
나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제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정없이 뺨을 잡아당겼다.
“아, 아야야야야야! 머하는 거해효!”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랬지?”
“다혀하 사시느 저해져즈 뿐니데!”
내가 손을 놓자 제나는 빨개진 볼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오빠의 멋짐을 전해주려던 건데.”
“집어쳐.”
나는 제나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제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웅다웅하는 사이에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아까 한 소리 들어먹은 조프리였다.
“하, 한 씨. 얘기는 들었소. 고맙소. 놈들의 행패는 들었소. 방금 온 사람들을 칼로 위협하면서 죽이려 했다고…….”
“그랬어요!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요!”
로비 구석에 앉아 있던 아줌마가 말했다. 방금 전 광장에서 죽을 뻔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알고 있소. 우리도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 그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당신 덕분에 살았으니까.”
“내가 살려준 건 아직 신입들뿐. 너희들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
“무, 무슨 말이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스터가 제대로 빡친 거 같거든.”
[마스터, 합성을 시작합니다.] [합성하고자 하는 영웅에게 제물로 바칠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경험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물이 된 영웅은 소멸합니다.]광장에서 이셀의 외침이 들렸다.
[루이스, 조프리, 오웬, 안디오, 아놀드, 던컨, 해럴드까지! 이렇게 6명. 내 앞으로 모여!]이름을 불린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프리가 땀을 흘리며 뒤돌아봤다.
“모, 모두 괜찮소! 언제나 그랬듯 고블린을 잡으러 가는 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조프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놈은 눈치가 빠르다. 그렇기에 약삭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6명을 부른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서브 파티를 보낼 의도였다면 5명만 부르면 된다. 하지만 방금 이셀이 호명한 인원은 총 6명. 한 명이 넘친다.
따라서 목적이 바뀐다.
“우리는 3명씩 짝을 나눠서…….”
“머릿속이 아주 꽃밭이시군.”
나는 로비 가운데에 있는 소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물러나며 길을 비켰다. 소파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도망치듯 일어나 멀어졌다.
소파에 앉아 있는 건 제나 한 명뿐. 나는 그 옆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언제까지 설렁설렁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우, 우리는 최선을 다했소!”
“아론, 디카! 네가 보기에 저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나? 너희들이 하루종일 훈련소에서 땀을 흘릴 동안 저놈들은 뭘 했지?”
두 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로비 구석에서 고개를 수그릴 뿐.
“제나! 네 사냥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도와준 적이 있나?”
“제가 도축한 고기랑 가죽을 나르긴 했네요.”
“운반은 개돼지라도 할 수 있어. 그런 면에서 너희들은 개돼지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거 같은데.”
“개돼지라니!”
나는 앞으로 나서는 한 명을 일어나면서 걷어찼다.
놈은 카펫 바닥을 뒤집으며 나뒹굴었다.
“꿀꿀대지 마.”
루이스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우릴 도와주시오! 당신의 부탁이라면 마스터도 들어줄 거요!”
[광장으로 나오라니까! 내 말 안 들려! 이것들이 봐주니까 끝이 없네!]이셀이 나타나 떽 소리쳤다.
[루이스, 조프리, 오웬, 안디오, 아놀드, 던컨! 혼나기 싫으면 빨리 나와!]“우릴 어쩌려는 거냐?”
‘대상은 에디스겠군.’
갓 소환된 에디스는 레벨이 낮다. 합당한 조치였다. 새로운 고위 영웅들이 소환될 때마다 쓸모없는 하위 영웅들이 무더기로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
“안 가, 안 갈 거라고!”
제물로 지명된 사람들이 숙소 안쪽으로 도망쳤다. 이셀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는 한 명씩 붙잡아 열린 문을 통해 광장으로 날렸다. 다른 몇 명이 복도에 있는 방의 문고리를 잡아당겼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여섯 명은 전부 광장행이 되었다.
그리고.
[합성 완료!] [‘루이스(★)’가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조프리(★)’가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오웬(★)이…….] [‘에디스(★★★)’, 레벨업! 함정 해제 스킬 습득!]정적.
로비는 조용했다.
나는 말했다.
“너희들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누구였든 상관없어. 부자든 거지였든. 그런 건 다 버려.”
“…….”
“얹혀가려고 생각하지 마. 너희를 누군가 지켜준다고 착각하지 마라. 살고 싶다면 너희가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
문득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한 명이 눈물을 훔치며 나섰다.
“저는 싸움에 재능이 없습니다. 검만 잡아도 벌벌 떨립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죽으라는 겁니까!”
“클로에. 에녹. 얼터. 패트릭.”
이름을 불린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현 대기실의 보조직 네 명. 각각 요리사, 목수, 대장장이, 무두장이다.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술을 가르쳐라.”
“대장 기술은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오만…….”
하얗게 수염이 난 남자가 말했다. 대장장이를 맡고 있는 얼터였다.
“자기가 의욕이 있다면 알아서 배울 수 있겠지.”
대기실에서의 반복된 행동은 스킬으로 거듭난다. 이는 곧 기술 습득이 빠르다는 뜻이다.
“싸우고 싶다면 내게 와라. 두들겨 패는 거 정도는 해주지. 사냥과 도축을 배우고 싶다면 제나에게, 목공을 배우려면 에녹에게 가라. 길은 얼마든지 있어. 너희가 그동안 안 했을 뿐.”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하늘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방으로 사라져갔다. 얼굴에 하나같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로비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제나, 그리고 아론과 디카.
옆에 앉아 있던 제나가 말했다.
“오빠는 친절하네요.”
“내가? 웃기는데.”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내 말대로만 하면 그렇게 어이없게 죽을 일은 없다. 방금은 암케나의 화풀이에 불과했지만
오늘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처분될 놈들이었다.
디카가 중얼거렸다.
“형님, 저희는…….”
“너희는 하던 대로만 해.”
“감사합니다.”
‘이런 귀찮은 짓은 하기 싫었는데.’
안 그래도 내 일만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나는 광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에디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용병단 출신이라고 했던가. 곳곳을 다녀봤다고 하니 경험이 아주 많을 것이다.
슬슬 10층이 가까워지고 있다.
두 번째 파티가 필요해질 때였다.
지금까지의 말만 서브인 같잖은 파티가 아니라, 메인 파티와도 견줄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