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16
15. 프롤로그
* * *
눈을 떴다.
거무칙칙한 잿빛의 하늘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침대가 눈에 띄었다. 숙소의 안쪽에 있는 내 방이었다.
왼팔을 돌려본다. 검은 사제의 마법에 의해 찢겨져 날아갔던 부위다.
제대로 움직인다. 오른쪽 가슴에 났던 구멍도 온데간데없었다.
‘살아난 건가.’
돌아가기 전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한 발짝 빨랐던 모양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45분. 대기실의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누워서 눈을 감았지만, 정신이 또렷했다.
결국 포기하고 로비로 나왔다.
로비의 소파에는 아론이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말했다.
“웬 시답잖은 궁상이냐.”
“아, 형님.”
아론이 머리를 들어 나를 봤다. 눈 밑이 초췌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저희 모두 걱정했는데.”
“걱정은 개뿔.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고심을 하길래 표정이 썩었어?”
“저희가 싸우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싸우는 이유?”
“형님이 나가신 이후, 도시에 시체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도시 안에는 민간인 NPC가 다수 거주하고 있다.
내성으로 피난한다고 해도 수용 인원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시체에 의해 한바탕 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안에 있던 제나와 아론, 그리고 에디스 파티는 그 장면을 생생히 지켜봤겠지.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물만 들이켜는 아론을 바라봤다.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졌나.’
휴식 없이 전투와 훈련만을 반복할 경우 영웅의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여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혹은 임무 도중 대량 학살극이나 친밀도가 높은 동료의 죽음을 지켜봤을 때도 우울증에 걸린다. 우울증은 돌연사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한동안 물만 들이켜던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쉬십쇼.”
“내일도 그런 얼굴로 나올 거냐?”
아론은 씁쓸하게 웃은 뒤 말했다.
“내일이면 회복될 겁니다.”
“그래, 들어가라.”
“예.”
내게 고개를 숙인 아론이 숙소로 돌아갔다.
어두운 로비에 나는 홀로 앉아 물을 마셨다.
나는 나를 이곳에 데려온 그 녀석을 떠올렸다.
대기실에 오기 전에도 그랬다. 모자이크 때문에 나는 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음성만 뇌리에 남았을 뿐이었다.
‘기다린다고 했었나.’
내게 여유가 있었다면 얘기를 하고 싶다던 검은 사제에게 물어봤겠지만, 놈은 내가 죽였다.
나는 그날 새벽, 클로에가 나타날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밤을 꼴딱 새운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큰 전투가 끝났으니, 스트레스를 낮출 조치가 필요하다.
원래는 암케나의 역할이지만, 이 녀석이 제 일을 못하는 만큼 별수 없다.
나는 내게 인사를 한 뒤 주방에서 밑재료 준비를 하고 있는 클로에에게 말했다.
“재료 다 꺼내.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해라.”
클로에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고에 있던 모든 식재료를 꺼내놓았다. 뒤따라 나온 제빵사 아줌마도 솜씨 발휘를 시작했다.
대기실의 모두가 모이는 아침의 식사.
식탁에는 고기 요리와 각종 빵, 샐러드와 스프 등 각종 거창한 요리가 늘어서 있다.
제일 먼저 식당에 나온 제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뭐래요? 아침인데 뭐 이리 화려해요?”
“왜, 싫어?”
“아뇨! 언제나 이렇다면 대환영인데!”
제나는 싱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곧 대기실의 멤버가 차례차례 나왔다. 그들은 음식을 본 뒤 한 번 놀랐고, 나를 보고 두 번 놀랐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식당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니.
식사가 시작된다.
나는 대충 빵을 집어 먹으면서 파티원의 면면을 살폈다.
‘제나는 당연히 정상. 아론도 괜찮고. 이올카도 좋아.’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2파티를 살폈다.
3성 두 명도 괜찮다. 어셔도 어떻게든 먹고 있다.
각 파티의 5번째 멤버인 슈른과 매킨은 죽어버렸으니 볼 필요 없고.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두 명은 합류 시기도 늦었고, 레벨이 너무 낮았다.
‘디카.’
디카가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에디스가 일어서서 디카를 부축해 끌고 나갔다.
파티원의 멘탈 관리도 리더의 역할 중 하나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사상자는 크게 없었다.
그게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멀쩡한 건 절대 아니겠지만.
스트레스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모두가 숙소에 돌아간 늦은 저녁.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암케나가 접속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하늘에 불이 켜졌다.
나는 광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암케나가 들어올 줄 알고 있었다.
10층의 클리어 보상으로 주어진 하급 불의 속성석.
창고에는 내가 수집해놓은 물과 바람의 속성석이 보관되어 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알람이 떠올랐다.
[마스터, 승급을 기다리는 영웅이 있습니다!] [승급 가능 영웅 – ‘한(★)’] [Tips/승급을 위해선 합성소의 부속 건물인 승급소가 필요합니다.]암케나의 조작창이 떠오른다.
시설 탭이 터치됐다.
[‘합성소’의 부속 건물 ‘승급소’을 선택하셨습니다. 건축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쿠르르르.
미약한 진동이 대기실을 뒤흔들었다.
[승급소가 완공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영웅의 승급이 가능해집니다.]이어서 아이템 합성창이 떠올랐다.
합성창 안에는 붉은 돌, 푸른 돌, 녹색 돌이 원형으로 회전하고 있다.
[아이템 합성을 시작합니다!] [선택 재료 – 하급 불의 속성석, 하급 물의 속성석, 하급 바람의 속성석] [완성 아이템 – 하급 승급석] [성공 확률 – 87%] [합성 방식 – 자동] [합성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쿠당탕탕탕!] [요정 파워!] [Good!] [합성 완료!] [‘하급 승급석’을 획득하셨습니다!]창고 문이 열리더니 이셀이 튀어나왔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승급 축하해!]나는 이셀이 던진 무지개색 돌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이걸로 1성도 졸업이네. 이대로 7성까지 팍팍! 탑 공략을 쾅쾅!]“7성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후후, 로키가 아니면 누가 7성에 가랴!]그랬으면 이미 시리스가 7성이겠지.
내가 사방으로 노력했지만 7성 영웅만큼은 가질 수 없었다.
[마스터, 승급을 시작합니다!]덜컹.
합성소의 문이 열렸다.
나는 승급석을 한 손에 들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보랏빛 마법진이 그려진 합성소 안에 또 다른 문이 열려 있었다.
두 번째 문으로 들어간다.
승급소는 합성소와 거의 같은 구조의 방이었다. 대신 마법진이 붉은색이었고, 방 중앙에 돌을 올려놓을 만한 작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제단 위에 승급석을 올려놓았다.
승급석에서 연한 적색 빛이 뿜어졌다.
쾅!
합성소의 문이 거세게 닫혔다.
승급소의 문도 이어서 닫혔다.
승급.
마스터가 볼 수 없는 영역 중 하나다.
승급소에 영웅과 재료를 집어넣으면, 잠시 후 승급한 상태로 영웅이 나온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마스터도 알 수 없었다.
마법진 전체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시공의 틈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하지만, 왠지 모르게 피부에 좀 더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마치 깊은 물에 잠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붉은빛이 전신을 감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가야.”
나무로 만들어진 좁고 누추한 방.
흔들의자에 앉은 한 중년 여자가 품의 갓난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착하다, 착하지.”
“넌 누구지?”
대답이 없다.
이 여자는 10층의 NPC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퉁.
여자에게 손을 뻗었으나 중간에서 튕겨 나갔다.
‘아예 건드릴 수도 없나.’
나는 방을 둘러봤다.
10평도 안 되는 장소. 가구는 낡고 초라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여자는 아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넌 대단한 사람이 될 거란다.”
손길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한 이스라트.’
나는 아니다.
내게는 가족 따위 없다.
원래 나 대신 이곳에 왔어야 할 놈이 저기에 있었다.
대기실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하임 반도의 한 이스라트.
이셀은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영문을 모르겠군.’
나는 방의 구석에 난 창문을 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정체 모를 어둠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착하다, 착하지.”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할 여유는 없다.
마침 오른쪽 벽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튕기지 않았다. 단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오자 대기실의 광장이었다.
광장은 아무 장식도 없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암케나의 대기실이 아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하늘에는 불이 꺼져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대기실을 천천히 걸었다.
광장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다. 숙소도 창고도 훈련소도 없었다. 내가 나왔던 문도 돌아보니 어느새 사라져 있다.
대문의 명패에는 시공의 틈이라 쓰여 있었다.
끼이이익.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무언가 빛을 뿌리며 튀어나왔다.
별가루가 반짝이는 두 쌍의 날개. 검은 원피스와 특유의 앙증맞은 얼굴.
‘이셀?’
다르다.
이 꼬마의 크기는 주먹 정도였다. 이셀은 이렇게 작지 않다.
요정은 내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쿡쿡 웃었다. 그러고서 작은 손가락으로 시공의 틈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란 거냐?”
끄덕.
수상하지만, 여기 있어 봤자 달라질 것도 없다.
나는 심호흡을 짧게 하고는 시공의 틈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의 방 중앙에는 단 하나의 거울만이 놓여 있었다.
[그대의 힘을 증명하라!] [강림 던전 : 난이도 – 초절급]“이건…….”
쾅!
광장으로 나가는 문이 닫혔다. 요정은 킥킥거리며 내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거울에서 검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의 빛은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나는 어두운 공간 안에 홀로 서 있었다.
[두루둥!] [강림 던전이 열립니다!] [Warning! Warning! Warning!]순간 찌부러뜨리는 듯한 압력이 전신을 감쌌다.
“읍……!”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계 프레스로 누군가 나를 머리 위에서부터 압착시키는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진다. 숨을 쉴 수 없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온몸이 찌그러져 한 줌 고깃덩이가 될 것 같다.
[‘한(★)’이 공포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나는 검을 뽑아 땅에 박았다.
땅인지 어딘지도 알 수 없다. 그냥 새까맸으니까.
검자루를 부여잡은 채 필사적으로 버텼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악물린 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기절한다.
나는 검으로 왼쪽 손바닥을 긁었다. 검날을 타고 핏물이 떨어졌다.
막혀 있던 것을 뚫어 부수는 듯한 감각이 머리에서 느껴졌다.
[‘한(★)’이 광폭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한(★)’이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호오.」
“……하아.”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다.
신체의 통제권을 되찾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이 앞에 서 있었다.
[SS▩SH黑⊙∈※ Lv.999]나는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군지는 모른다. 눈앞에 있는 지금조차 제대로 된 외모를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새끼는 내가 이곳에 온 원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만났구나.」
쇠를 긁는 듯 불쾌한 음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나는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가 하얗게 물들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내가 흘린 피와 땀.
그리고 거쳤던 지옥 같은 전장들.
모두 이놈 때문이었다.
비록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방패를 꺼내 왼손에 걸쳤다.
숨을 천천히 고른다.
내가 가진 전력 안.
놈을 죽일 수 있는 전술을 필사적으로 가늠한다. 나의 레벨과 스킬, 그리고 상대의 능력을 비교한다. 순간 강한 두통이 머리에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1성에 레벨 10. 대여섯 개의 하급 스킬을 가진 일개 영웅에 불과했다. 반면 저놈의 전력은 측정조차 할 수 없었다. 6성과 5성 만렙으로 구성된 디오라 파티를 10초도 안 되어 전멸시키던 그 능력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일그러지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놈은 나와 가까운 장소에 있었지만, 이상한 안개에 둘러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놈의 입으로 보이는 듯한 부분이 꿈틀거렸다.
「내게 달려들지 않나? 원망스러울 텐데.」
“잡소리나 할 거면 돌려보내라.”
「후후, 좋구나, 좋아. 과연, 그 정도의 자제력이 없다면 일찌감치 죽었겠지.」
놈의 팔이 흐물거리며 박수를 쳤다.
두통이 심해졌다.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언제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영웅 승급은 모두 이런 식인가?”
「그럴 리 없잖느냐. 너는 특별한 존재다. 이 장소는 너를 위한 선물이야. 픽 미 업의 영광스런 랭커였던 너를 위해 준비한 나의 무대다.」
필드에 깔린 안개가 흩어졌다.
안개 너머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여자보다는 소녀에 가깝다.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와 몸매는 인형을 연상케 한다. 하늘하늘한 검정색 원피스를 걸친 그 소녀는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소녀의 주위로 나를 이곳에 데려온 요정이 날아다녔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개 같은 년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지.”
“그건 좀 곤란해.”
소녀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가죽 시트로 뒤덮인 고급 의자가 나타났다. 소녀는 그 위에 앉아 내게 시선을 보냈다.
자세히 보니 이셀과 매우 닮았다.
이셀의 몸집이 커지고, 몇 년 동안 성장하면 딱 저렇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소녀는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작게 웃었다.
“내가 이셀을 닮은 게 아니라, 이셀이 나를 닮은 것이다. 그 아이는 내 복제품에 불과해. 1억하고도 479번째지. 이런, 마침 픽 미 업의 다운로드 수와 비슷하지 않은가?”
“……넌 뭐냐.”
“마침내 그 질문이 나왔군.”
소녀는 쿡쿡 웃더니 품속에서 명함을 꺼냈다.
소녀가 가볍게 던진 명함은 파르르 회전하면서 내 손에 들어왔다.
이름 란이 특수문자로 덧칠이 되어 있다.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쓰거든.”
나는 명함을 꾸깃 접어 바닥에 버린 뒤 발로 짓밟았다.
“실례인데.”
나는 잊지 않도록 놈의 본모습을 눈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이곳에 데려왔나?”
“아마 그렇겠군.”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갈 뻔했다.
소녀는 나의 상태를 아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너무 미워하진 마라. 네가 뫼비우스에 소환된 것은 나로서도 의외였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일종의 사고였지.”
“네 사정 따위 내가 알 거 없어. 죽기 싫으면 돌려보내라.”
“고작 1성 주제에 나를 죽이겠다니. 꿈이 좀 크지 않나?”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지.”
“그렇다면 너를 지금 죽이는 게 해답이겠군.”
소녀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창 한 자루가 솟아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담력이 대단하구나.”
창은 내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소녀가 손을 내젓자 창은 소녀의 그림자로 돌아갔다.
‘아직 이놈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쯤은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능력 상한이 어디까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심상치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인 임무 스테이지에 직접적으로 개입했고, 승급 과정에까지 파고들었다.
나를 없앨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을 터.
하지만 소녀는 이를 넘기고서 나를 이곳에 불러냈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끓어오를 것 같은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원하는 게 뭐냐.”
“별거 없어. 단지 너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대화?”
“그래, 로키. 세계 랭킹 5위이자 불굴 불패의 마스터. 나는 너의 팬이야. 모니터링을 하면서 네 플레이를 보고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강대한 니플헤임은 본사에서도 제1순위의 주시 대상이지. 그런 너를 어찌 내가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나?”
소녀는 히죽 웃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나는 네게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러 온 것이다.”
“…….”
“로키, 넌 모바일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뽑기 게임에서 스토리는 유저들이 잘 신경 쓰지 않는 부분 중 하나지. 그거보다는 컨텐츠에 많이 집중하거든. 나도 그래. 픽 미 업의 스토리는 솔직히 말해서, 좀 낡아빠졌잖아. 세계관도 별거 없고. 조금만 진행하다 보면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마스터가 대부분이야.”
소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연극의 무대가 바뀌듯, 어둠으로 뒤덮인 필드가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익숙한 곳이다.
5층과 10층의 주 무대였던 외딴 도시였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나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동쪽의 강은 남김없이 말라붙어 있고, 북쪽의 무성했던 숲은 뿌리와 가지만 남아 있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평원은 붉은 지표면을 드러낸 채 갈라져 있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폐허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이 새까맣다.
밤이 되어서 어두워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더없이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이곳이 어딘지 알겠나?”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그거 미안하군. 난 떠벌리는 성격이라. 이곳은 타오니어 대륙, 하임 반도에 있는 넬사라는 도시야. 보다시피 박살이 났지.”
박살이 난 정도가 아니다.
소녀는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장소가 또 바뀌었다.
“여긴 실키아. 카이아. 에도라.”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무대가 변했다.
배경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
인간은커녕 동물 한 마리, 벌레 한 마리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어느 곳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피오니아. 마디안. 이카르디아. 릴기아. 할세아. 아란티아. 시스니아. 바르디아까지. 이상, 타오니어에 있는 모든 지역의 현 상태다.”
소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니플헤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모두가 그래. 뫼비우스에 소속된 모든 대륙이 이렇게 되었다. 1억 이상의 세계가 같은 시기에 멸망했지.”
필드는 다시 처음의 어둠으로 돌아왔다.
“여기, 결말이 정해진 책이 있다. 결말은 배드 엔딩. 모든 것이 끝나버려. 책 속의 등장인물은 엔딩을 바꾸기를 희망한다. 무엇을 해야겠나? 답은 간단해. 책 밖의 인물을 끌어들이면 된다. 이야기를 고쳐 쓰게 해야 돼. 설정과 개연성이 엉망이 되더라도, 공간 축과 시간 축이 뒤섞여 파탄이 나더라도.”
“…….”
“상위 차원의 존재는 관측만으로 인과를 비틀 수 있지. 그게 바로 픽 미 업이 만들어진 이유다. 마스터 로키.”
얼마나 거창한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그래서.”
“그래서?”
“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는 이유가 뭔데.”
“네게 협력을 요구한다.”
“협력?”
“나와 함께 세계를 구하…….”
나는 벨트 뒤쪽에서 단검을 꺼내 집어던졌다.
푹.
단검은 깔끔하게 소녀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갈라진 이마 사이로 검은 피가 튀어나왔다.
“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했는데, 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자빠졌군.”
“잘 생각해라, 로키. 대답은 긍정이냐, 부정이냐?”
이마가 쪼개진 채 소녀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답했다.
“X 까.”
난데없이 이런 엿 같은 곳에 불러놓고 개고생을 시킨 다음 협력을 하라?
별 미친 또라이 같은 놈을 다 보겠다.
나는 전투태세를 갖추고는 중얼거렸다.
“너와 협력 따위는 안 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죽일 거면 죽여라. 네 머리통에 칼침 한 방은 놔주지.”
“말이 심하구나. 상처받는다. 후후, 후후후…….”
툭.
소녀의 이마에 박힌 단검이 저절로 뽑혀 나왔다.
검은 피가 흐르고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바닥에 흐른 피가 소녀의 그림자로 파고들었다. 나는 놈에게 달려들어 토막 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하아.’
머릿속에서 끓어 넘치는 열을 천천히 배출했다.
내게는 침착함이라는 스킬이 있다. 처음의 분노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 새끼를 죽일 수 없다.’
나는 1성.
레벨은 10에 불과하다.
스킬도 보잘것없었고 각인도 개방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죽인다면 힘을 더 기른 후에.
놈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보스 몬스터라면 공략은 분명 존재한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나는 말했다.
“너와 이야기 따위 나누고 싶지 않다. 돌려보내라.”
“서운하구나. 너를 이 장소에 부르기 위해 많은 간섭력을 소모했건만.”
소녀는 전혀 서운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키, 나는 너를 높이 평가한다. 그야말로 픽 미 업에 존재하는 어떤 마스터보다도. 네 앞자리의 랭커조차 너에 비하면 달 앞의 반딧불이에 불과하지. 그 이유를 알겠나? 그것은 네가, 마스터로서 유일무이한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필드 중앙에 홀로그램 글자가 떠올랐다.
[마스터, 영웅과의 유대를 믿으세요.]“이 문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튜토리얼을 클리어할 시 나오는 안내문의 일부였다.
“이 문장의 의미를 진정으로 구현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 1억 명의 마스터 중 오직 너뿐이었어.”
“무슨 말이냐.”
소녀는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풍경이 다시금 일변했다. 낯선 배경 속에서 홀로그램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플로어 80.] [임무 유형 – 복합] [목표 – 알 수 없음.]“어딘지 알겠나, 로키?”
소녀는 빙긋 웃었다.
“이곳은 6개월 전, 니플헤임의 80층 스테이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메시지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메시지였다. 내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층수였으니까.
층수 80.
픽 미 업의 1억 유저 중, 나를 포함 5명에게만 정복을 허락한 최악이자 최난의 스테이지였다.
최초의 정복 유형. 목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픽 미 업은 랜덤 스테이지였고, 운에 따라 난이도가 갈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80층에 도전한 랭커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실패했다.
따라서 랭킹 6위부터 도달 층수는 79층이었다.
랭커들 사이에서 80층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년하고도 3개월 전, 79층에 다다른 나는 자신 있게 80층에 도전했고, 메인 파티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력이 전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어떤가? 액정이 아닌 맨눈으로 보는 기분은? 장관이지 않나?”
소녀는 어느새 생겨난 가죽 의자 위에 앉았다.
손에는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이걸 보여주는 의도는?”
“간단해. 나와 함께 지금의 광경을 지켜보는 거지.”
소녀는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앉아라. 자리가 불편할 거야.”
내 뒤에 고급 시트로 둘러싸인 의자가 나타났다.
나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요정이 내게 음료를 건넸으나 나는 그것을 손으로 밀어냈다.
‘니플헤임 80층의 필드는…….’
수많은 필드 유형을 분석한 나도 정의하기 힘든 이상한 필드였다.
부유하는 섬이 곳곳에 떠 있었고, 아래에는 용암이 끓는 강이 흘렀다. 강이라기보다는 바다였다. 용암은 땅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저 멀리 펼쳐진 산맥에서는 화산이 불덩이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유황과 재가 섞인 바람은 매캐한 잿빛으로 일렁거렸다.
‘지옥.’
그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생명체가 일절 살 수 없는 극한의 공간.
80층의 스테이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보다시피 상태가 이렇지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곳의 환경은 네게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까. 과거의 기록을 재생하는 것일 뿐.”
나는 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작은 부유섬 위에 앉아 있었다.
내 바로 앞에는 족히 수백 미터는 넘을 법한 거대한 섬이 있었다.
그 섬의 한쪽에서 빛이 일더니 누군가 걸어 나왔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으로부터 걸어 나온 일행은 모두 다섯 명.
그들은 제각기 다른 복색과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사실적이었지만 알 수 있다. 잊을 리 없었다.
일행의 선두에 서 있던 금발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은빛의 갑옷을 두른 그녀는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선홍색 검을 차고 있었다. 칼집에 새겨진 문양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시리스 아젠트하임.’
니플헤임의 서열 1위이자 서브 마스터, 그리고 메인 파티의 리더였다.
‘그 뒤의 4명은.’
볼 것도 없다.
서열 1위부터 5위까지.
니플헤임에서 최강을 논할 수 있는 인원이 전부 모여 있었다.
“…….”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요정이 건네준 물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80층을 깰 때의 영상이군.”
“정답이다.”
“왜 이런 걸 보여주지? 어차피 클리어 과정은 알고 있다. 별 의미 없어.”
“두고 보면 알지 않겠나?”
소녀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메인 파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들은 한 곳에서 빙 둘러서 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각자 침묵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르. 스르르.
부유섬 밑에서 괴상한 것이 나타났다.
특별한 형체가 있는 게 아니다. 액체처럼 걸쭉하게 늘어진 그것들은 촉수를 꿈틀거렸다. 그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수십 수백 개의 부유섬에서 일제히 솟아올랐다.
[혼돈의 파편 Lv.113 X 2755] [절망의 파편 Lv.108 X 3164] [원념의 파편 Lv.121 X 2348]탑 고층에서 대량으로 출몰하는 무속성 몬스터.
흔히들 파편 시리즈라고 불리는, 80층 이상을 지옥의 난이도로 만든 주범이었다.
그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혼돈의 결정 Lv.322 X 13] [절망의 결정 Lv.315 X 11] [원념의 결정 Lv.311 X 15]유황과 재로 가득한 안개 속에서 커다란 형체가 떠올랐다.
각각 개체가 수십에서 수백 미터에 다다르는 초대형 몬스터들.
그들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침입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는가? 픽 미 업은 계정마다 난이도가 달라. 소환 확률도 천차만별이지.”
부유섬의 지표면이 수천수만 마리의 파편들로 뒤덮였다.
하늘을 가릴 듯한 거대 몬스터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운이 없어서 고급 영웅을 못 뽑은 게 아냐. 단지 니플헤임에는 영웅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난이도도 마찬가지. 니플헤임은 회사의 내부 판정에서 S를 받은 몇 안 되는 계정이야. 모든 면에서 최악이었다.”
“…….”
“아직도 의문이구나. 대체 88층까지 어떻게 올라간 거지?”
소녀는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무시했다.
다섯 명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파편들은 촉수를 뽐내며 바로 앞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으로 물든 촉수가 시리스에게 뻗어져 나가려 할 때, 시간이 정지했다.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80층 공략 당시, 내가 했었던 플레이 기록이었다.
[‘전술소’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시설 Lv. MAX!] [스테이지의 지도를 보유중입니다.] [전술 화면을 표시합니다.] [터치 앤 드래그로 영웅들에게 전술 지침을 내릴 수 있습니다.]화면에는 스테이지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거의 모든 부분은 붉은 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지도 자체가 빨간 게 아닐까 착각될 정도로. 반면 아군을 나타내는 푸른 점은 다섯 개. 화면 좌우로는 각종 전술 도구와 투입할 수 있는 파티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조작을 알리는 커서가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홀로그램 지도에 푸른 화살표가 그어진다. 화살표는 교차하고 나아가며 화면을 뒤덮었다. 몇날 며칠을 밤새가며 짰던 전략이었다.
부유섬에 있는 각종 보조 오브젝트를 완벽한 순서로 탈취함과 동시에 적을 토벌한다.
말은 쉽지만, 진형이 한 곳이라도 비거나 순서가 잘못되면 그 즉시 대형에 구멍이 뚫려 전멸한다. 빈틈을 없애기 위해 수백 번을 검토하고 뒤엎었다.
시리스 파티의 가운데에는 원형의 탁자가 솟아나 있다.
탁자 위에는 지도가 놓여 있었다. 화면에 표시된 것과 같은 종류의.
내가 커서를 움직임에 따라 탁자 위의 지도에 화살표가 그려졌다. 영웅들은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슬슬 시작되겠구나.”
소녀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음료를 들이켰다.
“잘 봐두어라. 저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들에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것이 네가 유일무이한 이유다. 마스터 로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맡겼다.
전술 지침이 종반에 다다르던 차.
각기 다른 세 자루의 검을 찬, 무표정한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분의 명령은?”
“언제나 그렇듯,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합니다.”
백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른 여자가 말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 저희를 위해서도, 그분을 위해서도.”
“최소 천 마리는 죽이지 않으면 성에 안 차겠는데.”
비틀린 창을 등에 메고 있던 소년이 말을 이었다.
백발의 여자는 품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책의 페이지가 허공에서 흩날리며 밝게 빛났다.
“우리가 한 맹세대로.”
파치칫.
한 소녀가 들고 있던 활이 뇌광을 흩뿌리며 빛났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5신기 중 하나, 브류나크였다.
“나, 왕의 화살, 니하쿠 게스트펠.”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녀가 중얼거렸다.
눈동자 속에서 노란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스르릉.
소년이 들고 있던 창이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마찬가지로 5신기 중 하나, 루인이었다.
“나, 왕의 창, 뮤덴 나이델크.”
소년이 중얼거렸다.
사내가 차고 있던 세 자루의 검이 박동하듯 꿈틀거렸다.
세 자루를 합쳐 하나의 무기, 클라우 솔라스였다.
“나, 왕의 검, 리디기온.”
사내가 중얼거렸다.
여자가 펼치고 있던 책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수많은 마법 문자가 공중에 새겨졌다.
“나, 왕의 눈, 유르넷 시드.”
여자가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시리스가 레바테인을 뽑아 들었다.
“나, 왕의 화염, 시리스 아젠트하임.”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다섯 명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아직 시간은 멈춘 채였고, 전술 배치는 끝을 앞두고 있었다.
[10초 뒤에 시간제한이 끝납니다.] [전투가 재개됩니다.] [준비하세요!]최대 레벨 전술소로도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필드 전체를 아우르는 클리어 전략이 완성됐다.
무기를 치켜든 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지도에 향했다.
“……훌륭하십니다.”
유르넷의 눈이 감탄의 빛을 띠었다.
[임무 개시까지 8, 7, 6…….]탁자와 지도가 사라졌다.
다섯 명은 주위를 포위한 채 굳어 있는 적을 향해 둥글게 둘러섰다.
[3, 2, 1…….] [임무 스타트!]시간 정지가 풀렸다.
수천의 적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레바테인으로부터 뿜어진 홍염이 시야를 뒤덮었다.
이후의 과정은 모두 생략되었다.
영상은 끝이었다.
나는 어둠으로 가려진 공간에 되돌아와 있었다.
소녀는 검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유리잔을 내게 들어 보였다.
“후후. 대단하지 않나? 저들은 진심으로 네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
“알고 있을 거다. 저들은 전 서버를 통틀어 최강이라고 불리는 6성들이지. 7성을 제외하고는 저들을 상대할 만한 자는 없어. 내 장담하마. 너는 무시무시한 놈들을 키운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저들이 마스터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 영웅들은 탑을 오르고 승급을 반복하면서 진실을 깨닫지. 그리고 절망한다. 그 누가 자신을 장난감으로, 애완용 완구로 취급하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겠나?”
소녀의 목소리는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들렸다.
“하지만 너만은 달랐다. 진정 대기실을 지배했던 마스터는 오직 너밖에 없었다.”
소녀는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로키, 너는 니플헤임의 왕이었던 거야.”
왕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지금도 니플헤임의 영웅들은 너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들은 네가 이곳에 떨어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소녀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라. 세상에 그 어떤 영웅이 마스터가 사라졌다고 몇 달 내내 모든 시공을 뒤지면서 발악하겠나? 너라면 그렇게 할까? 다른 대기실의 영웅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요정이 허리에 양손을 짚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었다.
“너의 플레이 방식은 아주 독특해. 동시에 정교하지. 나도 생각 못했거든. 설마 합성을 안 쓰는 마스터가 나타날 줄은.”
합성을 안 쓴다?
아예 안 하진 않았다. 필요하면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말대로, 내가 다른 마스터라면 하루에 서너 번씩은 거치는 합성을 최소한도로 줄여 대기실을 운영한 것은 맞다. 소환되기 전으로 따지면, 마지막 합성이 3개월 전이었을 것이다.
“그 밖의 운영도 마찬가지야. 네가 알려지기 전, 픽 미 업의 거의 모든 마스터는 영웅들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지. 쓰다가 질리면 버렸다. 소모품처럼 내던졌어.”
소녀는 확신을 가진 어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넌 이곳의 영웅들이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면 그런 방식은 불가능해. 이게 내 결론이다.”
특별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 속의 영웅들은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게임 캐릭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각각 명령에 따라 반응이 달랐고 수행 방식도 달랐다.
그러나 믿기지 않을 뿐이었지, 그걸 인간이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게 효율적이었을 뿐.’
보통의 마스터는 합성으로 영웅을 통제한다.
말을 안 듣거나 무가치한 놈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처분하고 그에 대한 공포로 대기실을 운영한다. 가능성을 보이는 저급 영웅이 있었어도 그들은 고위 영웅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따름이었다.
나는 달랐다.
내게는 태생 5성이 나오지 않았다. 4성조차 한 명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망한 계정이라고, 접으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접지 않았다.
불합리에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나아갈 길을 찾을 뿐. 그에 따라 관념이 달라졌다. 3성 이하의 영웅으로 대기실을 꾸리고 모든 공략을 진행해야 했으니.
등급이 낮아도 가능성을 보이면 버리지 않는다.
처음엔 쓸모없는 영웅이라도 나중에는 달라질 수 있다.
공포로만 대기실을 운영한다면 반드시 무너진다.
알아본 결과, 픽 미 업에는 합성 외에도 플레이 여하에 따라 영웅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몇 가지 존재했다. 그것들을 분석하고 파악하여 때에 알맞게 활용했다.
가치를 증명하면 보상을.
무가치에는 벌을.
무쓸모를 넘어 아예 방해가 되는 놈들이 있으면 ‘버림패’로 활용한다.
내가 강림 던전의 선발대로 내보낸 디오라 파티는 그 결과물이었다. 그놈들은 근처의 영웅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등 오래 써먹기에는 성향이 좋지 않았으니까.
합성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쓰지 않았다.
니플헤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 서버의 6성을 통틀어 최강이라고 불리는 메인 파티의 다섯 명.
그들 중에는 1성에서 시작한 영웅도 섞여 있다.
합성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대기실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니플헤임은 왕국과도 비슷한 규모로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게임의 효율에 대한 분석의 결과물을 ‘진실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한다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들었단 거냐?”
“그렇다. 꼭 한 번 얘기를 하고 싶었지. 지구에서는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구나.”
“나도 아쉽군. 지구에서 만났으면 당장 묻어버렸을 텐데.”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원망을 샀어. 다른 건 몰라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군. 정말 더럽게 짜증 났으니까.”
“그런가?”
“타오니어든 니플헤임이든, 둘 다 나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지구인이야. 네 사정을 남한테 강요하지 마라.”
“후후, 상관이 없다니. 니플헤임의 영웅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네게 실망할 텐데?”
“멋대로 실망하라지.”
이 녀석의 목적을 종잡을 수 없었다.
순수하게 탑 등반을 원했다면 나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아도 된다. 니플헤임 조는 착실히 공략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85층을 넘어 88층까지 도달했고 등반 도중에도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랭킹 1위가 머물고 있는 마의 벽, 90층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를 이곳에 끌고 왔다.
그 외에도 10층에서 난입한 이유나, 이곳에 데려와서 굳이 쓸데없는 비사를 알려주는 것까지. 정보가 적어 도무지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이 새끼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남이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만 명심한다면 효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너와 협력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게 있다면, 네가 내 눈앞에서 당장 꺼지는 거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너는 이 뫼비우스를 구할 용사가 될 수 있건만.”
소녀가 웃었다.
“뭐, 상관없다. 네게 바라는 것은 하나. 내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오르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이 정도 모욕은 얼마든지 참아주마.”
“10층에서 검은 사제가 나타난 게 네 짓거리냐?”
“그렇다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열 내지 마라. 15층부터는 나서지 않아. 타오니어는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너를 짜릿하게 반겨줄 것이다. 니플헤임과 같은 S급 난이도거든.”
“…….”
“네가 아무리 잘해도, 마스터가 접을 확률은 최소 9할 이상이라 본다만. 뭐, 나의 도움이 있다면 또 다르겠군.”
소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까만 가죽 시트 의자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것 하나만큼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네가 탑을 끝까지 오르는 위업을 달성한다면, 너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가진 뫼비우스의 지분을 반절 양도하마. 넌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대기업의 대주주가 되는 거야.”
뫼비우스의 대주주라.
‘믿지 않는다.’
돌려보낸다는 것도, 보상을 준다는 것도.
탑을 오를수록 내가 알지 못했던 정보가 풀려날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간다. 저런 쓰레기에게는 의지하지 않는다.
“어쨌든, 계약 성립인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소녀가 말했다.
“넌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돼.”
“어지간히 날 싫어하는구나. 왜지?”
“왜라고 물었나?”
“그렇…….”
나는 두 번째 단검을 꺼내 소녀의 미간에 집어 던졌다.
단검은 두개골을 파고 들어가 자루까지 깊게 박혔다.
“이게 내 대답이다.”
「흐흐흐…….」
이마에서 단검이 스르르 떠밀려 나왔다.
시간을 돌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었다.
「그래, 이 정도의 패기가 없다면 탑은 오를 수 없다. 무례는 용서하마, 용서하겠다!」
어둠 저편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이 생겨났다.
문이 열린다.
문 너머에서 오색 빛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그 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등반을 시작하는 네게 보여주겠다. 너만을 위해 준비한, 픽 미 업의 진정한 프롤로그를!」
소녀의 몸이 그림자로 흩어졌다.
쿠르르르.
필드 전체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나레이션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간과 이종족이 어울려 사는 땅, 타오니어.]장소가 바뀌었다.
지는 노을. 황금빛의 밀밭에서 아낙네들이 추수를 하고 있다.
다시 바뀐다.
어느 마을. 어린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어놀고 있다.
풍경은 파노라마처럼 연속으로 바뀌었다.
평화로운 인간 세계의 풍경들.
그 중에는 내가 임무에서 봤던 넬사라는 도시도 섞여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경치 속을 계속해서 걸었다.
[평화와 번영이 이어지던 대륙에 정체불명의 적이 침입하게 되는데!]장소가 뒤바뀌었다.
불타오르는 성과 그 앞의 들판.
병사와 괴물이 격돌한다.
다만 우열은 분명하다.
전투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 쪽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성에서, 마을에서, 들판에서, 숲에서, 사막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와 싸움이 패배로 마무리된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 속을 나는 걸었다.
[결국 대륙은 암흑의 힘에 휘말려 갈가리 찢어지고 만다.]어디선가 본, 풀 한 포기 없는 땅이 필드에 떠올랐다.
그 속에서 광소가 울려 퍼졌다.
「픽 미 업의 난이도가 왜 어려운 줄 아느냐!」
「패배로 끝난 싸움을 역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운명을 되돌려라, 로키!」
[그러나 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지 모를 숲속, 붉은 머리와 그을린 살갗을 지닌 소녀가 활을 만지고 있었다.
누군지 알고 있다. 저 소녀의 이름은 제나 시라이였다.
화면이 바뀐다.
낯선 도시. 등에 짐을 멘 아론이 중년 남자와 값을 흥정하고 있다. 옆에는 어린 소녀가 아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시 바뀐다.
연무장에서 검을 쥔 채 동료 기사들과 땀을 흘리는 셰이가 보였다.
[그대, 마스터여!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탑을 오르라!]그 뒤.
이미 소환됐고, 앞으로 소환될 수많은 영웅들의 일상이 펼쳐졌다.
빛바랜 풍경 속에서 그들의 몸은 반짝이고 있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화면 너머에서 핸드폰을 조작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개 같은…….’
[마스터, 영웅과의 유대를 믿으세요. 세상의 미래는 마스터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달려 있다. 달려 있고말고! 세상의 미래는 너와 마스터의 손에 달린 것이다!」
[너를 가로막는 수많은 적들!]풍경이 일변했다.
다종다양, 수백 가지의 몬스터가 투명한 벽 너머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각종 비경에 숨은 강대한 적들!]깊은 심해 속.
구름바다 너머.
광활한 사막.
거대하고 끔찍한 마물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안개에 뒤덮여 있어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아무도 올라오지 못한 이 탑의 꼭대기에 네가 오를 수 있겠느냐?」
“크아아아아아아아!”
괴물들이 일시에 포효했다.
막대한 음파에 의해 딛고 선 땅 자체가 흔들렸다.
나는 힐끗 돌아본 뒤 문을 향해 나아갔다.
만화경처럼 변화하던 풍경이 걷힌다.
어느새 나는 이곳에 진입한 통로였던, 시공의 틈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로 앞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왼발을 내디뎠다.
뒤를 돌아보자, 방 가운데의 거울 안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탑을 오르거라, 로키. 나는, 아니,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다.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문에 들어가기 직전, 답을 들려줬다.
“X 까.”
[빠라밤!]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영웅의 잊혀진 기억이 깨어납니다.] [‘한(★★)’, 승급 완료! 2성이 되었습니다.] [일러스트가 갱신됩니다.] [레벨과 스킬의 한계치가 늘어납니다.]눈부신 빛이 몸을 휘감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붉은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끝났나.’
하늘을 올려본다.
반짝이는 빛이 흐르고 있다.
액정 바깥에서 암케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합성소를 나서자 문이 차례대로 닫혔다.
마침 훈련소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아론을 발견했다.
아론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아, 형님. 돌아오셨습니까?”
“별일 없었냐?”
“평소대로죠. 여전합니다.”
그 표정에서는 지난 새벽의 우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싸우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군.’
네가 싸우는 이유.
이곳에 끌려와 목숨을 걸고 적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이유.
“그런데 혼자 들어가셔서 무얼 하고 오신 겁니까?”
“승급이라고 있어. 너도 곧 하게 될 거다.”
아론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간다.
‘니나라고 했었나.’
아론의 여동생 이름이다.
내가 봤던 환상 속에서 손을 잡고 있었지.
그 아이를 위해 돌아간다고 했었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탑을 오르는 것.
지구로 돌아가는 것.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보다 기분이 훨씬 더러워졌다는 점이다.
‘잊지 않아.’
네가 누구든, 이름이 무엇이든.
이 빚은 반드시 갚는다.
숙소의 문을 닫으려 할 때.
난데없이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픽 미 업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