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18
17. 다시 전진
* * *
나는 군마 조각상을 분수대 위에 놓았다.
일정이 끝나면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암케나가 복귀했으니 오늘부터 다시 바빠질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멤버들이 모인 훈련소로 가려는데 이셀이 따라붙었다.
[로키, 만약 마스터가 바뀌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그럴 일은 없어.”
나는 이셀의 우려를 일축했다.
어느 정도 바뀔지는 알 수 없어도 바뀐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애초에 공식 카페에 상담을 하러 간 것 자체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보낸 문서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암케나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 기회는 언제지?”
[다음번 인터넷 말야?]이셀이 되물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 달밖에 안 걸릴 수도 있고, 반년이 넘어갈 수도 있어. 잔여 간섭력이 얼마나 빨리 모이냐에 따라 달라.]“간섭력은 뭔데.”
[뫼비우스의 인과를 비틀고 법칙을 수정하는 원천이야. 마스터가 접속해서 대기실을 지켜보거나 활동을 하면 에너지가 쌓여. 층수가 올라가면 모이는 속도가 더 빠르고. 그리고 무엇보다…… 젬!]이셀이 핑그르르 돌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 파랗게 반짝이는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젬! 간섭력의 결정체, 창조의 힘이 깃든 보석이야.]“현질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거냐?”
[당연하지. 인간의 돈에는 강한 원념이 깃들어 있다구. 사이버머니도 좋지만, 더 좋은 건 현찰! 본사에 현금을 갖고 오면 1% 추가 결제 혜택을 줘. 몰랐어?]‘째째한데.’
고작 1%를 위해 본사까지 찾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쨌든 암케나와의 접선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이대로 기틀을 잡아나가면서, 엇나가는 게 보인다면 다음 접선 때 이를 교정해주면 된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현실의 생사나 뫼비우스에 대해, 그리고 픽 미 업에 대해 조사해볼 생각이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약간 더 속도를 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간섭력인가 하는 것을 모아야 하니 말이다.
최초의 접촉은 끝났다. 변화를 살펴볼 순서였다.
이셀과 작별한 다음 훈련소로 들어갔다. 1파티의 멤버가 곳곳에 흩어져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련을 하고 있는 제나와 아론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라, 오빠?”
“멈춰. 할 말이 있으니까. 이올카도 불러오고.”
얼마 뒤, 1파티의 인원이 한곳에 모였다.
나는 즉각 말했다.
“이 시간부로 출전 정지는 해제다.”
세 명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마스터가 변할 거란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
제나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전 마스터가 어떻든 상관없었는데, 그래도 잘됐네요.”
아론은 말없이 창을 쥐었다.
이올카는 두 명과 나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다가 한숨을 쉬고는 어깨를 내렸다.
세 명 다 동의했다. 효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1파티’가 조작 가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훌륭합니다, 마스터. 영웅이 마음을 되돌렸군요!]“그동안 너무 많이 쉬었지.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냐?”
“아니, 전…….”
나는 이올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근질근질, 근질근질하네요!”
“좋아.”
세 명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오랫동안 파업이 이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한, 제나, 아론, 이올카!]1파티를 부르는 이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바로 출전. 나는 멤버들과 함께 광장으로 나왔다.
이셀이 광장을 빨빨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 아론이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 마스터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 저희는 넷입니다. 한 명이 비었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 마라.”
나는 픽 웃었다.
이셀이 다시 한번 외쳤다.
[에디스!]“에디스 언니요?”
제나가 머리를 기울였다.
잠시 뒤 나온 에디스는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나를?”
[마스터가 1파티에 임시 합류를 요청했어. 할 거야? 말 거야?]에디스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출전 정지를 푼 거야?”
“보다시피.”
“마스터는?”
“두고 보면 알겠지.”
잠깐 고민하던 에디스는 결론을 내렸다.
“알았어. 너희들이 그렇다면.”
[‘2파티’가 조작 가능 상태가 되었습니다.]에디스를 포함한 2파티의 조작 불능이 해제됐다.
리더의 의사가 파티 전체의 뜻이 된다. 파티 내에서 신망이 높지 않으면 불가능한 판정이었다.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에디스(★★★)’가 ‘1파티’에 합류합니다!]그리고 에디스의 소속이 1파티로 변경됐다.
물론 임시적인 조치였다.
‘기한은 15층을 깰 때까지.’
선발대인 3파티의 희생으로, 15층이 1개 파티를 요구하는 소규모 임무라는 것은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굳이 파티를 나눌 필요가 없다. 양측의 팀워크가 맞다면 마스터의 의사에 따라 정예들을 섞어 임시 파티를 구성할 수도 있다. 정석은 새로운 영웅을 끼워 넣은 다음 1레벨부터 육성하는 것이지만, 파업 사태로 시간을 꽤나 지체한 상태였다.
속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효율을 추구하는 것.
이런 방식은 나도 환영이다. 신규 멤버 육성은 15층을 클리어한 뒤 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육성 속도는 층수가 높아질수록 빨라진다. 새로운 시설과 던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래 있지는 못할 거야.”
에디스는 어색한 듯 뺨을 긁었다.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뭐.”
[열려라, 시공의 틈!]덜컹.
광장 정면의 대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출진이었다. 에디스가 합류한 1파티는 원형의 방으로 나아갔다.
문이 닫혔고, 층수를 알리는 알람이 표시됐다.
[메인 던전, 현 도전 층수는 8층입니다.] [10초 뒤 문이 열립니다. 준비하세요!]‘8층.’
기억을 되짚었다.
27마리의 고블린 라이더가 등장하는 스테이지였다.
필드는 평원. 이올카 덕분에 꽤 고생했던 전적이 있었다.
방 왼쪽의 거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걷혔을 때, 낯익은 평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구두구두구.
뒤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도 익숙했다.
나는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는 말했다.
“어딘지 알겠지?”
“8층이군요.”
아론이 후방에 창을 겨누었다.
제나가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이올카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다.”
파업을 했다고 놀기만 한 게 아니다.
컨디션 조절을 병행하면서 실전 같은 훈련을 꾸준히 반복했다. 비록 레벨업은 하지 못했지만, 하루도 시간을 허투루 버린 적이 없었다.
“안다구요.”
이올카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곳에는 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고블린 라이더들이 있었다.
이올카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뒤집혀라!】
“키아앗?!”
고블린의 앞에 있던 땅거죽이 뒤집히더니 곧 솟아올랐다.
흙과 돌이 비산하며 선두를 달리던 고블린 라이더를 휩쓸었다. 단번에 대열이 흐트러졌다. 염동력을 응용한 기술이었다.
핑! 핑핑핑!
자세를 낮춘 제나가 속사포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겨 당기기까지의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기나긴 수련으로 완성한 궁수계 스킬, 속사의 효과였다.
목표는 이올카에게 석궁을 들이대는 고블린들.
화살은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고블린의 급소를 꿰뚫었다. 볼트를 쏘아내는 데 성공한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이올카는 아무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캐스팅을 이어갔다.
주문 시간은 불과 10여 초.
【발화하라!】
화르르륵!
이올카의 소매 끝으로부터 피어난 불길이 넓은 부채꼴로 퍼져나갔다.
화염은 고블린 라이더의 대열을 정면으로 덮쳤다.
불에 휩싸인 고블린이 늑대와 함께 뒹굴었다.
뒤에서 질주하던 늑대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몇 마리의 고블린과 늑대를 태워버린 이올카의 화염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일자 진형이 순식간에 붕괴됐다.
날카로운 송곳 같던 돌진력은 힘의 방향을 잃었다. 이제 저기에 있는 것은 고블린 라이더가 아닌 화염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일개 고블린과 늑대에 불과했다.
“마무리 단계군.”
나는 검을 한 바퀴 돌리고는 전선으로 파고들었다.
화염이 발밑으로 범위를 넓혔다. 상관하지 않는다. 폼으로 화염 저항을 익힌 게 아니다. 불길에 휩싸인 채 뒹구는 고블린과 늑대들을 한 마리씩 도륙했다. 몇몇 놈들이 반항했지만, 가볍게 짓밟았다. 아론도 뒷처리에 동참했다.
나는 바닥을 기어 도망치는 고블린의 뒤통수에 검을 꽂아 넣었다.
이놈이 마지막이다.
[스테이지 클리어!] [‘아론(★)’, ‘이올카(★★★)’ 레벨업!] [보상 – 3,000G, 늑대 가죽] [MVP – ‘이올카(★★★)’]전투 종료.
나는 검의 피를 털어내고는 칼집에 넣었다.
“……난 왜 불렀어?”
에디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말없이 웃고는 시공의 틈을 빠져나왔다.
저번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때는 고블린 라이더의 돌진을 몇 번이나 허용해야 했다.
제나의 사격 속도는 고블린의 석궁을 억제할 정도로 빠르지 못했고, 캐스팅 1분짜리의 화염 마법을 고집하던 이올카는 노림수가 되기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전투가 훨씬 유연해졌다. 결과적으로 27마리의 고블린 라이더는 단 한 번도 돌진을 완수하지 못한 채 전멸했다.
‘레벨만 올리면 되겠네.’
에디스는 아직 우리 파티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센스가 뛰어나다. 그렇기에 전투를 거듭하다 보면 알아서 자기의 역할을 찾을 것이다.
[로데리크, 어셔, 디카!]1파티가 대기실에 복귀하자마자 이셀이 2파티의 멤버를 불렀다.
로데리크를 선두로 두 명이 광장에 나왔다. 2파티의 레벨도 올리려는 듯했다. 에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2파티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에디스에게 물었다.
“두 탕 뛰려고?”
“두 탕은 무슨, 한 것도 없는데.”
에디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면서 무언가 속삭였다.
[‘에디스(★★★)’가 ‘2파티’에 합류를 원합니다.]곧 에디스의 소속이 2파티로 변경됐다.
당분간 그녀는 1파티와 2파티를 오가며 바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시공의 틈이 닫혔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겠죠? 마법을 쓰느라 힘이 쫙 빠졌다구요.”
이올카가 기지개를 뻗었다.
나는 제나와 아론을 보며 말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거냐?”
“훈련이죠. 곧 15층이잖아요.”
“당신들은 지치지도 않는군요.”
이올카는 한숨을 내쉬고는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올카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또 왜요?”
“안 끝났어.”
“달리게 하려는 거죠? 마법 쓰면 피곤하다니까요.”
“걱정 마라. 몸은 안 쓰게 할 거야.”
“안 믿어요. 한두 번 속는 줄 알아요?”
나는 앙탈을 부리는 이올카를 질질 끌어 훈련소에 데려갔다.
마법사가 대기실에 합류했을 때부터 시작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늦어도 한참이 늦었지.
“이셀.”
[무슨 일이야?]“연구를 해야겠다.”
[아하!]고개를 끄덕인 이셀이 사라졌다.
이어서 팁이 떠올랐다.
[마스터, 연구 가능한 인원이 있습니다.] [연구를 시작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연구로 얻는 성과는 원활한 대기실 운영의 기초가 됩니다!]암케나는 조작창을 띄우더니 연구 탭을 터치했다.
나는 이올카를 데리고 훈련소에 들어갔다.
마법 전당으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이올카를 데리고 전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등불이 마법 전당의 내부를 밝혔고, 정체 모를 향초와 고서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안으로 들어온 이올카는 의외였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이곳은 마법 전당이군요. 왜 절 여기로 데려왔죠?”
“말했잖냐. 몸 쓰는 거 안 시킨다고.”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닫았다. 안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네가 해야 할 건 연구다.”
“연구?”
“기다리고 있어 봐.”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연구의 테크트리를 알리는 정보창이 표시됐다.
[연구!] [현재 개발도는 위와 같습니다.] [ 1. 영웅 반응성 연구(Lv.0)] [ 2. 시설 확장성 연구(Lv.0)] [ 3. 던전 심화성 연구(Lv.0)] [Tips/인원을 연구소에 배치하면 연구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연구 포인트로 입맛에 맞게 대기실을 업그레이드시켜보세요!] [연구원 추천 리스트!] [‘이올카(★★★)’] [‘이올카(★★★)’를 연구원으로 임명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나는 책장에 있는 고서를 뒤적거렸다.
대기실에서 지내며 내가 타오니어의 언어도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이 책들의 내용은 여전히 의미불명이었다. 단지 마법진 같은 도형이나 수식은 알게 모르게 익숙했다. 아이템을 만드는 미니 게임에서 몇 번 본 기억이 난다.
멍하니 있던 이올카 옆에서 이셀이 나타났다.
이올카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갑자기 나타나지 마요! 깜짝 놀랐네.”
나는 책을 덮고는 다시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는 이올카 쪽을 바라보았다. 이올카는 전당 한쪽에 있는 책상에 엉거주춤 다가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파랗게 빛나는 잉크와 검은 깃털 펜, 이상한 기호가 잔뜩 그려진 서류가 놓여 있었다. 이올카는 서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마법 학교에서 배우던 수식인데…….”
[문제를 풀어서 통에 집어넣으라구.]이셀은 책상 옆에 놓인 새까만 원형 통을 가리켰다.
이올카는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요.”
[그건 연구를 위해서인데……. 아무튼 하라면 해! 혼나기 싫으면. 마스터가 명령한 거야.]“당신들은 또 그런 방식으로…….”
이올카는 투덜거리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펜에 잉크를 적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3분 뒤 종이에 풀이를 기입한 이올카가 책상 옆의 통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통에 들어간 종이는 파랗게 불타더니 사라졌다.
[연구 포인트 1 획득!] [현 연구 속도는 10/h입니다. 1시간당 10젬이 소모됩니다.]‘연구 효율이 좋지는 않군.’
픽 미 업에서는 연구에도 유료 재화인 젬을 사용한다.
1시간에 10포인트면 최하급이었다. 시설 레벨도 낮고, 이올카에게 연구 스킬이 없는 만큼 어쩔 수 없기는 했다.
[연구 시간을 설정합니다.] [하루에 3시간!] [Tips/연구 시간을 과하게 설정하면 연구원이 불만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일상이 있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이것만 풀면 되는군요.”
이올카가 마지막 문제를 통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올카의 표정은 다음 순간 굳어졌다. 책상에 문제가 기입된 서류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번보다 두꺼웠다. 이셀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었다.
[매일 3시간!]“3시간? 싫어요! 3시간이나 하라니. 이거 생각보다 머리 아파요. 쉬운 수식이 아니라구요!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올카(★★★)’가 불만을 표시합니다!]역시 이렇게 됐나.
예상했던 일이었다. 현재 이올카의 스케줄은 하드한 편이었다. 오전에는 체력 단련, 오후에는 염동력 위주의 마법 단련을 실시하고, 저녁에는 다시 진형 훈련이다. 휴식 시간을 군데군데 배치하기는 했지만,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여기에 3시간을 더 투자하라고 하면 반발하기 쉽다. 야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
하지만 훈련 시간을 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연구 시간을 빼는 것도 그렇다. 연구는 등반 속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올카가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도 말 좀 해봐요. 이렇게 되면 아침부터 밤까지 완전 노예인데.”
“…….”
나는 잠깐 고민했다.
시간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올카의 의욕을 유지하는 방법.
‘그게 있었군.’
속으로 작게 읊조렸다.
‘모피 코트.’
[‘한(★★)’이 ‘모피 코트’를 원합니다. 선물하시겠습니까?] [3,000골드가 소모됩니다.] [Yes(선택) / No]하얀 밍크털로 뒤덮인 코트가 생겨났다.
선물 상점에서 제공하는 의류 중 하나였다.
이올카가 코트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갖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피식 웃었다.
제나에게서 이올카가 따뜻한 옷을 갖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기실이 춥다나 뭐라나. 나는 코트를 휙 던졌다. 이올카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코트를 받아들었다.
“선불이다. 일을 제대로 마치면 더 주지.”
이올카는 모피 코트에 뺨을 정신없이 비볐다.
그러더니 별안간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제 마음을 돌리려 하다니. 이 무슨 파렴치한!”
“싫으면 내놔.”
나는 코트를 붙잡고, 당겼다.
이올카는 꾹 잡은 채 놓지 않았다.
“누가 싫대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이올카는 의자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나갔다.
암케나는 연구를 지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작을 이어가고 있었다.
2파티가 복귀한 다음 3파티를 새로 만들었다.
소환한 지 얼마 안 된 유망주들로 구성한 신규 파티였다. 얼마 뒤, 이셀이 3파티의 구성원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들 중에서 두각을 보이는 인원은 1파티나 2파티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어서 채집 멤버들을 요일 던전에 보냈고, 장비 제작소의 일원들에게 무기 제작을 명령했다. 나름대로 활발한 움직임이었다.
‘나쁘지 않네.’
마스터는 분명 달라졌다.
지금 하는 일들은 기초에 불과했지만, 그렇기에 중요했다. 그 전의 암케나는 이런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암케나의 조작을 감상하는데, 이올카가 툭 말을 걸어왔다.
“마법 배울 생각 없어요?”
뜬금없는 말이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이올카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문제를 풀어나가는 중이었다.
“제가 화염 마법밖에 못 써도 이론은 빠삭하거든요. 제가 보기엔 당신은 꽤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어때요?”
“마법을 배우라고?”
“저 혼자면 힘들겠지만, 여기 도서관엔 가치 있는 책이 엄청 많더군요. 기초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거예요.”
나는 이미 무기술을 6단계까지 올린 상태다.
‘마검사가 되라는 건가.’
2성인 내 직업은 현재 초보자.
3성부터 직업을 결정할 수 있다. 검과 방패 위주인 나는 이대로 가면 전사가 되겠지만, 몇몇 조건을 충족하면 히든 클래스로 가는 길이 열린다. 그중 하나가 마검사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양이다.”
“왜요? 배우면 좋은데.”
“성장이 꼬이거든.”
숨겨진 직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강한 게 아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정석 직업보다 강하지만 약한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마검사의 경우에는 힘과 체력 위주로 배분된 전사형 스탯에 지능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스펙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맘 바뀌면 언제든 말해요.”
“혼자 문제 풀기 싫어서 그렇지?”
“무, 무슨 망발을!”
정답인가.
나는 픽 웃었다.
‘연구원 육성.’
15층을 클리어하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이올카에게 맡겨볼 생각이었다.
연구원은 마법사 계통이지만 전투가 아닌 연구만을 담당하는 보조직이었다. 일반 보조직보다 익히는 난이도가 훨씬 높지만, 수십 명 중 한 명은 걸릴 것이다. 언제까지 이올카를 이곳에 붙잡아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올카가 문제를 푸는 것을 지켜봤다.
이올카는 문제를 푸는 도중 자신의 신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문은 원래 제국에 이름을 떨치던 명가였는데, 정쟁에 밀려 몰락 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그 가문을 부흥시킬 의무가 있다고 한다.
‘물어보지는 않았다만.’
“당신은 여기에 오기 전 어떻게 지냈죠?”
“나? 농부였지.”
“거짓말. 그걸 누가 믿어요.”
“……문제나 풀어.”
나는 책장의 고서를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3시간이 지나자 이올카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당의 시계는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스터는 아직 접속을 종료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연구 포인트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시간의 연구로 얻어진 연구 포인트는 총 30이다. 30포인트면 첫 번째 연구를 완료할 수 있었다.
‘때가 왔군.’
연구의 테크트리는 세 가지로 나뉜다.
임무와 명령에 대한 영웅의 반응도를 향상시키는 ‘영웅 반응성 연구’.
시설의 세부 탭을 개방하고, 좀 더 직접적인 운영을 가능케 하는 ‘시설 확장성 연구’.
특수 목적 던전의 종류를 늘려주고, 원활한 재료 수급을 도와주는 ‘던전 심화성 연구’.
각각 영웅(人), 시설(內), 던전(外)을 담당한다.
이 중에서 암케나가 개방한 첫 번째 연구는,
[띠링!] [연구, ‘영웅 반응성’이 Lv.1이 되었습니다.]영웅 반응성 연구였다.
나는 이 연구의 효과에 대해 예상한 점이 있었다.
[대기실에 여신의 축복이 내립니다!]파지지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무리가 하늘 위에서 번쩍였다.
빛무리는 수십 줄기의 광선이 되어 대기실 아래로 쏘아져 내려왔다.
그중 한 줄기 광선이 전당에 있던 이올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어?”
의자에서 일어나던 이올카가 휘청거렸다.
이올카는 의자의 바닥을 짚고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이상한…….”
마법 전당의 문을 열었다.
훈련소에 있던 제나와 아론도 사정은 비슷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쓰러져 있었다.
안색을 살펴봤지만,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
일시적인 어지러움증 비슷한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올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뭔가요, 이건? 기분 무지 나쁜데.”
“말했잖아. 연구한다고.”
“연구요? 대체 뭘 연구한다는 거죠?”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말했다.
“스탯창이라고 말해봐라.”
“스탯창? 으갹!”
이올카가 뒤로 자빠졌다.
눈에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보이나 보군.’
나는 웃었다.
“스탯창이지. 네 능력치를 수치로 보여주는 거야.”
여태껏 스탯창이나 임무 내용 같은 시스템 메시지는 나만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 달라지게 될 것이다. 3파티가 아무것도 못하고 죽은 이유 중 하나는 정확한 임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볼 수 없었다. 임무의 성공과 실패 조건을 몰랐던 것이다. 영웅 반응성 연구는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었다.
“힘, 지능, 체력, 민첩. 그리고 스킬. 보이나?”
“중급 화염 마법…… 염동력……?”
“그게 스킬이다.”
이올카의 가슴에 스며든 빛은 한 줄기가 아니었다.
대기실에 있는 모든 영웅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와. 다른 애들한테도 말해줘야 할 거 같으니까.”
나는 이올카를 데리고 훈련소로 나갔다.
아론이 훈련소를 방방 뛰고 있었다.
“귀신이다아아!”
“……뭐하냐?”
“혀, 형님. 이상한 글자 귀신이 절 계속 쫓아옵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나가 아론을 붙잡았다.
“허둥대지 마. 귀신이고 뭐고 아니니까. 설명해주마.”
“이, 이건 대체 뭡니까?”
반면 제나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도리어 즐기는 기색이었다.
“아하, 이게 이렇게 된 거였군요. 오빠는 이런 걸 보고 있었군요. 이얍!”
제나는 나를 가리키더니 외쳤다.
“떠올라라, 스탯창!”
“…….”
“어라? 왜 안 나타나지. 내 건 잘 보였는데.”
“어디서 배웠어?”
“오빠가 가끔 중얼거리는 걸 들었거든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길래 따라 했더니, 재밌는 게 떠오르지 뭐예요? 이 글자들, 오빠가 보고 있던 거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이상. 설명은 끝이다.”
나는 물을 들이켰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칼칼했다.
세 명은 의문이 남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완벽히 알아듣지는 못한 모양이다. 제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레벨과 스탯, 스킬이란 게 있고, 이거 덕분에 우리가 빨리 강해질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스탯창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글자는 너희 스펙이지. 그걸 보고 자신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는 거야.”
“싸우고 나서 갑자기 강해진 기분이 들 때가 있었는데, 레벨업을 해서 그런 거였네요.”
“믿기지 않는군요. 어떤 대마도사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할 텐데.”
이올카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벨과 스탯, 스킬 그리고 상태창.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몬스터 사냥으로 경험치를 얻고, 훈련으로 스킬을 터득해서 성장한다. 게임 속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후련한 마음은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어려워 미뤄두고 있었지만, 이제 이 녀석들에게도 스펙이 보인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알아야 했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그게 앞으로 너희의 지침이 될 거다.”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생각 이상으로 성장에 도움이 된다. 만약, 내게 상태창이 보이지 않았다면 훨씬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나는 물을 끝까지 마시고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희가 설명해줘.”
“당신은 이런 걸 어디서 안 거죠? 저희는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기인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됐지.”
“어쩌다 보니라구요? 그 무슨 수상한…….”
“아하하, 언니! 오빠는 여기에 가장 처음부터 있었거든요.”
“그렇게 된 거야. 경력이 길거든.”
“수상하군요…….”
이올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뭐, 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누구라도 비밀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당신이 해준 조언이 도움되는 건 사실이고.”
“그렇죠, 그렇죠. 엄청 도움되죠. 뼈와 살이 되죠.”
“당신은 아부 솜씨가 대단하네요.”
“아부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구요.”
제나는 나와 어떻게 만났고, 내가 어떤 식으로 난관을 돌파해왔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화제가 넘어간 것이다. 이윽고 아론이 거기에 어울렸다. 이올카는 내게 시선을 돌리면서도 대화에 경청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저들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모든 것을 말해줄 생각이다.
물론, 그때는 헤어질 때가 되겠지만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제나가 모두를 끌어모은 다음 상태창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빠르게 납득한 부류는 주로 전투직이었다. 무언가의 힘에 의해 자신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아직은 자기 자신의 상태창 밖에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영웅의 상태창이나 시스템 메시지는 볼 수 없었고, 내가 보는 것들의 아주 일부분만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연구 레벨이 낮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특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날의 저녁 훈련.
“지금껏 저희가 했던 훈련들이, 체질을 개선하고 스킬을 얻기 위한 거라 이거죠?”
“그렇지.”
쏘아진 세 발의 화살을 떨어뜨린다.
저 멀리서 제나가 시위를 당겼다. 한 동작에 한 발씩. 속사를 익힌 이후 사격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나는 화살을 막고 쳐내며 제나에게 달려갔다.
캉!
쇠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순식간에 단검을 뽑아든 제나가 검날을 막은 것이다.
“역시 그런 거였네요. 뭔가 이상하더라니.”
검날과 검날이 맞부딪힌다.
제나는 유연하게 움직이며 단검을 휘둘렀지만 틈이 보인다. 제나의 동작이 이어지는 찰나에 검을 찔렀다.
“어맛!”
제나가 황급히 단검을 회수하고는 공중제비를 뛰며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사격.
무기의 전환이 물샐 틈 없이 매끄럽다. 스위칭의 효과였다.
“가벼워.”
검의 궤적에 걸린 화살이 부나방처럼 떨어졌다.
방패를 쓸 필요도 없었다. 쏘는 순간 어디로 날아올지 알 수 있다. 한 발짝의 스텝으로 세 발의 화살을 피한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두 개의 화살을 꺾었다.
“이런…….”
어느새 제나의 화살통이 텅 비었다.
나는 화살이 가득 담긴 새 화살통을 던져주었다.
제나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훈련장 바닥에는 부러진 화살의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것도 스킬이에요? 다 막아버리는 거요.”
“그래.”
“사기잖아요. 전혀 안 통하는데.”
“막는 스킬이 있다면, 뚫는 스킬도 있지 않겠냐?”
제나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나는 제나에게 달려들었다. 노리는 것은 사슴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목. 붉은 피가 뿜어지기 직전, 제나의 고개가 숙여졌다. 검날이 제나의 머리카락을 얕게 자르고 지나갔다.
“지, 진짜 저 죽이시려고!”
“그것도 좋겠는데.”
“히익!”
몇 번의 참격이 제나의 전신을 가르고 지나갔지만, 아직까지 대련을 중단할 만한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목을 그어도 된다.
배가 찢어져도 된다.
어떤 치명상이라도 좋다.
일격에 즉사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예전에는 멀리서 제나가 화살을 쏘고, 내가 가만히 서서 막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 정도 훈련으로는 성이 안 차는 단계까지 왔다. 스킬 레벨업을 위해서는 더욱 가혹한 조건이 필요했다.
실전용 무기, 규칙 없음.
상대가 죽기 직전까지.
파업 이후, 실전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좀 더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 고안한 대련 방식이다. 제대로 된 전투를 거치지 못한 놈들은 이런 우리를 보며 미쳤다고 쑥덕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결과가 알려줄 것이다.
훈련장에는 구경꾼들이 둥글게 서서 우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 구경거리인가.’
순간 짜증이 났지만, 신경 쓸 가치도 없다.
무시하고 대련을 이어갔다.
핑! 피핑!
피하고 쳐낸다.
화살이든 단검이든. 자연스레 취해야 할 행동이 그려졌다. 의도하지 않아도 검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이미 내 무기술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무의식의 경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제나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검격을 하나하나 피했지만, 상처가 늘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틈을 봐서 화살을 쏘면 막힌다. 단검으로는 장검의 리치를 이길 수 없다.
뒤로 길게 뛰어 물러난 제나가 혀를 찼다.
“아니, 뭐 이래요!”
19전 18승.
나와 제나의 대련 성적이다.
물론 18승은 나였다. 내가 진 1번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 벌어진 사고에 가까웠다. 상성이 너무 불리했다.
“항복할 거냐? 아론이 기다리는데.”
“아, 아니, 전 괜찮습니다…….”
아론이 손사래를 쳤다.
덧붙여 저 녀석의 성적은 32전 32패다.
10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두 명을 한꺼번에 끼워 넣어야 하나.’
내 느낌상 6레벨인 하급 검방술과 2레벨인 투척 방어 스킬의 레벨이 올라갈 때가 되었다. 계기만 생긴다면 곧 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킬에 대해 고민할 즈음, 제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만 더 해볼게요.”
“그럼 간다.”
나는 검을 곧추세운 다음 뛰었다.
그 순간.
[띠링!] [‘제나(★)’가 ‘약점 포착’을 습득했습니다!]제나의 눈에 붉은 십자 형태의 빛이 번뜩였다.
핑! 핑핑!
시간차를 두고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투척 방어의 효과로 궤적과 속도, 도달점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
세 발의 화살은 정교하게 이어지며 틈을 노리고 있다.
내가 화살을 대처하는 방식은 피하거나 막는 것. 그걸로 두 번째 화살까지는 무력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화살이 대처할 수 없는 부분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캉!
나는 세 번째 화살을 방패로 튕겼다.
제나와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쓰는 방패였다.
“아이!”
제나가 아쉬운 듯이 탄성을 질렀다.
나는 검을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이건 어디서 배웠지?”
“방금 생각했어요. 막는 스킬이 있으면 뚫는 스킬도 있다고 하길래, 뚫어보려고…….”
본래는 대련이 끝난 다음 힌트를 주려 했었다.
제나가 지금의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은 두 가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쏘거나, 막기 힘든 곳으로 쏘면 된다. 첫 번째는 강궁이란 스킬, 두 번째는 제나가 방금 얻은 약점 포착이다.
‘재밌군.’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을 뿐인데, 스킬을 얻었다 이건가. 더욱이 약점 포착은 속사와 시너지가 상당한 스킬 중 하나였다.
아론을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검을 늘어뜨렸다.
“다시 간다.”
“쉽지는 않을걸요.”
마구잡이로 쏘아지던 화살에 규칙이 갖춰졌다.
첫 번째 화살로 행동을 강제한 후, 두 번째나 세 번째 화살로 급소를 노린다. 아니면 이와 반대로 페이크를 섞기도 한다. 대처하기가 몇 배는 까다로워졌다.
화살에 허실(虛實)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나(★)’의 ‘하급 궁술’이 Lv.6으로 상승했습니다!]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온다.
이전의 나라면 한꺼번에 쳐내고 거리를 좁혔겠지만, 제나와 나의 간격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방패는 비상시가 아닌 한 사용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스킬을 얻기 위한 훈련이었다.
단순히 궤적을 보는 것을 넘어야 한다.
화살에 담긴 뜻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시간이 느려졌다.
화살 끄트머리에 달린, 하얀 실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스킬 각성!] [따란!] [‘한(★★)’의 ‘투척 방어’가 Lv.3으로 상승했습니다!] [‘한(★★)’의 ‘하급 검방술’이 Lv.7으로 상승했습니다!] [‘한(★★)’이 ‘통찰력’을 습득했습니다!]캉캉캉캉!
나는 화살을 남김없이 쳐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제나의 목에 검날을 들이댔다.
“이걸로 내가 19승인가?”
“괴, 괴물…….”
구경꾼의 무리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시선을 돌리자 그들은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통찰력.
환영을 구분하게 해주고, 시력도 약간은 강화해준다. 또한, 무기술에도 보정을 붙여주는 다재다능한 스킬이었다. 거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효과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스킬이 몇 개지.’
상태창을 띄웠다.
[한 이스라트(★★) Lv. 11(Exp 53/11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27/27] [지능 : 10/10] [체력 : 25/25] [민첩 : 25/25] [보유 스킬 : 하급 검방술(Lv.7), 투척 방어(Lv.3), 통찰력(Lv.1), 화염 저항(Lv.2) 고통 내성(Lv.3), 침착성(Lv.3), 광폭성(Lv.1), 기마술(Lv.1)]‘좀 많군.’
하급 검방술, 투척 방어, 통찰력, 화염 저항, 고통 내성, 침착성, 광폭성, 기마술까지 도합 8개. 2성 11레벨이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스킬이다.
마침 제나와 아론이 스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론 오빠, 스킬 몇 개예요?”
“나 말이오? 음. 하급 창술에 고통 내성. 화염 저항. 이렇게 세 가지 있군. 제나 양은?”
“하급 궁술, 하급 단검술, 스위칭, 속사, 약점 포착, 매의 눈, 재빠른 몸놀림…… 또 뭐가 있더라.”
“그만하면 됐소.”
아론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끼어들었다.
“스킬이 많다고 강한 건 아니지.”
스킬의 강함은 가짓수보다는 레벨과 시너지로 결정된다.
상극의 스킬을 지닌 경우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진 광폭성과 침착성. 이건 좀 특이한 케이스가 되어버렸지만.
‘강한 편은 맞다만.’
재빠른 몸놀림에 숲의 사냥꾼, 화염 저항까지.
제나의 스킬은 도합 9개였다.
어쨌든, 이어지는 훈련 속에서도 암케나는 착실히 대기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셀이 던전에 나갈 멤버를 부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장비 제작소는 밤낮을 모르고 가동됐고, 틈틈이 1성 소환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내가 보낸 문서를 제대로 읽는다면 운영법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15층이 바로 앞이지만 당분간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파업 이후, 몇 번 던전을 다녀왔지만 모두 10층 이하였다.
어느 정도 성장이 끝나지 않는 한, 15층은 보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나도 5층과 10층에서의 고생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최적의 상태가 되었을 때 출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10할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아론은 긴장한 표정으로 창을 그러쥐고 대련장으로 나왔다.
나는 검을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