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38
37. All or Nothing
* * *
픽 미 업은 10층씩 오를 때마다 많은 컨텐츠가 개방된다.
기본적으로 탐험 던전의 새로운 구역이 열리며, 시설의 제한이 해제되고, 영웅의 레벨 한계가 늘어난다. 여기에 몇 가지 기능이 추가되는 방식이었다.
[※추가 컨텐츠 안내] [마스터, 30층을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어엿한 한 명의 마스터가 되셨습니다. 이제 마스터를 초보라고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앞으로도 분발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신규 요일 던전이 개방되었습니다.] [세 번째 탐험 던전, ‘카이아’가 개방되었습니다.] [추가 시설이 개방되었습니다. 도움말을 살펴주세요.] [대기실’ 타오니어’의 섹터가 변경됩니다.] [소속 섹터 : 95513 -> 88347] [현 좌표 – 188.347.447.935] [8등급 섹터부터 ‘유적’이 출현합니다!] [Tips/유적에서는 쥬얼과 각종 희귀 아이템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쥬얼은 일정량의 젬으로 환전이 가능합니다.]10층마다 마스터의 구역, 즉 섹터가 바뀐다.
같은 구역에서 저 레벨과 고 레벨이 마주치지 않게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방식이었다.
물론 구역을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컨텐츠도 생긴다. 30층 같은 경우는 유적, 비공정에 파티를 실어 탐사를 보내면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비공정이 있다면 말이지만.’
있을 리 없다.
만들기도 힘들 테고.
수많은 재료, 높은 연구 레벨과 비공정 기술자, 막대한 필요 자금과 제작 기간은 덤일 뿐더러, 이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마학자 클래스의 4성 영웅이 필요하다. 초보 티를 갓 벗은 암케나로서는 아직 비공정은 넘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차원의 틈을 개방하기 전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쉽군.
비공정이 있다면 임무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고, 유적에서 젬을 보급할 수도 있다.
다른 마스터와의 원활한 교류도 가능했다. 갖기 전과 후의 플레이가 다른 게임처럼 달라지는 것이다.
[픽 미 업!] [차원 카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어서 암케나는 화면 오른쪽에서 차원 카페에 들어갔다.
■거래 게시판
■게시글 9483125
[비공정 렌탈 전문점!] [당신, 설마…… 비없찐?] [벗어나고 싶다고요? 대형, 중형, 소형 비공정까지 전문적으로 대여해드립니다! 자세한 문의는 연락 주세요. 카톡 아이디는…….]암케나는 차원 카페에 들어가더니 비공정 렌탈에 대한 글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맞는 조건이 있을 리 없다. 대여료가 지나치게 비싸고, 파손 시 모든 손해를 메워야 한다. 또한, 보증이 없으면 빌려주지 않는다. 마학자가 없다면 더욱 부담은 심해진다.
결국 암케나는 창을 닫았다.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하늘이 어두워졌다.
“선배, 뭘 그리 보시오?”
나는 뒤를 보았다.
벨키스트가 이마의 땀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기껏 어울려주나 했더니 벽만 보고 있군.”
벨키스트는 다 쓴 수건을 바구니에 휙 던졌다.
훈련소에는 나와 벨키스트, 둘뿐. 30층을 클리어한 뒤 우리는 약간의 휴식기를 갖고 있었다. 벨키스트 같은 연습광을 제외한 영웅들은 오늘 훈련소에 출근하지 않았다.
‘비공정이라.’
있으면 좋지.
하지만 없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탑을 등반하다 보면 자연히 얻게 될 테니까.
“갈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칼집에 손을 가져가자, 벨키스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마스터, 미확인 채널 채팅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 / No] [Tips/채널이란?] [같은 섹터에 위치한 마스터끼리는 채널을 통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확인하지 않고 나간 듯하다.
암케나는 채널 채팅은 물론, 모든 메시지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너무 그럴 것도 없지.’
나는 발을 멈췄다.
응답을 요구하는 선택지가 파랗게 점멸하고 있었다.
“이러다 날 새겠소.”
“간다, 가. 보채지 마라.”
나는 한숨을 쉬고는 대련장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방에 이셀을 호출했다.
[무슨 일이야?]이셀은 잠옷을 입고 고깔모자를 쓴 채로 왔다.
품에는 ‘Ragnaroki’라 써진 긴 베개를 안고 있었다.
‘…….’
어쨌든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이셀, 마스터 권한을 임시적으로 받고 싶다.”
[음? 권한이라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놈한테 온 채팅 확인을 좀 하려고.”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안 되었다면 내가 아이템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알았어, 로키의 부탁이라면!]이셀이 몸을 한 바퀴 돌리자 잠옷과 모자가 사라졌다.
원래의 복장으로 돌아온 이셀이 기를 모았다.
[하아앗! 요정 파워!]번쩍!
이셀의 손에서 뿜어진 빛이 내게 스며들었다.
인증 완료. 합성이나 소환 등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스터, 미확인 채널 채팅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Yes’를 터치하자 채팅 화면이 떠올랐다.
[88-347 채널]시느느> 안녕하세요~
시느느> 새로 오셨군여~ 방가워용~
시느느> 여기 혼자 있어서 심심했는데! 잘 됐네여.
시느느> 계신가요? 암케나님?
나는 손을 펼쳤다.
화면에 가상 자판이 떠올랐다.
암케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느느> (입력하는 중입니다)
지금 접속중인 것 같다.
채널 채팅이 된다는 것은, 이 녀석은 암케나와 같은 섹터에 위치한 이웃이라는 의미였다.
시느느> 방가워용~ 제가 여기 죽돌이라 그런데. 방금 오셨져? 다 봤어용 *^^*
암케나> 네.
“이셀, 지금 섹터의 지도를.”
[아라써!]시야 좌측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8등급 섹터(88347)]중앙의 작은 탑을 기점으로 바둑판 형식의 지도가 펼쳐져 있다.
왼손으로 화면 끝을 슬라이드하자 회색으로 덧칠된 또다른 탑이 나타났다. 다른 마스터의 대기실이었다.
‘회색.’
의미는 간단하다.
장기 미접속자.
한 마디로 접었다는 것이다.
‘한 섹터에 배정된 마스터는 100명.’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둘러봐도 전부 회색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느느> 여기 저밖에 사람이 없어서, 되게 외로워여.
시느느> 암케나님은 안 접으셨음 좋겠는데. 도움을 좀 드리고 싶어서 얘기해봤어여.
시느느> 제가 파밍을 많이 해서 남는 재료가 꽤 있거덩여.
어이쿠.
바로 본론으로 왔다.
시느느> 좌표를 좀 알고 싶은데 알려주실래여? 바로 쏴드릴게여.
시느느> 메뉴 오른쪽에 눌러보시면 확인하는 거 있어요. 그거 알려주시면 돼요.
암케나> 잠시만요.
나는 의자의 바퀴를 돌렸다.
이셀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엇다.
[이 녀석은…….]“딱 보면 알지.”
나는 중얼거렸다.
“사냥꾼이군.”
다른 말로는 호구 헌터라고 한다.
이렇게 도와주는 척, 좌표를 알아챈 다음 싸그리 털어 재낀다.
게임을 많이 접하지 않은 유형들은 의외로 쉽게 걸린다.
‘근처에 회색 계정이 많다는 것은.’
이미 뽑아먹을 대로 뽑아먹은 것 같다.
친절해 보이는 말투였지만, 당연히 연극이다.
[저런 놈은 무시해! 답할 가치도 없다구. 우리 할 대로 하면 돼.]이셀은 콧김을 내뿜고는 고개를 돌렸다.
“…….”
섹터의 지도를 재차 살폈다.
접은 유저의 비율이 상당하다. 회색이 아닌 계정도 있지만, 색깔이 흐려져 있다.
접속이 드문드문한 마스터.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을 부르는 용어가 있다.
‘배드 섹터인가.’
물론, 진짜로 다른 유저를 도와주려고 하는 친절한 마스터도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섹터로 배정된다면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할 수 있다. 여기는 아닌 거 같지만 말이다.
시느느> 저기여?
시느느> 답변 좀 ^^:
암케나> 잠시만요.
[왜 상대해줘? 알려주기라도 하게?]“기다려봐. 생각 중이야.”
나는 PVP에 대한 룰을 되짚었다.
차원 좌표를 알게 된다면 비공정에 의한 침략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보호받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결국은 뚫린다.
‘흠.’
나는 서랍에서 파일을 꺼냈다.
내가 픽 미 업의 PVP 유저, 사냥꾼과 그 방식에 대해 기록한 자료가 들었다.
’30층대에서 사냥을 한다.’
드문 부류였다.
일단 30층대에서는 비공정을 구하기 쉽지 않다. 있다면 세 가지 중 하나. 운이 오지게 좋거나, 과금을 퍼부었거나, 든든한 고렙 빽이 있거나.
‘어느 쪽이든 성가시게 됐군.’
시느느> 자꾸 무시하시면 곤란한데요…….
시느느> 제가 진짜 뵙고 싶거든요. 안 알려주셔두 곧 찾을 수 있을듯 ^^;
이 새끼.
노골적이다.
암케나> 죄송해요.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시느느> 걱정도 ㅋㅋ 많으셬 ㅋㅋ.
암케나> 저도 비공정을 갖고 싶은데, 어떡하면 될까요?
시느느> 설계도부터 좀 빡세죠? 제가 몇 장 있는데. 보내드릴까여?
[로키, 설마……?]“이 채팅이 끝나면 로그는 삭제해줘.”
[자, 잠깐만, 마스터가 있을 때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은 마스터두 없는데……!]“없는 게 나아.”
나는 왼손의 검지를 보았다.
‘어차피 온다면.’
임무 중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지금 당장이 낫다.
엔터를 눌렀다.
암케나> 좌표를 봤는데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시느느> 뒤에 여섯 자리만 알려주심 댑니당~
암케나> 아. 447.935라고 써져 있네요.
시느느> 그럼 암케나님의 좌표는 188.347.447.935인 거네요!
시느느> 설계도 갖고 싶다고 하셨져. 소형 3장 정도 보내드릴게여. 기본 재료품도 같이요.
암케나> 감사합니다!
시느느> 이따 뵐게여~
[마스터 ‘시느느’님이 채팅을 종료하셨습니다.]나는 상단의 ‘X’를 눌렀다.
채널 채팅창이 닫혔다. 이셀이 어벙벙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괜찮아.”
마스터가 부재중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는 영웅이 자동적으로 방어를 한다. 의심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 생각나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픽 미 업에서 착실히 임무를 진행하다가, 중간에서 좌절한 마스터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아예 등반을 포기한 채 심시티를 즐기는 유저들. 둘째가 아예 PVP 쪽으로 나가버리는 전문 사냥꾼들이다.
한번 시작한 놈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대처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43분.
‘여유는 한 시간 정도.’
“이셀, 맡기겠다.”
[하지만…….]“걱정 마라.”
철컥.
나는 칼집을 벨트에 걸었다.
“난 개싸움에선 진 적이 없거든.”
문을 열고 나갔다.
1파티 숙소의 응접실은 비어 있다.
랜턴의 불을 켠 다음, 테이블에 울려진 종을 올렸다.
비상시를 대비해 만든 호출용 벨이었다.
“뭐예요? 왜 갑자기…….”
복도 문이 열리더니, 제나가 걸어 나왔다.
그 옆에서 네리사와 이올카도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놈들이 온다. 준비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당신? 뭐 잘못 먹었어요?”
“……침공입니까.”
네리사의 눈이 가라앉았다.
“눈치 빨라서 좋네. 앞으로 할 일도 알겠지?”
“모든 파티의 리더를 호출하겠습니다.”
“제나는 보조직 애들한테 말해. 숙소에 처박혀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아, 알았어요!”
네리사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제나도 허둥거리면서 뒤를 따라갔다. 이올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죠?”
“예전에 한번 말했잖냐. 다른 대기실의 놈들이 올 수도 있다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란 거예요?”
“맞아.”
이올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쉴 틈이 없군요.”
“원래 이런 거야.”
“만약 저희가 진다면…….”
“안 져.”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마스터의 미접속을 알리듯.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비공정을 갖고 싶나?’
비공정은 수많은 시간과 기술, 자금이 필요한 상위 아이템이다.
그러나 이를 얻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하나 장만해주지.’
깔쌈한 걸로.
나는 웃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잠시 후.
각 파티의 리더가 로비에 모였다.
먼저 입술을 씰룩이고 있던 라이만이 말했다.
“다른 대기실의 놈들이 온다는 게 정말이오?”
“확인했다.”
“믿을 수 없군…….”
에디스가 입을 열었다.
“한, 우리를 부른 건…… 생각이 있어서겠지?”
“할 일은 정해져 있어.”
나는 테이블 위의 물은 들이켠 다음 말했다.
“역으로 털어주면 돼.”
“전쟁이냐?”
키샤샤가 히죽 웃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대처는 1파티한테 맡겨라. 너희는 준비하고 있다가,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신호하면 도와줘.”
“다섯 명이서 충분하겠소?”
“봐야 알겠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필요는 없다.
놈들의 목적이 약탈이라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회의는 금방 끝났다.
별다른 내용은 없다. 보조직 및 채집직 영웅은 숙소로 피신한다.
1파티를 제외한 전투직은 장비 제작소에서 대기한다.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
광장으로 나왔다.
유리 바닥 너머로 아래층이 보였다.
장비 제작소의 인원이 허둥지둥 숙소로 들어가고 있다.
“심심했는데 잘 됐군.”
벨키스트가 칼집을 어루만졌다.
무뚝뚝한 얼굴에는 이미 살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함부로 쓰지 마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쓴단 말이오?”
“죽이면 안 되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죽이는 것은 차선이다.
40층 이전까지는 영웅 보호 시스템이 적용된다. PVP 도중 영웅이 사망해도 일정량의 패널티를 입을 뿐,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벨키스트를 비롯한 1파티의 인원이 모여 있다.
이미 지시 전달은 끝났다. 각자의 눈빛에 전의가 서려 있었다.
“너무 쫄지 말고. 임무와 다를 거 없으니까.”
“쫀다뇨. 별별 일을 다 했는데, 이 정도야!”
“그럼 시작해.”
힘차게 경례한 제나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올카도 궁시렁대면서 따라갔고, 네리사와 벨키스트도 뒤를 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아래층으로 향한 것이다.
‘한꺼번에 나설 필요는 없다.’
자칫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하면 큰 손해로 이어진다.
죽음의 패널티는 모든 스탯과 스킬의 영구적인 하락. 한순간에 유망주를 폐기물로 만드는, 사망에 준하는 리스크였다.
‘혼자면 충분해.’
긴급 상황을 대비한 보험도 들어놓았다.
나머지는 기다리는 것뿐. 나는 가죽 장갑을 손에 끼우고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목적지는 2층에 있는 차원의 틈. 놈들이 진입할 장소다.
차원의 틈 곳곳에는 짙은 그늘이 끼어 있다.
나는 그림자의 한쪽에 숨어서 몸을 낮추었다.
5분 뒤.
[Danger!] [마스터, 허락받지 않은 비공정이 대기실에 침입했습니다!]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가 기항합니다.]기이잉!
차원의 소용돌이가 파랗게 빛나더니, 비공정의 앞부분이 나타났다.
[경보 시설이 없습니다.] [마스터의 영웅은 침입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기습을 당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하세요!]규모는 크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10m 이상, 중형 상선을 방불케 하는 크기였다. 비공정은 돛대에 깃발을 두른 채 천천히 소용돌이를 빠져나왔다. 붉은 깃발에는 안대를 두른 해골이 그려져 있다.
“아무도 없는디요?”
“크하하, 이번에도 호구 새끼가 걸렸나? 연기를 할 필요도 없겠구만!”
비공정으로부터 호탕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철컥. 기릭기릭. 목재 계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흠.’
나는 칼집에 손을 올린 채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계단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내려오고 있다. 붉은 가죽 갑옷을 입었으며, 칼을 비롯한 각종 무기를 등에 찼다.
“환영이 없구먼! 시시하게스리.”
“제 경험에 따르면, 창고는 1층에 있는 것 같은디요!”
키 작은 남자가 비공정 하단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수레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궤짝으루다가 가져와. 금화 가득히.”
“그러믄요.”
놈은 수레를 꺼내더니 셋밖에 없는 앞니를 드러냈다.
“목격자는 알지?”
“예, 반쯤 죽여서 데려와라 이 말씀이시죠?”
“그려. 데려가서 합성해야지.”
“만약 그 새끼들이 덤벼들면…….”
“일단 잽싸게 튀고, 다시 와야지.”
‘역시.’
놈들은 전면전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바라는 것은 창고를 노린 약탈.
다섯 명 중 네 명이 수레를 끌고 나갔다.
놈들은 1층의 창고로 내려가 골드와 귀중한 재료를 한가득 실은 다음 복귀할 계획이다. 혹여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즉각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기절시키거나 반쯤 죽인 뒤 납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낌새가 안 좋아지면 바로 튄다.
히트 앤 런. 꽤나 치사한 방식이었다. 영웅에게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 시설이 없다면, 마스터는 발을 동동 구르고 보는 수밖에 없다.
“하아암~”
녀석이 비공정에 등을 기댄 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위기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몸을 숨긴 채 비공정 근처로 간 뒤,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졸려서 뒈지…… 응?”
놈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시, 시발! 비공정 바로…….”
나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은 뒤 끌어당겨 얼굴에 무릎을 박았다.
이빨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이어서 비공정의 벽면에 얼굴을 처박았다. 퍽! 퍽! 퍽! 우둑! 팔을 부러뜨린 다음 걷어찼다. 피를 뿌리면서 놈의 신형이 바닥을 미끄러졌다.
기이잉.
비공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접혀져 올라가는 계단의 끝을 붙잡고 상승했다.
손을 놓으며 크게 도약했다. 갑판에 올라섰다. 즉각 조종실로 달려갔다.
쾅!
문을 걷어차자, 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뭐가 그리 바쁘냐?”
“이, 이런 미친……!”
놈이 칼을 뽑아 휘둘렀다.
슥슥. 나는 가볍게 피하고는 놈의 손목을 붙잡은 뒤 반대로 꺾었다. 으직.
“끄아아악!”
놈이 덜렁거리는 손목을 잡은 채 주저앉았다.
나는 사커킥을 하듯 놈의 안면을 세게 걷어찼다. 피가 유리창에 튀었다.
“꺼, 어, 어헉!”
“들어온 새끼는 일곱 마리가 전부냐?”
“나, 나는 모르…….”
모를 리 없지.
나는 부러진 놈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어헉!”
“말해. 작살나기 전에.”
“전부, 일곱 명이 전부요!”
‘마학자가 없군.’
나는 혀를 찼다.
눈앞의 기기판 위에는 현란한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다.
간단한 조작으로 움직이는 자동 모드인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웅크린 채 눈물을 짜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출발은 언제 하냐?”
“워, 원래는 10분 뒤지만! 내가 건드려서 5분이면…….”
퍽!
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칼집으로 후려쳤다.
머리가 깨진 남자가 피를 흘리며 엎어졌다.
‘자동 운행인가.’
일이 귀찮아졌다.
지금 비공정은 정지한 상태지만,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한이다.”
“잘 해결됐어. 도와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10분만 대기하다가 돌아가서 잠이나 자면 돼. 우리 기다리지 말고.”
통신을 끊었다.
기기판의 각종 버튼을 눌러보았다.
[삐빅! 조작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삐빅! 조작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삐빅! 조작이 금지…….]‘먹통이다.’
그나마 되는 거라고는 즉시 출발과 계단을 내리는 일 정도인가.
나는 기절한 놈을 로프로 묶은 다음 질질 끌고 갔다. 선내의 적당한 창고에 틀어박았다. 아래에서 엎어져 있는 새끼도 마찬가지. 통로을 내린 다음 들어서 옮겼다. 핏자국은 걸레로 대충 닦았다.
[마스터, 적이 약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용의 심장(하급)’이 꺼내집니다!] [‘흑룡의 비늘(C) X 3’이 꺼내집니다!] [‘마도 부품(하급) X 2’이 꺼내집니다!] [‘흑룡의 뼈(C)’가…….] [‘300,000G’를…….]비싼 것만 골라서 가져가고 있다.
잠시 후,
덜컹덜컹.
먼 곳에서 수레바퀴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갑판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난간으로 얼굴을 내밀자, 놈들이 궤짝이 가득 담긴 수레를 끌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보람차구만.”
“이 정도면 술과 여자를 받을 수 있것네!”
“껄껄, 쥐새끼 하나 안보이다니.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어.”
제각기 화색에 찬 얼굴로 걸어온다.
“형님, 저희…… 음? 어디 갔수?”
“벌써 들어가서 퍼질러 자고 있는 거 아녀? 이거, 감시는 맡겨달라더니! 에잉!”
계단은 이미 내려가 있다.
놈들은 수레를 하단의 수납처에 넣은 뒤 갑판으로 올라왔다. 기다렸다는 듯 비공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출발이 좀 빠른디?”
한 명의 의문을 표했으나,
“알 게 뭐야. 빨리 가면 좋지!”
자연스레 묻혔다.
나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비공정은 차원의 소용돌이로 향하고 있다.
[Danger!]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가 마스터의 아이템을 실은 채 출발하고 있습니다!]시스템 메시지가 빨갛게 깜빡였지만, 암케나는 이미 게임을 나간 상태였다. 재접속한 뒤에야 로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번쩍!
전신에 강한 압력이 깃들더니, 순간적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잿빛의 하늘과 황폐한 대지. 탑의 외부였다.
비공정은 날개를 펼치며 잽싸게 창공을 나아갔다.
그렇게 10분쯤 날았을까.
기계적인 소년의 음성이 울렸다.
풍경이 다시금 바뀌었다. 땅 아래에서는 수많은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3847차원 – 하르라]수백 미터 앞, 차원의 소용돌이가 돌아가고 있다.
비공정의 도착지였다.
기둥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갑판을 살폈다. 난간에 한 명이 팔을 기대고 있다.
다른 네 명은 선내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몸을 일으킨 뒤 나섰다.
난간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예전엔 마스터도 안 이랬는데. 세상이 변했어. 안 그러…… 응?”
퍽!
나는 남자의 등을 걷어찼다.
“자, 잠깐, 으아아아아악!”
뒤집어진 남자의 몸이 끝없이 추락했다.
나는 등을 돌리고는 선내의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억!”
피투성이가 된 놈이 튀어나왔다.
남김없이 부러진 이빨에서 피가 새고 있다.
“약해빠졌군. 대체 이 새낀 뭐요?”
벨키스트가 이죽거렸다.
“굳이 궤짝에 숨어야 했소? 갑갑해 죽는 줄 알았소만.”
“상황은?”
“이놈이 마지막이오.”
벨키스트는 검날을 남자에게 향했다.
“기, 기다려. 살려주시오. 나를 주, 죽이면 보복이 있을 것이오. 죽기 싫다면!”
콰직!
검이 놈의 어깨를 뚫고 갑판에 박혔다.
“흐어어억!”
남자는 눈을 까뒤집더니 몸을 파르르 떨었다.
벨키스트가 침을 퉤 뱉었다.
“순 버러지밖에 없군.”
“이쪽도 정리 끝났어요.”
제나가 갑판으로 나왔다.
단검이 피로 젖어 있었다.
“생각보다 나쁜 놈들이더라구요. 이런 짓을 수없이 했대요.”
“쳐들어온다고 해서 바짝 긴장했는데, 이 무슨…… 실망이군요.”
이올카와 네리사까지.
1파티의 모든 인원이 갑판에 모였다.
“오빠, 역으로 들어가자는 거였죠. 5명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예상에서 조금 바뀌기는 했다.
원래 계획은 비공정을 내부에서 제압한 뒤, 정예 인원을 꾸려 역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 운행이었기 때문에 다른 파티의 인원을 실을 여유가 없었다.
“적지에는 최소 수십 명이 있을 겁니다. 심문한 결과, 조정만 잘하면 대기실로 돌아갈 수 있다더군요. 일단 한번 돌아가서 정비한 뒤…….”
“안 돼. 기습의 의미가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는 게 늦으면 걔네들도 눈치채겠지.”
“그렇다면…….”
“이대로 간다. 그리고 한 번에 끝내.”
약간의 타격으로는 사냥꾼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오히려 화만 돋우게 될 것이다. 전력이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다. 그런 놈이 달라붙으면 임무 공략에 방해가 된다. 방법은 하나뿐.
“하지만 다섯 명인데…….”
“충분하지.”
벨키스트가 말을 끊더니 발밑의 남자를 걷어찼다.
“이런 벌레들은 다발로 덤벼도 끝장낼 수 있소.”
“확실히 약하긴 하더군요.”
나는 놈을 바라보았다.
레벨에 비해 약한 이유는 간단하다. 훈련을 제대로 안 했으니까.
탑 등반을 포기했다면, 우리처럼 악착같이 강해질 필요 또한 없다.
“결정은?”
“결정이고 뭐고.”
나는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거냐?”
“당연한 대답이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모조리 털고 다 불태워. 씨를 말린다.”
니플헤임을 운영하면서 얻은, 사냥꾼에 대한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끝까지 조진다. 접을 때까지.’
차원의 소용돌이가 비공정을 삼키고 있었다.
비공정이 대기실로 넘어가는 도중, 나는 멤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기습전은 속도가 생명. 어영부영하다간 적의 전력이 집중된다. 그렇게 되면 숫자가 부족한 우리가 먼저 전멸하게 될 것이다.
“이올카, 네가 중요해.”
“알았어요. 실력 발휘를 하라 이거죠.”
나는 말을 이었다.
“신속하게 움직여. 한 명도 빠짐없이 살아서 돌아간다.”
“살아서만 돌아갈 것이오?”
“물론…….”
나는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우릴 건드린 대가를 알려줘야겠지.”
빛이 전신을 감쌌다.
차원 이동의 신호였다.
[시스템 로그 열람 권한이 해제되었습니다.]환한 빛 속에서 비프로스트가 칠흑색으로 번쩍였다.
‘음?’
다시 눈을 뜨니, 검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로그 열람 권한인가.’
다른 대기실에서도 시스템을 볼 수 있다는 뜻이겠지.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가 복귀합니다.] [Danger!] [마스터, 타 소속의 영웅이 침입했습니다!] [의도가 불순한 것 같습니다. 조심하세요!]비공정이 차원의 틈을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하늘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군.’
형편상 좋다.
나는 씨익 웃었다.
“이번은 좀 빠르군! 뭐 쓸 만한 건 가져왔소?”
두 명의 남자가 비공정 입구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철컥. 기릭기릭. 계단이 내려갔다.
“간만의 수확이지. 이쯤이라면 마스터도…….”
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너, 넌 누구……!”
핑! 핑!
난간의 틈새에서 두 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억!”
“끄헉!”
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검을 휘둘렀다.
두 명의 남자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망 보호 적용!] [‘카즈(★★)’의 영혼이 소실됩니다!] [‘베럴드(★★★)’의 영혼이 소실됩니다!] [Tips/사망 보호에 대하여] [보호 상태에서 사망한 영웅은 모든 능력치와 스킬이 영구적으로 하락합니다. 소실된 영혼은 일주일 후 ‘영혼석’으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Tips/PVP] [PVP 상황이 발생하면 대기실의 치유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나는 두 구의 시체를 걷어찼다.
놈들의 시체가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엔 두 명밖에 없나.’
주변을 살폈다.
차원의 틈에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는다.
제각기 어디선가 늘어져 있겠지. 흩어졌다면 더 좋다. 차례대로 정리하기로 했다.
[마스터, 위기입니다!] [경비 시스템을 작동시키세요!] [Yes(선택) / No]왜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하늘이 붉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들킨 거 같은데요?”
“이제 시작이야.”
빠른 걸음으로 출구로 향했다.
통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나가자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딸꾹! 뭐여, 이건?!”
“시, 시벌…….”
광장에서는 술에 취한 남자들이 허둥거리는 중이었다.
옆에는 빈 술통이 널려 있다. 붉어진 얼굴의 남자가 이쪽을 발견했다.
“저놈이다! 저놈이 침입자인 거 같어!”
“이 새끼,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다니, 잘게 썰어서…….”
2층 광장.
열세 명. 놈들이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네리사.”
“갑니다.”
네리사가 들고 있던 원형의 통을 걷어찼다.
데굴데굴. 뚜껑이 열린 통에서 누르스름한 액체가 새어 나왔다.
“술에 취했으면 놀잇감이 있어야지. 불꽃놀이는 좋아하냐?”
“뭐? 무슨…….”
이올카가 입김을 불자 장작에 불이 붙었다.
나는 불타는 장작을 건네받았다. 통에 들어 있던 액체는 비공정의 연료, 즉 기름이었다. 선내 창고에서 몇 통 가져왔지. 나는 웃고는 장작을 손에서 놓았다.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Danger!] [2층 광장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 미친 새…….”
【작렬하라!】
콰콰콰쾅!
[‘알버트(★★★)’의 영혼이 소실됩니다.] [‘디론(★★)’의 영혼이 손실됩니다.] [‘게드릭(★★)’의…….]연이어 떠오르는 사망 메시지.
나는 달려나가며 말했다.
“전부 죽여.”
쐐애액!
제나의 화살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화살은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닥을 뒹굴던 한 놈의 머리통에 꽂혔다. 이어서 벨키스트가 검을 길게 그었다. 두 놈의 목이 공중에 떠올랐다.
“네리사, 이올카, 따라와!”
“알았어요.”
화르르륵!
불길이 번져나가면서 매캐한 연기를 흩뿌렸다.
나는 화염을 등지고 달려나갔다. 목표는 숙소의 입구. 닫힌 문 너머로 분주한 발소리와 고함이 울렸다.
‘놈들이 정신차리기 전.’
끝장을 본다.
쾅! 나는 문을 걷어찼다.
바쁘게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영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네리사가 두 번째 연료통을 굴렀다.
“스트라이크.”
【작렬하라!】
투쾅!
[Danger!] [2층 숙소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시설의 손상도가 격렬합니다. 주의하세요!]“끄아아악!”
“불, 불이야아아!”
화염과 연기 너머로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이올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까 왠지 악당 같네요.”
“둘 중 하나야. 우리가 하거나, 혹은 당하거나.”
숙소 안의 놈들은 아우성을 치며 난리를 피웠다.
전의는 조각도 찾아볼 수 없다. 영웅의 공포와 패닉, 절망을 알리는 상태이상 메시지가 연속해서 떠올랐다.
놈들이 100%의 전력이었다면 이쪽도 희생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는다. 상대가 방심했을 때, 자고 있을 때, 아직 모이지 못했을 때.
‘우리가 유리한 필드에서, 유리한 상황을 선점한다.’
나는 숙소의 입구를 발로 건드렸다.
투명한 벽이 가로막았다. 침입자도 숙소는 들어갈 수 없다. 영웅의 신변을 보호할 유일한 시설인 것이다.
‘상관없어.’
할 건 많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이미 광장에 있던 13명의 적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광장 곳곳에서 불길과 화염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1층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열 명의 영웅이 대기하고 있었다.
선두의 흑발 여성이 검을 뽑았다.
“이 개새끼들! 여기부턴 한 발짝도 못 넘어간다!”
[‘시밀라르(★★★★)’가 전의를 다집니다!]‘대처가 빠르군.’
아직 안 모였을 줄 알았는데.
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이 악적! 도망치는 것이냐!”
“생각해보니, 거기 창고에 불을 안 지르고 왔더라고.”
“뭐, 뭐라고?”
“지금부터 불 지르러 간다.”
“이 또라이 자식이!”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싸워줄 필요 없지.’
상대가 오게 하면 그만이다.
나는 횃불을 왼손에 들고는 광장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어젖히자 진열장이 가득한 내부가 드러났다. 창고였다.
“으아아아!”
한 소녀가 프라이팬을 들고 달려들었다.
스쳐 가며 발을 툭 걸자 엎어졌다.
‘창고 관리자인가.’
아쉽게 됐지만, 봐줄 의향은 없다.
“굴려.”
“갑니다.”
네리사가 연료통을 굴렀다.
횃불을 놓았다.
화르르르륵!
[Danger!] [2층 창고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재료 손실의 우려가 있습니다! 당장 불을 끄세요!]창고 내부에서 격렬한 화염이 피어올랐다.
목적이 아이템 약탈이라면 방화는 미련한 짓이지만.
‘내 목적은 그게 아니거든.’
창고를 나왔다.
광장의 화재는 갈 데까지 갔다. 이미 화염과 연기가 가득했다.
‘시설 커스터마이징을 안 했네.’
창고는 기본 위치에 있고, 숙소도 마찬가지.
“이올카, 네리사. 장비 제작소로 가라. 다 태워.”
“예.”
“완전 악당이 된 기분이네요.”
두 명이 광장을 빠져나갔다.
[‘숙소’의 레벨이 하락합니다!] [Lv.5 -> Lv.3] [Danger!] [2층 창고의 재료가 손상됐습니다!] [해당 아이템 : 총 32종] [하급 가죽(A) X 32] [다이아몬드(C) X 5] [하급 영혼석…….]“뭐, 뭐하는 짓거리야! 이 개자식이!”
‘왔군.’
“죽여버리겠다! 나와!”
“알아서 죽을 길을 찾아오는데.”
벨키스트가 씨익 웃었다.
왼쪽 뺨이 잿가루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콜록!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이미 2층 광장은 불지옥이 되어 있다. 화염 저항을 꾸준히 습득한 우리는 버틸 만하지만, 저쪽은 다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질래야 질 수가 없거든.
나는 검날을 돌렸다.
“다 죽여.”
5분도 걸리지 않았다.
4성 여검사의 반발이 꽤 거셌지만, 시간문제일 뿐.
그녀는 제나와 벨키스트의 합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시체가 되었다.
[‘시밀라르(★★★★)’의 영혼이 소실됩니다!] [‘크실(★★)’의 영혼이 소실됩니다!] [‘로이드(★★★)’의 영혼이…….] [Danger!] [장비 제작소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마스터, 화재가 점점 심해집니다!]1층으로 내려갔다.
몇몇 놈들이 소극적으로 저항했으나 이미 중심 전력은 전멸한 상태.
싸움이 될 리 없다.
“오빠,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반쯤 끝장난 거 같은데.”
제나가 뺨을 닦았다.
손가락에 피와 재가 묻어났다.
“나쁜 놈들도 있지만 무고한 사람도 있고요.”
“아직 안 끝났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제 안 죽이니까. 기반 시설만 조질 거야.”
대기실의 기초가 되는 핵심 시설은 네 곳이 있다.
숙소, 창고, 무기고, 그리고 훈련소.
‘깡그리 불태운다.’
복구할 생각조차 들지 않게끔.
나는 1층 창고의 문을 열었다. 곧장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화재와 손상을 알리는 메시지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우리는 두 조로 나뉘어 각종 건물에 불을 지르고 시설을 박살 냈다. 방어 세력은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수가 많았지만, 가다듬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마스터, 미확인 채널 채팅(74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 / No]시야 좌측에 로그가 떠올랐다.
이셀이 부여한 마스터 권한이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꺼져.’
[Yes / No(선택)]알림창이 닫혔다.
녀석이 이번에 입은 피해를 계산해보았다.
‘주요 전투직 대거 사망. 아이템 및 장비 손실. 창고 전소. 무기고 전소. 광장 전소. 숙소 반괴. 장비 제작소 가동 불가.’
이 정도로는 안 되지.
하나 남았다. 나는 다른 멤버에게 뒷처리를 부탁한 뒤 2층 광장으로 올라갔다. 화재는 어떻게든 진정됐다. 그러나 벤치와 분수대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물건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나는 차원의 틈의 반대쪽에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훈련소였다.
“히익!”
구석을 보자 몇 명이 모여서 웅크려 떨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 눈물까지 짓는 녀석도 있다.
나는 놈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오지 마!”
한 청년이 일어섰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면 이길 수…….”
“물어볼 게 있어. 답하면 살려주마.”
“뭐든지 물어보십쇼.”
“마학자는 어딨냐?”
“저기 있습니다요.”
청년이 공손하게 왼쪽 문을 가리켰다.
“고맙다.”
나는 그 문으로 다가갔다.
특별히 어디로 샌 것 같지는 않다. 마법 전당의 문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찰나.
[그것만큼은 안 돼에에에!]번쩍!
눈앞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야, 이 나쁜 자식아! 털 거면 얌전히 물건만 털어가지, 왜 멀쩡한 집에 불을 지르구 그래! 양심도 없냐? 상도덕도 없어, 응?! 야, 이 악마 자식아아아앗!]투명한 두 쌍의 날개.
조막만한 이목구비와 얄팍한 몸체. 이셀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검정 원피스 대신 붉은 가죽옷을 차려입고, 해적모와 안대를 눌러썼다는 것 정도.
“비켜.”
[안 돼, 죽어도 안 돼에!]나는 요정의 날개를 붙잡고 휙 던졌다.
요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녀석은 내 눈치를 흘낏 살피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똥 같은 마스터한테 배정돼 고생만 한 지 반년.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 꼴이라니.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하지만…… 혹여나 능력 있는 동료가 내 뒤를 받쳐준다면…….]뭐라는 거야.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마법 전당의 안에는 희미한 약물 냄새가 감돌고 있다.
벽 구석의 낡은 책상 위, 하얀 로브를 입은 한 소년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이 난리에 잘도 자는군.’
마학자.
비공정 운용에 빠져서는 안 될 필수적인 인재였다.
나는 소년의 뒤로 다가가 등을 건드렸다.
“음냐, 누가 이 몸의 단잠을 깨워……? 이 몸은 야근 때문에 삼일 밤낮을…… 읍!”
나는 소년의 입을 틀어막고는 로프를 꺼냈다.
순식간에 팔과 다리, 몸통읕 통째로 결박한 뒤 입에 로프를 물렸다.
“읍! 읍읍! 읍!”
나는 발버둥 치는 소년을 둘러업었다.
“으으읍!”
소년이 발끝으로 등을 툭툭 건드렸다.
의미없는 발악이지. 나는 마법 전당을 빠져나왔다.
[너, 너, 기어이……!]“기어이는 무슨.”
나는 빙긋 웃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간다.”
“으으읍! 으읍!”
나는 훈련장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놈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나가. 숙소에 틀어박혀 있어라. 살고 싶으면.”
“아, 알았습니다요!”
네다섯 명의 남녀가 꽁무니가 빠져라 훈련소를 나갔다.
벌컥. 훈련소의 문이 열리더니 제나가 들어왔다. 궤짝이 가득 찬 수레를 들고 있다. 타지 않은 아이템을 골라담은 것이다.
“그 아이는…….”
“빠져선 안 될 전리품이지. 놓치지 마.”
나는 수레에 소년을 던져넣었다.
“이건 납치 아녜요?”
“납치 맞아.”
쿵!
수레가 크게 흔들렸다. 소년이 발로 수레 안쪽을 걷어찬 것이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았다. 곱상한 얼굴에 눈물이 고여 있다. 표독스러운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비공정으로 끌고 가. 마무리는 내가 할게.”
“알았어요. 늦지 마요!”
제나가 수레를 끌고 사라졌다.
나는 숨을 깊게 쉬고는 장작을 꺼냈다. 바깥으로 잠깐 나가서 잔불을 옮겨붙였다.
마법 전당부터.
이곳은 기름이 필요 없다. 탈 만한 종이가 잔뜩 있으니까.
[너, 이 자시이익!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아!]요정은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인재를 약탈하고! 네가 악마와 차이점이 뭐야!]“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나는 마법 전당의 문을 열었다.
책장에 고서가 빽빽이 꽂혀 있다. 불붙은 장작을 던져넣었다. 화르륵. 곧장 연기와 함께 화염이 일기 시작했다.
[Danger!] [마법 전당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책상과 의자, 각종 마법 도구, 수많은 마도서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간다.
요정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어떻게든 끄려고 했으나 한번 붙은 불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훈련장 안쪽, 제나가 가져다 놓은 연료통의 뚜껑을 따고는 기름을 바닥에 쏟았다.
마법 전당의 불길이 이곳까지 닿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체 왜…….]“타협은 없어.”
처음 사냥꾼을 털었을 때, 하도 애원하길래 적당히 남겨주었다.
한 달 뒤, 나는 바로 뒤통수를 맞았다. 다음도, 다음 사냥꾼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상황이 바뀌어도 결과는 똑같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원칙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런 새끼들은 절대 안 변해.’
일시적인 모면일 뿐.
한번 굳어진 성향은 변하지 않는다.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누구를 뽑아먹을 궁리만 하지. 완전히 게임에서 손을 떼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화르르르륵!
마침내 훈련소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너, 이러고도……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앗!]요정이 울분 어린 표정으로 내게 펀치를 날렸다.
그러나 주먹은 투명한 벽에 막혔다. 작은 몸이 빙그르르 돌며 튕겨 나갔다.
‘요정의 정당방위 조건은 두 가지.’
첫 번째, 마스터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두 번째, 영웅이 살의를 가지고 공격할 경우다.
이 녀석은 내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한다. 방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법 전당으로부터 일어난 불길은 닿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허수아비와 나무인형. 각종 연습용 무기와 의자와 책상까지. 나는 광장으로 나온 뒤 문을 닫았다. 화염은 훈련소의 전부를 태우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잿더미가 된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곳곳에 피와 잔불, 영웅의 시체가 눌어붙어 있었다.
한 남자가 주저앉은 채 멍한 눈으로 광장을 둘러보았다. 나는 굴하지 않고 걸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이 세계의 희망을 끊어버렸다.
‘후회는 하지 않아.’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
이 정도는 이미 각오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마스터는…….]“접을 수도 있겠지.”
[알면서도 그렇게 했어?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요정이 주저앉았다.
나는 커다란 대문을 바깥쪽으로 젖혔다.
일자형의 공간, 차원의 틈이 드러났다.
통로 안쪽에는 유선형의 소형 비공정이 정지하고 있었다. 캐피탈리즘 호였다.
‘작명 센스하고는.’
화염은 이곳까지 닿진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했고. 나는 비공정 근처로 걸어나갔다. 제나와 네리사가 비공정 하단에 전리품을 수납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비공정 상태는? 출발할 수 있을 거 같아?”
“운행 기능이 정지되어 있더군요. 연료도 충분합니다만. 무언가 인증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 꼬마는 어딨어?”
“갑판에 묶어뒀습니다.”
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갑판 위, 기둥에 묶인 소년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읍읍! 읍!”
‘뭐라는지 모르겠네.’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 입의 밧줄을 풀었다.
“퉤엣!”
옆으로 피했다.
“더럽잖아.”
“네가 더 더러워, 이 나쁜 놈아!”
소년이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풀어! 대가리 작살나기 싫으면. 내가 누군지 알아?”
“마학자겠지.”
“그래! 삼류 마법사들은 이름만 들어도 떤다는 카티오님이시다!”
“비공정을 출발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미친. 너 같으면 알려주겠냐? 흙탕물에 튀겨 죽일…… 윽.”
소년의 목에 검날이 드리워졌다.
뒤에서 벨키스트가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건방진 놈이로군. 손가락 몇 개쯤 자르면 알아서 불지 않겠소?”
“그러지 마라. 우리가 진짜 악당 같잖냐.”
“악당 맞잖아!”
“이거 원. 서로 오해가 쌓였네.”
“오해는 개뿔. 천하의 버러지…… 힉!”
소년의 목에 검날이 조금 파고들었다.
“이, 일단 거, 검부터 치우고 말해.”
“치워.”
벨키스트가 검을 칼집에 넣었다.
나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법을 쓰는 낌새가 있으면, 바로 팔을 잘라버려.”
“그러겠소.”
“이런 무도한…….”
소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해는 이따가 풀고. 우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돼. 네 협력이 필요하다. 이해했냐?”
“돌아간다고?”
“여기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잖냐. 잿더미밖에 없는데.”
“너희들이 그렇게 만들었잖…… 아.”
소년은 뒤의 벨키스트를 보더니, 말을 흐렸다.
“어렵진 않을 거다. 바로 전에 갔던 좌표로 출발시키면 돼. 너희들이 털려고 했던 곳이거든.”
나는 구속을 느슨하게 한 다음, 소년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공정의 조종실로 걷게 만들었다.
“나, 나는 그저 연구만 하던…….”
“알았어.”
“흐윽…….”
울음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질질 짜지 마라.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벨키스트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은 진짜 피도 눈물도 없군.’
어쨌든.
조종실로 들어간 소년은 계기판으로 가더니 입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면을 뒤에서 지켜봤다. 벨키스트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칼집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놈들도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학자의 진가는 각종 보조 마법에서 드러난다. 그중에는 화재를 무마시킬 수 있는 마법 또한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녀석의 잠꼬대를 떠올렸다.
삼일 밤낮을 샜다고 했었지. 컨디션 관리를 못한 마스터의 책임이었다.
기이잉.
계기판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캐피탈리즘 Ho!] [접근이 허가되었습니다.]“됐다.”
“옳지. 잘했어.”
“이제 풀어주는 거겠지? 돌려 보내줘.”
“뭔 소리야? 너도 같이 가야지.”
“뭐, 뭐라고?”
나는 소년을 제친 뒤 계기판 앞에 섰다.
“저놈은 다시 묶어라.”
“알았소.”
“야, 이, 개…… 읍! 으으으으으읍!”
벨키스트가 소년을 보쌈한 뒤 끌고 나갔다.
나는 홀로그램을 살폈다. 각종 이상한 도형과 정체불명의 언어로 가득했지만, ‘시동’과 ‘출발’이란 단어는 알아볼 수 있었다. 꾸욱.
기이이잉!
비공정이 가볍게 진동을 시작했다.
시동이 걸린 것이다.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모두 타라!”
“다 실었어요. 곧 갈게요!”
제나와 네리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두 명이 갑판에 발을 딛자 계단은 자동으로 접혀져 들어갔다.
[진짜 다 가져가는구나! 다 가져가! 이 놈들아아!]비행장 바닥, 요정이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우린 가벼운 인사를 하려 했을 뿐인데!]“그런 인사도 있었냐?”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우리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누가 있는데.”
[들으면 깜짝 놀랄걸. 그 이름도 유명한 단결회다! 30명의 랭커로 구성된 초정예 길드야! 이 마스터는 실력은 개똥이지만, 거기 간부와 접점이 있다고!]‘뭐야, 그건.’
듣보잡인데.
하여튼 이곳의 마스터는 랭커와 연결됐다고 한다.
빽으로 비공정을 만들었으며 대기실을 운영했다는 의미였다. 그런 타입치고는 꽤나 부실했지만.
덜커덩.
비공정이 크게 흔들리더니 서행을 시작했다.
방향은 전방. 차원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몇 시예요, 지금? 거의 밤샌 거 같은데.”
갑판에 있던 제나가 중얼거렸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나 혼자면 충분해.”
“맡겨도 되죠?”
제나는 하품을 하며 들어갔다.
벨키스트는 소년을 묶은 채 선내로 들어갔고, 나머지도 마찬가지.
갑판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긴 뒤 걸터앉았다.
비행장 안쪽, 요정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의 승리를 만끽해라. 하지만 그때가 오면 봐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어! 나는 적 앞에선 자비를 모르는 요정이야.]“…….”
[이것도 비적왕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면, 웃으며 받아들이겠어. 위대한 인물의 일대기에는 시련이 등장하기 마련이니까. 내 이름은 캡틴 이셀, 잊지 말고 기억해둬!]“그래?”
[네 이름은 뭐냐!]나는 한이라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멈추었다.
흐음.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 이름.”
[기억해두마.]“내 이름은 로키다.”
[풉!]캡틴 이셀이 무언가를 내뿜었다.
[설마 그 니플헤임의…….]요정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분통을 터뜨렸다.
[이 자식, 되도 않는 구라를 쳐! 혼나고 싶냐, 앙?]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믿을 거라 생각하고 꺼낸 말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안 잊어, 꼭 복수해줄 거야앗!]요정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소용돌이가 비공정을 휘감았다.
[※손실 안내] [이하 물품이 마스터 ‘암케나’에 의해 탈취당했습니다.]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 [마학자 ‘카티오(★★★★)’] [상급 승급석 X 5] [중급 영혼…….] [30만…….]시느느의 손실 물품이 나열되었다.
일일이 읽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때려눕힐 만큼 때려눕혔다.
‘복수라.’
참 귀찮은 단어지.
이것 때문에 나는 수많은 분쟁에 휘말렸다.
그저 조용히 탑을 공략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휘말리기 싫어서 이렇게까지 했건만.’
[마스터, 미확인 채널 채팅(114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시느느> 야, 이 ****야.
시느느> 양심 없냐? 개**가.
시느느>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런 개****. 튀겨 죽일 *****.
시느느> **, 넌 내가 ***, *******준다.
시느느> ***, *****야. ****, ** 진짜.
어이쿠.
암케나가 보면 깜짝 놀라겠지만, 나로서도 별다른 방법은 없다.
신고와 차단을 추천해주는 수밖에.
나는 난간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공정은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을 순항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르넷 시드.
“보고 있었냐?”
“하지 마. 쪽팔려 뒤지겠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단결회는 뭐야. 들어봤어?”
유르넷은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버려 둬라. 먼저 건들지 않는다면.”
“그때는 네 판단에 맡기지.”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통신이 끊겼다.
나는 혀를 찼다.
‘니플헤임의 손은 가능하면 빌리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나도 방법이 없다.
‘뒷배경 싸움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주마.
나는 의자에 등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