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51
50. 수왕의 후예
* * *
며칠에 걸쳐, 기본적인 업무는 마무리됐다.
훈련 시스템의 개편과 관리직의 창설, 그리고 규칙의 명시.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시간을 보내면서 다듬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뭐, 어찌 됐든 운영 시스템은 니플헤임과 조금 달라지겠지.
그런데.
“…….”
나는 숙소의 개인 방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때는 늦은 저녁. 암케나도 접속을 끊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군.’
책상 위에 보고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보고서에는 3파티 전용 숙소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본래 수인족 다섯 명이 머물러야 할 그 숲에는 지금은 한 명밖에 살지 않는다. 네 명은 전부 죽었으니까.
‘암케나가 채우려 한 것 같지만.’
쌍둥이 법사를 얻게 된 이번의 소환도, 원래 목적은 3파티의 인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겠지.
그러나 뽑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외종이 나올 확률은 극히 드물었으니.
그래서, 혼자 남은 이 녀석이 무얼 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안 한다.
키샤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바로 나.
네 명의 유품이 실린 납골당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목격자도 없었다. 암케나의 조작창을 보면 3파티 전용의 숲에 처박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종종 우리와 교류를 맺곤 했는데.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상황은 이해한다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고볼 수는 없다. 키샤샤는 대기실 내의 유일한 태생 4성.
실제로 맞붙어서 알고 있다. 잠재력도 수위를 다투는 우수한 인재였다. 내가 방치한다면, 동력을 잃어버린 그 녀석의 최후가 뻔히 보였다.
암케나가 온건파라고 해도, 아무 짝에 쓸모없는 영웅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
무언의 시위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나는 벽 한쪽에 걸린 칼집과 갑옷을 걸쳐 입었다.
다 식은 차를 끝까지 들이킨 다음 방을 나왔다. 어두워진 저택 내부를 단숨에 빠져나가 광장의 3층으로 내려갔다.
“요즘 자주 뵙는군.”
계단에서 벨키스트와 마주쳤다.
“뭔 일이냐? 이 새벽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 싹수가 보이길래, 상대해주고 오는 일이오. 선배는 이 새벽에 무슨 일이신가.”
“키샤샤를 보러 간다.”
“흐음.”
벨키스트는 턱을 매만졌다.
“거기서 주저앉는다면 별거 없는 인재 아니겠소? 내버려 두면 그만이잖소. 강하면 무엇하나. 정신이 허약해 빠진 것을.”
“키샤샤가 그렇게 된 건 내 책임도 있어.”
“예전의 선배와는 달라진 것 같구려.”
“어디가?”
“유해지셨소.”
“유해졌다?”
“나는 가보지. 보모 노릇, 수고하시오.”
벨키스트가 흐흐 웃더니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
3파티가 전멸한 것은 확실히 내 책임이다.
이올카를 임무에 끼워 넣자고 결정한 것은 나. 맥주병만 모여 있는 3파티를 바다에 끌어들인 것도 바로 나였다. 그때의 실책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뭐, 키샤샤가 보잘것없는 영웅이었다면, 이런 짓도 안 한다.
‘유해졌다.’
섣부른 추측일 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3층 광장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광장을 지나 숙소로 향했다. 숙소 입구의 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바삭.
흙과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오른손에 시끄러운 꼬마가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죽어버렸지.
나는 통로를 계속 나아갔다.
금속제의 바닥이 흙과 풀로 바뀌었다.
하지만 생기가 엿보이지 않는다. 통로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고, 싱그러웠던 숲의 바람에선 차가움만 느껴졌다.
‘관리를 오랫동안 안 한 것 같네.’
그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바싹 마른 나뭇잎을 밟아 부수며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3파티의 전용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숲의 마을.
암케나가 수인들을 위해 꾸며놓았던 이 장소는 이제 쓸모가 없다.
키샤샤의 처우가 결정되고 나면 철거될 것이다.
‘조용하군.’
어둠 속에서 선명한 윤곽이 드러났다.
심안 스킬의 효과. 나는 숙소 가운데로 뻗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키샤샤.”
작게 중얼거렸다.
수인은 귀가 유별나게 밝다.
분명히 듣고 있겠지.
“데리러 왔다.”
“…….”
“거기 있는 거 알아.”
숲의 공터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뭇가지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마음 정리는 끝났나? 복귀해라. 임무 공략을 위해선 네가 있어야 돼.”
“……임무.”
나는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름드리나무의 위쪽, 무성한 잎사귀 안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래.”
“무슨 의미가 있지? 내 동족들은 다 죽었는데.”
목소리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 인간을 돕는 게 내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이냐.”
“100층까지 오르면 살릴 수 있어. 넌 알고 있잖냐.”
“네 말이 맞다는 보장은?”
“없어. 그래도 믿을 만한 말이라 생각한다.”
후후후.
싸늘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어. 난 성인식을 거친, 질풍 부족의 어엿한 전사니까. 수왕님에게 인정받은 후계자니까.”
“맞아, 넌 전사다. 그러니…….”
“하지만 아니야.”
“…….”
“돌아가라.”
역시 이렇게 나오나.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너를 원망 안 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 동족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런 내게, 어떤 긍지가 남았단 말이냐.”
“네가 계속 이러면 어떻게 될지 알아?”
“알고 있지. 암, 잘 알고 있다. 난 죽을 테지. 죽고말고. 어쩌면 그런 최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한심하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의 저 녀석은 빛나고 있었는데.
여기 있는 키샤샤는 단지…… 찌꺼기일 뿐인가.
“나를 먹을 자는 그대인가? 영광이야.”
“진짜 그렇게 처박혀 있을 거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마음 한구석에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처음 본 것도 아니야. 니플헤임에서 몇 번 비슷한 일이 있었다.
파티의 모든 동료를 잃었을 때, 좌절한 영웅들은 대게 이렇게 된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이런 꼴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게. 가능한 정을 주지 않게끔.
하지만 결국…….
‘이거 참.’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모른다.
나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잘 알았다, 키샤샤.”
“돌아가.”
“싫은데.”
철컥.
나는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검날이 차갑게 빛났다.
“쫄보 같은 년.”
“뭐?”
“이셀, 분명히 말했어. 말리지 마라.”
“……?”
검날을 옆으로 돌렸다.
무게감이 어깨에 전해졌다.
나는 하체를 낮춘 뒤, 키샤샤가 있는 쪽을 노려보면서 몸을 날렸다.
후웅.
바람이 몸을 스쳤다.
그리고.
“무슨 짓이냐!”
콰지직!
아름드리나무의 위쪽이 갈려 나갔다.
흩어지는 가지와 나뭇잎 속에서 검은 신형이 몸을 날렸다.
“거기서 뒤져.”
“……!”
“왜?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나?”
반대편의 나무로 키샤샤가 뛰어올랐다.
놓치지 않아. 부러진 나무 윗동을 타고 뒤를 쫓았다.
다시 검날이 호선을 그렸다. 그림자가 날렵하게 뛰었다.
“이제 와서 뒈지긴 싫은가 보네.”
“미친 게냐!”
나는 키샤샤를 뒤쫓으면서 나무를 남김없이 쪼깨고 부쉈다.
육중한 검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박살 난 숲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전사니 뭐니, 떠들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질질 짜냐? 같잖게.”
“…….”
“덤벼라. 그때처럼 적당히 하진 않아.”
나무가 거슬린다.
키샤샤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검격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무를 눈에 보이는 대로 때려 부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불도저가 미는 것처럼 숲의 한쪽이 지워져 갔다.
‘역시 빠르군.’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파스슥. 나뭇잎이 살짝 휘날리나 싶더니, 어느새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살짝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한!”
그림자의 팔에서 길쭉한 것이 솟아올랐다.
알아. 본 적 있다.
‘수인의 손톱.’
웬만한 강철보다 튼튼하고, 기계 커터보다 우수한 절삭력을 자랑한다.
“쫄았냐?”
“죽고 싶나!”
‘아직 꼬맹이란 말이야.’
말투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쾅!
전신에 짜릿한 충격.
발을 디딘 흙바닥이 움푹 파였다.
나는 그제야 키샤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키샤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인데.”
“무슨 생각이냐?”
“이런 생각이야.”
나는 왼손으로 단검을 뽑은 뒤 키시샤의 왼눈에 투척했다.
키샤샤가 고갯짓으로 피했다. 손목을 비틀어 손톱을 떨친 뒤 사선으로 휘둘렀다. 키샤샤는 묘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검격을 피했다.
퍽!
나는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큭!”
키샤샤가 주륵 미끄러졌다.
나는 단검을 연이어 뿌렸다.
녀석이 피하는 찰나에 다시 달려들었다.
‘미꾸라지 같다.’
몇 번의 검격이 종횡으로 이어진다.
키샤샤는 기계체조를 방불케 하는 동작으로, 검격을 뛰어넘고 기어오르며 피해냈다.
하지만.
[‘키샤샤(★★★★)’가 출혈 상태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윽!”
신음과 함께 키샤샤가 물러났다.
나는 왼손의 단검을 휘릭 돌렸다. 피가 튀었다.
“아프냐?”
“왜……?”
“참을 수 있어야지. 실력도 안 되는 게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는데.”
나는 왼손의 단검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노리는 것은 심장. 키샤샤가 손톱으로 쳐냈다.
그 순간, 키샤샤의 사타구니를 노린 검날이 위로 솟았다.
“……네게 실망했다.”
녀석이 솟구치는 검날의 면을 발로 걷어찼다.
이후, 즉각 손톱이 휘둘러졌다.
쾅!
손톱과 검날이 마주치자, 불꽃과 함께 폭음이 튀었다.
‘여전히 센데.’
그때보다 나는 몇 배는 강해졌다.
그러나 마주한 느낌은 여전했다. 눈을 속이는 스피드. 그러나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손톱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했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키샤샤의 행동 패턴에 공격이 섞이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듯 빠지고, 빠지는 듯 달려든다. 사방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급소를 노렸다.
푸확.
허벅지 한쪽이 길게 찢겼다.
피가 솟구쳤다.
[‘한(★★★)’가 출혈 상태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이쯤에서 멈춰라!”
퍽!
나는 검자루로 키샤샤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키샤샤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팔꿈치로 뒷머리를 내리친 뒤 무릎을 꽂았다.
검으로 목을 찢으려는 찰나, 키샤샤가 뒤로 크게 뛰었다.
“으윽…….”
“그때 이후로 펑펑 놀았나? 예전 같지 않아.”
“웃기지 마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키샤샤가 피 섞인 이빨을 내뱉었다.
주황색 홍채가 가로로 찢어졌다. 맹수의 그것처럼.
“너는 한 방이야.”
쾅!
흙을 몇 줌이나 퍼 올리며, 키샤샤가 돌진했다.
손톱이 아래부터 긁고 올라왔다. 때려 박듯이 검으로 막아냈다. 포탄 같은 발차기가 머리를 노렸다. 급히 고개를 숙였다. 뺨의 오른쪽이 얼얼했다.
‘이 녀석은…….’
아직도 강하다.
기어를 한층 올린 것 같다.
몸이 여러 개로 나뉘는 것 같은 속도였다.
손톱이 갑옷 이곳저곳을 할퀴며 전신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고작 이 정도로 덤빈 거냐!”
손톱이 목의 살가죽을 살짝 베고 지나갔다.
한 뼘만 더 깊었다면 피를 쏟으면서 쓰러졌을 것이다.
‘대기실이라 다행인가.’
그나마 회복이 되고 있으니.
키샤샤가 공중제비를 돌며 하체에 손톱을, 상체에는 발차기를 날렸다.
나는 검을 끌어당긴 뒤 길게 휘둘렀다.
쾅!
무시무시한 괴력에 나는 수 미터나 밀려났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추격이 없다.
나는 중얼거렸다.
“왜 멈추지?”
“여기서 그만…….”
“도망치지 마. 더 싸우면 내가 이길 거 같거든.”
등을 돌리려던 키샤샤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깨가 들썩이나 싶더니, 작은 입이 움직였다.
“너만.”
“…….”
“너만…… 아니었다면! 한 이스라트!”
피부가 따끔거렸다.
명백한 살기.
‘제대로 빡돌았군.’
나는 히죽 웃었다.
“죽여주마!”
키샤샤의 눈이 붉어졌다.
나는 숨을 골랐다.
키샤샤의 눈에 핏발이 돋았고, 눈썹이 곤두섰으며, 뾰족한 송곳니가 엿보였다.
세로로 찢어진 눈이 번들거렸다.
‘까딱하면 죽겠는데.’
살갗이 저려왔다.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슥 닦고는 검자루를 쥐었다.
키샤샤의 손톱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렇게 나를 약 올리고 싶으냐.”
“덤벼.”
“원하는 대로!”
키샤샤의 전신이 바닥에 눌어붙나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쇄도해 있다.
손톱이 심장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스치면 빈사, 제대로 맞으면 즉사. 나는 몸 안을 뛰도는 아드레날린을 느끼며, 검을 빙글 돌렸다.
쾅!
밀려나려는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키샤샤가 예상했다는 듯 다음 공격을 이어왔다. 여전히 예측하기 힘든, 사방으로 날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캉! 캉캉캉!
파란 불꽃이 튀었다. 비프로스트의 검날이 손톱을 남김없이 튕겨냈다.
발차기도, 무릎도, 팔꿈치도 전부 막고 돌려냈다. 제대로 보기 힘들 만큼 빠르지만, 이런 전투는 익숙했다. 이 녀석보다 빠른 남자와 셀 수 없을 만큼 싸워왔으니.
‘시선을 최소한으로.’
동작의 시작을 보면, 공격의 도달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리디기온이 내게 가르친 ‘영역’이었다.
‘몸놀림은 가볍게. 최소한의 동작으로.’
검이 파르르 떨렸다.
‘충격은 흡수한다.’
카카카카카캉!
쉴 새 없이 쏟아지는 10연격은 내 몸에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키샤샤는 반대쪽으로 뛰어넘어 공격을 이어갔고, 급제동과 급가속을 반복하며 눈을 현혹시켰다. 그와 동시에 칼날 같은 손톱이 뿌려졌다.
‘흠.’
나는 왼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쌍검은 익숙하지 않지만, 못 쓸 것도 아니지.
심장과 목을 노려오는 손톱을 단검으로 튕기며,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다.
“……?!”
키샤샤가 황급히 물러났으나, 검날이 하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부가 갈라지더니 붉은 피가 흘렀다. 동작의 맥을 노린 일격.
키샤샤는 송곳니를 깨물며 손을 털었다.
“힘을 숨긴 거냐.”
“숨긴 적 없어.”
“흥!”
옆의 나무토막을 박차고 뛴 키샤샤가, 공중으로부터 달려들었다.
나는 땅에 발을 굳게 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더욱 놓칠 수 없다.
이번의 싸움으로 알게 되었다.
키샤샤의 초기 능력치는 4성 중에서도 상위권. 게다가 중반이 된 지금까지, 그 전투력은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재능 또한 상위.’
유감을 표한다.
양쪽 다 평범하게 컸다면 이쪽이 밀렸겠지만.
내가 조금 치사하거든.
‘마스터, 결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디기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상대를 본다.’
키샤샤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손톱이 발목을 노렸다.
발을 빼며 검을 휘둘렀다. 키샤샤가 공중에서 회전했다.
다시 휘둘렀다. 다시. 다시.
‘왼쪽. 왼쪽. 오른쪽. 위. 위. 중앙.’
전체의 움직임을 볼 필요는 없다.
핵심만 관찰할 수 있다면, 속도가 얼마나 빠르던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크윽!”
[‘키샤샤(★★★★)’가 출혈 상태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키샤샤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나는 검을 털어냈다. 어둠 속에서 핏방울이 흩어졌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빡세게 굴렀으니까.”
마음가짐도 조금 달라졌다.
나는 웃고는, 단검을 집어던졌다.
키샤샤가 당연하다는 듯 튕겼다.
‘단검은 다 썼나.’
뭐, 이제 쓸 일은 없겠지.
나는 검을 옆으로 늘어뜨렸다.
‘변환.’
철컥.
기계음과 함께, 비프로스트의 검날이 확장됐다.
대검으로 바뀐 것이다. 육중한 무게감. 나는 검자루를 짧게 쥐었다.
“너는…….”
키샤샤가 말을 잇기도 전, 내가 뛰어들었다.
대검이 우상으로 움직였다.
후우웅!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검을 끌어당긴 뒤 몸을 돌렸다. 두 번째 베기가 횡으로 이어졌다.
쾅!
키샤샤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더니 풀숲에 처박혔다.
어떻게든 막았지만,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것 같다.
‘손해야.’
키샤샤가 죽는 것은 아깝다.
대기실에서 나와 놀아줄 만한 유일한 녀석이니까.
제나와 벨키스트가 따라오고는 있지만, 아직 멀었어.
나는 검날을 풀숲으로 겨누었다.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겠지.”
부스럭.
풀숲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고유 스킬, 수화 발동!] [‘키샤샤(★★★★)’가 변신합니다!]“크아아앙!”
짐승의 포효와 함께 무언가 뛰쳐나왔다.
이번엔 형체조차 잡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대검을 가져다 댔다. 트럭에 부딪히는 듯한 충격. 뒤로 날아가 몇 바퀴나 굴렀다.
즉시 자세를 되돌린 다음, 다시 물러났다.
바닥이 파이더니 흙 기둥이 솟구쳤다. 불도저가 땅을 파헤치듯.
나는 머리의 흙을 털어냈다.
앞에 있는 것은, 짐승의 형상을 한 소녀.
눈이 완전히 찢어졌다.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나왔으며, 머리가 갈기처럼 뻗쳐 있었다. 엉덩이 뒤로 줄무늬 꼬리가 나타났다.
‘인간 형태인가.’
전에 봤던 건 그냥 호랑이였는데.
인간과 짐승. 두 가지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것 같다.
“크르르…….”
키샤샤가 이를 드러냈다.
적의를 증명하는 것처럼, 위로 뻗은 꼬리가 흔들렸다.
순수 전투력은 이 형태가 더 센 거 같은데.
와라.
나는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키샤샤의 몸이 사라졌다.
‘……?!’
순간 머뭇거렸다.
키샤샤가 내 발밑의 흙을 퍼 올린 것이다.
시야가 먼지로 뒤덮였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굴렀다.
콰쾅!
커다란 흙더미가 솟구쳤다.
‘그냥 괴물인데.’
살아있는 굴착기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피식 웃고는 검을 내리그었다. 다시금 손톱과 검날이 맞부딪혔다.
“크아아아!”
손톱 너머, 짐승의 눈에선 한 치의 이성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했다. 급소를 망설이지 않고 공격해왔다.
“차라리 그 모습이 낫네.”
캉! 카카캉!
나는 손톱을 튕기며 이죽거렸다.
“꿍하니 처박혀 있는 것보단 말이지.”
나는 날듯이 뛰어 물러났다.
한 번 더. 숲의 반대쪽까지 뛰었다.
키샤샤가 나무의 잔해와 잎을 흩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짐승의 눈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왼발을 뒤로.
오른발을 앞으로.
나는 검을 굳게 쥔 다음, 머릿속의 스위치를 올렸다.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콰직.
몸 내부에서 골격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전신의 근육과 뼈가 남김없이 찢겨나가는 통증.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피가 날 정도로 혀를 깨물었다.
희뿌연 시야가 돌아왔다.
눈앞에 질주하는 키샤샤가 보였다.
흡사 번개와 같다.
활활 타는 듯한,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퍼졌다.
시간이 느려졌다.
수십 분의 일 초. 느리게 흘러가는 시공 속에서.
“정신 차려라.”
[스킬 각성!] [‘한(★★★)’의 ‘패검혼’이 Lv.2가 되었습니다!]나는 대검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투쾅!
공간이 통째로 찢겨나갔다.
30분 뒤.
나는 박살 난 바위에 걸터앉아 물병을 들이켜고 있었다.
“더럽게 아프네.”
출력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개미 손톱만큼. 심지어 대기실의 회복력이 듣는 상태. 그러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통증이 멈추질 않았다. 근육이 모조리 아작난 듯했다.
“……윽.”
대자로 엎어져 있던 키샤샤가 눈을 떴다.
“정신 차렸냐?”
“나, 나는…….”
“일찍 좀 일어나. 늦잠은 작작 자고.”
나는 회복 물약을 던졌다.
쨍그랑. 키샤샤의 손이 허공을 짚나 싶더니, 유리병이 깨져 물약이 흘러내렸다.
아까운데.
뭐, 괜찮겠지.
키샤샤가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피와 진흙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인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묘하게 해탈한 표정이었다.
“져버린 건가.”
“그래, 내가 이겼다.”
나는 숲 안쪽을 보았다.
이젠 숲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흙과 풀이 갈려 나갔고, 온전한 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 숲의 한가운데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넌 정말 강해졌구나.”
“빡세게 굴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죽이지 않는 것이냐.”
“덜 맞았나. 또 개소리를 하는군.”
쿨럭.
기침을 하자 피가 새어 나왔다.
위력은 끝장나지만, 쓰기 너무 힘들어.
방법을 빨리 찾아야겠다.
“스트레스가 좀 풀리나?”
“…….”
“안에 꽁 처박혀 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만 하지. 운동도 하고 그래라.”
말동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안 왔을 것을.
귀찮은 길을 돌아가야 했다.
“…….”
키샤샤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다른 놈이라면 여기서 멋진 위로의 말을 해주겠지만, 그런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나는 바위에 앉아 물만 들이켰다.
“후후.”
키샤샤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의 일족은…….”
“죽었어 전부. 안 돌아와.”
탑을 끝까지 오르면 살아 돌아온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녀석이 지적했듯이 100% 확실하진 않으니.
만약 살아난다고 해도 기억을 모두 잃었을 테니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알겠다. 알겠어.”
키샤샤의 미소가 쓰게 변했다.
“내 일족이 죽은 건 너 때문이야, 한.”
“그래, 내 인선 미스였지.”
35층에서는 이올카가 아니라 카티오를 넣었어야 했다.
그 밖에도 여러 실수가 있지만, 결정적이라 할 만한 건 그것뿐이다.
“책임져.”
“어떻게?”
“그건…….”
대답을 기다렸으나 몇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돌렸다. 키샤샤가 대자로 누운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숨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작은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잘도 퍼질러 잔다.
더 이상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끙차 몸을 일으켰다. 삭신이 쑤셨다.
주위의 숲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여긴 곧…….’
철거되겠지.
남겨둘 이유가 없다.
내가 손수 박살 내기도 했고.
나는 위를 보았다.
하얀빛이 섞인 회색이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이다.
‘엿 됐네.’
아침부터 빡빡한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는데.
한숨도 못 잤다. 나는 쑤시는 허리를 두드리며 칼집에 검을 넣었다.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는 키샤샤를 힐끗 보고는 숲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집무실에서 벨키스트와 서류를 처리하던 도중이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 누구와 싸우셨소?”
벨키스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은 무슨 개인가.
“아, 어제. 그 괴물 꼬맹이인가. 이기셨소?”
“졌겠냐.”
“하긴. 그렇겠소만.”
나는 정리된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대기실 개편은 오늘로 대강 마무리된다. 내일부터 훈련을 재개하고, 늦어도 일주일 뒤에는 탑 공략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이긴 다음에는? 목을 손수 날렸나?”
“헛소리도 풍년이네.”
거참.
이 녀석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 같다.
“훈련은 잘 돼가냐? 나와 싸워본 지도 꽤 된 거 같은데.”
“그럭저럭. 싸운 지 오래된 건 선배가 몸을 빼서지. 나는 언제라도 준비됐소.”
“오늘 일이 끝나면, 다음 선발전을 준비해둬라.”
벨키스트가 손을 멈췄다.
“무슨 소리요. 다음 선발전이라니.”
“쎈 놈이 한 명 합류할 거야. 근데 자리가 다섯밖에 없잖아.”
“……?”
“나, 제나, 카티오, 너, 네리사. 이렇게 다섯 명.”
일단 나는 열외하고.
파티 내 유일의 원거리 딜러인 제나는 빠질 수 없다.
마학자인 카티오 역시 마찬가지. 비공정을 쓸 일이 있어도 빼지 않는다. 비공정이 필요하다면 정비사를 활용할 작정이었다.
“예전에 네가 말하지 않았냐. 약하면 내려가고, 강하면 올라간다고.”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실천해라. 이번엔 동료의 정 같은 건 없어. 봐주지 않는단 거지.”
2파티의 정원도 꽉 찼다.
이번에 떨어지면 뒤가 없다.
자리가 나거나, 새로운 주력 파티가 생길 때까지 아웃이란 뜻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쾅!
집무실의 문이 사정없이 젖혀졌다.
나와 벨키스트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이곳이 네 방이냐.”
높게 쳐줘야 10대 중반의 외모.
가죽옷을 입고 맨발을 드러낸 소녀가 말했다.
“……음?”
벨키스트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올 줄 알았다.
나는 서류를 마저 서랍에 넣었다.
“특이한 냄새가 나는군. 인간이 사는 집은 다 이렇나.”
키샤샤가 코를 킁킁거리며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한.”
키샤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를 1파티에 넣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