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52
51. 예고
* * *
이튿날, 이른 아침.
저택 1층의 훈련장에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제나, 벨키스트, 네리사. 정비소에 있는 카티오를 제외한 1파티 전원.
그리고 공터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한 소녀.
키샤샤였다.
“어…… 그러니까.”
한 차례의 설명을 끝낸 뒤, 제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쪽 눈이 키샤샤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분이 저희 파티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너희도 알다시피, 키샤샤는 대기실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영웅이다. 능력도 내가 보장하지. 나와 붙어볼 만하거든. 이런 인재를 썩힌다는 게 아깝지 않냐?”
“선발전을 준비하라는 말이 그 뜻이었군.”
벨키스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벌써부터 전투태세다. 벨키스트의 손이 칼집에 올라가 있었다.
“그래, 저번에 했던 대로 승자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오?”
“일단은.”
“난 준비됐소. 그때와는 다를 거요.”
벨키스트가 키샤샤를 노려봤다.
이 녀석은 내가 니플헤임에서 돌아왔을 때, 키샤샤와 맞붙어 형편없이 깨진 적이 한 번 있다. 그때 이후로 이를 갈고 훈련을 거듭해왔었지.
“차라리 이게 낫군. 귀찮게 찾아가서 안 달라붙어도 되니 말이오.”
키샤샤는 나른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하품이었다.
“재밌군.”
벨키스트의 입이 움직였다.
“지금 당장…….”
“네 차례는 한참 뒤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옆에 제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뺀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무언가의 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나부터.”
“제가 먼저 싸우란 말이죠.”
“둘 다 좋은 경험이 되겠지.”
“알았어요. 해볼게요.”
제나가 화살통과 활을 등에 걸치고, 허리춤에 단검집을 넣은 뒤 대련장에 올라섰다.
내가 눈짓하자 나른한 표정으로 있던 키샤샤가 눈을 빛내더니 제나를 따라갔다.
“저 인간 소녀와 싸우면 되는 건가?”
“첫 번째 상대야.”
“두 번째도 있다는 거로군. 뭐, 상관없다.”
나는 벨키스트와 네리사를 살폈다.
굳이 제나와 대련을 시키는 이유는, 하나는 폭넓은 전투 데이터를 얻기 위함이고, 둘은 제나의 경험을 늘려주기 위해서. 마지막은 쟤네들에게 소소한 혜택을 주는 것이다.
미리 상대를 알아볼 수 있게끔.
‘이 정도는 괜찮지.’
최소한의 메리트는 준다.
뒷일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벨키스트는 의자에 앉아, 이글거리는 눈으로 키샤샤를 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투지가 넘치는 녀석이다. 혹여 이번에 떨어져도 금방 올라오겠지. 그러니 나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다.
‘얘는 조금 식었군.’
네리사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흥미가 동하지 않는 얼굴로 키샤샤와 벨키스트를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바뀌었어.’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
벨키스트와 비슷한 과인 줄 알았더니.
‘…….’
네리사가 문득 이쪽을 보았다.
마주치는 시선. 그녀는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돌렸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제나는 평소의 패턴대로, 후퇴하면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벌리며 중장거리전으로 끌고 나아간다. 이를 적이 뚫고 들어오면 단검으로 맞서 싸우면서 틈을 노린다. 제나가 가장 자주 취하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어?”
결판은 눈 깜짝할 새에 났다.
지금껏 자기보다 빠른 녀석과 싸워본 적 없었겠지.
눈부신 속도로 제나를 따라잡은 키샤샤는 화살과 단검을 손쉽게 튕겨내고는 그 목에 손톱을 대었다.
’20초인가.’
“져, 졌어요.”
제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인간치고는 빠르구나. 솜씨도 좋아. 하지만 너무 자신의 발을 믿지 마라.”
어벙한 얼굴로 제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키샤샤의 조언은 간단했다. 상대의 특성에 따라 전투 패턴을 바꾸라는 거다. 속도전에서는 키샤샤를 이길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싸웠다면 최소한 두 배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저기요, 오빠!”
곰곰이 생각하며 대련장을 내려가던 제나가 외쳤다.
“왜?”
“한 번만 더 해도 돼요?”
“마음껏 해라. 어차피 오늘은 스케줄을 다 비워놨으니. 상관없지?”
“난 언제든 괜찮다.”
키샤샤가 웃었다.
제나는 나와 키샤샤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대련장에 올라섰다. 오기가 잔뜩 들어선 표정이었다.
시간은 많다.
오늘 일정을 전부 빼버렸으니.
“언니, 엄청 빠르던데요.”
자기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꼬마한테 언니라고 부른다.
다른 종족이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리겠지만. 키샤샤는 말없이 손톱을 들었다.
30분 뒤.
“……졌어요.”
제나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나의 최종 성적은 6전 6패. 마지막에는 5분 가까이 버텼으나, 결국 유효타는 한 번도 없었다.
“넌 강하군. 자질이 엿보여.”
“칭찬 고맙네요. 비기가 완성되면 한 번 더 상대해줘요.”
“그러마.”
제나는 아쉬운 얼굴로 계단을 내려왔다.
비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스킬 합성으로 얻은 기술을 쓰지 않았군.
미완성인 것 같다.
다음으로는.
나는 벨키스트를 돌아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녀석의 승률은 높지 않다.
잘 쳐봐야 1할 미만. 그러나 물러서고자 하는 마음은 털끝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웃음까지 머금으며 칼집을 매만지고 있었다.
“다음은 나인가.”
“그래.”
“저 궁수를 뺄 수는 없으니, 이번 선발전의 대상은 내가 되겠구려. 다른 역할들도 마찬가지. 내가 진다면 1파티에서 빠지겠군. 아니 그렇소?”
거짓말을 하진 않아.
나는 벨키스트의 말에 긍정했다.
“저 꼬마는 여전히 괴물처럼 강하군. 선배를 보는 것 같소. 하지만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오. 한번 해보도록 하지.”
벨키스트는 흐흐 웃더니 검을 뽑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에 오르려는 찰나.
“제가 빠지겠습니다.”
무감정한 목소리가 훈련장을 뒤흔들었다.
나는 뒤를 보았다. 네리사가 손을 들고 있었다.
“뭐라고 했나.”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제가 1파티에서 빠지겠습니다.”
“돌은 것 같군. 진심인가?”
“진심이야.”
네리사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뒤이어 나를 보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벨키스트보단 제가 빠지는 편이 이득일 겁니다. 제 역할은 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단순 정찰이라면 제나 양도 있고, 저 수인도 가능하겠죠. 그러니 저를 빼십시오.”
나는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스스로 빠지면 다신 못 돌아와. 알고서 하는 말이냐?”
“예, 각오는 됐습니다.”
“다른 파티에도 자리는 없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네리사!”
벨키스트를 깨끗이 무시한 네리사가 말을 이었다.
“대기실의 업무가 바쁘신 걸로 압니다. 그 일을 저한테 맡겨주신다면 제가 원활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겠지요.”
네리사의 말 그대로였다.
내가 탑 공략에 집중하기 위해선 누군가 서브 마스터의 업무를 대행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한, 내려가도 되나?”
대련장의 키샤샤가 기지개를 켰다.
우뚝 서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키샤샤가 지나칠 때, 벨키스트는 토해내듯 말했다.
“선발전을 준비하라 해놓고, 이걸로 끝이오?”
“네 감정으로 판단하지 마라. 효율을 우선하는 거야. 여기선 내가 빠지는 게 나아.”
네리사는 싸늘하게 말했다.
뒤이어 부드러워진 눈으로 제나를 보았다.
“제 역할은 제나 양이 할 수 있겠죠.”
“이상한 걸 가르쳐주나 했더니, 이런 뜻이었어요?”
제나는 얼이 빠져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파티 구성에서 가장 최악은 싫다는 멤버를 억지로 데려가는 것이다.
“둘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네리사가 다소곳이 말했다.
“들을 가치도 없군. 저 여자는 넋이 빠진 것 같소.”
“자리를 비켜줘.”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키샤샤가 제일 먼저 나갔고, 고민하던 제나도 뒤를 따랐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벨키스트는 죽일 듯이 네리사를 노려보다 훈련장을 나갔다.
“둘만 남았군요.”
네리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이야. 갑자기 나간다니.”
“갑자기가 아닙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죠.”
“들어올 때는 생존이니 뭐니 일장연설을 늘어놓더니. 뭐 그리 바뀌었어? 다시 말하지만, 저 녀석한테 진다고 끝이 아냐.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나도 너희를 도와줄 거고.”
그럼에도 네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왜냐?”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아무도 믿을 수 없었죠. 저 말곤 모두 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네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조금, 생각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말 그대로입니다.”
네리사가 내게서 몇 발자국 멀어졌다.
진청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당신이라면 황녀님을……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네리사는 내게 등을 보였다.
옷깃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하얀 어깨와 함께 점차 몸의 굴곡이 드러났다.
‘저건…….’
허리의 곡선 한중간.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흡사 장미꽃 같은 그 문양은 불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황혼의 낙인’이라 불리는, 할기온 가의 특수한 비법입니다. 주인에게 절대복종하게 만드는 마법의 문양이죠.”
“…….”
“그 밖에도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신체 강화 및 두뇌 능력 향상. 수명 단축과 젊음 유지. 그리고…… 기억력 강화.”
네리사는 말을 이었다.
“어째선지, 이곳에 와서도 문양이 남아 있더군요.”
“그렇군.”
이 녀석은 할기온 출신이라고 했지.
그들을 별로 좋게 말하진 않았다.
나는 말했다.
“생전의 기억이 남아 있나?”
“예. 승급을 거치면서 대부분 떠올랐습니다.”
네리사는 상의를 다시 입었다.
문양의 잔상이 눈앞에서 맴돌았다.
네리사의 설명이 시작됐다.
자신은 본래 귀족이었으나, 암투 과정에서 가문이 쇠락해 노예로 팔려왔다는 것. 그리고 할기온 가문에서 특수한 대법을 받은 뒤 제국의 2황녀에게 선물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프리아시스 알 라그나. 그분이 제 주인이십니다. 저를 노예로 대하지 않으셨지요. 기억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만.”
네리사가 말했다.
“이 세계는 타오니어의 복원을 위해 만들어졌다. 맞습니까?”
기억을 갖고 있다는데.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은 알고 있었군요. 예상은 했습니다만.”
네리사가 싱긋 웃었다.
“다른 이들은 언제 진실을 알게 됩니까?”
“40층 이후.”
40레벨.
4성의 승급 제한이 풀린다.
나는 마스터의 기억을 되돌렸다.
3성과 4성은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게임적인 성능 문제가 아니다. 일단 임무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4성은 알고 있다.’
키샤샤와 셰이의 공통점.
그들은 임무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지금의 3성들처럼 반 억지로 수행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게임 바깥의 내가 그들에게 느꼈던 미묘한 차이는 거기서 비롯됐겠지.
‘설명해야 할 때가 오겠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 보고 온 게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니까.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2성과 3성 승급 때는 변변찮은 꼴만 봤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알아먹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4성은 다르겠지. 분명한 힌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그런데 그 기억이 네가 파티를 나가는 거랑 뭔 상관이냐?”
“크흠.”
네리사는 헛기침을 했다.
“싸울 필요가 있으면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열심히 하는 겁니다. 원래 본토에서 잡무 담당이었는데.”
“수상한데.”
“굳이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조사를 하고 싶습니다. 1파티에 속하면 남는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조사?”
“여러 가지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더군요. 특히…….”
네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리죠.”
“……?”
“어쨌든,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지금의 저보단 벨키스트가 쓸모가 많을 겁니다.”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다행이군요.”
네리사가 웃음을 지었다.
“그 바보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하루종일 훈련소에서만 구르다 쫓겨나면.”
“…….”
“질 게 뻔하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네리사가 훈련장을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서 발을 까딱거렸다.
‘영웅의 기억이라.’
지금 단계에서는 모른다.
네리사에게 기억의 상세한 내용을 묻지 않는 것도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탑을 오르다 보면 알 수 있겠지.
’40층.’
4성으로 승급을 하게 되면, 영웅의 취급이 약간 달라진다.
4성 영웅은 영웅의 세 번째 능력인 각인을 활용할 수 있었다.
‘어쨌든.’
서브 마스터를 대행할 영웅을 찾았다.
네리사라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성실한 축에 속하면서 맡은 일은 꼼꼼히 처리한다.
‘탑 공략을 재개해야겠군.’
이번에는 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