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55
54. 쾌도난마
* * *
그리고.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
이른 저녁.
나를 포함한 1파티는 1층 광장에 모여 있었다.
시야 우측에서 암케나가 바쁘게 조작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물약 등의 소모품을 분배하고, 파티의 상태를 점검한다.
“하아.”
제나가 긴장한 듯이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아자아자, 파이팅!”
주먹을 굳게 쥔 제나가 우리를 둘러보았다.
“할 수 있어요. 그쵸? 그렇게 고생했는데! 마지막이니까 아무 일 없이 깨자구요!”
“뭐, 어차피 잘 되든 안 되든 마지막 아니겠소. 실패하면 다 같이 뒈지는 거지.”
벨키스트가 히죽 웃엇다.
제나가 볼을 부풀렸다.
“반응 참. 아무도 힘내자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분위기를 원하면 저기로 들어가지 그러나? 아주 잘 맞을 거 같은데.”
벨키스트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2파티의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에디스가 밝게 웃으며 파티원의 어깨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시 2파티의 뒤로,
수많은 영웅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1공격대'(소형)를 구성합니다.] [파티 구성 – ‘1파티’, ‘2파티’, ‘3파티’, ‘4파티’, ‘5파티’] [영웅 총합 – 25] [공격대장 – ‘에디스(★★★)’]공격대 구성을 마친 암케나가 임무 탭에 들어갔다.
곧 임무가 시작될 것이다.
2회차 도전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다섯 번이었고, 이후 두 번의 실패를 더 겪었다.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하지만.’
실패에서 얻은 것도 없지 않다.
이번 임무의 공략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필드의 모든 포인트와 변수를 찾아냈고, 이에 대한 대처법도 구상이 끝난 상태. 나머지는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너한테 달렸다.’
나는 위를 보았다.
40층의 클리어 계획은 모의전을 통해서 전달했다.
암케나가 삽질한다면 우리는 이곳에 뼈를 묻겠지.
[※주의!] [이번 임무는 다섯 개의 파티가 요구되는 중형 임무입니다. 만약 파티 인원이 모자란다면 유료 소환이나 무료 소환을 이용해 영웅을 충원하세요!] [이번 임무는 선발대와 후발대가 정해져 있는 고정형 임무입니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후발대가 출전할 수 있습니다!]암케나가 40층 도전을 누르자 임무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20층과 비슷했다. 선발대가 먼저 돌입, 후발대가 뒤이어 투입. 다만 차이점은 선발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1파티가 무조건 나가야 했다.
그야 그렇겠지.
루프를 발견한 것은 1파티.
임무를 클리어하거나, 전멸하기 전까지는 타겟이 바뀌지 않는다.
[※주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 실패할 시 ‘1파티’ 소속의 영웅은 전부 소멸하며, 31층부터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깰 수 있겠지?”
카티오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안 될 것 같으면 오자고도 안 했어. 얘기한 대로만 해라.”
“어째 괜히 온 것 같아. 고생만 잔뜩 하고.”
“있던 곳보단 낫잖냐.”
“그건 그렇지만.”
카티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단검집이 잘 고정되어 있는지, 파우치의 끝은 제대로 묶여 있는지 점검했다.
암케나의 작업도 거의 끝이 보이고 있다.
쾅!
마침내 굉음을 내며 대문이 열렸다.
문 옆에서 이셀이 날개를 파닥거렸다.
[자자, 문 열렸어. 1파티 입장!]나는 가장 앞서서 시공의 틈으로 들어갔다.
이미 중앙의 거울이 빛나고 있었다. 뒤이어 멤버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2파티를 비롯한 후발대들은 광장에서 대기하는 중. 에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
에디스가 내게 고갯짓을 했다.
저 녀석과의 이야기는 어제 끝마쳤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실전만이 남았을 뿐.
‘못 돌아올 수도 있겠군.’
임무 자체가 빡빡하기 그지없다.
계획에서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모두 끝장일 것이다.
[메인 던전, 현 도전 층수는 40층입니다.] [10초 뒤, 문이 열립니다. 준비하세요!] [임무 녹화중입니다. 플레이 기록이 보존됩니다.] [전술소가 가동중입니다. 전술 탭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나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한.”
침묵 속에서 키샤샤의 속삭임이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키샤샤가 까치발을 한 채 내 귀에 입을 대고 있었다.
“만약 싸우다 죽는다면, 나를 남기지 말거라. 더 이상은 혼자 남고 싶지…… 아얏!”
나는 키샤샤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너희 종족은 개소리가 특기냐? 말이 되는 얘길 해.”
“하지만…….”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모두 살아서 돌아간다.”
“하, 하지만……!”
“당연하죠. 살아서 돌아가요.”
제나가 빙긋 웃었다.
벨키스트도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나와 죽어라 싸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어린애가 되었군. 전사라면서 창피하지도 않나. 부디 1파티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오.”
키샤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허튼소리는 안 할게.”
“알면 됐소.”
벨키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눈부신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소환의 섬광. 빛이 걷히고 나면 임무가 시작된다.
나는 칼집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어제 입이 닳을 정도로 말했었지. 아직 이해 못한 놈 있냐?’
“그 얘기는 열 번도 넘게 듣는 것 같구려.”
“완벽히 외웠어요.”
“나도.”
그렇겠지.
4회차의 루프를 끝마친 이후, 멤버들에게 몇 번이고 계획을 설명했다.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어선 안 된다. 일정이 톱니바퀴처럼 맞춰 돌아가야 계획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실패는 없어.’
나는 칼집에서 검을 조금 꺼냈다.
[플로어 40.] [임무 유형 – 불명] [목표 – 알 수 없음.]풀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쳤다.
다섯 번째로 맞이하는 평원 필드. 마지막 루프가 시작됐다.
임무를 시작하고 3초.
투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불꽃으로 물들었다.
마법 포격이었다.
“움직여!”
나는 즉각 초원을 내달렸다.
멤버들이 각각의 행동을 시작했다.
“크앙!”
키샤샤가 크게 포효했다.
[고유 스킬, 수화 발동!] [‘키샤샤(★★★★)’가 변신합니다!]거대 호랑이로 변한 키샤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필드 동쪽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넷은.’
서쪽으로.
때마침 보급대가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차의 한중간에 다짜고짜 뛰어들었다.
“이놈드을! 나, 여신의 분노를 대행하는 은빛 성기사! 카일 폰 스트라우스……!”
지겹네.
나는 폼을 잔뜩 잡고 있는 놈의 목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뒤이어 몇몇 주요 기사를 빠르게 처리한 뒤.
“벨키스트, 혼자 처리할 수하겠지?”
“걱정 마시오.”
“힘내요!”
이번 임무의 핵심은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
조금도 낭비할 수 없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얻어야 했다.
벨키스트를 혼자 남겨둔 뒤 우리는 다시 달렸다.
[화면을 슬라이드!] [마스터의 영웅에게 날개를 달아주세요!] [띠링!] [‘간달프(★)’를 전장에 소환합니다!] [‘라다가스트(★)’를 전장에 소환합니다!]암케나가 탈것을 불러왔다.
나는 옆에서 마주 달리고 있는 말의 등에 올라탔다.
말에 잽싸게 오른 제나가 카티오를 끌어당기더니 뒤에 앉혔다.
‘두 번째 구간.’
2회차에서 실패했던 곳이다.
마탄의 사수가 나오는 절벽. 온갖 기이한 궁술로 접근을 차단하는 코스였다.
“준비는?”
나는 고삐를 굳게 쥐고는 말했다.
카티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초도 망설이지 마. 바로 간다.”
“오빠, 맡길게요.”
“너희만 잘하면 돼.”
카티오가 품에서 마석을 꺼내 제나에게 건넸다.
제나는 마석을 화살촉에 달더니 곧장 장궁에 메겼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사격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다. 제나의 화살이 어느덧 가까워진 절벽 건너편을 겨누었다.
[Danger!] [마탄의 사수 Lv.?]돌다리 너머.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던 궁수가 일어섰다.
놈의 묵빛 활에 새까만 빛이 머물렀다.
퉁.
가벼운 소리.
나는 순식간에 비프로스트를 뽑아 휘둘렀다.
“……큭!”
쾅!
오른팔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첫 번째 사격은 뒤에서 날아왔다.
‘성가신 새끼.’
일단, 저놈이 쏜 화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향 또한 무작위. 분명 앞에서 쏘았는데 옆이나 뒤에서 나타났다. 방향이 제멋대로 꺾이는가 하면, 느닷없이 땅 밑에서 솟구칠 때도 있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다섯 발까지.’
사격이 이어질수록 위력이 강해지고, 기묘한 효과가 섞인다.
절벽 건너편까지 약 50m. 놈의 두 번째 사격이 이어졌다. 이번 패턴도 알고 있다. 나는 고삐에서 손을 놓고는 단검을 뽑았다.
카캉!
정수리 위.
왼쪽 늑골 아래.
거리는 30m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제나를 보았다. 말을 달리면서, 시위를 당긴 채 절벽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놈한테 화살은 안 먹혀.’
제나가 화살로 견제했지만,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마법 방어도 시험했으나 우습게 관통당했다. 모두 직접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갑니닷!”
제나가 경쾌한 구령과 함께 시위를 놓았다.
장궁으로부터 빠져나간 화살이 매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마탄의 사수가 세 번째 사격을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히히히힝!”
[‘간달프(★)’가 역소환되었습니다!]말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교차하듯이 날아간 제나의 화살은, 놈이 디디고 있는 절벽의 아래쪽에 박혀 들었다.
「이어져라!」
카티오가 마력이 담긴 음성으로 외쳤다.
말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내 몸이 땅에 처박히기 전.
‘기회는 한번.’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알싸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가 싶더니.
「텔레포트!」
번쩍!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아래에는 끝 모를 암흑. 위에는 파란 하늘과,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이 있다. 놈은 당황하면서도 사격을 준비했다.
“될 거 같냐?”
나는 단숨에 절벽을 박차고 올라갔다.
시위를 당기려는 놈의 면전에 박치기를 먹였다.
놈이 휘청거렸다.
“……!”
퍽!
다리를 걸어 자빠뜨린 다음, 그대로 걷어찼다.
놈은 옷깃을 휘날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끝. 나는 귀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벨키스트, 끝났냐?”
“이쪽도 됐어. 두 명과 합류해서 궁수 부대를 처리해.”
제나의 말이 돌다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내가 눈짓하자 카티오가 다시 수인을 맺었다.
‘……정상적인 루트로는.’
시간이 부족하다.
아무리 루트를 짜도 클리어 시간이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변칙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마학자는 전면전에서 원소술사보다 약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클리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한 공간 압축. 이렇게 하면 억지로 전력을 나누지 않으면서도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이어져라!」
카티오의 두 번째 텔레포트가 시전됐다.
정신을 차렸을 때.
키샤샤의 등 위였다.
‘다음.’
동쪽 필드에는 세 개의 요새가 있다.
최종 목표는 모든 요새를 전부 점령하는 것이지만…….
‘우선순위가 있지.’
후발대를 불러들이는 오브젝트가 설치된 요새가 있다.
빠른 클리어를 위해서는 후발대를 먼저 소환하는 것이 당연지사.
문제는 해당 오브젝트가 세 개의 요새 중 랜덤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정답을 알 수 없다.
[띠링!] [전술 탭을 개방합니다!]‘그렇지.’
암케나는 지시 도구를 선택한 뒤 화면에 대고 그었다.
지잉!
하늘에 붉은 화살표가 그려졌다.
화살표는 북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자.”
키샤샤가 방향을 꺾더니 초원을 달려나갔다.
말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 순식간에 요새의 풍경이 가까워졌다.
수 미터 높이의 검은 성벽이 나타났다.
[교단군 궁수 Lv.36] X 15피피피핑!
일제 사격을 지그재그로 피한 키샤샤는 성벽에 다가붙더니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키샤샤의 송곳니에 걸린 궁수 한 명이 걸레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성벽 위에 착지한 키샤샤는 앞발을 휘둘러 세 명을 찢어발긴 다음 곧장 요새 안으로 도약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여신상이 파란빛을 발하고 있었다.
[Danger!] [상급 이단심판관] [괴력의 로드비크 Lv.46]역시 나타났다.
여신상 앞, 3m에 가까운 거인이 철갑을 두른 채 철퇴를 들고 있었다.
악마를 빗댄 면갑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단에게…… 죽음을……!”
녀석이 기둥 같은 철퇴를 들어 올렸다.
3회차에선 여기서 시간을 많이 지체했지.
나는 피식 웃고는 검을 가로 쥐었다.
‘익시드.’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나는 머리를 내리찍으려 하는 철퇴에 검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콰직!
폭발음과 함께 철퇴를 든 놈의 오른손이 솟구쳤다.
“우오오오!”
키샤샤가 앞발로 놈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철판이 찌그러지며 녀석의 거대한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뒤져.”
나는 면갑 틈새로 검을 쑤셔 박았다.
나는 불타는 듯 뜨거워진 머리를 가라앉혔다.
[‘한(★★★)’의 익시드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후우.”
온몸의 뼈가 삐걱거렸다.
살짝 발동시킨 것만으로 이 정도.
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나는 체력 물약을 입에 물고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요새 안으로 병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키샤샤.”
우직!
흉포한 앞발에 여신상의 상체가 박살 났다.
새파란 빛이 흩어지며 하늘로 솟구쳤다.
[오브젝트 효과 발동!] [마스터, 후발대 투입이 가능해졌습니다.] [위기에 빠진 영웅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세요!]스타트는 좋아.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텅 빈 유리병을 내던진 후 키샤샤의 등 위에 올라탔다.
[후발대를 선정합니다.] [지정 파티 – ‘2파티’, ‘3파티’, ‘4파티’, ‘5파티’]소환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금쯤 필드의 스타트 지역에서는 갓 소환된 영웅들이 무리 지어 있을 것이다.
키샤샤가 요새의 벽을 타고 오르며 벗어나는 와중, 나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에디스, 나야. 들리냐?”
“시간이 없어. 바로 멤버를 끌고 움직여라. 점령해야 할 곳은 마스터가 알려줄 거야. 저번에도 왔으니, 알고 있겠지.”
“세부적인 지휘는 네가 해. 그리고 말했지만, 안 될 것 같은 놈은 빨리 버려라. 신경 써줄 시간 없으니까. 쌍둥이 마법사는 꼭 데려가고.”
“맡기마.”
나는 통신을 끊었다.
에디스 파티의 역할은 명확하다.
우리가 필드 전체를 오가며 주요 장애물과 네임드를 처리하는 특공대라면, 그들은 직접적으로 적지에 깃발을 꽂는 보병대였다.
요새를 빠져나온 키샤사가 으르렁거렸다.
“두 명 남았어. 아래로.”
요새마다 한 마리씩 네임드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다.
각각의 특징도 확실했다. 방금은 괴력. 다른 놈들은 각각 신속과 기교다.
세 명 모두,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꽤나 귀찮은 녀석들이다.
[검은 기사 Lv.41] X 5뒤쪽의 요새에서 성문이 열리더니, 검은 말을 탄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우리를 쫓기 위한 추격대. 이것도 예상 내였다. 오히려 이쪽에서 시선을 끌어준다면 공격대의 점령이 쉬워진다.
“가자.”
공격대는 암케나의 지시를 받아 필드를 오른쪽으로 돌며 요새를 점령할 것이다.
나는 키샤샤와 함께 남쪽으로 질주했다. 그들이 첫 번째 요새에 도착하기 전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했다.
‘여기까지 32분 33초.’
회중시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
남은 여유는 약 2시간 30분.
[Danger!] [상급 이단심판관] [신속의 라젤카 Lv.46]두 번째 요새의 오브젝트 앞.
흑기사가 쌍검을 화려하게 돌렸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시야를 현혹하는 놈이다.
“……후후.”
놈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더니,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패턴은 익숙한데.’
나도 마주 웃었다.
나보다 빠른 상대와는 지겨울 정도로 싸웠었지.
리디기온부터 키샤샤까지.
나는 순간적으로 왼손을 뻗었다.
“컥!”
갈퀴처럼 움켜쥔 왼손에는 놈의 목이 잡혀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놈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목뼈가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놈의 몸이 늘어졌다.
‘약해빠졌긴.’
시체를 던져버린 다음, 정면을 보았다.
[교단군 병사 Lv.26] X 157여신상 앞에 수많은 병사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무리한다면 돌파한 뒤 여신상을 부술 수 있겠지만,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다.
귀찮은 건 처리했다. 뒷일은 에디스 파티에게 맡기면 된다.
‘한 명 남았군.’
나는 병사들을 힐끗 돌아본 뒤, 키샤샤를 타고 요새를 빠져나왔다.
흑기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추격해왔다.
“카티오, 들리냐?”
“두 번째까지 처리했다. 바꿔.”
몇 초 뒤, 빛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공간이동의 신호. 나는 키샤샤의 갈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난 간다. 이따 보자고.”
번쩍.
눈을 감았다 뜨자, 평원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전장에 합류하려던 궁병대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벨키스트가 일어났다.
“오셨군. 이제 출발하려던 참이오.”
카티오가 마력 물약을 들이켜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제나는 지금 키샤샤와 함께 세 번째 네임드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상성상 나보단 그 녀석이 훨씬 유리하니까.
‘전장의 상태는…….’
나는 옆을 슬쩍 보았다.
교단군이 사자군을 포위한 채 쌈 싸 먹고 있었다.
강렬한 화염이 사자군의 우측에 작렬했다. 여기까지 약 73분.
사자군이 전멸하기까지 반절의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됐어.”
채비를 갖춘 카티오가 일어났다.
순간이동 마법을 남발한 탓인지,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좀만 더 수고해줘라. 얼마 안 남았어.”
나는 카티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티오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마지막이군.’
궁병대의 북쪽에는 평원을 가로지르는 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역시, 절벽과 마찬가지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었다.
그 너머에는…….
[Danger!] [검은 탁류의 마도사 Lv.?]세 번째 도전에서 나를 좌절케 했던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마법사가 입을 달싹거렸다.
쿠르르릉!
번개가 치는 소리가 나더니 강의 흐름이 격렬해졌다.
순식간에 불어난 물길이 소용돌이치며 탁류를 형성했다.
일종의 방벽이었다. 너희는 이곳을 지나칠 수 없다는.
‘꽤 귀찮았지.’
35층에서의 경험도 되살릴 수 없다.
물의 흐름이 너무 강했으니까. 수중 보행 마법을 걸어도 통과하지 못했다.
따라서.
카티오가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달걀형의 푸른 차원문이 생겨났다. 뒤이어 카티오가 복잡한 수인을 맺자 차원문이 빛을 발하더니 두 개의 형체가 튀어나왔다.
“지금 여기!”
“바람과 냉기의 쌍마도사, 등장했습니다!”
레인과 메인.
2파티 소속의 쌍둥이 원소술사였다.
두 명은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아마,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한창 싸우고 있었을 터.
“바쁘겠지만, 부탁할게.”
“그럼요! 후딱 끝내고 돌아갈게요!”
쌍둥이는 손을 맞잡더니 노래를 부르듯이 마법어를 읊었다.
레인의 오른손에서 일어난 바람이 하늘로 솟구쳤고, 메인의 왼손에서 뻗어 나간 냉기가 바람과 합쳐졌다. 두 명은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카티오를 바라보았다.
“후우, 진짜. 죽여라, 죽여.”
카티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마력의 실이 냉기와 바람에 섞여져 두 마법을 하나로 엮었다.
[띠링!] [합체 대마법, ‘울부짖는 폭풍(★★★★)’이 발동합니다!] [시전자 – ‘레인(★★★)’, ‘메인(★★★)’, ‘카티오(★★★★)’]우우우우우우웅!
“거 한번 화려하군.”
벨키스트가 말했다.
그렇겠지. 하늘에는 직경 수십 미터의 폭풍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합체 대마법. 상성이 맞는 마법사끼리는 마력과 술식을 엮어 보다 강한 위력의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
카티오가 손으로 강 너머의 마법사를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벽과 같은 폭풍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고하십쇼! 먼저 갑니당!”
“나중에 봐요!”
할 일을 마친 쌍둥이는 찡긋 웃더니 차원문 안으로 사라졌다.
벨키스트는 나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즉각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쫓았다. 폭풍은 강 위를 나아가며 물길을 남김없이 몰아내고 있었다. 일종의 방어벽인 것이다.
‘저놈은 마법 공격에 면역.’
원거리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이를 가로막은 강을 직접 뚫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폭풍을 앞세운 채 강물을 지나갔다. 마법사가 각종 방해 마법을 걸어왔지만, 카티오의 지원에 무력해졌다.
스걱.
결국, 놈은 벨키스트의 검날에 목을 내줬다.
‘경과 시간.’
103분 22초.
80분 남았다.
나는 시계를 집어 던졌다.
어차피 되든 안 되든 마지막.
더 이상 시간을 체크할 필요는 없겠지.
“더, 더 이상은…… 못해!”
카티오가 뒤에서 주저앉았다.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수고했다. 나머진 우리가 하지.”
“……맡길게.”
카티오는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 녀석은 여기서 아웃. 그런대로 맡은 역할을 잘 해주었다.
‘마지막 포인트.’
강을 건너면 아무것도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저번 거점처럼 보급대나 궁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허허벌판일 뿐.
‘…….’
나는 한 언덕 위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개의 부대가 뒤얽혀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교단군이 후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최적의 공격 지점.’
적을 기습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다.
방어 병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부대의 바로 뒤편.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공격한다면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제나의 흥분한 목소리가 귀에서 울려왔다.
“잘했어. 곧장 돌아와라.”
나머지는…….
‘네 몫이지.’
암케나의 화면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실제로 파고들면 별거 없다. 적당한 위치에 공격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니까. 최대한 암케나에게 부담이 덜 가게끔 전략을 설계했다.
‘공격하고, 점령하고, 다시 움직여.’
여기서 암케나의 역할은, 병력들을 올바른 길로 유도하는 것.
요새가 위치한 동쪽에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각종 장애물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찾아놓은 샛길들이 있다. 영웅들을 그 위치로 이끌기만 하면 된다. 세세한 전투 지휘는 에디스가 대신할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브젝트 효과 발동!] [차원벽에 손상이 가기 시작합니다!]콰직.
전장과 우리를 가로막은 투명한 벽에 금이 새겨졌다.
마치 유리의 균열처럼.
‘하나 남았네.’
나는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덕 북쪽에서 키샤샤와 제나가 평원을 달려오는 중.
그 뒤에는 수십여 명의 흑기사가 두 명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다.
‘우리도 마지막인가.’
이 필드에서 마지막 남은 1파티의 역할.
바로 저 새끼들 족치는 거지. 내버려 두면 전장에 들어가서 프리아 쪽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나는 칼집에 손을 올리며 통신을 열었다.
“에디스, 세 번째 여신상을 부수면 전장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거야. 그대로 합류해서 방어선을 지켜. 최소한의 진형만 무너지지 않게만 버티면 돼.”
“우리는 뒤에서 난장판을 쳐놓을 거다.”
에디스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통신을 끊었다.
이제 임무가 끝난 뒤에나 얼굴을 볼 수 있겠군.
“오는군. 마중을 나가야 하지 않겠소?”
벨키스트가 검을 뽑았다.
“그래야지. 가자.”
우리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기사를 태운 말들이 달려오며 흙먼지를 흩뿌리고 있었다.
바로 정면 방향. 기사단에 잘못 부딪혔다간 피떡이 될 것이다.
‘하아.’
검을 굳게 쥐었다.
궁금했었지. 예전엔 강철을 베지 못했다. 그렇기에 각종 꼼수를 이용해서 판금 갑옷을 입은 놈들은 상대했었다. 이제는 어떨까.
푸릉!
선두에서 달리던 말들이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시뻘게진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 번에.’
자루를 느슨하게.
비프로스트를 늘어뜨린 채 검을 돌렸다.
철컥. 기계음과 함께 검날이 확장됐다. 대검 형태.
육중한 무게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오빠!”
키샤샤 위에서 제나가 손을 흔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나는 장궁에 시위를 메겼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바로 정면.
맨 앞의 기사가 창을 휘둘렀다.
‘익시드는 없지만.’
특수 스킬에만 의지할 수는 없지.
나는 진각을 내지른 채 검을 휘둘렀다.
전신의 근육이 한계까지 힘을 짜 올렸고, 말머리를 무처럼 토막 낸 대검은 흑기사의 창을 박살 낸 다음 판금 갑옷이 입혀진 상체를 가로로 썰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흑기사는 수 미터나 달려가서야 피와 살점을 흩뿌렸다.
“다 죽여!”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 순간, 머리를 돌린 키샤샤가 기사의 얼굴을 물어 씹었고, 제나의 화살이 한 놈의 목을 꿰뚫었다. 달려가던 말에 올라탄 벨키스트가 기사의 등 뒤에 검을 쑤셔 박았다.
[오브젝트 효과 발동!]그리고 세 번째 여신상이 파괴되었다.
[Destiny Break!]콰칭!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장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빛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임무가 변경되었습니다!] [임무 유형 – 정복] [목표 – 전쟁의 판도를 뒤바꿔라!]흑기사의 피가 얼굴을 적셨다.
여기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걸 이기라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인데.
여러 공작을 거치긴 했으나, 전황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불리하다.
몇 명으로는 상황을 절대 뒤집을 수 없다.
그만큼 압도적인 차이였다.
‘……그래도.’
나는 니플헤임의 멤버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영웅이라 불리는 이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이제 내 순서가 돌아왔을 뿐이다.
끈적한 피 내음 속에서 나는 웃었다.
십수 명의 흑기사들이 나를 지나치며 무기를 휘둘렀다.
대검이 내리 찍히고, 철퇴가 쇄도했으며, 창이 쏘아졌다. 나는 그 자리에 굳건히 땅을 디딘 채 모든 공격을 쳐냈다. 흙먼지와 투레질 소리로 사방이 어지러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조금의 틈이라도 드러내는 놈이 있다면,
서걱!
한 놈의 목이 공중에 솟구쳤다.
잘린 목의 궤적을 따라 검은 피가 흩어졌다.
“부탁한다.”
에디스를 비롯한 20여 명의 영웅들이 방어선에 가담하기 위해 나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패배를 지연시키는 정도.
지금, 전투의 판도를 뒤바꿔야 할 주역은 다름 아닌 우리였다.
어떤 방법을 쓰든 해내야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전부 죽을 테니까.
그중에서도…….
‘내가 해야 돼.’
나는 적의 공격을 쳐내고, 때때로 반격하며 머리를 굴렸다.
소수가 전투의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
‘이거 원.’
의외로 방법은 간단했다.
세 명의 흑기사가 동시에 창칼을 찔러오자,
나는 바닥을 굴러 피해내고는 옆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멤버들에게 외쳤다.
“움직여! 싸움터를 바꿔야 돼!”
“어디로요?”
“딱 보면 몰라? 어디겠냐!”
나는 몸을 일으킨 뒤 곧장 뛰었다.
가파른 경사의 내리막길 끝에는 전장의 후열이 위치하고 있었다. 후열에선 교단군의 마법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음 마법 포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과연. 적지에서 싸우라 이거군.”
“당연하지.”
우리 모두 난전에는 이골이 나 있다.
물론,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놈들의 혼란을 위해서는 적지 한가운데에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종아리 근육에 힘을 실으며 땅을 박찼다. 몸이 화살처럼 경사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오빠!”
옆에서 키샤샤를 타고 달리던 제나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호랑이의 등 위에 탑승했다.
뒤에서 흑기사들이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었다.
“벨키스트, 마법사들을 맡아라! 마법을 못 쓰게만 해도 돼.”
“그러지.”
벨키스트가 피로 범벅이 된 검을 들어 올렸다.
내리막길의 중간 지점을 돌파했다. 본래 이쯤에서 투명한 벽에 막혀야 했지만, 지금은 길이 가로막혀있지 않았다. 나는 사납게 뛰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이제까지는 전초전. 앞으로가 진짜였다.
“뭐, 뭐냐!”
맨 뒤쪽에 있던 마법사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핑! 내 뒤에 있던 제나가 재빨리 놈의 숨통을 끊었다.
‘최대한 빨리.’
지금도 전방에서는 시시각각 교단군이 사자군을 잡아먹고 있을 것이다.
“흐읍!”
제나가 숨을 짧게 들이마시자, 눈에 붉은빛이 맴돌았다.
단궁의 시위에 세 발의 화살이 실리더니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가 세 명의 마법사를 꿰뚫었다. 뒤늦게 기습을 감지한 마법사들이 외쳤다.
“후방! 후방을 봐! 적습이다!”
“호위병들은 무얼 하고 있나!”
중장갑옷을 입은 보병들이 나섰다.
마법사 부대의 전용 호위병인 듯했다.
그들의 방패를 앞세운 채, 마법사들이 이곳을 향해 캐스팅을 시작했다.
쐐액!
제나의 단궁에서 쏘아진 화살이 느닷없이 뱀처럼 휘어지더니, 방패벽의 틈새를 지나갔다. 영창을 이어가던 한 마법사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합체 스킬, 사이드와인더.
사격의 궤적을 곡선으로 바꾸는 상위급의 궁술이었다.
방패병의 전열이 주춤거렸다.
제나가 사격을 이어가는 사이, 나는 키샤샤의 갈기를 어루만졌다.
“단숨에 돌파한다.”
나는 오른손의 검자루를 느슨하게 쥔 다음, 힘을 끌어모았다.
“침착해라! 침착하고 적을……!”
“크아아앙!”
방패벽을 단숨에 뛰어넘은 키샤샤가 장교의 머리통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대검을 휘둘렀다. 궤적에 걸린 병사들이 파도에 모래가 밀려나듯, 장난감처럼 쓸려나갔다.
“마법사는 제가 맡을게요!”
쐐애액!
제나가 시위를 당길 때마다 한 명씩 마법사가 죽어 나갔다.
무서울 정도의 솜씨. 방패병을 앞세워도, 지형 뒤에 숨어도 화살은 어김없이 휘어져 나가 타겟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걸로는 모자라.’
마법 병단은 교단군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백지장 같은 얼굴이 되어 도망가는 마법사를 반절로 쪼갰다.
“너희들은 뭐냐! 어디서 나타났어? 분명 사전 정찰에선…… 컥!”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교가 목을 부여잡고는 쓰러졌다.
벨키스트가 놈을 지나치며 놈의 목에서 단검을 회수했다.
“가시오. 여긴 내가 맡지.”
“죽지 마라.”
“그럴 것 같소?”
벨키스트는 씨익 웃더니 검을 들어 올렸다.
“대장이 있는 곳이지.”
상급 지휘관들을 모조리 도륙 낸다면, 병력의 사기와 지휘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머리를 돌린 키샤샤가 다시 뛰어나갔다. 뒤에선 마법사와 호위병의 틈새에 파묻힌 벨키스트가 흑기사와 검을 섞고 있었다.
“제나, 높아 보이는 새끼들이 나타나면 다 죽여.”
“반짝거리는 갑옷을 입은 사람을 쏘면 되는 거죠. 맡겨둬요.”
“저건 무슨…… 억!”
때마침 보급대를 이끌고 가던 장교가 화살을 맞고 널브러졌다.
병사들의 눈에 당황이 깃들었다. 그렇겠지. 웬 거대 호랑이를 탄 두 명이 후방을 휘젓고 있으니.
“무시해라.”
잔챙이들은 상대할 필요 없다.
목표는 저기 언덕 너머의 3층 텐트.
수많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병력을 통제하는 지휘소가 분명했다.
‘문제는, 저길 처리해도 이길 수 있느냐인데.’
일단 족치고 나서 생각하자.
우리는 기병 돌격을 준비하고 있던 부대를 지나치며 난장판을 쳐놓았다.
이제 슬슬 적의 대응이 시작된 것 같다. 저쪽 고지대에 궁병대가 나타났다.
“쏴라!”
백 명에 가까운 궁병이 일제히 장궁을 쏘아 보냈다.
키샤샤가 주춤거리자, 제나가 외쳤다.
“안 피해도 돼요! 계속 가요!”
단궁을 쥔 제나의 손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방향은 하늘. 우리에게 날아오던 화살들이 제나의 화살에 맞부딪혀 박살 났다.
“저건 뭐야?!”
장교가 한순간에 벙찐 표정이 되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마주 쏴서 떨어뜨린다니.
이미 인간의 솜씨라고는 볼 수 없었다.
‘완전 괴물이네.’
뭐, 이 정도가 아니라면 깰 수 없겠지.
“히이이익!”
키샤샤가 가까이 다가가자 공포에 질린 궁병대는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장교가 아무리 붙잡고 만류해도 들을 리 만무. 놈도 제나의 사격에 숨통이 끊겼다.
그 너머의 지휘소로 가는 길.
[교단군 병사 Lv.21] X 217 [교단군 기사 Lv.25] X 28아주 바글바글하군.
수백 명의 병력이 떼거리로 모여 있다.
지휘소 함락을 막기 위한 저지선이겠지.
“에디스, 어떻게 되고 있냐?”
“그쪽 대장하곤 연락했냐?”
“후퇴는 안 돼. 싸우라고 해라.”
잠깐의 대기 후, 에디스가 말을 이었다.
“거기 마법사 있지. 직접 연결해달라 그래.”
나는 쉬고 있는 카티오에게 통신을 넣은 다음, 대장과의 연결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인사는 집어치워. 서로 시간 없잖아.”
나는 뒤이어 말했다.
“도망치는 건 용납 안 해. 이겨라.”
“윗대가리들을 다 죽여주마. 그럼 되겠지.”
나는 통신을 끊었다.
개인이 부대를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복잡하지 않다. 머리를 잘라내면 된다.
물론, 실행하는 데까지 문제가 적진 않았지만.
[교단군 병사 Lv.21] X 453 [교단군 기사 Lv.25] X 67‘대체 몇 명이지?’
지휘소 앞의 병력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놈들은 끝을 모르고 불어나며 앞을 가로막았다. 병사만 있다면 다행이겠지. 수 겹의 울타리와 높은 바리케이트가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뚫을 수 있겠어요? 아무리 키샤샤 씨라도, 저길 돌파하는 건…….”
제나의 목소리에 초조가 묻어났다.
맞는 말이었다. 호랑이 폼의 키샤샤는 일반 군마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다. 생물적인 한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 명.
저기는 어림잡아 사오백 명이다.
단순히 돌파만 한다면 어떻게든 될지 모르지만, 뒤이어 지휘소에 있는 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고르고 고른 엘리트들이 사방에 깔려있겠지.
‘……하지만.’
해야 돼.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제나.”
“네.”
“날 저기까지만 보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한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장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Danger!] [상급 전쟁 지휘관] [로드비오 시스티나 Lv.43] [Danger!] [상급 전쟁 지휘관] [시르다오 시스티나 Lv.43] [Danger!] [상급 전쟁…….]무수한 경고음과 함께 네임드 표시가 떠올랐다.
빠르게 명단을 훑어보았다.
합쳐서 열일곱 명. 레벨은 4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레벨을 보니 단독 전투력도 우수한 놈들이었다.
“……오빠.”
키샤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화살과 창과 검을 피하면서 질주를 이어갔다.
“딱 한 번이면 돼.”
“알았어요.”
제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소까지의 거리는 약 20m.
이미 근처에는 병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들은 창과 검으로, 혹은 몸으로 우리 앞을 막아왔다.
키샤샤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뚫을 수 없나.’
방패병들이 1열을 가로막고, 그 뒤로 장창병이 2열을, 장검병이 3열을 막고 있다.
은빛의 사각 방패 사이로 장창이 드러났다. 키샤샤가 진형의 빈틈을 찾아 요리조리 뛰었지만, 빗발치는 공격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키샤샤(★★★★)’가 출혈 상태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눈먼 창이 키샤샤의 가죽을 찢었고 살을 할퀴었다.
등 위의 우리에게도 공격이 몰려들고 있었다.
‘포위됐나.’
후방도 이미 틀어막혔다.
마침내 모든 길이 막히자 키샤샤가 발을 멈췄다.
[교단군 병사 Lv.21] X 674 [교단군 기사 Lv.25] X 92 [교단군 마법사 Lv.31] X 5 [교단군…….]적의 숫자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다.
“왜?”
나는 피식 웃었다.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던 중년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Danger!] [교단군 총 지휘관] [철혈의 발렌티온 Lv.56]네가 대빵인가.
‘저놈을 죽여도…….’
일시적으로 혼란은 있을 것이다.
총사령관이 죽은 거니까.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곧 지휘 계통은 복구될 것이다.
자리를 이어받을 지휘관은 열여섯 명이나 있었다. 잠깐 혼란을 준 것에 불과할 뿐,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후우.’
나는 숨을 내쉬었다.
“크아아아앙!”
키샤샤가 포효한 것은 다음이었다.
선두의 병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크게 울부짖은 키샤샤는 몸을 길게 빼더니, 한순간에 뛰어올랐다. 거대한 몸이 수 미터의 높이까지 도약했다.
키샤샤가 공중에서 나를 물은 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저 너머, 지휘소가 있는 쪽으로. 수백 명의 병사와 바리케이트가 일제히 멀어졌다.
‘이걸로는 모자라.’
거리가 닿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요!”
옆에서 제나가 깍지 낀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균형을 잡은 뒤, 제나의 팔을 박차고 한 번 더 날아올랐다.
[‘제나(★★★)’가 출혈 상태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화살이 제나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를 대신해서 맞아준 것이다. 나는 추락하는 제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검날을 돌렸다.
도약 높이는 10m. 중간의 높은 토벽을 한 번 더 박찬 나는 지휘소 앞까지 뛰어올랐다.
‘확실히.’
한 명을 죽인다고 끝이 아니다.
머리 하나가 잘려도 대체할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마치 히드라처럼.
그러니.
‘깡그리 죽이는 수밖에.’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우직.
전신의 골격이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통증이 뇌를 뒤흔들었다.
‘내가 그동안 개지랄을 했던 건.’
익시드 스킬을 쓰고 풀기를 수백 번이나 반복했다.
지옥 같은 고통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넘겼다. 제나와의 고행도, 뼈를 깎는 듯한 훈련도, 다 이 한순간을 위한 것.
나는 17명의 네임드가 모인 공터의 한중간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짓쳐오는 각종 무기들. 하나같이 급소를 노리고 있다.
‘늦었어.’
나는 히죽 웃었다.
쾅! 전력으로 진각을 밟았다.
오른손은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킬, ‘패검혼’ 발동!]슬로우 카메라를 돌리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사방에서 급소를 노린 창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
쾅!
내가 휘두른 검에 부딪힌 창이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갔다.
창수가 놀랄 사이도 없이, 놈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불타는 듯 뜨거운 몸을 억누르면서 나는 힘을 계속 주었다.
‘한 명으로는 안 돼.’
마침 교단군의 상급 지휘관들이 종합 세트로 모여 있다.
지금 이 타이밍이야말로, 전세를 뒤집을 최고의 찬스였다.
‘단칼에.’
검날에 파란빛이 머물렀다.
수룡과 골렘을 한꺼번에 썰었을 때 봤었던 그 눈부신 광채였다.
패검혼.
익시드 상태의 잠력을 전부 끌어올려 날리는 일격 필살기.
물론 힘을 쓴 만큼 반동이 돌아오겠지만, 힘 조절 같은 건 안 한다.
“……흐읍!”
폐가 터질 정도로 숨을 들이쉬자 시간의 흐름이 돌아왔다.
머리와 목, 심장과 폐를 겨눈 무기가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투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주위의 모든 것이 박살 나 흩어졌다.
검격이 끝난 뒤, 지휘소가 있는 언덕 전체에 한 차례의 먼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삐걱거리는 팔을 겨우 움직여 땅에 검을 꽂았다.
이윽고 먼지구름이 걷혔다.
그 사이로 지휘소의 풍경이 드러났다.
“……?”
가까이 있던 병사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온갖 인챈트와 복잡한 제작 과정을 거친 무기와 갑옷들도, 단련에 단련을 거친 강자의 육신도, 심지어 고층 천막과 깃발, 언덕 지형의 일부까지도. 남김없이 갉아먹었다.
언덕 위쪽은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마냥 움푹 파여 있다.
위풍당당하던 지휘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당연, 나 말고 멀쩡한 놈이 있을 리 없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한 놈이 대다수였다.
쿨럭.
검붉은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순간 휘청거렸으나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오빠!”
제나가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을 뛰어넘으며 다가왔다.
제나는 검을 짚으며 서 있는 내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래 보이냐?”
검면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얼굴 전체가 피로 덮여 있다. 땅을 딛고 선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가죽 갑옷은 사방팔방이 찢어져 있다. 누더기 꼴이 따로 없었다.
뒤이어 키샤샤가 뛰어왔다.
수화가 풀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저자는…… 악마인가?”
언덕 아래에 서 있던 한 기사가 탄식했다.
놈을 비롯한 교단군 병사들의 눈에 공통된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포.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보면,
나는 단 일검에 수십 평방미터의 공간을 초토화시킨 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다.
검을 짚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멀쩡한 척을 하는 것일 뿐.
이 순간에도 시야가 흐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포위한 수백 명의 병사들은 우리에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멀리서 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하하, 멋있어, 한! 과연 최고야!”
키샤샤가 호탕하게 웃으며 등을 때렸다.
힘 조절 좀 해라. 더 세게 두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데.
“큭……!”
신음이 들렸다.
쓰레기장처럼 박살 난 고층 지휘소의 구석.
피투성이가 된 기사가 쓰러져 있었다.
[교단군 총 지휘관] [철혈의 발렌티온 Lv.56]안 죽었군.
저 남자는 비교적 후방에 있었다.
앞선 놈들이 고기 방패를 해준 덕에 목숨은 건진 것 같았다.
상태를 보니, 얼마 안 가 알아서 죽겠지만.
‘선언을 해야겠지.’
나는 검을 지팡이 삼아 놈에게 다가갔다.
기사에게선 처음의 위엄 어린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이놈……!”
“안 뒤져서 다행이야. 그래야 실감이 나거든.”
나는 남자의 얼굴을 짓밟은 뒤,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잘 봐라. 너희 대장의 모습을.”
우둑.
손아귀에 힘을 주자 목뼈가 부러진 기사가 늘어졌다.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이나 레벨을 보면 네임드 중에서 최상위급. 원래 임무 설계대로라면 영웅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겠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그냥 개죽음이야.
나는 팔다리가 늘어진 남자를 언덕 아래로 집어 던졌다.
병사와 장교들이 일제히 주춤거렸다.
사기 저하를 위한 쇼. 제대로 먹힌 것 같다.
“후후.”
“오빠, 완전 악마인데요. 웃음이 사악해요.”
“사기를 꺾어야지. 못 덤비게. 쿨럭.”
더럽게 아프군.
하마터면 티를 낼 뻔했다.
나는 카티오에게 즉각 통신을 넣었다.
연결 대상은 상대 측 사령관. 지휘소는 전장에서도 높은 언덕에 있는 만큼, 방금의 장면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내가 말한 대로 됐다. 윗대가리를 다 족쳤어. 이제 이길 수 있겠나?”
“해보겠소가 아니라, 하겠소야. 말은 똑바로 해라.”
전장을 바라보았다.
사자군의 삼면을 둘러싼 채 맹공을 퍼붓고 있던 교단군들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지휘부가 전멸당했다는 것이 전해졌겠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쇼까지 벌였다.
한편, 에디스를 필두로 한 제1 공격대는 파상 공세를 퍼부으며 교단군 우측을 박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쌍둥이 원소술사의 마법 엄호 아래에서 거침없이 나아갔다.
‘괜찮은 수를 냈군.’
상대의 포위진을 망가뜨리기 위해 한쪽 날개를 집중적으로 조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군 측의 대장에게 통신을 넣었다.
“상대는 지휘관이 없어. 군대가 아니라 일개 병사들의 모임이라 이거지. 여기서 못 이기면 당신은 병사보다 못한 쓰레기야. 알지?”
“그럼 다행이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다.
곧 전투가 시작된 이래, 물러서기만 하고 있던 사자군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도망치기 급급해 후방에만 있던 기병대가 나선 것이다.
어떻게든 된 것 같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이 뒤처지는 만큼, 이제 시작이었다.
사자군의 지휘관이 차린 밥상도 못 먹는 얼간이라면 여기서 끝일 뿐.
“뭣들 멍하니 있는 거냐!”
청년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과연. 정신을 차린 놈도 있는 것 같다.
“하, 하지만…….”
“보면 모르느냐! 악적들도 멀쩡하지 않아. 힘을 합친다면 능히 처단할 수 있다. 멀쩡히 돌려보낼 셈이냐? 정녕 발렌티온님의 원통함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기사를 시작으로 몇몇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생존의 분기점이 온 것 같다. 키샤샤와 제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마주 섰다. 네임드를 쓸어냈다고 해도 아직 우리는 포위된 상태였다.
“싸울 수 있겠어요? 힘들면 무리하지 마시구요.”
“나하하! 우리가 싸울 수 있으니 괜찮다.”
“개소리 마.”
나는 단검을 빼들었다.
격한 움직임은 어려워도, 싸울 수는 있다.
평범한 병사 나부랭이라면 최소 열 명은 상대할 수 있지.
‘문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분명, 수세에서 공세로 판도가 바뀌기는 했다.
그렇다고 임무가 끝은 아니었다. 언덕 아래, 놈들이 살기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하는 것이다.
나를 버린다면 제나와 키샤샤는 몸을 뺄 수 있겠지.
하지만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교단군 병사 Lv.21] X 643 [교단군 기사 Lv.25] X 87“원수를 갚아라!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아!”
물밀듯이 병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두 명과 어깨를 맞댄 채 말없이 단검을 쥐었다.
1열의 병사와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띠링!] [아군 NPC ‘라다스테리 기사단’이 합류합니다!]“전원 전진! 영웅들을 지켜라!”
언덕 뒤편에서 무언가 나타나더니 대열에 합류했다.
무슨 말을 나눌 사이도 없이, 그들은 우리 앞에 서더니 병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뭐예요?”
활을 굳게 쥔 제나가 눈을 깜빡였다.
“한, 무사하느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의 인물이 서 있었다.
“보자마자 바로 뛰어왔다. 다행히 시간에 맞게 도착한 것 같구나.”
프리아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짧지 않았을 텐데. 전력으로 뛰어온 것 같았다.
한편, 대열에 합류한 열 명의 기사들은 나란히 서서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보자 프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시니스 가에서 내게 제공해준 호위 병력이야. 그대들을 도와달라는 나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아델 라다스테리라고 하오.”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청년이 내게 묵례했다.
세검의 끝에서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가시오. 우리가 시간을 끌어드리지. 퇴로는 확보해놓았소.”
제나와 키샤샤가 동시에 나를 보았다.
뭐, 굳이 호의를 베풀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우리는 프리아의 안내에 따라 언덕 뒤편의 길로 빠졌다. 한 차례 청소를 해놓은 모양인지, 길에 교단군의 시체가 무수히 널려 있었다.
“우리 서로 할 말이 많아.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 생각한다. 말을 아끼겠어.”
걸음을 서두르며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동감이었다. 피와 살이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뭐, 내 역할은 끝난 것 같지만.’
이대로 발걸음을 돌려 싸움에 합류한다고 해도, 내가 제 몫을 하진 못할 것이다.
멀쩡해 보이지만 몸 전체의 근육과 골격이 아작난 상태. 내 상태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영웅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없었다.
에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침착했던 어조가 활기를 띠고 있다.
앞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잘했네.”
암케나도 지켜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전술 도구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중요한 격전지나 적의 상급 장교가 있는 곳을 지목하여 공격대를 이동시킨다. 암케나의 시선은 내가 아닌, 에디스의 1공격대에게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전장의 우측을 보았다.
“돌파! 돌파하라! 제국 최강, 아시니스 기사단의 위용을 보여라!”
육중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군마와 함께 적의 대열을 짓밟고 있었다.
교단군 측에서도 기사들이 따라붙었으나 얄짤없이 밀려났다. 모든 부분에서 밀리는 줄 알았던 사자군도 우위를 가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사단의 전력이었다.
‘결국.’
우측에선 사자군의 기사단이.
좌측에서는 에디스의 1공격대가 날뛰고 있다.
교단군의 양 날개가 모두 꺾였다.
병력의 숫자나 질을 보면 교단군이 반격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는 군대를 다독이고 재정비할 인재가 있을 때의 이야기. 상급 지휘관이 모조리 아작난 지금, 교단군은 진형을 이루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서 싸우는 중이었다. 이미 후방에서는 대열을 이탈하는 병력도 보였다. 도망치는 것이다.
‘운이…… 좋았군.’
우리가 전장에 들어오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병력 부족으로 역전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파티에 마학자가 없었다면, 암케나가 제 몫을 하지 못했다면, 때마침 적의 대장이 한곳에 모여 있지 않았다면…….
어느 한 가정이라도 들어맞지 않았다면 임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난이도였다.
내게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게 했었던 니플헤임 이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나 혼자서는 절대 깰 수 없었겠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평생 죄를 짓고 살 뻔했느니라.”
“무슨 죄?”
“은인을 도울 수 없다면, 그게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프리아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책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있었구나. 진짜 영웅이. 단 몇 명이서 운명을 뒤집을 수 있다니, 진정으로 개안했느니라. 정녕 신의 사자라고 할 만한…….”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오글거린다.”
“그, 그런가?”
전장의 중간까지 왔다.
넓은 평원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나는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겼어! 이겼다고!”
“이놈들! 다 죽여버려!”
“와아아아아!”
사기충천.
사자군의 보병들이 무리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전투의 결과는 정해졌다. 뒤바꿀 수 없었다.
“여기서 끝인가 봐요.”
제나가 팔을 들어 올렸다.
작은 팔뚝이 흐릿해져 있었다.
임무 클리어의 전조이자 대기실 복귀의 신호였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아마. 곧 다시 올 거야. 이야기는 그때 해도 돼.”
궁금한 점은 많다.
이곳은 어디인지. 저들은 누구인지. 왜 싸우고 있는지.
여기선 접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보자.”
다음 임무에서.
이제 시작이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스테이지 클리어!] [‘한(★★★)’, ‘제나(★★★)’, ‘키샤샤(★★★★)’, ‘벨키스트(★★★)’, ‘카티오(★★★★)’, 레벨업!] [‘에디스(★★★)’,’아난(★★★)’, ‘베닉(★★★), ‘레인(★★★)’, ‘메인(★★★)’…….] [보상 – 40,000G, 흑기사의 망가진 검 X 3…….] [MVP –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