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58
57. 살의
* * *
며칠이 지난 저녁.
대기실 4층, 1파티 전용 저택의 응접실.
타오니어의 주요 영웅들이 모여 있었다.
“크흠.”
에디스가 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도 좋냐는 뜻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스는 숨을 깊게 몰아쉬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장면을 봤을 거라고 생각해.”
“…….”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곳에 모인 영웅들은 대부분 4성이었다.
소환될 때부터 4성이었던 키샤샤와 카티오부터, 나와 제나처럼 1성에서 시작해 4성까지 승급을 마친 영웅까지.
‘현재 4성 영웅은 여섯 명.’
키샤샤, 카티오.
나, 벨키스트, 제나.
마지막으로 에디스.
타오니어에 있는 4성의 리스트였다.
에디스를 제외하면 모두 1파티 소속이긴 했지만.
어쨌든 다른 2파티의 멤버들도 승급이 예정되어 있는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4성 대열에 합류하는 인원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제나가 한숨을 쉬었다.
“엄청나네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엄청나단 건 알겠어요.”
“그 궁전에 바글바글하니 모여 있던 놈들 말인가.”
벨키스트가 팔짱을 낀 채 웃었다.
제나는 말을 이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었는데, 다 의미가 있던 거였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볼걸.”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설명해주실 분 있소? 그냥 적이란 것들을 깡그리 죽이면 되는 거 아니었나?”
“우리가 했던 임무에는 다 의미가 있던 거야.”
“잘 모르겠구려. 수수께끼를 푸는 취미는 없소. 그냥 화려한 궁전에 인간과 몬스터가 모여 있고, 자기들끼리 꽥꽥거리다 끝나더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요.”
전후 사정을 모른다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2성 승급까지는 과거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이상한 장소로 넘어가 버렸으니까. 이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아채기에는 조금 힌트가 부족할 것이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구려. 알려줄 거면 제대로 알려줄 것이지.”
“그렇긴 해요. 아리송한 부분이 많다고 해야 되나.”
“모르신다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던 네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이곳의 영웅들 중 유일한 3성이었다. 이 세계와 임무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불렀다. 네리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고향인 타오니어는 이미 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소환된 이유는 그 과거를 되돌려 타오니어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벨키스트가 미간을 구겼다.
“여러분이 본 광경은 타오니어가 멸망하기 직전입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죠.”
“이, 이거, 좀…….”
“천천히 말씀드리죠.”
네리사는 나를 힐끗 보더니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고향, 타오니어는 진즉 멸망했고, 우리는 망하기 전의 타오니어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 대기실에 소환된 영웅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선택된 영웅들이며, 황녀는 임무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어, 살짝 어려운데요…….”
제나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잘 이해가 안 돼요. 넬 언니의 말이 맞다고 해도, 저는 그런 계약을 한 기억이 없단 말이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는데.”
“제 분석으로는, 저등급 영웅들은 이곳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등급 영웅들은 다른 것 같습니다만.”
“결국, 억지로 끌려왔다 이 말인가.”
“그런 셈이겠지.”
각자 발언을 하며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제나와 벨키스트는 납득하지 못한 것 같다. 네리사가 차근차근 정보를 알기 쉽게 풀어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내 기억과는 다르다. 그 금발 계집 같은 건 본 적 없어.”
“다음 승급에서 기억이 풀리지 않을까? 나도 누구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 아주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게 여신님이었나봐.”
키샤샤의 이의를 에디스가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지 않소. 100층까지 깨야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타오니어가 어쨌느니는 귀찮은 문제로군.”
“바뀌는 건 없지. 하지만 이 정보가 함부로 퍼져나갔다간 다른 주민들에게 동요를 줄 수 있어. 우리끼리 입단속을 하자는 거야. 한, 네 생각은 어때? 저층의 사람들에겐…….”
“…….”
“한?”
에디스가 내게 다가왔다.
“네 생각을 듣고 싶어.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그렇긴 해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봤던 거.”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별생각 없어. 마음대로 해라.”
“네?”
“어떻게 결정했는지는 나중에 알려줘. 그대로 따를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디스가 당황한 듯이 따라왔다.
“어디 가?”
“미안. 몸이 안 좋아.”
나는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네리사와 에디스가 회의를 주도하고 있다.
곧 결론이 나겠지. 이 세계의 진실은 주요 전투직을 제외하고 불문에 부치며,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알려주지 말자고. 회의의 흐름을 보면 그러했다.
‘어차피 다 구라인데.’
내가 봤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믿어주고 말고를 떠나서 이것 자체가 위험한 정보였다. 여신이 타오니어의 인간을 장난감 다루듯이 갖고 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영웅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될 것이다.
‘…….’
나는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방. 침대 옆의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짜증 나네.’
뭐가 이리 복잡한지 원.
통수를 몇 번이나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봤던 광경이 빙빙 돌고 있다.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군.’
이를 위해선 도우미가 필요하다.
손가락을 튕기자 바로 옆에서 별가루가 반짝였다.
[로키의 부하 제1호, 이셀 등자앙!]이셀이 빙그르르 돌며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나는 어지러이 섞인 정보를 하나씩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셀은 곰곰이 나를 들여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이상해. 뭔 일 있어?]“질문이 있는데. 답해줄 수 있냐?”
[고럼! 뭐든지 물어봐!]이셀이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뭐든지라니. 한번 볼까.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승급식에서 아주 재밌는 걸 봤어.”
[응, 이곳의 4성 승급식은 이사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거든. 특별히 타오니어 전용으로 만든 거니까, 이해가 쉬울…….]“신경 써서 구라를 잘 쳐놨던데.”
이셀이 흠칫 물러났다.
[무슨 뜻이야, 로키?]“예, 아니오로만 답해라.”
내가 침묵하고 있자, 이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임의 목적은 멸망한 세계를 구하는 것. 맞나?”
[마, 맞아.]“마스터와 영웅, 대기실은 그걸 위해 존재하고.”
[응. 임무도 마찬가지야.]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맞다.
이 세계의 존재 이유는 세계의 멸망을 되돌리는 것.
그걸 위해서 간섭력이 있고, 마스터와 영웅, 대기실이 존재한다.
“그래.”
[갑자기 왜?]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임무 속의 몬스터가 멸망과 관련이 있나?”
[…….]“우리가 그놈들과 싸웠던 이유는 뭐지?”
[자, 잠깐…… 그건 타오니어를…….]이셀이 주춤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공정을 타고 봤었던, 멸망한 세계의 특징들.
모든 것이 불로 휩싸인 세계도 있었고, 바다로 뒤덮인 세계도, 꽁꽁 얼어붙은 세계도 있었다.
특징은 제각기 달랐으나,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누구도 살지 않는다.’
인간은커녕 몬스터와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살 수 없는 폐허가 되어, 완전히 죽은 땅이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멸망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망한 이유가 몬스터의 침공 때문이었다면, 그런 결말이 나서는 안 된다.
인간이란 종족이 사라질지언정, 세계 자체가 멸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셀. 나는 네 예상보다 많은 걸 알아. 숨기려고 하지 마라.”
[…….]“내가 거쳐왔던 임무들 속에서, 멸망의 원인이 된 놈들이 있었나?”
나는 눈을 떴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던 이셀이 입을 열었다.
[아니.]“그럼 나는 왜 그 지랄을 했었던 거냐?”
이셀이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나는 피식 웃고는 비프로스트를 뽑았다.
“이걸 써라. 그놈의 눈은 가릴 수 있잖아.”
이셀은 누가 볼세라 근처를 둘러보더니, 검날에 손을 얹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나와 이셀을 감쌌다.
[이런 거 들키면…… 진짜 모가지인데.]“괜찮아. 내가 막아줄게.”
[거짓말 아니지?]이셀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더 크면 말이야. 얼마 안 남았어.”
[아, 알았어.]이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로키, 너는 진짜 0층을 본 거야?]내가 있었던 그 장소를 ‘0층’이라 부르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사기 한번 잘 치던데.”
[진짜루 걸리면 끝장이야. 쓰읍, 하아.]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심호흡을 한 이셀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너희가 싸웠던 몬스터들은, 타오니어의 멸망과 아무 관련 없어.]“…….”
[그 녀석들은…… 과거의 영웅들이야.]“인간이든, 이종족이든 말이군.”
[응.]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신나게 죽여온 것들은, 한때 타오니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호자들이란 뜻이 된다.
‘앞으로 죽일 것들도 마찬가지겠지.’
“왜 그래야 했지?”
[게임을 만들려면 조건이 있어야 하니까.]이셀이 말을 이었다.
뫼비우스의 두 여신은 멸망할 운명의 세계를 돌리기 위해 ‘픽 미 업’이란 게임을 만들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뫼비우스의 상위 차원에 속하는 지구인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게임의 영웅이 있으면, 적도 있어야 되잖아. 그래서…….]“멀쩡한 놈들을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거네.”
[그렇다고 진짜 적들을 등장시켜버리면…….]“상대가 안 되니까?”
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진정한 적들이 누구인지.
바로 80층 이후.
‘이해가 가긴 하네.’
그런 놈들이 초장부터 등장한다면, 게임의 신이 온다고 해도 절대 깰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전에 있는 몬스터들의 존재 목적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걔네들은 그냥 경험치란 거냐?”
[몬스터들은 거진 영웅의 레벨업을 위한 제물들이야. 몬스터로 바뀌는 과정에서 망가지긴 하니까, 복구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과연.
[뫼비우스에 속한 세계가 멸망할 때, 이사님의 기준을 따라 몬스터와 영웅들이 정해져.]알 것 같다.
나는 그때의 풍경을 떠올렸다.
만약 그들이 여신의 제의를 수락했다면 ‘고급 영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수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몬스터가 되었다.
‘태생 등급의 조건을 알 것도 같군.’
생전의 영향력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 것 같다.
그 세계의 주요 인물들은 고등급으로. 엑스트라에 가까운 놈들은 저등급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신의 의견에 동조했던 자들은 영웅으로 남고, 반대했던 자들은 몬스터가 된다.
‘완전 자기 꼴리는 대로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영웅이든 몬스터든 모두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
이 정도는 사소하겠지. 놈은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
일부러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들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물이 올라올 정도였다. 이번 승급식만 해도 그렇다.
‘……후.’
문득, 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단지…….
‘쓰다 버릴 말이었던 건가.’
프리아뿐만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전부가 그랬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덕분에 잘 들었어.”
“걱정 마. 피해는 안 가게 할 거니까.”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탑을 오르며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계속 강해지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지구로 돌아간다.
다만 그사이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여태껏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상황에 짜증은 나 있는 상태였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크게 상관없었다.
지구에 돌아간 뒤 무시하면 된다. 안 볼 사이처럼 떠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확실해졌다.
‘넌 뒤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