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
5. 살고 싶으면 줄을 잘 타라
* * *
이튿날 아침, 광장으로 나온다.
정적. 공기는 서늘했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딜 간 거야.’
나는 혀를 찼다. 제나가 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뒤따라 가보았지만 없었던 것이다. 소파는 양보할 생각이 있었는데.
침대는 안 되고.
아무래도 좋다.
훈련소가 개방되었다. 지난 일주일간 머리를 움직였다면 이제는 몸을 움직일 순서였다. 나는 훈련소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훈련소 Lv.1]넓이는 50평가량.
곳곳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다. 귀퉁이의 진열대에는 목검과 목창, 방패 등 연습용 무기가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휑하니 비어 있었지만, 고작 레벨 1 훈련소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나는 훈련소의 벽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숨을 가볍게 두 번 들이키고, 깊게 한 번 뱉는다.
군대 구보에서 배운 간단한 테크닉이었다. 그렇게 10분을 뛰었다.
천천히 속도를 유지하며 뛰니, 종아리가 땅기거나 호흡이 벅찬 느낌도 없었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한 이스라트(★) Lv. 5(Exp 44/5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15/15] [지능 : 15/15] [체력 : 15/15] [민첩 : 15/15] [보유 스킬 : 없음]처참하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벨당 성장치가 고작 4밖에 안 된다. 지능은 또 왜 오르는 거냐. 물리 타입한테는 하등 쓸모없는 스탯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구에서의 내 몸보다 우월한 것은 분명하다. 전역 이후 운동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고 늘상 차를 타고 다녔기에 계단 몇 단만 올라도 헉헉대기 일쑤였다.
운동 부족인 현대인의 표본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군대 시절의 나로 돌아간 거 같았다.
특급전사를 따기 위해 발악하던 그때로.
‘이 세계는 지구와 법칙이 다르다.’
진열장의 라면과 냉장고의 오렌지 주스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다음 날이면 채워져 있고, 원하는 것을 생각한 뒤 서랍이나 옷장을 열면 그 물건이 생긴다. 물론 K-2나 AK-47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얻을 수 있는 건 옷이나 연필, 휴지 같은 생활용품 정도였다.
그렇게 30분을 뛰자 몸이 괜찮은 상태로 달아올랐다.
나는 가볍게 숨을 고른 후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종종 같은 등급인데도 남들과 다른 전투력을 보이는 영웅들이 몇 있다.
그들의 공통점 하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알 수 없었다. 훈련을 한다고 해서 스탯이나 레벨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훈련소에 죽치고 나오질 않는지. 그래도 게임 캐릭터인 주제에 노력을 하는 게 기특해서 시설 업그레이드는 꾸준히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게임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레벨이 높아질수록, 등급이 달라질수록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나는 이를 ‘체질’이라 정의했었다.
높은 빌딩을 지으려면 튼튼한 기초 공사가 필요하듯 기본을 다지는 일이다.
1성 영웅들은 기본 스탯 10으로 시작한다.
힘도 10, 지능도 10, 체력도 10, 민첩도 10이다.
푸짐한 아줌마든 오늘내일하는 할아버지든 신체 능력은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첫 번째로 멘탈.’
걸핏하면 공포나 패닉에 빠지는 영웅들을 마스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승리의 가능성을 찾는 힘.
그렇기에 이를 가능케 하는 ‘전투 논리’가 S급 패시브로 인정받는다.
‘두 번째로 기술.’
원석을 분별하는 두 번째 조건은 기술이다.
어떤 영웅은 검을 잘 쓰고 어떤 영웅은 창을 잘 쓴다. 무기술에 대한 재능은 영웅마다 다르다. 고위 영웅들은 보통 재능을 개화한 채로 소환되며, 하급 영웅들은 숨겨져 있어 마스터가 찾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아직 내 기술을 알 수 없다. 이를 알아갈 기회는 많을 것이다.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세 번째로 육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성장에 방향성과 탄력을 부여하는 작업.
정신.
기술.
육체.
이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릴 때, 태생 5성들과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이 내게 생겨날 것이다.
내가 상대해봐서 알지만,
그놈들은 진짜 괴물이거든.
그렇게 한창 운동을 하고 있자니,
“뭐해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팔굽혀펴기를 멈추고 일어섰다. 훈련소 입구를 보자 붉은 머리를 땋아 내린 제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몬스터 때려잡으려고 훈련하는데. 왜?”
“왜 이리 말투가 공격적이에요. 기껏 찾았더니.”
제나는 투덜거리면서 훈련소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낡은 통에 들어 있는 목궁을 만지작거렸다.
“저, 밤새 생각해봤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거 맞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나는 목궁을 꺼내 활줄을 당겼다.
“저도 껴줘요. 말 잘 들을게요.”
“껴주긴 뭘 껴줘.”
“알면서 대꾸하긴. 저, 이래 봬도 활은 잘 쏘거든요. 방해는 안 될 거예요. 아버지가 사냥꾼이었으니까, 남는 시간에 활 쏘는 게 취미였어요.”
제나는 통 안의 나무 화살을 들더니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얕은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10m 거리의 허수아비에 박혔다.
“울면서 질질 짜봤자 상황이 바뀔 거 같지도 않고. 오빠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는 거죠?”
“너, 실전은 어제가 처음이냐?”
“당연하잖아요. 집에만 박혀 살았는데.”
“활은 얼마나 잘 쏘지?”
“그럭저럭이요.”
제나는 다시 한번 활을 쏘았다.
똑같은 허수아비. 명중이었다.
‘상태창.’
[제나 시라이(★) Lv. 2(Exp 5/2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11/11] [지능 : 10/10] [체력 : 11/11] [민첩 : 12/12] [보유 스킬 : 하급 궁술(Lv.1)]성장치는 4로 낮지만, 지능 대신 민첩이 2포인트 올랐다. 게다가 1성 주제에 선행 스킬을 갖고 있다.
도망친 사인방 중 돌아온 건 저 녀석뿐이었다.
첫 실전이라 비록 공포는 걸렸지만 패닉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고블린 한 마리를 쏘아죽였다. 죽은 사람들한테 얽매이는 눈치도 아니었으며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목표도 명확하게 잡고 있었다.
‘원석이다.’
나는 어제의 전투를 떠올렸다. 무기를 쥐여줬더니 도망만 치는 세 명. 만약 다음에 올 놈들도 같은 꼬라지라면? 나 혼자서 적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경쟁 전에 일단 살아야지 않겠는가.
나는 답했다.
“좋아. 도와주마.”
“잘 부탁해요, 오빠.”
제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제나(★)’가 ‘한(★)’에게 호의를 느낍니다.] [친밀도 보너스가 생성되었습니다.] [Tips/서로 친밀한 영웅들끼리 파티를 맺을 시 능력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이를 잘 활용해보세요.]“아버지가 말했거든요. 살고 싶으면 줄을 잘 타라고.”
“그러냐.”
“훌륭한 아버지죠?”
나는 제나에게 픽 미 업에 대한 기초적인 룰을 설명했다.
마스터라는 존재가 있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것.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 적을 토벌하거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 임무를 완료할 때마다 층수가 높아지고, 100층에 도달하면 아마 해방될 수 있다는 것도.
“몬스터들과 줄창 싸워야 한다는 거네요?”
“그래서 훈련을 하는 거야. 힘을 길러야 하니까.”
훈련 외에도 강해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도달 층수가 낮은 지금, 개방되지 않은 컨텐츠가 대부분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훈련 정도였다.
“저희 두 명이서만 싸워야 하나요?”
나는 소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마스터가 젬과 골드라는 재화로 다른 세계의 인간을 불러온다는 것. 우리는 그 소환에 휘말려 이 세계에 왔다는 것.
앞으로도 사람들은 꾸준히 소환될 것이고, 우리는 그들과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세계와 나의 정체에 대해선 숨겼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야. 알아들었지?”
“네, 이해했어요.”
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빛이 좋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는다. 속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보일 법한 투정이나 어리광은 없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충분히 쓸만하겠어.’
“우린 일련탁생(一蓮托生)인 거네요?”
“일련탁생?”
“제가 죽으면 오빠도 죽고, 오빠가 죽으면 저도 죽는.”
그건 아니지.
합성에 대해선 설명 안 했다.
“어쨌든, 마스터는 곧 돌아올 거고, 그럼 전투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 훈련이나 해둬. 넋 놓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옙!”
요란한 동작으로 경례한 제나가 목궁을 들었다.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없었고, 그저 체력 단련을 하거나 허수아비에 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도 제나도 장난기는 없었다.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하루의 훈련이 끝난 뒤.
숙소에서 제나를 찾지 못한 이유도 밝혀졌다.
내가 숙소의 문을 열면 현대풍 집이 나타났고 제나가 문을 열면 아담한 나무집의 내부였다. 이셀을 불러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불만 있어? 헛간에 처박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셔!]생활에 불만은 없었기에 나도 제나도 따지지는 않았다. 문을 여는 사람에 따라 장소가 바뀌는 듯했다.
그렇게 훈련을 시작하고 3일 차.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나는 목검을 휘두르던 손을 멈추었다.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상태창.’
[한 이스라트(★) Lv. 5(Exp 44/5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15/15] [지능 : 15/15] [체력 : 15/15] [민첩 : 15/15] [보유 스킬 : 하급 검술(Lv.1), 하급 방패술(Lv.1)]얻은 스킬은 두 가지. 각각 검과 방패에 보정을 붙이는 하급 검술과 하급 방패술이다. 제나는 하급 궁술이 레벨 2로 상승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준비해라. 마스터가 왔어.”
“벌써요?”
“벌써는 무슨. 3일이나 지났는데.”
우리는 무기를 반납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훈련소의 장비들은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공지사항이 스킵되고 마스터가 메인 화면으로 들어섰다.
나는 지구와 대기실의 시간 배율을 계산해보았다. 마스터가 매일 이곳에 접속한다고 하면 지구의 하루가 이곳에서는 3일인 셈이다.
소환소의 문이 열렸다.
“소환!”
“그래, 온다.”
한 파티의 정원은 다섯 명이다.
세 번 뽑겠지.
[영웅 소환!] [골드나 젬으로 영웅을 소환합니다. 뫼비우스 서먼으로 소환되는 무한의 영웅들을 뽑아보세요!] [마스터, 소환을 시작합니다. 어떤 영웅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탈칵, 두루루루.] [따라란!] [Common!]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아론(★)’을 습득하셨습니다!] [Common!]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토비(★)’를 습득하셨습니다!] [Common!]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옐슨스(★)’를 습득하셨습니다!]다 1성인가.
소환소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여긴 어디야?”
“그러게 말이오.”
“아저씨들! 일단 싸울 준비 하세요. 무사히 끝나면 가르쳐드릴게요!”
“싸울 준비라니? 넌 뭐야? 대답해!”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아론(★)’이 ‘1파티’에 합류합니다!] [‘토비(★)’가 ‘1파티’에 합류합니다!] [‘옐슨스(★)’가 ‘1파티’에 합류합니다!] [열려라, 시공의 트으음!]덜컹.
정면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무기고의 문이 열렸다.
전회차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다.
“제나, 늦기 전에 무기 들어!”
“넵!”
우리는 달렸다.
세 명은 남 일처럼 우리를 보고 있었다.
무기고에 진열된 장비의 수는 대폭 줄어 있다. 딱 2개 남아 있었다. 활과 방패. 가지고 나간 놈들이 다 죽어버려서 그렇다. 픽 미 업에서는 영웅이 죽으면 들고 있는 장비도 소멸한다.
제나는 활과 화살통을 꺼내 등에 비껴 멨다. 나는 나무 방패 뒷면의 가죽끈을 손목에 고정시켰다.
장비를 차고 무기고 밖으로 나오자 곧장 문이 닫혔다.
이셀이 나타나 우리에게 삿대질을 했다.
[한, 제나, 아론, 토비, 옐슨스! 나왓!]“넌 뭐냐?”
“어디서 왔어? 우릴 돌려보내!”
남자들은 이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제나가 말렸다.
“그만두세요. 건들면 안 좋은 꼴을 당하니까.”
“너도 한패냐? 네가 우릴 이곳에 불러온 거야?”
“전 한패가 아니에요. 당신들처럼 이곳에 끌려왔어요. 그래서 먼저 적응한 거예요.”
“뭐하러 귀찮은 짓을 하냐. 어차피 몇 분 뒤면 저절로 알게 될 텐데.”
나는 말하고는 시공의 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서 나나 제나가 아무리 쫑알거려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알았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하아, 정말.”
답답하다는 듯 폭 한숨을 내쉰 제나가 털레털레 따라왔다. 뒤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음성이 들렸다.
“마누라가 기다린다고! 빨리 돌려보내 줘!”
“가난한 농부라서 동전 한 푼 없소. 상대를 잘못 찾은 거요!”
이셀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제나가 내게 물었다.
“죽게 될까요?”
“먼저 안 건드리면 돼.”
얼마 뒤, 남자 한 명이 투포환처럼 날아왔다. 남자는 바닥에 엎어지더니 신음을 흘렸다.
남은 두 명도 곧 여기에 날아왔다. 마지막으로 이셀이 들어오자 광장으로 향하는 문이 닫혔다.
[그러게 나한테 던져지기 싫으면 말 재깍재깍 들으라구. 쟤네들처럼 말야.]가장 왼쪽의 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메인 던전이다. 층수는 아마 2층. 1층에 다시 갈 수도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이득이 없다.
빛이 점차 방을 감싸자 다른 파티원들은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출구를 두드려댔다. 이셀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치, 귀찮긴!]이셀은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며 손을 피했다.
그리고 빛이 가득 들어찼다.
[플로어 2.] [임무 유형 – 토벌] [목표 – 적을 전멸시켜라!]‘필드 타입, 평원.’
초원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풀이 듬성듬성했고 바닥은 경사져 있었다.
‘늑대겠군.’
[고블린 Lv.3] X 2 [평원 늑대 Lv.4] X 2경사 위쪽, 회색 갈기를 가진 늑대 두 마리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 위로 투석구를 든 고블린들이 돌멩이를 줍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형도 구성도 우리가 불리했다. 우리는 아래쪽, 적들은 위쪽. 늑대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원거리 요원들도 있다.
“저, 저, 저게 뭐야!”
“후우.”
[‘아론(★)’이 공포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토비(★)’가 공포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옐슨스(★)’이 공포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나는 심호흡을 했다.
평범한 인간이 살면서 맹수와 마주칠 경험이나 있었을까.
늑대들은 적의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부드러운 속살은 가볍게 물고 찢을 송곳니가 엿보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강해 보이지만 별거 아니다. 싸워본 경험도 있고, 나도 강해질 만큼 강해졌다.
“크르르르…….”
[‘제나(★)’가 공포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제나의 어깨를 툭 쳤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제나는 갑자기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뭐 잘못 먹었어?!”
실성이라도 했나?
하지만 다음 순간, 제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제나(★)’가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괜찮아요. 잠깐…… 그냥 잠깐 그런 거예요.”
“네가 저 고블린 둘을 맡아. 돌이 나한테 안 오게만 해주면, 늑대는 내가 알아서 하지.”
후우웅!
고블린 한 마리가 돌을 날렸다. 내 쪽이 아니다. 막 화살통을 뒤지던 제나를 향해서였다. 나는 앞으로 뛰면서 방패로 돌을 쳐냈다.
“서비스는 이번이 마지막일 줄 알아!”
“네!”
슬쩍 뒤를 보니, 다른 세 명은 한 곳에 모여 떨고 있었다.
‘역시 도움이 안 되는군.’
이번에는 미끼 역할도 못 할 것 같다. 적들은 명백히 나와 제나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는 저놈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맞서 싸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크아앙!”
늑대 한 마리가 이빨을 벌리며 뛰어들었다. 놈은 사족보행 동물. 인간형과는 도약력이 다르다. 하지만 이 패턴은 예상했다.
달려드는 늑대의 입에 낡은 철검을 쑤셔 넣었다.
“안 죽었나.”
늑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뿐, 일격에 죽지 않았다.
입천장은 뚫고 지나갔어도 뇌까지는 칼끝이 닿지 않은 것 같다. 검을 뽑으려 했으나 어디 뼈에라도 걸렸는지 뽑히지 않았다. 언덕 위에서는 다른 한 마리가 서성거렸다.
‘무기가 구려서 그런가.’
생각하기 무섭게 다른 늑대가 뛰어올랐다. 나는 바닥에 배를 붙이고 바짝 엎드렸다. 이곳의 지형은 기울어진 상태. 늑대의 도약은 허공을 스쳤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달려가 입에 검이 박힌 늑대의 머리를 걷어찼다. 두 팔로 검을 뽑아냈다. 이후 이마에 검을 꽂았다.
‘일단 한 마리.’
“컹, 컹컹컹!”
언덕 아래에서 늑대가 짖어댔다.
위치는 역전되었다. 내가 위, 늑대가 아래.
늑대는 내게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물러설 필요 없다. 나도 방패를 앞세워 돌진했다.
그렇게 맞부딪쳤을 때, 나는 입을 크게 벌리는 늑대의 뺨을 방패로 후려친 다음 옆구리에 철검을 박아넣었다.
“깽! 깨갱!”
바닥을 뒹굴며 발악하던 늑대가 잠시 후 늘어졌다.
‘두 마리.’
고블린은 어떻게 됐지?
나는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고블린 두 마리가 푹 엎드려 있었다. 쐐애액, 하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 한 대가 고블린의 시체에 박혔다.
“그만해! 죽었으니까.”
“네!”
“…….”
제나의 이마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돌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스테이지 클리어!] [‘한(★)’, ‘제나(★)’, 레벨업!] [보상 – 5,000G, 가죽(C) X 3, 철광석(C) X 1] [MVP – ‘한(★)’]시공의 틈으로 돌아왔다.
제나는 신기한 얼굴로 사라진 이마의 상처를 문질렀고, 다른 세 명은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채였다.
[2층을 돌파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3층으로 올라갑니다.]덜커덕. 쿠르르르.
대기실이 진동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남자 한 명이 어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셀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예 귀찮아져 버린 건가. 나도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상태창’
[한 이스라트(★) Lv. 6(Exp 13/5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17/17] [지능 : 14/14] [체력 : 16/16] [민첩 : 16/16] [보유 스킬 : 하급 검술(Lv.1), 하급 방패술(Lv.1)]‘좋아.’
지능이 1 깎였지만, 힘이 2 올랐다. 종합 성장치는 여전히 4였으나 레벨업 효율은 좋아졌다. 체질이 개선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하루에 1층씩.
마스터도 급하게 진도를 빼지 않는다. 1층에서처럼 있는 대로 꼬라박았다면 나도 제나도 위험했을 것이다. 상처는 없어도 피로가 남아 있었다.
나는 무기고로 들어가 방패를 걸어놓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제나와 다른 세 명이 투덕거리는 중이었다.
“왜 뒤에서 보고만 있어요? 우리만 싸웠잖아요!”
“상황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뭐가 뭔지!”
“처음에 설명했잖아요! 싸우면 된다고!”
“내가 왜 싸워야 하는데? 여긴 또 어디야? 그 몬스터들은 뭐고, 무슨 마법을 부려서 그런 곳으로 우릴 끌고 간 거여!”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선 일단 싸워야 된다구요.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칼 한 자루 쥐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몬스터하고 싸우란 겨!”
“누군 싸워본 줄 알아요?”
말다툼은 점점 격해졌다.
제나는 우리가 방금처럼 싸우기 위해 소환됐으며, 살아남으려면 다 같이 노력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세 명은 달랐다. 나한테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며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썼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왜 1성이 폐기물이라 불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1성은 일반인들이다. 전장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10연 소환 때의 자기소개만 떠올려봐도 전투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이는 없었다.
있었다면 2성의 몰몬트.
용병이라 했었지.
‘그렇다면, 별이 높아질수록 전투직이 소환된다는 뜻이다.’
또한, 고급 영웅들은 헤매지 않는다.
갓 뽑은 1성 영웅들을 전투에 투입하면 백이면 백 공포 또는 패닉에 걸린다. 하지만 3성 이상은 달랐다. 곧장 전투를 시작했다.
‘그들은 알고 있는 채로 소환됐던 건가.’
싸워야 하는 이유와 그 목적까지.
셰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태도를 보면 분명했다.
조금 더 내가 냉정했다면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 저딴 것들이 다 있어!”
제나는 씩씩거리며 무기고로 들어가더니 활을 반납하고 나왔다.
“오빠도 좀 도와주면 덧나요? 같이 싸워야 할 사이인데, 어르고 달래서 동료로 만들어야죠.”
“저런 쓸모없는 놈들을 내가 왜?”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어차피 곧 없어질 놈들이야.”
“네?”
“두고 보면 알게 돼.”
싸우다 죽는 게 아니다.
만약 다음 전투까지 저 상태라면 저들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닫혀 있는 합성소의 문을 바라보았다.
“다음 전투에서도 너와 나, 둘이서 싸운다. 쟤네들은 신경 쓰지 마.”
제나는 불만 어린 눈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네 집에 한번 가보자.”
“제 방이요?”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궁금하거든. 왜, 싫어?”
“알았어요.”
우리는 광장 중앙을 지나쳐 숙소로 향했다. 도중 광장 구석에서 수군거리고 있던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이보쇼,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있소!”
“묻지 마라. 성가시니까.”
“뭐라고!”
남자가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억!”
남자는 흉하게 나동그라졌다.
“우리가 피 흘릴 동안 뒤에서 춤이나 추던 놈들이 그따위 태도냐?”
“아, 아니오! 나는…….”
나는 침을 퉤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부여잡은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헤헷.”
“뭘 쪼개?”
“아무것도 아녜요.”
제나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식탁과 의자, 진열장 등의 가구가 늘어서 있고 벽에는 빛을 발하는 돌이 박혀 있었다.
냉장고나 가스레인지 같은 현대 문명의 이기는 보이지 않았다.
[숙소 Lv.1]숙소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제나의 집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영웅들의 숙소일 것이다. 즉 그 꼴불견 세 명도 여기서 묵을 거란 소리다.
‘나만 왜 그런 방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뭐 먹을래요? 감자밖에 없지만.”
“감자밖에 없다고?”
“감자하고 소금, 물 정도? 먹어도 다음 날이면 채워지지만, 그것밖에 없네요.”
내 방도 라면하고 오렌지 주스밖에 없다.
숙소 레벨이 낮아서 그렇겠지.
제나는 진열장에서 감자 몇 알을 꺼내 쇠꼬챙이로 찍은 다음, 방 가운데의 화로에 집어넣었다.
감자가 익는 동안 나는 숙소를 살폈다.
안쪽으로 복도가 길게 늘어섰고 방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방이 몇 개 없고 시설도 별로지만 숙소 레벨이 오를수록 점차 크고 넓어질 것이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가질 수 있는 영웅 한도는 20명. 숙소를 업그레이드해야 더 많은 영웅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픽 미 업의 시스템이 이곳에서는 이렇게 구현되는 것이다.
감자는 맛있었다.
* * *
다음 날도 훈련은 이어졌다.
지난 3일간의 트레이닝으로 스케줄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아침에는 구보나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같은 기초 운동을 한다. 제나는 내가 하는 운동들을 그대로 따라 했다. 나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기초 운동이 끝나면 무기술 훈련이 시작된다.
무기술 훈련이라고 해봐야 나는 목검을 휘두르고 제나는 허수아비에 활을 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게을리하지 않았다.
휘두르면서 점차 힘의 배분이나 적절한 자세 등 기초 테크닉이 잡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상태창에 생긴 기술, 하급 검술이나 방패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정식 검술을 배운 기사한테는 한참 모자랄 것이다.
옆에서 지도해줄 전문가가 있으면 모른다. 하다못해 대련이라도 하면 뭔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 혼자였다. 제나는 활으로 메인 장비를 굳힌 상태였으므로 대련을 요구할 수도 없다.
다른 세 명은 훈련소에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광장 구석에서 출구를 찾느니 탈출하겠다느니 혼잣말을 하는 건 볼 수 있었다.
물론 출구는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나와 제나는 훈련소 양쪽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괜찮아.”
나는 목검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제나는 활을 들고 있었다.
나도 제나도 좀 더 실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지했다.
검과 검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지만, 다른 방식이 있었다.
“다칠지도 몰라요?”
“죽지만 않으면 돼.”
검을 무리하게 휘둘러 손목이 나간 적이 몇 번 있다.
다친 손목은 곧 원상 복구됐다. 이 대기실 자체가 치유의 효과가 있는 듯했다. 몰몬트처럼 단칼에 죽지만 않는다면 자연 치유될 것이다.
내가 간밤에 구성한 훈련 방법 중 하나.
“쏴!”
“원망하지 마요!”
제나가 화살을 쏘았다.
오른쪽 어깨. 왼팔을 움직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방패에 꽂혔다. 나는 화살을 뽑아서 제나에게 던져주었다. 연습용 화살이라 그런지 쑥 뽑혔다.
“다시.”
사격은 계속되었다.
제나에게는 살아있는 상대에게 하는 사격 훈련.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방패술 훈련.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옆의 허수아비를 공격하면서 방패로 화살을 막는 것.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훈련이다.
공격 위치도 의식하면서 바꿨다.
처음에는 머리. 다음에는 가슴. 그 다음으로는 다리.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일과 비슷하다. 집중력을 둘로 쪼개야 되는 것이다.
“……!”
종아리에 파고드는 알싸한 고통에 나는 주저앉았다.
화살이 박힌 건 아니지만 스쳐 가면서 살을 한 뭉텅이 훔쳐갔다.
“괘,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
잠시 꿇어 있자니 상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났다. 나는 일어서 오른발을 툭툭 털었다. 아무렇지 않다. 움직일 수 있었다.
“너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 적들은 나처럼 멈춰있지도 않을 거고 너를 공격하기도 할 건데, 가만히 서서 쏘기만 할래?”
내 말에 제나는 훈련 방법을 추가했다.
걸으면서 쏘기.
이동 사격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화살을 맞는 빈도가 점점 늘어갔다.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상처는 치유된다고 하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해야 돼?’
부정적인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프다면 좋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아직 충분하지 않다. 나는 탑을 올라간다. 살아남는다.
그리고…….
[‘한(★)’의 ‘하급 검술’이 Lv.2로 상승했습니다!] [‘한(★)’의 ‘하급 방패술’이 Lv.2로 상승했습니다!] [‘한(★)’이 ‘고통 내성’ 스킬을 습득했습니다!]‘역시.’
전사 계열의 필수 패시브라 일컬어지는 고통 내성을 얻었다.
고통 내성을 레벨 10까지 올리면 전투 속행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영웅의 전투력을 유지 시켜주는 A급 스킬이다.
남은 것은,
‘침착성.’
전투 논리의 하위 스킬이다.
침착성을 레벨 10까지 올리면 전투 논리를, 전투 논리를 10까지 올리면 궁극 스킬인 명경지수를 얻는다. 명경지수까지 오른다면 어떤 정신계 상태이상도 방지할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스킬인 광폭성, 전투 광기, 광폭화로 가는 것도 좋겠지만, 나의 강점은 픽 미 업에 대한 폭넓은 정보력에 있다.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이성을 상실하는 광폭화는 내게 독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흥분하지 않는 것.
냉정하게 전황을 관찰하는 것.
튜토리얼과 첫 번째 전투에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상태가 이어지면 꼼짝없이 광폭화 테크트리를 타야 할 것이다. 침착성과 광폭성은 공존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
‘명심하자.’
픽 미 업의 수천 가지의 스킬들 중 시너지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어떤 스킬이 어떻게 조합되어야 시너지를 발휘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암케나는 한동안 접속하지 않았다. 바쁜 모양이었다. 접었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접었다고 해도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벤다.
방패로 화살을 막는다.
베는 것과 막는 것. 이를 두 가지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의 행동으로 묶어야 한다.
화살이 날아온다.
이젠 끝까지 볼 필요도 없다. 나는 방패를 화살이 들어올 장소에 올린 다음 검으로 허수아비의 목을 찔렀다.
그래, 검과 방패는 하나다.
나는 검과 방패를 ‘한 무기’로 인식했다.
[따라란!] [스킬 각성!] [영웅 ‘한(★)’의 ‘하급 검술’과 ‘하급 방패술’이 합쳐져 새로운 스킬이 탄생합니다.] [‘한(★)’이 ‘하급 검방술(Lv.3)’을 습득했습니다!]상쾌한 감각이 전신에 파고들었다.
검과 방패가 몸의 일부가 된 듯 기묘한 일체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방패를 내렸다.
나무 방패는 수십 개의 화살로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기술이 발전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나도 점차 사격에 조건을 부여해갔다. 걸으면서 쏘기, 뛰면서 쏘기, 2연사 등. 제나의 하급 궁술도 어느덧 레벨 4가 되어 있었다.
제나가 활을 무기통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스터가 안 오는 것 같네요. 이대로 안 돌아오면 어쩌죠? 계속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나요?”
제나의 표정에서 불안감이 엿보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만약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오지 않으면요?”
“뭐, 두고 보면 알아.”
나는 검과 방패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마침 왔군.”
“잘됐네요. 훈련만 하느라 근질근질했는데.”
“어째 나보다 적응을 잘하는 거 같다, 너?”
“제가 좀 당차거든요.”
휴식 때 들은 얘기로는 제나는 외딴 숲에서 혼자 살아왔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돌아오던 그녀의 아버지는 1년 전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한다.
광장으로 나오자 이셀이 세 명을 숙소에서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좀 와, 오라니까! 마스터가 오면 광장으로 나오라구. 왜 말을 안 들어. 혼나고 싶어?]나는 천장을 올려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기실에는 천장이 없다. 대신 희끄무레한 회색의 하늘이 떠올라 있었다. 이 하늘은 마스터가 입장하면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된다. 메시지 말고도 이런 표시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 싸우게 하려는 거지? 난 싫어, 싫다고!”
“도, 돈이라면 주겠소. 집에 돈이 있단 말이오! 돌려보내 주시오! 감자만 먹는 것도 지쳤소!”
[아, 진짜 미치겠네!]참다 못한 이셀이 폭발했다.
앙증맞은 손에서 불꽃 같은 스트레이트 펀치가 작렬했다.
“쿠엑!”
[야, 내가 드러워서 시말서 쓰고 만다! 이리 와! 안 와? 오늘 너희들 다 뒤졌어!] [Loading…….]잠시 후, 세 명은 광장에 섰다. 저마다 코 아래에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열려라, 시공의 틈!] [Tips/말 안 듣는 영웅들은 뺑뺑이를 돌려보세요. 반응성이 높아집니다.]이셀, 아주 작정을 했네.
시공의 틈과 무기고가 열렸다. 각각 방패와 활을 챙긴 후 시공의 틈에 들어서자 곧장 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탑을 등반, 세상을 구원하라!] [메인 던전 : 현 등반 층수 – 2]빛이 걷혔다.
[플로어 3.] [임무 유형 – 토벌] [목표 – 적을 전멸시켜라!] [고블린 Lv.5 X 4]필드 타입, 평원.
이번에 상대할 적은 고블린 네 마리였다.
“케르르르!”
세 마리는 칼과 방패로 무장했다.
뒤의 한 놈은 투석구가 아닌 석궁을 들고 있었다.
검방을 든 고블린들은 각각 오른쪽, 왼쪽,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석궁 고블린은 볼트를 장전하는 중이었다.
‘무장도, 전술도 좋아졌군.’
층이 올라간 만큼 당연한 변화다.
장전을 마친 고블린이 내게 석궁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이었다.
쐐애애액!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고블린의 이마를 꿰뚫었다.
“캭!”
고블린은 과장된 동작으로 넘어지더니 죽었다.
“어쭈.”
“말했죠. 저도 쓸모 있다구요.”
나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합공을 받기 전 이쪽에서 치고 들어간다. 먼저 한 마리. 고블린은 상체를 웅크리며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틈이 있다. 나는 어깨를 비틀어 검을 찔러넣었다.
두 마리. 방패를 앞세운 채 돌진해왔다. 마주쳐 방패로 날려버렸다. 신장도 체중도 힘도 내가 우위에 있다. 빈틈을 노려 목을 벴다.
마지막 한 마리.
겁이라도 먹었는지 놈은 뒷걸음쳤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화살 한 발이 고블린의 정강이를 꿰뚫었다. 방패로 막기 어려운 하체 부분이다. 심장에 검을 박았다.
[스테이지 클리어!] [‘제나(★)’, 레벨업!] [보상 – 7,000G, 가죽(C) X 1, 철광석(C) X 1] [MVP – ‘제나(★)’]전투의 MVP로 선정되면 보너스 경험치를 받는다.
이번에는 제나가 MVP였다. 아무래도 처음에 죽인 석궁 고블린이 포인트가 높았던 거 같다.
‘쟤들은 아직도 싸울 생각이 없나.’
세 명은 불안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상관없다. 나도 저런 놈들과 경험치를 나누고 싶지는 않다. 전투에 기여하지 않으면 경험치를 받지 못한다.
시공의 틈으로 돌아왔다.
“어라, 벌써?”
“이번이 좀 시시하긴 했지.”
적들이 시시하다기보다, 우리가 강해진 것이다.
실감할 수 있다. 훈련은 헛된 짓이 아니었다. 검과 방패는 좀 더 매끄럽게 움직였고, 동작에 틈이 없어졌다.
“다 끝난 겨? 그럼 우린…….”
토비가 나가려다가 안색을 굳혔다.
광장으로 통하는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왼편의 거울이 빛났다.
[선택 층수, 플로어 1. 재도전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아직 안 끝났군요.”
제나가 굳은 표정으로 활을 다잡았다.
“뺑뺑이를 돌리려나 보군.”
이셀의 팁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이미 클리어한 층수를 재도전하면 받을 수 있는 경험치나 보상이 줄어들지만 암케나는 한 층 더 올라가는 것보단 안전성을 중시하기로 판단한 듯했다.
[플로어 1.] [임무 유형 – 토벌] [목표 – 적을 전멸시켜라!] [고블린 Lv.2 X 3]“케르륵!”
쐐애액!
“캭!”
한 마리가 바로 머리가 꿰뚫려 죽었다.
제나는 곧장 두 번째 화살을 먹이더니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동료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고블린의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제나가 세 번째 시위를 당겼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 – 1,000G] [MVP – ‘제나(★)’]“…….”
“헤헷.”
거울이 다시 빛났다.
[플로어 1.] [임무 유형 – 토벌] [목표 – 적을 전멸시켜라!] [고블린 Lv.4 X 2]나는 장소가 바뀌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뒤에서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렸다. 나는 방패로 날아오는 화살을 후려쳤다.
“뭐하는 거예요!”
“시끄러, 임마!”
감히 혼자 경험치를 다 처먹어?
나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고블린 두 마리를 도륙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 – 1,000G] [MVP – ‘한(★)’]그렇게 두 번의 전투를 더 반복하자 우리는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끝난 거지?”
“저도 몰라요.”
다른 파티원의 물음에 제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총 다섯 번의 전투가 이어질 동안 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몬스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뒤에서 한담을 나누는 여유까지 보였다.
입을 삐죽거린 제나가 말했다.
“진짜 암 걸리겠네. 언제까지 저 사람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돼요?”
“오늘로 끝이야.”
“끝이라뇨. 바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식충이들을 먹여 살릴 정도로 마스터가 여유 있는 것 같지 않거든.”
[마스터, 합성을 시작합니다.] [합성하고자 하는 영웅에게 제물로 바칠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제물이 된 영웅은 소멸합니다.]합성소의 문이 열렸다.
기회는 주어졌다.
내가 봤을 때, 정말 넉넉할 정도로.
우리가 전투에서 겪는 세세한 일들이 액정 밖의 마스터에게는 생략되어 전해진다고 해도 마스터가 아예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누가 가장 앞서서 싸우는지, 누가 가장 활약하는지, 어느 누가 뒤에서 게으름을 피우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한(★)’을 즐겨찾기에 등록합니다.] [‘제나(★)’를 즐겨찾기에 등록합니다.]처음과 같은 실수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셀이 나타나 떽 외쳤다.
[제나, 옐슨스. 합성소로 들어간다. 실시!]“합성소라니, 어디요?”
[오른쪽 문 보이지? 거기로 들어가면 돼.]옐슨스는 불안한 눈치로 나를 살폈다.
뭐 어쩌라는 거냐.
도와달라고?
하다못해 싸우는 척이라도 했다면 조금은 도와주려고 했었다. 셰이가 내게 그랬듯 고블린 한 마리쯤은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나는 제나에게 말했다.
“갔다와. 너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다녀올게요.”
제나는 굳은 발걸음으로 합성소를 향해 떠나갔다. 반면 옐슨스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넌 왜 안 가?”
“가, 가면 어떻게 되는 거요?”
“네가 한 일에 대해 판정을 받겠지.”
“난 불합리하게 이곳에 끌려온 거밖에 없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암, 첨으로 맘이 맞는구만!]이셀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들 기저귀 채우는 것도 질렸다 이거야. 얼른 들어가셔.]“난 안 가겠소.”
이셀은 옐슨스를 합성소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문이 닫혔다.
[정말로 합성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합성 완료!] [‘옐슨스(★)’가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제나(★)’, 레벨업! ‘매의 눈’ 스킬 습득!]얼마 뒤.
합성소의 문이 열렸고, 제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 아저씨가 빛으로 변하더니 사라졌어요.”
“이곳에서 쓸모없는 놈은, 쓸모있는 놈의 제물이 되어 죽는다. 다음은 내 차례로군. 너희 중 누구일까.”
나는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합성소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다음, 한, 토비!]“나, 날 집으로 돌려보내 주는 거냐?”
이셀은 대답하기도 귀찮았는지, 토비의 손목을 붙잡고 던져버렸다. 내가 뒤이어 합성소로 들어갔다. 금속의 벽으로 둘러싸인 합성소 밑, 보랏빛 마법진이 불길하게 빛났다.
“그렇지? 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돌아간다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라.”
토비가 희열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차라리 몬스터에게 죽느니 저렇게 고통 없이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토비는 다리부터 서서히 분해되어 사라졌다.
[합성 완료!] [‘토비(★)’가 빛이 되어 사라집니다.] [‘한(★)’, 레벨업! ‘침착성’ 스킬 습득!]광장으로 나오자 합성소는 닫혔고, 다시 열리지 않았다. 남은 마지막 한 명, 아론이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론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운이 좋았군.”
“왜, 왜 안 돌아와? 설마 죽은 거야?”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지. 왜, 너도 해보고 싶어?”
아론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너 이 자식, 알고 있으면서…… 내게 말 안 한 거냐!”
“말해줬으면 믿어줬을 거였나? 말을 하도 쳐 들어먹질 않아서, 외국어를 쓰는 애들인 줄 알았지.”
아론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내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저 깊은 신음을 내지르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나는 이셀에게 말했다.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인가?”
[아냐, 기다려봐! 아직 접속을 안 끊었어.]이셀은 공중제비를 돌더니 뿅 사라졌다.
잠시 후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시설을 구축합니다. 원하시는 시설 종류를 터치해주세요.] [‘무기고 Lv.1’의 부속 건물 ‘대장간’을 선택하셨습니다. 건축하시겠습니까? 건축에는 500젬이 소모됩니다.] [Yes(선택) / No]대장간이군.
하긴. 재료도 꽤 쌓였으니 장비 합성을 할 차례였다.
[마스터, 현실이 바쁘시다면 영웅에게 자율 행동을 허락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특별한 수확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Tips/영웅의 ‘자율 행동’은 픽 미 업의 핵심 기능 중 하나로서, 마스터가 접속하지 않아도 영웅이 자기 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시스템입니다. 행동의 결과는 영웅의 성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Yes(선택) / No]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무지개색으로 반짝이던 하늘이 잿빛으로 변했다. 암케나가 픽 미 업을 종료한 것이다.
“끝난 건가요?”
“일단.”
“그 사람들은…….”
“죽었지, 아마.”
“마스터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 방에서 사라지는 거군요.”
“왜 그렇게 침울하냐. 뒤치다꺼리하기 싫다며 찡찡댈 땐 언제고.”
“언젠가 제가 필요 없어질 때가 오면, 저도 그렇게 되나요?”
표정은 태연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층이 올라갈수록, 싸워야 할 몬스터도 소환되는 인간들도 강해져. 죽는다면 적에게 죽거나, 제물이 되어 죽거나, 둘 중 하나야.”
“그렇군요. 오빠는 뭐든지 알고 있네요.”
나는 제나에게 물었다.
“살고 싶냐?”
“네.”
“그럼 아버지 말씀 잘 따라.”
아버지 말씀, 중얼거리며 제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살고 싶으면…….”
“줄 잘 타라고.”
나는 제나를 지나쳐 숙소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까만 소파에 다리를 뻗고 누워 들이키니, 기막히게 시원했다.
“이셀, 있으면 나와라.”
[네가 뭔데 오라가라야!]“그 레퍼토리 지겨운데, 좀 바꿔봐.”
[끄아앗!]이셀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셀은 차마 내 몸에 손대지는 못하고 눈앞에서 주먹만 붕붕 휘두를 뿐이었다.
“너도 고생이네.”
[시끄러워!]“그나저나, 암케나한테 주는 팁은 네가 보내는 거 맞지?”
[그게 왜! 너랑 상관있어?]“상관있지.”
나는 플라스틱 컵의 주스를 쭉 들이켰다.
컵을 개수대에 던졌다. 골인.
“인터넷은 할 수 있냐?”
[인터넷?]“픽 미 업의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다면 인터넷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왜 자꾸 물어봐. 답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니까.”
[할 수 있다구. 웹서핑이 내 취미니까.]“그럼 네가 띄우는 팁은 카페 공략을 토대로 하는 거겠군. 장비 10연 뽑기 후 훈련소 1레벨. 그 다음 대장간 개방.”
픽 미 업 공식 카페의 최고 인기글이다. 조회 수 2천만. 추천 수 5백만. 그 공략은 다른 인터넷 웹진에도 무수히 실렸으며, 번역되어 전 세계로도 퍼져나갔다.
작성자의 계정명은 로키.
공략글에는 어떤 시설과 어떤 방식으로 영웅을 선별하고 키웠는지 대략적으로는 서술되어 있다.
[너, 로키를 알아?]“알지. 나도 픽 미 업 유저거든.”
[헹, 그래봤자 저층에서 구르는 땅강아지겠지! 로키님과 비교될 게 못 돼. 마스터 오브 마스터, 그분은 픽 미 업의 신이라구! 로키님이 7성만 있었어도 진작 세계 1위였을 거야!]나는 씨익 웃었다.
“로키는 왜 좋아하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이니까!]“오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픽 미 업 유저라면서 그것도 몰라?]“그거 난데.”
“내가 로키라고.”
[자, 자, 자, 장난하는 거야, 너?!]“계정번호 46631913.”
이셀의 눈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이 녀석, 역시 내 계정번호를 알고 있었다.
픽 미 업의 계정번호는 마스터 본인과 픽 미 업의 서버 관계자만 알 수 있다. 남에게 공개하면 해킹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스터는 절대 계정번호를 알리지 않는다.
[네, 네, 아니, 네가? 로키님……?]“안 믿기냐? 고글 계정이라도 알려줘? 뮤튜브 채널 들어가 봐.”
나는 고글의 이메일과 비밀번호도 알려줬다.
이셀은 허둥지둥 사라지더니 잠시 후 나타났다.
[……해줘.]“뭐?”
[사인해달라구, 이 바보야!]이셀은 빨개진 얼굴로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 슥슥 그어서 돌려주었다. 이셀은 내가 대충 휘적거린 낙서에 입을 쪽 맞췄다.
[아싸! 이걸로 나도 라그나로키 우수 회원!]“라그나로키가 뭔데?”
[마스터 오브 마스터, 로키의 팬카페! 로키의 사인이 있어야 우수 회원으로 올라갈 수 있어!]그런 게 있었나.
금시초문이다.
라그나로키는 또 뭐야. 작명 센스 최악이다.
[아, 아, 아무튼 네가! 아니, 당신이 로키님…….]“반말로 해. 낯간지러워.”
[정말로 로키, 맞지? 정말정말? 진짜루?]“거참 맞다니까 그러네.”
[꺄오!]한참을 방방 뛰던 이셀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더니 말했다.
[잠깐. 그럼 난 그동안 로키한테 그런 건방진 말을 한 거야?]“지금은 그냥 일개 1성인데 건방지고 말고가 어딨어.”
[내, 내가, 로키한테 땅강아지라고……!]이셀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감정 변화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미안! 로키인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야! 정말이야!]“정신 사나우니까 적당히 해. 별로 화도 안 났어.”
[왜 하필 로키를 이곳에…… 아아아악!]이셀은 머리를 붙잡고 절규했다.
[난 무슨 재미로 살라고…….]“…….”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사생팬 수준이다.
양갈래 머리를 파닥거리며 좌절하던 이셀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가만, 가만가만! 네가 없으면 니플헤임은 어떻게 돼?]니플헤임은 내 계정의 대기실 이름이다.
총 1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용인원 2만명의 숙소와 22레벨의 훈련소, 18레벨의 무기고 등 랭커 타입 중에서도 인프라 구축의 끝판왕이라 불리고 있다.
그럼 뭐하나.
정작 마스터인 내가 여기 있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서, 설마 접는 거야?]“이렇게 됐는데 어쩌겠냐.”
[그럼 타천의 2만 군세는 어떻게 되는 거야!]“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없다고 니플헤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아쉬우면 돌려보내 주든가.”
[그건 할 수 없어.]이셀은 침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알고 있다. 이 녀석도 상사와 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것이다.
“어쨌든 이 대기실 주인은 지구의 인간, 맞지?”
[응.]좋아, 고분고분해졌다.
이 기회에 궁금한 것들을 마구 물어보기로 했다.
“소환되는 영웅들도 인공지능이 아니고.”
[맞아. 소속 세계는 조금씩 다르지만 다 인간들이야.]“탑을 100층까지 오르면 나는 지구에 돌아갈 수 있나?”
[그건…… 몰라.]“모른다?”
[진짜야! 믿어줘!]“됐어. 다음 질문. 날 누가 여기에 데려왔지?”
[……답할 수 없어.]“하, 거참.”
[미안.]“그럼 이것도 넘어가자. 네 말대로 탑을 오르다 보면 알 수 있을 거니까. 다음 질문으로. 너는 마스터의 권한에 어디까지 접근할 수 있지?”
[지금은 도움말 띄우는 거 하고, 시설들 여닫고, 자율 행동을 보조하는 정도야.]다음.
질문의 핵심이다.
“다른 마스터의 대기실도 이곳과 같은 거냐?”
[세부적으로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은 똑같아.]“…….”
이런 세계가 1억이나 존재하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에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게임 속의 일이 다른 세계에서는 현실이었을 줄이야. 내가 무심하게 내린 결정이 게임 속 영웅에게는 사형선고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건가.
만약 지구에 돌아가게 되면 영웅들을 최대한 아끼는 방향으로 탑을 등반해보기로 했다. 제 역할 못 하는 놈들은 빼고.
영웅이 마스터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투만이 아니다. 이 대기실은 대부분의 기능이 잠겨 있기에 전투에 재능이 없다면 무쓸모지만 등급이 높아지고 기능이 개방될수록 비전투직 영웅들도 마스터에게 기여할 방법이 생긴다.
만약 이 대기실의 등급이 좀 더 높았다면 허무하게 죽어버린 놈들에게도 역할이 있을 수도 있었다. 걔네들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
하지만 어쩌랴. 세상이 그런 것을.
‘니플헤임 애들은 나 없이 잘하고 있으려나.’
그곳의 영웅들도 살아있다면 지금쯤 나의 부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당분간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픽 미 업에는 마스터가 장기간 부재일 시 지정된 영웅이 대신해서 대기실을 운영하는 기능이 있다. 따라서 픽 미 업은 방치형 게임이란 타이틀도 갖고 있었다.
‘시리스가 알아서 하겠지.’
니플헤임의 서브 마스터, 시리스는 유독 똑똑하고 현명했다.
하나를 맡기면 둘을 해냈고 내가 원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재능이 있었다. 정말, 이게 인공지능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여간 내 코가 석 자다.
살길이나 찾아보기로 했다.
“이셀.”
[으, 응?]“탑 오르고 싶지?”
이셀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잘 들어. 오르게 해줄 테니까.”
이번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태.
도달 층수는 3층.
자율 행동은 풀렸고 대장간이 개방되었다.
활동 범위가 확 넓어졌다.
내일부터는 진도를 좀 빼야겠군.
이셀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천장을 올려보았다.
잿빛의 하늘은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