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5
64. 5성 확정 소환
* * *
결과적으로, 우리가 유적에서 체류한 기간은 일주일 남짓이 되었다.
두 번째 점령전까지 하면서 자원을 채취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50층대로 올라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곳이었고, 첫 주차에 자원만 제대로 쓴다면 목표량을 채울 수 있었다.
며칠 뒤.
50층 공략을 위해 전력을 한창 증강시키고 있던 어느 때.
“읍……! 읍읍!”
나는 집무실 책상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왼쪽 눈이 파랗게 붓고, 온몸에 피딱지가 앉아 있는 남자는 온몸이 꽁꽁 결박되어 있었다.
“너희는 뭔데 귀찮게 구냐?”
“으으읍!”
입의 재갈 때문인지
남자는 버둥거리기만 했다.
어제 새벽, 훈련을 하던 벨키스트가 수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소리는 다른 마스터의 비공정이 차원의 틈에 착륙하는 소리였고,
먼저 차원의 틈으로 간 벨키스트는 기습을 준비하는 적 무리를 발견한 뒤, 조용히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적 13명 중 12명 사망.
포로 1명 포획.
나는 놈에게 다가가 재갈을 풀었다.
“이 천벌을 받을 놈! 네가 유적에서 벌인 만행은 똑똑히……!”
퍽!
나는 놈의 입을 장화발로 걷어찼다.
“어억!”
남자가 피를 뿜으며 나동그라졌다.
이럴 줄 알았지. 자기 주제도 모르는 마스터가 공식 카페에 있는 암케나에 대한 고발글을 본 뒤 공격을 온 것이다.
고작 소형 비공정 1대와 시시한 영웅 13명이라니.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시간대가 깊은 새벽이었기 때문에, 벨키스트가 먼저 발견하지 못했다면 비전투직들은 꽤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점점 일이 귀찮아진다.
이런 놈들이 시시때때로 등장한다면 마음 놓고 공략에만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대규모 임무에서 모든 전투직을 출전시킨다면 복귀했을 때, 대기실이 엉망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한심한 꼴은 사양이었다.
“짜증 나네.”
나는 혀를 찼다.
대기 병력을 남겨둬야 한다는 소리였다.
한명 한명이 중요한 이때에.
뭐, 차원의 틈에 방어 시설을 갖추고 전담 부대를 만든다면 수비 효율이 높아지긴 할 것이다.
일종의 외정 부대인 거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적당한 놈한테 먹여.”
이런 놈은 쓸 데도 없다.
네리사는 버둥거리는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끌고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바닥에 튄 피를 대걸레로 대충 닦아낸 다음 의자에 앉았다.
집무실 책상에는 네리사의 보고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전투직의 숫자가 얼마나 늘어났고, 어떤 장비들이 만들어졌으며, 비공정의 건조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든 맞출 수 있겠네.’
뒤통수가 간지럽다는 것만 빼면 순조롭다.
나는 책상 위의 녹차를 마신 뒤 마지막 보고서를 눈으로 훑었다.
거기에는 어제 암케나가 작성한 계획서가 쓰여 있었다.
– 한에게 맡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지 같은 플랜은 뭐냐.
그냥 떠넘기기잖아.
이해는 간다.
5성 영웅들은 1~4성 영웅에 비해 많은 부분이 달랐다.
다른 등급이 초등학생이라면, 5성은 대학생이랄까.
훈련소에서 같은 교육을 받는다면 수준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대기실의 제일 고참인 나에게 전담 마크를 하라는 것이겠지.
나는 육성 계획서를 적당히 읽다 아래의 서명란에 서명을 했다.
오늘 암케나가 접속하면 내가 제안에 동의했다는 표시가 뜰 것이다.
‘그럼 오늘인가.’
나는 마시던 녹차를 끝까지 비웠다.
뭐가 나오든 한번 보기로 했다.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그날 저녁.
언제나처럼 암케나가 접속했다.
“…….”
나는 1층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소환소에서 뭐가 튀어나오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5성 확정 소환권.’
내가 레이드 페스타에서 개고생을 하며 따낸 물건이었다.
운영사에서는 무조건 태생 5성의 영웅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는 내가 5성 영웅에 대해 알게 된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태생 5성은 억 단위로 현질을 해도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대표 케이스인 나부터 시작해서 외제 차 한 대 값을 퍼붓고, 집 한 채 값을 던져버렸는데 5성을 얻지 못한 유저 등등 여러 사례들이 있었다.
이곳에 떨어져 영웅이 된 뒤로, 대강의 사정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는 해당 세계의 사정에 따라 5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니플헤임이 그런 케이스였다.
‘그런데, 100% 5성이라고 했지.’
나는 입을 매만졌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암케나가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던 물건이 눈앞에 보였다.
[5성 확정 소환권] [등급 : SS] [확정적으로 태생 5성의 영웅을 얻을 수 있다.] [비고 – 차원도시의 3대 이벤트에서 종합 우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무지갯빛으로 번쩍거리는 티켓.
암케나가 티켓을 터치했다.
[확정 소환을 하시겠습니까?] [Yes / No]“태생 5성이 그렇게 세다면서요?’
옆에 앉은 제나가 다리를 흔들었다.
5성 티켓을 사용할 거라는 것을 알려주자, 구경한답시고 따라온 것이다.
“오빠보다 셀까요?”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5성이라도 레벨 1에서 시작하니까.
하지만 시작 지점이나 가진 재능은 다를 것이다.
‘뭐, 이해는 간다만.’
해당 세계의 주요 인물이었다면, 특수한 기술은 하나 꿍쳐두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Yes’를 터치하려 하는 암케나의 화면을 바라봤다.
[Yes(선택) / No] [띠링!] [마스터, 특급 소환을 시작합니다!] [탈칵, 두루루루.] [투콰콰캉!] [이셀 : 아니, 이 느낌은?!]소환소의 열린 문 사이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얗게 반짝이던 섬광은 점차 황금빛으로 변해갔다.
[콰아아아아앙!] [진정한 영웅의 출현에 소환소가 격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셀 : 우와아아아앗! 눈부셔!]저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기 위해 몇 번이나 가챠를 돌렸는지 모르겠다.
[영웅 중의 영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을 만나보세요!] [「Hyper Rare!」]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위령(★★★★★)’을 습득하셨습니다!]유치찬란한 효과음 가운데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환소를 바라보았다.
섬광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기실에 온 것을 환영해요!”
제나가 5성에게 쪼르르 달려나갔다.
“저는 제나 시라이! 타오니어에서…… 어라?”
제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짙은 눈동자가 쉼 없이 깜빡거렸다.
“개성 있게…… 생기셨네요.”
제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타오니어에 최초로 소환된 태생 5성 영웅, 위령은 벤치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생머리에 검은 눈.
품이 넓고 하늘하늘한 도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수실이 달린 칼집을 차고 있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제나.”
나는 말을 이었다.
“쟤는 타오니어 출신이 아니야.”
한눈에 보면 알잖냐.
머리 색과 이목구비, 체구에서 복장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르다.
“……여기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타오니어라고 불리는 곳이로구나.”
위령은 속이 빈 눈으로 바닥을 보았다.
[‘위령(★★★★★)’이 실의에 빠졌습니다!] [Tips/ ‘실의’ 상태에 빠진 영웅은 임무에 출전시킬 수 없습니다. 달래고 얼래서 실의를 풀어주세요!]나는 이마를 감쌌다.
하긴. 본사에서 그리 쉽게 5성을 풀어줄 리 없지.
제대로 엿을 먹은 것 같다.
“제나, 먼저 올라가 있어. 얘하고는 내가 말해볼게.”
“저도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그러죠, 뭐. 일단 나중에 봐요, 언니.”
제나는 가만히 서 있는 위령을 힐끔 바라보다가, 위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냐?”
“나는…… 지키지 못했…….”
실성이라도 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짜증 나게 구네.”
나는 위령의 손목을 휙 잡아챘다.
내 기억으로는 1층의 왼쪽 구석에 빈방이 있었다.
손목을 잡고 이끌자 여자는 휘청거리면서 나를 따라왔다.
덜컥.
방에 들어온 나는 문을 걸어 잠근 뒤, 위령을 방 가운데의 철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나도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위령을 마주 보았다.
“야.”
“…….”
“대답 안 하냐?”
“꿈이…… 아니었단…….”
나는 위령의 턱을 붙잡은 뒤, 내 쪽으로 들어 올렸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뒈지기 싫으면.”
“……너는.”
“너는 뭐.”
“이곳의 문주인가?”
“문주?”
그건 무슨 단어냐.
잠깐 생각하던 나는 문주가 서브 마스터와 비슷한 뜻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구나.”
위령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에 빠졌다.
‘화딱지가 나는데.’
나는 다리를 꼰 채 앞을 보았다.
위령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특이한 복장. 이상한 단어. 독특한 발음.’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어조가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말을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데없이 동양풍이라고?’
나는 머리를 긁었다.
뫼비우스에 속한 세계들은 거의 서양풍에 가까웠다.
각 세계에는 기사와 투사, 궁수와 도적, 마학자와 원소술사 같은 직업이나,
중세의 성과 몬스터, 용과 마법이 존재했다.
‘상태창.’
[난위령(★★★★★) Lv.1(Exp 0/10)] [클래스 : 명인(Weaponmaster)] [힘 : 36/36] [지능 : 10/10] [체력 : 38/38] [민첩 : 41/41] [보유 스킬 : 상급 연검술(Lv.1), 명정심(Lv.1), 심검안(Lv.1), 신검합일(Lv.1)] [각인 슬롯 : 2/2] [1 : 상급 기공술(B+, Lv.1)] [무자에게만 주어지는 고유 기관을 사용하는 특수한 비술. 명문가의 순혈이기에 보다 높은 등급의 기공술을 사용할 수 있다.] [효과 : 힘, 체력, 민첩 보정 + 20%, 마력 저항 + 15%] [고유 스킬 : 기공(氣功)] [비고 – ‘연자의 맹세’에 묶여 있기에, 다른 장소에서는 각인의 능력이 반감된다.] [2 : 비연검(A-, Lv.1)] [한번 휘두르면 제비처럼 날아간다. 공간제압 특화 마검술.] [고유 스킬 : 비연(飛燕)] [비고 – ‘연자의 맹세’에 묶여 있기에, 다른 장소에서는 각인의 능력이 반감된다.]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고작 1레벨이었다.
그런데 힘이 36, 체력이 38, 민첩이 41이다.
1레벨 주제에 어지간한 20레벨 영웅과 맞먹는 것이다. 상급 무기술을 비롯한 고효율 스킬들만 가지고 나왔고, 그 드물다는 B급 이상의 각인까지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괜히 사람들이 뽑기에 목숨 거는 게 아니지.’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나도 태생 5성을 뽑기 위해 별별 짓거리를 다 해봤지만 끝내 얻지 못했었다.
물론, 태생 5성도 단점은 존재했다.
‘유저 간 교환이 힘들다는 거지.’
거래할 수는 있다.
한창 유적에서 자원을 퍼다 나를 때, 젬을 주고 5성 영웅을 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비싼 돈을 주고 산 그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으니까.
태생 5성들은 소속이 바뀌면 제 힘을 거의 발휘하지 못한다.
현 니플헤임의 훈련소장인 에클레는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따라서 5성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뽑아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연자의 맹세라고 했었나.’
딱 봐도 거슬리는 패널티를 달고 나왔다.
‘다른 장소’에서는 각인의 능력이 반감된다?
보나 마나 타오니어에서도 패널티가 적용될 것이다.
“…….”
나는 위령을 다시 한번 살폈다.
픽 미 업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되짚으면서.
저 여자의 출신이 어디인지 알 것 같다.
‘하나밖에 없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자는 2서버 출신이 아니다.
즉, 픽 미 업의 해외 서버에서 온 것이다.
내가 헷갈릴 만도 했다.
한국 서버에는 저런 세계관이 없었으니.
아마 3서버겠지.
3서버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저 여자는 외국에서 온 것이다.
붉은색으로, 연(聯).
저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글자였다.
“무련이냐.”
수그려 있던 위령의 고개가 올라갔다.
“네가, 거길 어떻게……!”
“중고품이었다 이거네.”
서버가 달라도 모를 수가 없다.
그만큼 유명하고, 막강한 곳이었으니.
계정명 무련(武聯).
수천만의 픽 미 업 계정 중 정점을 달리는 유저였다.
현 랭킹 2위였으니까.
문제는, 무련 소속의 영웅이 이벤트 경품으로 내 앞에 있다는 것.
이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랭킹 2위가 끝장났군.’
우승 티켓으로 소환된 태생 5성 영웅, 난위령의 거처는 4층으로 정해졌다.
뭐, 기본 스펙이 우수한 만큼 다른 신입들과 똑같이 다룰 수는 없을 테니까.
숙소도 내 방 옆으로 배정되었다. 내가 신경을 많이 써주길 원했는지, 암케나가 특별히 지정한 것이다. 네리사에게도 어떤 지시가 내려졌는지, 급작스레 서브 마스터의 업무 일정이 텅 비게 되었다.
챙강.
나는 연습용 철검을 내던졌다.
4층 훈련소의 철제 바닥에 부딪힌 철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안 오네.’
분명 아침에 방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본적으로 알아둘 게 있으니, 훈련소로 나오라고 말도 꺼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거 어지간히 튕기시는군. 비싼 몸이라 이건가.”
벨키스트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위령의 정확한 전력 측정을 위해 내가 부른 것이다.
“내가 가봐도 되겠소? 머리채를 붙잡아서 끌고 나오지.”
“관둬라.”
훈련소를 떠나려던 벨키스트가 멈춰섰다.
벨키스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벨키스트는 훈련소 구석의 개인 훈련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식용 소파에 앉아 팔짱을 꼈다. 훈련소로 위령을 호출한 지 반나절.
여전히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실의 상태라고 했었나.’
실의.
영웅의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달했을 때 걸리는 상태이상 중 하나였다.
실의에 걸린 영웅은 임무에 출전시킬 수 없으며, 전투 시 스킬과 각인을 포함한 모든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실질적인 그로기 상태인 것이다.
어제, 갓 5성을 뽑은 암케나는 위령을 시험용 임무에 보내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암케나는 히어로 박스의 위령을 수십 번 터치하고, 도움말을 뒤적거렸으나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위령을 대기실에 배치한 다음, 접속을 껐을 뿐이다.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그 강력하다는 태생 5성을 최초로 뽑았다.
그런데 소환되자마자 출전을 할 수 없는 상황.
나는 간접적이나마 상황을 알 수 있었지만, 암케나는 영문을 모를 것이다.
곧 암케나가 접속할 시간이었다.
나는 연습용 도구를 대충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덜컥.
노크도 하지 않고서, 위령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
아침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위령은 침대에 앉은 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계란 프라이와 우유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야.”
여전히 아래를 보고 있을 뿐, 대답이 없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귀찮아 죽겠네.’
내가 이 녀석을 어르고 달랜다고 하더라도, 큰 쓸모는 없었다.
각인에 특수한 제한이 걸려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합성행인가.
태생 5성인 만큼, 잡아먹으면 꽤 성장할 것이다.
“후우…….”
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위령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정신 차려.”
짝!
“……읍?!”
따귀를 맞은 위령이 나뒹굴었다.
“이게 무슨……!”
위령이 나를 올려보았다.
오른뺨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네가 뭔 사정인진 몰라도, 여긴 무련이 아니다. 죽기 싫으면 여기의 룰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 합성이라도 해줄까? 경험치가 꽤나 짭짤할 거 같은데.”
“나는…….”
나를 보는 위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마침내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그때를 되짚고 있었어.”
“그때?”
“무련이 멸망할 때 말이다.”
위령의 눈이 가라앉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분을 지켜드려야 했는데…… 나는 그저…….”
“자꾸 짜증 나게 할래?”
“후후, 그렇군. 여긴 무련이 아니구나.”
위령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군.
나는 테이블 위의 차갑게 식은 우유를 위령에게 건넸다.
“고마워.”
“네 처지와 지금 상황을 말해주지.”
“부탁한다.”
“너는 5성 영웅으로 타오니어에 소환됐다. 그리고 우린 어려운 임무를 앞두고 있어. 개미 손가락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이지. 그래서, 전력으로 써먹으려고 널 부른 거야.”
“그렇게 됐나. 또 한 번의 기회라는 건 이런 의미였구나.”
“또 한번의 기회?”
“신녀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신녀(神女).
다시 낯선 용어가 나왔다.
의미 유추는 어렵지 않았다.
‘텔이군.’
랭킹 2위 계정인 무련이 모종의 이유로 괴멸했다는 것은 알겠다.
외세의 침입이든, 임무에서의 전멸이든, 혹은 다른 이유가 있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개미 손가락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해. 싸울 건지, 말 건지.”
“미안하지만…… 나는 싸울 수 없다.”
위령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연자의 맹세로 묶여 있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다.”
“그래?”
나는 혀를 찼다.
이렇게 된다면 저 녀석의 앞날은 뻔했다.
본인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는 등을 돌린 뒤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왜 불러.”
“혹시, 이 세계는 2지대에 속해 있는 것이냐?”
애매한 용어로 사람 헷갈리게 만드네.
잠시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지대’가 ‘서버’와 동의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할 일이 있어. 한 번만 도와다오.”
“밥값을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게 도와달라?”
나는 싸늘한 눈으로 위령을 돌아보았다.
위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염치가 없다는 것은 알아. 그래도…… 꼭 해야 하는 일이야.”
“그게 나와 뭔 상관인데?”
“네가 날 도와준다면, 나도 노력해보마. 조건이 충족될 수도 있으니. 물론, 일방적인 부탁은 아니야. 은혜 또한 반드시 갚겠다.”
“네가 쓸모가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볼게.”
위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맹세니 조건이니, 사사건건 귀찮네.
이래서 5성은 안 된다니까.
잠시 뒤.
나와 위령은 훈련소에 도착했다.
훈련소 가운데에는 철책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대련장이 세워져 있었다.
“대련인가.”
“그래.”
나는 눈앞의 위령에게 말했다.
위령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검을 빼 들었다.
종이처럼 얇디얇은 백은의 장검.
칼집에서 뽑은 반동 때문인지 검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편없이 약해졌구나.”
위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약해졌다.’
만약, 저 녀석이 본래 무련의 핵심 간부였고, 무련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재포장됐다면, 레벨과 스킬이 초기화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아.”
위령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대련장 한 편에 놓인 철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저 녀석이 5성이라고 해도 1레벨과 40레벨의 대결이었다.
적당히 수준을 맞추면서 놀아주기로 했다.
‘어디 한번 해볼까.’
익시드를 쓸 때의 감각과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익시드는 출력을 높였다면 이번에는 일부러 낮추는 것.
리디기온이 나와 대련할 때 사용한 방법이었다.
“배려 고맙다.”
내 몸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위령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검을 느슨하게 쥐었다.
“무련, 천의무봉대의 단장, 검홍 난위령.”
검은 생머리를 묶어 내린 위령이 내게 포권을 취했다.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잘 부탁하오.”
“부탁은 무슨.”
“그대는 고수인 바, 선수를 받겠소!”
팟!
위령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보지도 않고 검을 뒤로 휘둘렀다.
카캉!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연검날이 뱀처럼 검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연검술.’
픽 미 업에서도 사용자가 극히 드문 무기술이었다.
리디기온과의 대련에서 겪어보지 않았다면, 방금 수에 피를 한번 봤을 것이다.
“왜 검을 쓸 수 없지?”
챙! 챙강! 챙챙챙!
나는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연검을 되받아치며 말했다.
“연자의 맹세란 것은, 의와 협에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다.”
“그딴 이상한 이유 말고.”
“무련에서는 각오를 걸지 않으면 절정지경으로 올라갈 수 없어.”
“아하.”
일종의 자가 패널티인가.
“4성에 벌써 신검합일에 오기조원인가.”
“말 좀 알아듣게 해.”
채애앵!
공중에서 연달아 세 번 자세를 바꾼 위령이 검격을 쏟아냈다.
가슴, 허리, 허벅지로 이어지는 삼연참. 나는 검을 상단으로 쓸어올려 공격을 걷어낸 뒤, 공세로 바꾸어 몰아쳤다.
“아깝구나. 네가 무련 출신이었다면, 대성할 수 있었을 것을…….”
위령은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공중을 뛰어다니는 듯한.
‘무련이라.’
니플헤임과 인연이 아예 없지는 않다.
몇 달 주기로 열리는 서버 통합전 때, 무련의 마스터와 실제로 교류를 해본 적도 있었다.
그곳에 속한 영웅들의 직업은 소수 비전투직을 제외하면 9할 9푼 이상이 명인이라 봐도 좋았다. 그들은 무기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며, 여기에 무련만의 고유 각인인 기공술을 덧붙여 강함의 완성도를 한층 높이곤 했다.
추정 소속 영웅은 5만.
인원수로만 따지면 니플헤임의 두 배에 가깝다.
‘왜 멸망했지?’
나는 위령과 검을 섞으며 생각했다.
무련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서버의 지배자였다.
특히 거기의 서브 마스터인 단자흠은, 17가지 무기술의 극한을 돌파한 레벨 400대의 7성 영웅 중 하나였다.
‘임무에 실패했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탑의 89층에 도달한 이후, 무련은 공식적으로 등반 포기를 선언했다.
“너는 강하구나.”
“웃기는 소릴 하는데.”
이 녀석의 능력이 초기화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졌을 것이다.
무련 산하 단체의 대장.
예전에는 6성 만렙이었겠지.
‘내부 항쟁인가.’
아니겠지.
무련의 단결력은 엄청나다.
놈들은 조그마한 상선 한 척만 건드려도 벌떼같이 들고 일어선다.
“이제야 기억났어. 나는 원한을 갚고,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해 신녀에게 혼을 바쳤다. 필요하다면 수억의 도산검림이라도 기꺼이 헤쳐나갈 것이야.”
위령의 검놀림이 경쾌해졌다.
나는 점차 능력의 제한을 풀어갔다.
그러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
레벨 1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함이었다.
[띠링!] [‘위령(★★★★★)’의 실의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임무에 출전시킬 수 있습니다!]그래 봤자 각인의 패널티는 그대로지만.
“부탁은 뭐지?”
“2지대에서 가야 할 장소가 있다.”
“어딘데?”
“타천향(墮天鄕).”
이런 젠장.
카티오에게 말해서 번역 마법을 준비하든 해야겠다.
뭐라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네.
“이곳의 발음으로는, 니플헤임이라고 한다.”
나는 검을 멈췄다.
연검을 찔러오던 위령도 손을 멈추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거기는 왜 가는데.”
“그 연유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내겐 사명이 걸린 일이야. 한 번만 도와다오. 그곳의 문주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전언이 있다.”
“여기서 말해봐라.”
위령은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미안하지만, 변방의 소문주인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전언이야.”
“그럼 안 도와줄 건데.”
“큭…….”
“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해봐. 왜 여기서 니플헤임이 나와? 궁금하잖냐.”
“혹시, 이곳은 타천향의 산하 문파인가?”
“그건 아니지만, 관계가 아예 없진 않거든.”
나는 검을 거두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오자 흥이 식었다.
“…….”
나는 위령을 바라보았다.
위령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납득한 듯이 중얼거렸다.
“괜찮겠구나. 그 불경한 이름은 아는 자가 많지 않으니.”
위령은 연검을 뻣뻣하게 펴더니, 하얀 칼집에 집어넣었다.
“많이 배웠소.”
“…….”
서로 카드를 내보이지도 않은 모호한 대련이었지만, 위령은 내게 포권을 취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 비밀이야. 만약 새어나간다면 나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
“나는 무련 소속이며, 련주님의 특명을 받고 2지대에 왔다.”
위령은 심호흡을 두어 번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엘 시드, 준동…….”
“그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직 말이 다 안 끝났다만.”
“말 안 해도 돼. 알 거 같으니까.”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듣고 있었냐.”
“죽을 리 있나.”
그 괴물 같은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