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9
68. 임무 유형, 복합 (1)
* * *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나는 무기술과 흑룡혈의 단련을 이어가면서 빈 시간에 대기실 업무를 맡았다.
영웅들의 훈련 상황과 비공정의 건조 진척도를 확인하고, 영웅들의 성향과 직업을 고려하여 파티를 짰다. 그리고 각 파티의 리더를 지정했다.
파티 구성의 최종 결정권은 마스터에게 있었지만, 암케나는 내 제안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50층 공략을 앞둔 지금, 타오니어의 전력은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 상태였다.
전투형 비공정 다섯 대.
사백여 명의 영웅들.
49레벨의 계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병력이었다.
‘뒤통수 대비도 완벽하고.’
본대가 임무에 떠나있는 동안, 위령을 필두로 한 수비군들이 대기실을 지킬 것이다.
벌써 그들은 두어 차례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벨키스트가 돌아왔지.’
출발 직전에나 올 거라 생각했던 벨키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복귀했다.
나는 벨키스트에게 성공 여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 녀석의 표정만 봐도 결과를 알 수 있었으니까. 구구콘이 어이가 없다며 혀를 찰 정도였다.
‘레벨도 충분히 올라왔다.’
53레벨.
현재 나의 레벨이었다.
우리는 47층에 이어 48층을 클리어했고, 49층까지 무사 돌파했다.
마침, 49층에 몬스터 사냥을 통해 경험치를 다량 획득할 수 있는 임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경험치 부족으로 5성으로 승급할 수는 없었지만, 4성의 한계선까지는 도달했다.
이것은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3단계에 머물러 있던 흑룡혈도 얼마 전 4단계를 돌파했다.
이제 웬만한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도 1 대 1은 밀리지 않을 것이다.
암케나는 본 공략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필요 없는 영웅들을 모아 선발대로 50층에 출전시키려 했다.
미리 패턴을 파악하고 싶었겠지.
[※임무 출전 불가능!] [해당 임무는 비공정이 필요합니다!]하지만 암케나가 출전 버튼을 터치하자, 위와 같은 메시지가 뜨더니 임무창이 닫혔다.
비공정이 있어야 하는 임무. 그러나 비공정 한 대, 한 대가 금과 같은 타오니어에서 버림패로 쓸 만한 비공정은 없었다. 결국, 선발대 정찰은 포기해야만 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껏 그랬듯이 전력을 모아 한 번에 돌파하는 것.
그리하여 다시,
출전의 때가 왔다.
“심호흡하세요, 심호흡!”
2파티의 쌍둥이 마법사, 레인이 에디스의 등을 쓸어내렸다.
에디스는 창백한 얼굴으로 눈앞의 종이를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저기, 한이 해주면 안 될까? 난 못하겠는데…….”
“대장은 너잖아.”
“아니! 공격대 대장은 서브 마스터가 해야지!”
“네가 사람을 이끄는 데에 적성이 잘 맞잖냐.”
“그건 무슨 소리야! 살 떨려 죽겠는데.”
이곳은 차원의 틈에 위치한 격납고였다.
제2의 광장이라고 불릴 만한 드넓은 장소.
차원의 틈에는 타오니어에 속한 모든 전투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줄을 맞춰 서서 단상 위의 우리들을, 정확히는 이번 공격대의 총대장으로 임명된 에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웅들의 뒤에는 다섯 대의 비공정이 도열해 있다.
각각 캐피탈리즘 호, 루세트 호, 티어 호, 이지 호, 프랑 호로 이름 붙여진 비공정들은 모두 이번 임무에 참전할 예정이었다. 갑판 위에는 조종과 정비, 포격을 맡은 영웅들이 서 있었다.
“느닷없이 연설이라니, 일개 용병 나부랭이인 내가…….”
“사기를 위해서도, 사전 연설은 필수 아니겠냐.”
“암요! 암요!”
내 말에 레인과 메인이 맞장구를 쳤다.
“대장님도 나서지 못하는데, 부하들이 어떻게 가겠습니까!”
“바로 그거죠.”
“미치겠네…….”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에디스를 내버려 둔 채 단상 밑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이번 임무에서 기동대 밑 주요 지점 타격 역할을 맡을 1파티의 멤버가 모여 있었다.
“예상보다 적의 숫자가 많아. 이 정도로 될까?”
카티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47층에서 돌아온 뒤부터 저 소리를 백 번은 하는 것 같다.
“지원군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용병왕이랬나?”
“올지 안 올지도 모르잖아. 불확실한 전력은 빼는 게 맞아.”
“불확실하진 않지.”
“그럼 무조건 온다는 거야?”
“내 예상이 맞다면.”
그들이 임무에 아무 의미도 없이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프리아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때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아빠가 나온다고 했지.”
키샤샤가 주먹을 맞부딪혔다.
“괜찮겠냐?”
“상관없어. 얼굴 몇 번 본 적도 없거든. 가장 강한 전사랬으니까, 한번 붙어보고 싶은 것뿐이야.”
키샤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다.
상관없다고 했지만, 피를 나눈 동족을 토벌하러 간다는 것이 기분 좋지는 않을 것이다.
“벨키스트,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소. 한시라도 빨리 써보고 싶군.”
벨키스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면 지겹도록 쓰게 될 것이다.
할기온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원래 이 녀석은 비둘기의 몸으로 오려 했지만 키샤샤가 난리를 피는 바람에 데려오지 못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원격으로 통신할 수 있는 이상, 흑룡혈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언제나 긴장되네요.”
제나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다.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그럴 수는 없어.”
“알아요. 1파티 멤버들이라도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35층의 일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잖아요. 오빠도, 저도.”
그렇기야 하지.
나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표정의 에디스가 연설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아.”
숨을 한번 고른 에디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연설이 시작되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번 전투에 대기실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정도.
‘모든 것이라.’
맞는 말이었다.
이번 공략전에 암케나는 계정의 전부를 투자했다.
만약 영웅들이 전멸한다면, 대기실은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받겠지.
무리해서 병력을 끌어모은 만큼, 이와 비슷한 전력을 다시 키울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암케나는 너무 많은 칩을 베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시도가 마지막이겠지.
‘용케도 포기 안 했군.’
한 번의 터치에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다.
이 압박감을 못 이긴 몇몇 마스터들은 공략을 준비하다가도 자진해서 포기하곤 했다
나 역시 그랬다.
수없이 많은 임무를 겪어왔으나, 출전 버튼을 누를 때면 항상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암케나도 나처럼 잠시 망설이기만 했을 뿐,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작 50층에서 대형 임무라니.
임무 복이 터졌구만.
‘선발대는 없다.’
임무가 시작되자마자, 타오니어의 공격대가 일제히 투입될 예정이었다.
[한, 무조건 이겨야 돼!]이마에 필승 두건을 두른 이셀이 내게 삿대질을 했다.
[어떤 놈이건, 어떤 꼼수를 부리건!]“당연하지.”
나는 픽 웃었다.
언제나 그래왔었지.
이기는 건…….
[‘시공의 틈’과 ‘차원의 틈’이 연결됩니다!]“이기는 건 우리야.”
에디스가 연설을 끝마쳤다.
[성공적인 연설!] [공격대의 사기가 상승합니다!]연설 못 하겠다고 내뺄 때는 언제고.
나름대로 깔끔하게 잘했잖아.
“전원 탑승!”
철커덕.
비공정 다섯 대의 계단이 동시에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영웅들이 갑판으로 올라타기 시작했다.
“장관이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이 싸운다니.”
“신경 쓸 필요 없소.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될 뿐이지.”
“그렇기야 하지만요.”
제각기 무기를 차려입은 수백 명의 영웅들이 우르르 비공정에 탑승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서 투지와 두려움 그리고 여러 감정들이 엿보였다.
어떻게 보면, 제나 말처럼 장관이었다.
“우리, 타오니어를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거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가 숨을 골랐다.
“좋아요. 타오니어를 구하러 가요!”
우리가 탈 비공정은 타오니어의 두 번째 비공정이자, 함대의 선두를 맡을, 소형급 루세트 호였다.
루세트 호는 1파티의 작전 지역 투입을 위해 만들어진 수송형 비공정으로 무장을 줄인 대신 기동력과 방어력을 높였다.
갑판에 올라서자 소녀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점령전을 할 때 이 녀석의 신세를 졌었지.
“우리밖에 없네요.”
제나가 근처를 둘러보았다.
이 비공정은 전장의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본대의 영웅들은 루세트 호를 제외한 네 대의 비공정에 나눠타고 있었다.
에디스를 비롯한 지휘진이 승선하게 될 공격대의 기함은 캐피탈리즘 호였다.
[열려라, 시공의 틈!]멀지 않은 곳에서 빛이 일더니, 거대한 빌딩 크기의 거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울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탑을 등반, 세상을 구원하라!] [메인 던전 : 현 등반 층수 – 49]저 거울 안으로 들어가면 임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약 400명의 병력을 실은 비공정들은 인원 체크 및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에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통신 채널에서는 대답이 없다.
인원에 이상이 없다는 뜻이었다.
우우우웅.
비공정 선단의 맨 앞에 주차되어 있던 루세트 호가 부유하기 시작했다.
‘시작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날뛰는 피를 가라앉혔다.
타오니어로 떨어진 이후, 최대 규모의 임무였다.
부우우우웅!
루세트 호가 가속했다.
임무 필드의 통로인 거울까지는 바로 코앞.
[마스터, 임무를 시작합니다!]정비사의 활기찬 음성과 함께,
루세트 호가 시공의 거울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 앞을 가린 빛이 걷히고 나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쳐 갔다.
‘필드는…….’
숲인가.
시작 위치는 공중.
우리가 탑승한 루세트 호는 숲의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서행하고 있었다.
물론, 저 멀리서 거대한 알이 쉴 새 없이 검은 피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번쩍.
빛이 일더니, 타오니어 소속의 비공정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럽게 많군.”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자,
[몬스터 군단 Lv.???] X 8325숲 곳곳.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의 몬스터가 바글거리고 있었다.
[Tisp!] [전술 도구를 사용하여 함대의 전술 목표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지정하지 않는다면, 영웅들은 인공지능에 따라 행동합니다.]에디스가 공격대 전체에 통신을 전달하고 있다.
“조건만 충족하면 프리아는 알아서 나타날 거야.”
“그래.”
프리아의 출현 조건이 무엇인지는 임무를 진행하면서 찾으면 된다.
우우웅.
선두의 루세트 호가 천천히 나아갔다.
전방 약 50m 앞.
누군가 하늘 위에 떠 있다.
[Danger!] [흑왕자] [프라이오스 알 라그나 Lv.354]에디스가 통신을 끊었다.
황자는 미라처럼, 전신을 새빨간 붕대로 꽁꽁 싸맨 채 검은 외투를 두르고 있었다.
그 얼굴의 입 부근이 꿈틀거렸다.
「이곳은 어울리지 않는다.」
「바꾸도록 하지.」
황자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리고.
[Now Loading…….] [필드를 구성하는 중입니다!]쨍그랑!
유리가 깨지듯, 눈앞의 풍경이 일변했다.
하늘이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는 회색 구름이 회오리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필드 구성이 완료되었습니다!] [필드 타입 – 어둠]「게임을…….」
황자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자.」
[플로어 50.] [임무 유형 – 복합] [임무 목표 – 알 수 없음] [오염된 몬스터 군단 Lv.???]X 13579
필드 타입은 어둠.
픽 미 업의 설정상에서는 초차원 공간이라 명명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소였다.
‘…….’
나는 근처를 살폈다.
보랏빛으로 변한 하늘에서는 오로라처럼 잔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에는 드넓은 숲이 펼쳐져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전의 필드와 다를 바 없었지만, 검게 변색된 숲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Warning!] [‘혼돈의 알’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꿀렁.
숲 가운데에 있던, 거대한 알의 눈이 뜨여졌다.
“오빠, 저기……!”
“알아.”
고오오오오.
혼돈의 알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필드 전체에 울려 퍼졌다.
회백색의 껍질 바깥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더니 출렁거렸다.
“카아아악……?!”
촉수는 근처 하늘을 부유하던 와이번 떼를 채찍처럼 휘어잡았다.
그리고는 껍질 가운데에 생겨난 입으로 사냥감을 가져갔다.
콰직.
무수한 이빨들이 와이번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퍼진 수십 개의 촉수가 몬스터들을 무차별적으로 휩쓸었다.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요.”
제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뭐, 저 알이 언제는 보기 좋았냐만.
[Danger!] [마스터, ‘혼돈의 알’이 주위의 몬스터를 사냥합니다! 진화도 수치가 100이 되면 ‘혼돈의 알’은 ‘혼돈의 유체’로 진화합니다. 시간 내에 임무 조건을 충족시키세요!] [현재 진화도 : 001 / 100]구오오오오오!
건물 크기의 대형 몬스터를 머리부터 집어삼킨 알이 포효했다.
‘목표는 정해졌군.’
타임 어택.
진화도 수치가 100을 가리키기 전, 알을 처리하거나 진화를 늦춰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필드를 다시 살폈다.
비공정 아래에서 득시글거리는 만 마리 이상의 몬스터들.
저게 전부라면, 영웅 1명당 30마리 정도만 처리하면 충분하겠지만, 몬스터들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촉수가 집어삼키는 속도보다 빠르게.
‘불가능한 난이도인가.’
초보 마스터들은 임무의 초반만을 보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이건 절대 깰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고수들은 다르다.
그들은 픽 미 업의 상위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임무라도,’
설사 신과 악마가 튀어나온다 한들,
그것을 깰 수 있는 공략은 존재한다.
에디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내게만 들리는 개인 통신이었다.
나는 귀에 손을 올렸다.
“일단 알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필드를 살펴봐야 해. 공략의 힌트가 어딘가 있을 거야.”
나는 시야 오른쪽 위의 알림창을 살폈다.
[현재 진화도 : 001 / 100]진화도가 오르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필드를 천천히 살펴보고, 공격대를 정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마, 이런 유형의 임무라면, 숲 어딘가에 여신상이 숨겨져 있을 거야. 알에 다가가면 위험하니까, 숲 주위를 돌면서 오브젝트를 찾아보자. 눈이 좋은 애들한테 자세히 살펴보라고 해.”
나와의 통신을 끊은 에디스는 즉시 지휘용 채널으로 내가 말한 내용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겁먹은 놈은 별로 없군.’
공포나 패닉에 빠진 영웅들이 몇몇 보였지만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우우웅.
루세트 호가 뱃머리를 돌렸다.
에디스의 지시대로 알의 근처를 돌면서 필드를 탐색하려는 것이다.
“이제 오겠구려.”
팔짱을 끼고 있던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끼에에에엑!”
숲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비행형 몬스터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놈들이 날아오르자 하늘 일부가 까맣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림잡아 세어봐도 수백 마리.
당연히 그들의 목표는 타오니어의 비공정 선단이었다.
타오니어의 수석 정비사이자, 이제는 함대장이 된 라디가 지휘 채널에서 크게 외쳤다.
철컥. 기릭기릭.
기계음이 나더니, 뒤에서 루세트 호를 따라오고 있던 네 대의 비공정들이 각자 무기를 내보였다.
기본 무장인 대형 발리스타부터 연발형 투석기, 마법 대포 등 장비 제작소의 장인들이 밤낮을 투자해서 만든 물건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마법사들의 영창 소리가 들렸다.
2파티의 쌍둥이 외에도, 암케나는 유료 뽑기를 해서 몇몇 마법사들을 새로 충원했다.
각각의 비공정에서 마력 섬광이 일고 있었다.
“끼에에엑! 끼아아아!”
[오염된 하피 Lv.48] X 321 [오염된 와이번 Lv.51] X 32 [오염된 키메라 Lv.53] X 11콰콰콰콰쾅!
비공정의 옆면에서 나란히 포화가 터졌다.
발리스타 화살에 직격당한 하피가 토막 났고, 포격에 맞은 와이번의 날개가 찢어졌다.
수 미터 크기의 얼음창과 번개 줄기가 키메라 한 마리를 머리에서 꼬리까지 꿰뚫었다.
펑! 퍼퍼퍼펑! 퍼퍼퍼퍼펑!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하늘 곳곳이 화염과 피, 몬스터들의 비명으로 얼룩졌다.
비공정과 마법사의 포화망을 뚫은 몬스터들은 궁수진의 화살 세례에 직면해야 했다.
파바바바바박!
선두에서 날던 키메라가 고슴도치가 되어 추락해갔다.
아쉽게도, 고속함인 루세트 호는 비무장이었다.
“화살 걱정 없이 활을 쏘는 건 처음이네요.”
제나는 갑판 위의 기둥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수십 발의 강철 화살이 담긴 통이 놓여 있었다.
제나가 싱긋 웃더니 장궁에 시위를 먹였다.
[고유 스킬, ‘강철 폭풍’ 발동!]파아앙!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더니, 화살의 궤적에 걸린 몬스터들이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힘 빼지 말고 적당히 해. 우린 저런 잡졸들을 처리하려고 있는 게 아니야.”
“알아요, 알아. 위험할 것 같을 때만 지원할게요.”
팡!
수 미터 크기의 키메라를 단발로 죽인 제나가 다음 사격을 준비했다.
“발리스타 정도가 아니지.”
비행형 몬스터들은 숲 안쪽에서 끊임없이 날아올랐지만, 포화망과 화살 사격에 맥을 못추며 몰살당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비공정의 선체에 붙는 데 성공한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슬슬 때가 됐는데.’
나는 하늘 너머를 보았다.
필드를 어둠으로 뒤바꾼 황자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자기 부하들이랑 시시덕거리며 우리를 보고 있겠지.
‘여기서 끝날 리 없다.’
나는 비프로스트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Danger!] [어둠 차원문이 생성됩니다!]하늘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는 비공정의 갑판 위.
검은 구멍이 뒤틀리며 열렸다.
“키아아아아아!”
[오염된 고블린 Lv.38] X 315 [오염된 리자드맨 Lv.41] X 85 [오염된 인간 병사 Lv.45] X 76 [오염된…….]구멍에서 온갖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비공정의 갑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던 고블린이 루세트 호의 옆면에 달라붙었다.
파지지직!
“끼아아아악!”
통구이가 된 고블린이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져 갔다.
비공정의 갑판과 내부를 제외한 다른 부위에서는 고압 전류가 흐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올라타는 놈들을 막기 위한 설비였다.
“때가 됐군.”
벨키스트가 조용히 검을 뽑았다.
이쪽에도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흥!”
송곳니를 드러낸 키샤샤가 주먹을 맞부딪혔다.
[고유 스킬, 수화(초월형) 발동!] [‘키샤샤(★★★★)’가 변신합니다!]“크아아아앙!”
키샤샤가 포효했다.
초월형 수화.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짐승의 육체 능력을 가져온다.
기존 수화의 상위 단계였다.
머리 위에는 털이 푹신한 호랑이의 귀가 돋아나 있다.
엉덩이에 난 꼬리를 한번 살랑거린 키샤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호랑이 펀치!”
키샤샤가 위로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앙!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의 살점과 피가 갑판 전체에 떨어져 내렸다.
“초반부터 힘 빼지 마.”
“알고 있다, 한! 이 정도는 몸 푸는 거야.”
갑판의 끄트머리에 병사 한 명이 떨어져 내렸다.
강철 갑옷에 투구는 눌러쓰고 있었다. 안갑 너머로 보이는 눈에는 이성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창을 찔러온다.
콰직. 나는 비프로스트를 꺼냄과 동시에 올려 베었다.
순식간에 토막 난 병사의 상체가 비공정 바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 말했다.
“각자 담당 구역을 정해 놈들을 정리한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 역할은 잡졸 처리가 아니야.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최소한의 힘으로 처리해. 내가 갑판의 후미 쪽을 맡겠다. 키샤샤가 중앙, 벨키스트가 앞쪽. 제나는 지원 사격 계속하고, 카티오는 마력 낭비하지 말고 쉬어라.”
다들 대답은 없었지만, 내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나는 검을 빼든 채 갑판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리자드맨 한 마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키락!”
펑!
왼손으로 가벼운 잽을 날리자, 머리가 사라진 리자드맨이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이쪽엔 몬스터의 수가 많지 않군.’
어둠의 틈새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은 공격대의 본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공격대의 기함인 캐피탈리즘 호에는 수백여 마리의 몬스터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갑판 위에서 영웅들이 몬스터와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1호기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어줄 수도 있어.”
갑판 안쪽에서 몸을 피하고 있던 카티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의 공격에 무너진다면 공략하는 의미가 없었다.
[현재 진화도 : 004 / 100]진화도가 3포인트 올랐다.
여전히 알은 촉수를 휘두르면서 몬스터들을 포식하는 중이었다.
영웅들의 부상 메시지가 차례차례 떠올랐다.
비공정에 들이닥친 몬스터는 벌써 천 마리에 가깝다.
그러나 영웅 측은 아직 한 명의 사망자도 없는 상태였다.
‘할 수 있다.’
영웅과 몬스터의 교환비는 100 대 1 이상.
이 정도면 만 마리가 아니라 수만 마리가 몰려와도 버틸 수 있다.
지상에서 포위되는 형태라면 힘들었겠지만, 이곳은 우리의 무대인 하늘이었다.
[창고를 개방합니다!] [발리스타용 화살 X 13235] [마력형 폭약 X 9831] [체력 회복 물약(중급) X 511] [마력 회복 물약(중급) X 364] [전송용 소환석 X 318] [전류석…….] [마스터, 비공정 선단에 원격 보급을 실시하시겠습니까? 보급에는 ‘전송용 소환석’이 필요합니다.] [Yes(선택) / No]탄약과 물약은 차고 넘쳤다.
전술 메뉴를 개방한 암케나는 비공정에 꾸준히 물자를 채워 넣고 있었다.
저걸 다 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대형 공장을 방불케 하는 타오니어의 장비 제작소에서 추가분을 찍어내고 있는 중이니까.
갑판에서 멤버 교체가 이루어졌다.
선내에서 체력을 보존하고 있던 2군들은 한창 싸우던 1군들과 위치를 뒤바꿨다.
비공정 위의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교대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었다.
에디스가 외쳤다.
[영웅 ‘에디스(★★★★)’가 동료를 다독입니다!] [공격대의 사기가 상승합니다!]“아직은 시시하군.”
벨키스트가 병사 세 놈을 한 동작으로 베어 넘겼다.
루세트 호의 갑판에도 몬스터의 시체가 쌓여가고 있었다. 일단 웬만한 놈들은 전류 방벽에서 처리된다. 갑판에 착지하는 몬스터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에디스가 개인용 통신을 보냈다.
타오니어 1함대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필드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았지만, 여신상 같은 특이 오브젝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안쪽에 있겠네.”
나는 알이 꿈틀거리고 있는 숲의 안쪽을 보았다.
불길한 색의 구름이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저 구름 속을 돌파해야 하는군.’
하긴, 오브젝트가 바깥쪽에 있을 리 없겠지.
그럼 너무 쉬우니까.
“그래.”
에디스가 통신을 끊었다.
잠시 뒤.
루세트 호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포성이 쉴 새 없이 터지고, 화염이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무수한 몬스터들이 지상에서 날아오르거나, 비공정 위의 차원 구멍에서 갑판을 향해 뛰어들었다.
타오니어의 비공정 선단은 몬스터의 공격을 견디면서 숲의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캬아악!”
검붉은 피부의 고블린 두 마리가 단검을 든 채 양옆에서 달려들었다.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자 단검 날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가볍게 비프로스트를 내리그었다.
“끼악!”
고블린들의 찢어진 상하체가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벌써 내가 처리한 몬스터들만 수십 마리.
하지만 이 정도로는 요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1파티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괜찮아.’
루세트 호는 물론, 다른 비공정들도 몇몇 부상자나 손상 부위는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이런 페이스라면 놈들이 몇 시간 내내 몰려와도 버틸 수 있다.
[현재 진화도 : 008 / 100]다만, 이번 임무의 룰은 타임 어택.
정해진 시간 내에 임무 조건을 찾아낸 뒤 충족해야만 한다.
실패한다면…… 아마 우리는 전멸하겠지.
콰직!
루세트 호는 앞을 가로막은 하피들을 뱃머리로 들이받으며 빠르게 전진했다.
전방에는 똬리를 튼 뱀처럼 얽히고설킨 거대한 나무들과, 그 위에서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보랏빛 구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루세트 호가 구름의 바다로 진입하자,
비공정 전체가 희뿌연 안개에 휩싸였다.
[혼돈의 심층(1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 [공격대 전체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디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5% 감소]미묘하게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주인가.
에디스가 개인 채널에서 속삭였다.
“능력치 감소다. 신경 안 써도 돼. 5%는 상관없어.”
필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패널티가 있는 것 같다.
숲의 외곽에 걸쳐 있는 이 장소에서는 영웅 전체를 대상으로 5%의 능력치 감소가 적용되고 있었다.
알까지는 꽤 거리가 남아 있다.
내 예상대로라면, 안쪽으로 갈수록 디버프가 심해질 것이다.
“무시하고 전진해.”
나와의 통신을 끊은 에디스는 곧장 지휘 채널에서 명령을 내렸다.
루세트 호를 비롯한 선단이 쐐기 진형으로 바꾸어 구름 속을 나아갔다.
사방이 희끄무레해지기는 했지만, 딱히 시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키아아아악!”
펑! 퍼퍼펑! 퍼퍼퍼퍼펑!
한 차례의 대공세를 버텨낸 함대가 좌우로 포격을 흩뿌렸다.
일제 사격에 고깃덩이가 된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아래쪽으로 추락해갔다.
[현재 진화도 : 011 / 100]나는 갑판 위의 몬스터를 정리하면서 1단계 구역 곳곳을 둘러봤다.
이곳에 오브젝트가 존재한다면 분명 표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안을 이용하면서까지 샅샅이 뒤져봐도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다음 구역에 있나.’
타오니어 함대가 숲 외곽의 구름바다를 뚫었다.
그리고, 주위에 펼쳐진 안개의 색깔이 불그스름하게 바뀌었다.
[혼돈의 심층(2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 [공격대 전체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디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10% 감소, 상태이상 중독]매캐한 공기가 폐로 파고들었다.
흡사 불을 들이키는 듯한 쓰라림.
“오빠, 독……!”
중독 상태이상.
나는 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공기 전체가 오염된 것 같다.
“카티오.”
“내게 맡겨.”
카티오는 눈을 감더니, 손을 좌우로 교차했다.
손끝에서 마력의 실이 퍼져나가 투명한 방벽을 만들었다.
마학자 고유의 공기 정화 마법이었다.
비로소 호흡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괜찮아졌어요. 하지만 다른 파티는 방법이 없는 거 같은데요!”
“그렇게 심한 독은 아냐. 물약만 제때 섭취한다면 오래 버틸 수 있어.”
맹독이었다면 당장 탈출해야 했겠지만, 이번 상태이상은 그보다 몇 단계 낮은 중독이었다.
“에디스, 선내 창고에 비상용 해독제가 있을 거야. 그걸 갑판 위의 멤버들에게 보급해라.”
“되든 안 되든, 가야지.”
나는 난간 밑을 보았다.
키메라의 입에서 화염이 토해지고 있었다.
시뻘건 화염은 루세트 호의 밑바닥을 뜨겁게 달구었다.
“키아아악!”
퍽!
불을 뿜던 키메라의 목구멍에 제나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현재 진화도 : 011 / 100]모든 능력치 10% 감소에 중독 상태.
디버프의 수치가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제 하나둘 사망자가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다.
[‘라킬(★★★)’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영웅 측에서 첫 사망자가 떴다.
갑판에 달라붙은 몬스터를 처리하다 같이 추락사한 것이다.
[Danger!] [어둠 차원문이 추가로 생성됩니다!]“슬슬 많아지는군.”
트롤 한 마리를 베어 넘기던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차원문에서 뛰어내리는 몬스터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제는 포화망을 뚫고 안쪽으로 진입하는 비행형 몬스터들도 생겨났다.
파지지직!
전류 방벽이 출력을 높였다.
“여신상은?”
“그럼 다음 구역으로 가. 어물쩍거릴 시간 없어.”
나는 시야 우측을 보았다.
[현재 진화도 : 017 / 100]벌써 17%.
알이 몬스터들을 집어삼키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혼돈의 심층(3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타오니어 함대가 숲의 2구역, 불그스름한 안개 지대를 돌파했다.
‘이번 디버프는…….’
[공격대 전체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디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50% 감소, 상태이상 맹독] [‘심연의 아귀’가 활동을 시작합니다!]콰아아아앙!
숲의 한쪽이 들썩거리더니, 거대한 입이 튀어나왔다.
‘……이런 망할.’
나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당장 빼! 다시 2구역으로 가라!”
삐이이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경고음.
3구역의 초입에 돌입하던 함대가 허겁지겁 뱃머리를 돌렸다.
‘능력치 50% 감소에 맹독이라고?’
나는 난간을 붙잡았다.
루세트 호가 위쪽으로 급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콰직!
백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입이 닫혔다.
루세트 호가 급상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대로 먹혔겠지.
심연의 아귀.
아주 드물게 나오는 함정형 몬스터로서, 비공정의 악몽이라 불리는 놈이었다.
자기 위를 지나가는 것들은 다 잡아먹어 버리니까.
‘개 같은…….’
여기선 도저히 활동할 수 없다.
영웅들의 능력치가 반절이나 떨어지고, 맹독 상태이상에 아귀까지 움직인다면, 타오니어 함대는 10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혼돈의 심층(2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 [디버프가 완화됩니다!]함대가 2구역으로 돌아왔다.
[현재 진화도 : 023 / 100]진화도는 계속해서 오르는 중.
에디스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나는 팔짱을 꼈다.
“기다려봐. 생각하고 있으니까.”
디버프의 악화 수준이 너무 가파르다.
10%에서 갑자기 50%로 뛰다니. 다섯 배는 좀 심하잖냐.
‘3구역에 뭔가 있군.’
나는 갑판 위를 돌아보았다.
두 번째 공세가 끝난 뒤라 약간 여유가 있었다.
벨키스트는 검날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고, 키샤샤는 스스로 어깨를 풀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공기 정화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카티오와
골똘히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제나가 보였다.
“아까 장소 말이지.”
“몸이 갑자기 무거워지더군.”
“하지만…… 가야 하는 거잖아.”
“그래서 물어보는데, 거기서 뭐라도 본 사람?”
나는 말하면서 제나를 쳐다보았다.
제나가 나를 보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빠, 이상한 빛을 본 것 같기도 해요. 확실하진 않아요.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였거든요.”
“어디서 봤지?”
“괴물의 입 안쪽이었어요. 하얗게 반짝거렸다고 해야 되나. 저희가 임무에 들어갈 때 있잖아요. 그때 빛의 색깔이랑 비슷해요.”
나는 기둥에 등을 기댔다.
‘하얀빛.’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10초 만에 결론을 내린 나는 입을 열었다.
“에디스.”
“너희 본대는 2구역에서 대기하고 있어. 우리만 3구역에 갔다 온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임무 밖이라면 몰라도, 임무 안이라면 순간의 망설임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현재 진화도 : 027 / 100]늦장 부릴 시간은 없었다.
“기다려라. 저주를 없애고 올 테니까.”
에디스와의 통신을 끊은 나는 조종실로 들어갔다.
“바로 출발해.”
“설마…….”
“그래, 그 설마야. 우리는 아귀 입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좀……!”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정비사는 반쯤 우는 얼굴으로 조종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루세트 호가 다시 방향을 꺾었다.
[혼돈의 심층(3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 [1파티 전체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디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50% 감소, 상태이상 맹독]이번에 디버프를 받는 대상은 1파티만.
다른 비공정은 2구역에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몬스터들의 3차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데.’
움직이지 않아도 디버프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상태창을 열어보자, 고스란히 반으로 깎인 스탯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참.’
나는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본대가 진입할 수 있게, 우리가 길을 뚫어야 해. 최대한 빨리 이 디버프를 해제해야 한다.”
“방법은?”
“제나가 봤다는 빛 속으로 들어가야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들어와서 다시 둘러봤지만, 오브젝트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만약 잘못 본 거라면…….
“그땐 그때 생각하고.”
[‘심연의 아귀’가 활동을 시작합니다!]쿠릉.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넌 일 마치고 튀어도 돼. 2구역에서 본대와 합류해라.”
“그럼 다행이네.”
나는 비프로스트를 늘어뜨린 뒤, 멤버를 둘러보았다.
“신호하면 뛰어내려.”
“…….”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지시였지만, 반박하는 멤버들은 없었다.
“후, 진짜. 5층마다 매번 대단하네요.”
“이젠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봤다.
쾅!
땅이 갈라지더니 시꺼먼 입이 튀어나왔다.
입의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이빨이 돋아 있다.
“오빠, 저기!”
나는 제나가 가리키는 곳을 살폈다.
아귀의 입 안쪽, 하얗게 빛나는 소용돌이가 보였다.
“정답이네.”
구오오오오.
아귀가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한층 크게 벌렸다.
루세트 호가 덜컹거렸다.
“지금.”
망설임은 없다.
나는 난간 너머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부양감과 함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1파티’가 ‘심연의 투기장’에 돌입합니다!]빛의 소용돌이가 나를 집어삼켰다.
“…….”
나는 눈을 떴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은 고운 모래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는 끝 모를 어둠이 가득했다.
‘앞은 잘 보이는군.’
1파티의 멤버들도 무사히 들어온 듯,
제각기 필드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긴…….’
사방이 높은 강철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마치 20층의 무대였던, 원형 투기장을 연상케 하는 듯한 장소였다.
‘연상케 하는 정도가 아닌가.’
20층과 똑 닮았다.
눈앞에 있는 적이 다를 뿐.
투기장 위쪽의 관람석,
옥좌에 앉은 황자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싸움터에는…….
[Danger!] [수왕] [키아드니 비크샤비 Lv.???] [Danger!] [맹목의 성녀] [리아느 테라리사 Lv.???]“크하하!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다!”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앞을 보았다.
수왕 키아드니는 2m가 넘는 키에,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중년의 거한이었다.
사자 갈기와 같은 머리칼을 지닌 그의 입술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다.
교단의 수장, 성녀 리아느는 텔 이카르의 표식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관람석에서 무심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자.
“그 정신 나간 마녀를 꺾었더군.”
키아드니는 말을 이었다.
“아주 좋다! 이런 흥분은 오랜만이야. 너희들의 힘, 나에게도 보여주거라! 얼마나 성장했는지…….”
키아드니의 시선이 키샤샤에게 향했다.
키샤샤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내가, 똑똑히 봐주겠다.”
키아드니는 씨익 웃은 뒤 철퇴를 연상케 하는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난 상관없다!”
잠깐 불쾌한 표정을 지은 키아드니는 흥 웃었다.
리아느가 앞으로 나섰다.
리아느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Warning!] [Warning!] [Warning!]이어지는 3중 경고 메시지.
강적 출현을 알리는 증표였다.
우우웅.
투기장의 상공, 하얀빛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필드를 구성하는 중입니다.]쿵!
빛으로부터 튀어나온 기다란 물체가 투기장의 모랫바닥에 틀어박혔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봐온 그것은,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하고 있는 여신상이었다.
[필드 전체에 여신의 축복이 내립니다!]우우우우웅!
여신상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빛을 내뿜었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 – 50%] [부여된 축복 – 정화의 기도]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부여된 디버프가 해제되었습니다.]이제야 나는 이번 임무의 룰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멤버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 우리 목적은 이 여신상을 지키면서 쟤네들을 상대하는 거다. 본대의 길을 뚫어주는 거야. 여신상만 제대로 지키면 본대는 저주의 영향 없이 필드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시야 오른쪽에 있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살폈다.
신성력 수치는 50%. ‘정화의 기도’라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 특성으로 인해 디버프가 무력화되는 것이겠지.
‘조건에 따라 신성력이 올라가거나, 떨어질 수도 있겠군. 문제는…….’
나는 보스 두 명을 바라보았다.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리아느가 가볍게 웃었다.
리아느가 성벽 위를 가리켰다.
시선을 그쪽으로 옮기자, 검은 차원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염된 인간 병사 Lv.53] X 17 [오염된 인간 기사 Lv.61] X 3이윽고 차원문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이성이 없는 그들의 눈빛은 여신으로 향해 있었다.
‘보스와 싸우면서 몬스터들로부터 여신상을 지켜야 하는 건가.’
이것을 잘 수행하면 보너스를 받을 것이고, 실패하면 패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명쾌한 룰이었다.
“설명하기엔 좀 바빠. 우린 당분간 못 돌아간다. 신경 쓰지 말고 숲 안쪽으로 가.”
나는 에디스와의 통신을 끊고 말했다.
“수비조와 공격조로 팀을 나눈다. 수비조는 여신상을 지키고, 공격조는 나가서 보스와 맞서 싸운다. 수비조는 제나, 카티오, 벨키스트. 공격조는 나와 키샤샤야.”
벨키스트가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왕을 상대하는 덴 너보다 키샤샤가 나을 거다.”
“……알았소.”
“진형을 짜되, 너무 얽매이진 마. 서로 각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과 협력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나에게는 흑룡혈이 있었고, 벨키스트에게는 백룡혈이 있다.
게다가 키샤샤의 초월 수인화와 제나의 바람 화살의 가호,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지닌 우수한 스킬들을 살펴볼 때,
형식에 얽매일 시기는 지났다고 볼 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Round 1.]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무기를 꼬나쥔 채 여신상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지켜보던 리아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1파티의 구성원들은 한 명, 한 명 인간 병기에 가깝다.
저런 잡배들은 혼자서 수백을 상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검을 늘어뜨린 채 앞으로 나왔다.
키샤샤가 내 옆에 따라붙었다.
‘내가 신호하면…… 단번에 몰아쳐라.’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
키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스킬 및 각인 구성은 단기전 특화.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최대 출력으로 끝장내버릴 생각이었다.
“크하핫. 이 만찬을 바로 끝내겠다고?”
키아드니가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휘감겼다.
“맛있는 만찬일수록, 오래 즐겨야지. 그걸 위해서 쓸데없는 장식은 없애는 게 어떠냐? 너희도, 나도 말이야.”
만찬은 개뿔.
나는 왼손을 펼쳤다.
“할기온.”
파지직!
왼팔로부터 검붉은 번개가 튀기 시작했다.
흑룡혈 발동의 전조.
키아드니의 뒤에 서 있던 이리느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뒤이어 이리느의 몸이 어둠 속에 잠겨 사라졌다.
“크핫핫! 전사의 싸움이다! 즐겨보자꾸나!”
쾅!
키아드니가 발을 박찼다.
모래 구덩이가 높이 솟구쳤고, 그 육중한 신체가 엄청난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나는 비프로스트를 역수로 쥐었다.
패검혼의 발동 자세였다.
‘한 번에 끝낸다.’
시시한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파지지지직! 비프로스트의 검 끝에 번개가 모여들었다.
‘죽어라.’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고유 스킬, ‘흑룡린’ 발동!] [스킬, ‘패검혼’ 발동!]번개를 머금은 화염이 검에 깃들었다.
키아드니는 바로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검을 내리그었다.
[‘천상을 유린하는 왼눈’]그 순간, 투기장 위에 보랏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
검 끝에 깃든 불꽃이 사라졌다.
“크하하핫!”
바로 앞.
키아드니의 주먹이 얼굴에 틀어박히려 했다.
“한! 조심해라!”
나와 키아드니의 사이에 끼어든 키샤샤가 놈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퍼엉!
“우읍!”
충격을 버티지 못한 키샤샤가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
“왜? 네가 자랑하는 그 힘을 쓸 수 없어서 당황했나?”
키아드니가 주먹을 털더니 이죽거렸다.
“걱정 마라. 능력을 쓸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공평한 싸움 아닌가!”
스탯창.
곧장 나의 상태가 홀로그램으로 표시됐다.
중급 검술을 제외한, 모든 스킬란이 회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흑룡혈이 포함된 각인창도 마찬가지.
‘사용…… 불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투기장 위,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투기장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천상을 유린하는 왼눈.
‘아주 재밌는 패턴이군.’
저놈과 맨몸 싸움을 하라 이건가.
“내가 피할 것 같냐?”
나는 피식 웃은 뒤, 검을 빙글 돌렸다.
장식 다 떼고 맞짱 뜨자는 거 아냐.
“캬하하핫! 좋다! 그래야 진정한 전사지!”
대소를 터뜨린 키아드니가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그리고.
쾅!
그 몸이 폭발적으로 내게 닥쳐왔다.
‘쓸 수 있는 스킬은 무기술뿐.’
흑룡혈도, 익시드도, 패검혼도, 그 밖에 어떤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
나는 키아드니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의 옆면에 주먹이 박혀 들었다.
“……!”
나는 수 미터나 물러났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
무식한 힘이었다.
[몬스터 웨이브!] [Round 2.] [오염된 인간 병사 Lv.53] X 23 [오염된 인간 기사 Lv.61] X 5“아무것도 안 써져요. 이게 뭔 일이래요!”
핑!
제나가 뛰어내리는 한 병사의 목을 화살로 꿰뚫었다.
여전히 솜씨는 정확했지만, 담긴 힘이 부족했다.
‘진형이…….’
수비조 세 명은 필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각인과 스킬을 이용해 넓은 범위를 커버하겠지만…….
“크아아아아아!”
한 병사가 괴성을 지르며 여신상에게 달려들었다.
여신상이 내뿜는 빛에 닿자 병사는 전신이 녹아내리며 소멸했다.
그러나.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48%로 떨어집니다!] [정화의 기도가 해제되었습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수비조, 뭉쳐!”
나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진형을 짜라! 여신상 근처에서 삼각진을 펼쳐. 한 놈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라!”
“왜 스킬이……!”
“이게 저 여자의 능력인가.”
벨키스트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털었다.
“그런 것 같다.”
스킬도, 각인도 모두 사용 불가.
그렇다면, 전투의 양상은 20층 이전처럼 흘러가게 될 것이다.
에디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3구역을 진행하던 도중, 때아닌 디버프 세례를 받은 것 같다.
나는 귀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다. 우리 실책이야. 곧 복구할 테니 기다려.”
에디스가 통신을 끊은 다음이었다.
[비공정 ‘이지 호’가 중파되었습니다!] [‘대런(★★★★)’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셰킬라(★★★)’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지란(★★★★)’가 여신의 품으로…….]십수 명에 가까운 영웅들의 사망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제길.’
4호기인 이지 호가 중파 되었다.
활동이 불가한 대파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은 것 같다.
[현재 진화도 : 034 / 100]나는 이를 악물었다.
“못 들어가게 해. 우리가 뚫리면, 본진도 끝난다.”
“알았어요!”
“이쪽으로 와!”
제나와 벨키스트가 서둘러 카티오가 있는 여신상 근처로 달려갔다.
세 명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쥔 채 삼각진을 펼쳤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51%로 상승합니다!] [정화의 기도가 부여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부여된 디버프가 해제되었습니다.]방어진을 돌파한 몬스터는 한 마리.
곧 디버프가 회복되었다.
‘신성력 수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르는 거 같은데.’
방어에 오래 성공할수록,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귀찮게도 만들어놨네.
“한눈을 팔아도 괜찮나!”
“당연히 아니지!”
나는 모래가 파일 정도로 땅을 세게 밟은 뒤, 검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검날이 내리꽂혔다.
콰앙!
나의 검과 수왕의 주먹이 격돌했다.
몸이 한순간 떨릴 정도의 충격.
“재밌는 재롱이구나!”
나와 힘겨루기를 하며 키아드니가 뒤를 후려찼다.
후방을 노리던 키샤샤가 수십 미터 바깥으로 포탄처럼 날아갔다.
“아직……!”
날아가던 도중 자세를 되돌린 키샤샤가 다시 뛰쳐나갔다.
스릉. 날이 선 손톱이 키샤샤의 손에서 돋아났다.
“한!”
키샤샤가 손톱을 내질렀다.
나는 검을 내뺀 뒤 곧장 찌르기를 넣었다.
두 명의 공격이 교차했다.
“크하핫!”
호탕하게 웃어젖힌 수왕이 뛰어오르며 몸을 비틀었다.
검날과 손톱이 키아드니가 있던 곳을 스쳐 갔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동작.
“너희들이 지금껏 각인 같은 잡것에만 의지해왔다면, 결코 이 몸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걱정 마라.”
각인에 매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나는 지금껏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나갔을 뿐.
비프로스트가 호선을 그리며 키아드니를 따라갔다.
스킬과 각인.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그걸 위해, 무수히 많은 훈련을 반복해왔다.
‘공평한 싸움.’
스탯과 스킬은 영웅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몬스터도 마찬가지.
수왕의 말대로, 이번 싸움은 육체의 힘과 기술로만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 [Round 3.] [오염된 인간 병사 Lv.53] X 29 [오염된 인간 기사 Lv.61] X 6나는 흘낏 뒤를 보았다.
단검을 든 제나가 병사들을 빠르게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벨키스트가 제나가 놓친 적을 처리했다. 반대편에선 카티오가 소환한 모래 골렘이 병사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삼각 편대를 이룬 세 명은 유기적으로 자리를 바꾸며 공세를 빈틈없이 막아냈다.
나와 키샤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능력을 잃은 수왕은, 그저 힘이 조금 센, 권사에 불과했다.
분명 놀라울 만큼 강하고, 매서운 주먹이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머리통이 통째로 사라질 정도로.
하지만, 이런 주먹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쾅!
수왕의 주먹을 키샤샤가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그녀가 디딘 땅이 움푹 파였으나, 키샤샤는 물러서지 않았다.
뒤이어 나의 검날이 놈의 목젖을 노렸다.
스각.
마침내 솟구치는 피.
수왕이 입은 첫 번째 상처였다.
“크하하핫!”
대소를 터뜨린 수왕이 다시 주먹을 날렸다.
“어림없어!”
키샤샤가 팔꿈치를 내밀었다.
쾅!
키샤샤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지만, 이번에도 튕겨 나가지 않았다.
나는 밀려 나가는 키샤샤 아래에서 하체를 낮춰 달려나갔다.
‘키샤샤가 공격을 받아내면.’
키샤샤의 체술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다.
따라서 힘과 민첩 같은 육체 능력은 나보다 훨씬 우월했다.
박투전으로만 따지면 키샤샤는 4성을 넘어 최상급의 5성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콰직!
수왕이 내지르는 발을 키샤샤가 한 번 더 막아냈다.
나는 그 사이에 검을 찔러넣었다.
‘내가 반격한다.’
간단한 전술이지만, 두 명의 합이 완벽히 맞아떨어져야 했다.
“훌륭하다!”
수왕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갔다.
수비조도 여신상에 들이닥치는 몬스터들을 빈틈없이 물리치고 있었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62%로 상승합니다!] [광휘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10% 증가]여신상이 내뿜는 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계속 가.”
시야 오른쪽 상단에 떠오른 필드 지도에는 숲의 깊은 곳으로 진입하고 있는 타오니어 함대의 위치가 나타나 있었다.
알까지는 멀지 않았다.
무리해서 수왕을 처리할 필요도 없다.
신성력 수치를 높이면서 버티기만 해도 본대가 목표를 처리해줄 것이다.
“과연! 오랫동안 단련을 반복해왔군. 우수한 연격이다!”
수왕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손등 위쪽, 내가 새겨놓은 칼자국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즐기고 싶은데. 안 되겠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키아드니가 비릿하게 웃었다.
‘또 뭘 하려는 속셈이군.’
보스전의 첫 번째 페이즈를 돌파한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체력은 여유롭다.
‘뭐가 나오든, 침착하게.’
나는 니플헤임과 타오니어의 임무들을 각각 마스터와 영웅으로서 돌파해왔다.
이쯤은 위기 축에도 들지 않는다.
[‘지상을 탐식하는 오른눈’]투기장 상공에 떠 있는 보랏빛 눈동자의 반대편.
새로이 주황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 번 더, 불타는 듯한 시선이 투기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흐하하하! 너희들의 투지를 보여주거라!”
키아드니가 주먹을 움켜주었다.
그리고 다시 땅을 박찼다.
키아드니가 달려들고 있다.
전술은 변하지 않았다.
키샤샤가 방어, 내가 공격.
하지만 키샤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
대처하는 움직임이 전혀 아니다.
키샤샤는 당황한 듯 허공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키샤샤?”
키샤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샤샤의 눈동자에는 빛이 사라져 있었다.
‘이건……!’
나는 급하게 키샤샤를 향해 뛰었다.
키샤샤의 면전에 키아드니의 주먹이 쇄도하고 있었다.
“큽!”
반쯤 억지로 끼어들어 검면으로 주먹을 튕겨냈다.
무리한 자세.
우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오른팔의 관절이 반대로 꺾였다.
“뭐 하는 거냐!”
“앞이…… 앞이 안 보인다!”
안 보인다고?
나는 키샤샤를 허리에 낀 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오른팔에서 밀려왔다.
‘오른팔이…….’
부러졌다.
망할.
나는 검을 왼손으로 고쳐 쥐었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43%로 떨어집니다!] [광휘의 축복, 정화의 기도가 해제되었습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디버프가 적용됩니다!]수비조에서도 난리가 났다.
카티오의 마법 방벽이 해제된 틈을 타, 세 명의 병사가 여신상으로 침투했다.
‘왜 이렇게 됐지?’
나는 멤버를 빠르게 살폈다.
다들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보인다. 시각은 정상.
소리도 들린다.
‘안 되는 건…….’
나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씁쓸한 감촉이 뇌리에 전해졌지만, 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릿한 피의 향도 코끝에 올라오지 않았다.
‘알아챘다.’
나는 키샤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키샤샤는 모래 위에 엎드린 채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뒤편에 있던 키아드니는 눈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너희 중에서, 눈이 보이는 놈은 나한테 와라!”
나는 파티원들을 향해 외쳤다.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활시위를 당기던 제나가 이쪽을 보았다.
“일단 이쪽으로 와!”
제나는 활을 접더니 내게 뛰어왔다.
“넌 나와 이놈을 상대한다.”
“키샤샤 언니는…….”
“얘는 안 돼.”
나는 벨키스트 쪽을 보았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몬스터를 베어 넘기고 있었지만, 내가 외쳤을 때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군.”
벨키스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상을 탐식하는 오른눈.’
영웅의 ‘감각’을 강탈하는 스킬인가.
키샤샤는 시각과 청각을 뺏겼다.
그 때문에 키아드니의 공격에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감각을 빼앗기는가 보군.’
나는 후각과 미각을 잃었다.
‘카티오도 눈이 안 보이는 건가.’
대신 소리는 들리는 것 같다.
이쪽을 돌아보긴 했으니.
‘뺏기는 건 오감 중에서 두 개.’
나는 머리를 굴렸다.
느긋하게 고민할 여유는 없다.
“카티오, 성녀의 두 번째 능력은 감각을 빼앗는 거야.”
“……그런 거였어?”
“키샤샤와 벨키스트의 피부에 마력으로 글씨를 써줘. 두 명은 귀가 안 들린다. 이제부터 수비조와 공격조를 바꾼다. 눈이 안 보이는 놈은 수비조로 빠져. 눈이 보이는 애들은 공격조로 가서 수왕과 싸운다.”
“아니,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그건…….”
나는 입을 다물고는 뛰었다.
쾅! 내가 있던 곳에 수왕의 주먹이 처박혔다.
“아주 여유로우시군.”
말을 할 틈이 없다.
키아드니는 내게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받아칠 수 있는 건 받아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핑!
틈을 노린 제나의 화살이 키아드니의 인중을 노리고 날아갔다.
콰직!
키아드니는 입을 벌려 날아오는 화살을 짓씹었다.
“어이가 없네요.”
제나가 혀를 찼다.
키아드니는 부러진 화살을 퉤 뱉더니 웃었다.
“그 꼬마와 네 조합은 인상적이었다.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키아드니가 제나에게 닥쳐들었다.
제나는 빠르게 단검을 꺼내 들더니 키아드니와 맞부딪혔다.
‘상성이 좋지 않아.’
수왕의 살가죽은 돌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무척 단단했다.
제대로 자세를 잡아 베지 않으면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캉! 카캉!
제나의 단검날을 연이어 튕겨낸 키아드니가 주먹을 내뻗었다.
제나가 높이 뛰었지만, 키아드니도 제나를 추격하기 위해 발디딤을 했다.
‘안 되지.’
나는 날 듯이 뛰어가 놈에게 검을 연달아 찔렀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34%로 떨어집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적용된 디버프가 강화됩니다!]벨키스트 혼자서는 사방을 막을 수 없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여신상을 향해 돌진했다.
[비공정 ‘프랑 호’가 중파 되었습니다!]5호기인 프랑 호의 중파 메시지가 떴다.
뒤이어 떠오르는 영웅들의 사망 알림.
벌써 사망자는 백여 명을 돌파했다.
[현재 진화도 : 042 / 100]아무리 단련을 겹쳐 쌓았어도, 감각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싸울 수 없다.
덧붙여 시각의 의존도는 절대적.
‘빌어먹을 패턴이군.’
영웅의 스킬과 각인을 봉인한 데에 이어, 감각까지 빼앗는다.
게다가 이 상태에서 보스와 맞서 싸우며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여신상을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공략은 존재한다.
“알았다!”
엎드려 있던 키샤샤가 벌떡 일어났다.
카티오가 마법으로 나의 말을 피부에 새겨 전해준 것이다.
벨키스트도 마찬가지.
“크아아아아앙!”
키샤샤는 포효하더니 병사의 무리를 향해 네 발로 뛰어들었다.
손톱을 크게 휘두르자, 병사들의 살점과 피가 사정없이 흩날렸다.
‘안 보여도 돼.’
키샤샤는 후각이 발달했다.
그녀는 적들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 손톱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수왕과 싸우는 건 무리였지만, 쫄 정도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나는 제나와 어깨를 맞댔다.
“우리는 조가 바뀔 때까지 버틴다.”
수왕과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선 키샤샤가 필요하다.
키샤샤의 눈이 회복될 때까지 버틸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요. 그 정도는 쉽죠!”
제나가 단검을 휘릭 돌렸다.
그리고, 재차 수왕이 달려들었다.
“놈의 주먹과 부딪치지 마! 회피 위주로 싸워라!”
제나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아래로 수왕의 주먹이 연달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아래로 몸을 낮춘 뒤, 틈새를 노렸다.
왼팔의 힘을 빼고, 어디까지나 견제 위주로.
“적응이 빠르구나.”
키아드니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지상을 탐식하는 오른눈’]주황빛 눈동자가 투기장을 한 번 더 쓸고 지나갔다.
그 순간, 눈앞이 암전됐다.
‘이번에는 나인가.’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뒤쪽으로 뛰면서 빠르게 감각을 체크했다.
‘뺏긴 건 시각과 미각.’
양호하군.
뒤를 더듬자, 여신상의 매끈한 촉감이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나다!”
“나로군.”
공수 전환.
눈이 보이는 벨키스트와 키샤샤가 앞으로 나섰다.
벨키스트가 내 역할을 대체할 수 있으니, 괜찮은 조합이었다.
“저도 안 보이네요.”
“안 보인다고 못 쏘는 건 아니잖냐.”
놈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덧붙여,
‘냄새가 난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하고도 강렬한 향이었다.
물론 그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카티오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향이었다.
카티오는 자신이 만든 향을 적이 있는 곳에 뿌렸다. 이 정도 향이라면, 키샤샤 만큼의 후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손쉽게 적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오른쪽은 내가 막아줄 수 있어.”
카티오가 속삭이듯 말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적당한 대처법을 찾아내다니.
“알았다.”
나는 웃으며 검을 늘어뜨렸다.
향의 진원지는 바로 앞. 쇠로 된 부츠가 모래를 밟는 소리가 났다.
핑! 핑핑!
화살이 바람을 꿰뚫는 소리.
“컥!”
비명이 연이어 들린다.
나는 검날을 앞으로 겨누었다.
후웅!
무거운 소리가 났다.
나는 옆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창날이 스쳐 갔다.
몸을 돌리면서 크게 베자, 손끝에 살갗을 자른 듯한 둔중한 감촉이 전해졌다.
‘냄새와 소리.’
나는 눈을 떴다.
아직도 눈앞은 어둠이었다.
“덤벼라.”
“크아아아악!”
병사와 기사들이 괴성을 질렀다.
‘다 알아.’
나는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건 창을 찌르는 소리.
이건 도끼를 내리찍는 소리군.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42%로 상승합니다!] [현재 진화도 : 045 / 100]천천히,
어둠 속에서 무기의 궤적이 떠올랐다.
적들은 쉴 새 없이 나타났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에게선 이성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괴성과 신음을 반복하면서 물밀 듯이 여신상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왼쪽에 다섯 명이야!”
스각.
비프로스트의 검날은 강철과 살점을 가리지 않는다.
닿는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분명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패널티였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나는 내게 달려드는 놈들이 똑똑히 보였다.
공감각(共感覺).
리디기온은 말했었다.
단련과 실전을 무수히 겹쳐 쌓다 보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게 보일 거라고.
‘웃기는군.’
이제는 완전히 인간을 넘어선 것 같다.
나의 뇌리는 소리와 냄새를 시각으로 바꿔, 망막에 투영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스킬이 아니다.
훈련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일 뿐.
물론, 평상시대로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은 적들과 맞서 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상을 탐식하는 오른눈’]다시 한번 감각이 뒤엉켰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어둠이 걷히자,
투기장의 모랫바닥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시체들.
“…….”
키아드니와 싸우던 키샤샤가 나를 돌아보더니 뭐라 속삭였다.
입만 달싹거릴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다, 가.’
이번에도 키샤샤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키샤샤와 자리를 교체했다.
‘이번에는 나와 벨키스트인가.’
둘 다 힘과 테크닉을 적절히 섞은 검사 타입.
밸런스는 나쁘지 않다.
‘팔 상태가 좋지 않으시군.’
나는 벨키스트의 입 모양을 읽었다.
그 너머로는 피를 뚝뚝 흘리는 수왕이 주먹을 쥔 채 달려들고 있었다.
‘내가 앞에 나서겠소.’
무음의 세계.
벨키스트의 검과 수왕의 주먹이 한 번 더 격돌했다.
나는 엎드리듯 몸을 숙이며, 놈의 빈틈을 노린 채 뛰쳐나갔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62%로 상승합니다!] [광휘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10% 증가]신성력 수치가 다시금 상승세로 접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의 숫자가 많아졌지만, 그들은 오는 족족 시체로 바뀌어 땅에 드러누웠다.
‘스킬과 각인을 쓸 수 없는 보스전.’
이번 임무를 통해 영웅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스킬과 각인에만 의지해 신체와 무기술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느냐고.
그와 더불어 주기마다 감각에 제약을 줘, 같은 파티의 파티원들과 합을 맞출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점에서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이클이 몇 번이나 돌았을 무렵.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82%로 상승합니다!] [광휘의 축복이 강화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에 버프가 적용됩니다!]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20% 증가]마침내 신성력 수치가 80%를 돌파했다.
“크하하핫! 멋지구나!”
상처투성이의 수왕이 우리를 보며 대소했다.
뻗쳐 있던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 있고, 강철과도 같은 근육 곳곳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소소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정도는 심하지 않다.
‘엄청난 회복력인데.’
나는 오른손을 털었다.
키아드니의 주먹을 잘못 막았을 때 부러졌었지만, 물약을 마신 뒤 시간이 지나자 도로 붙었다.
이제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건가.’
흑룡혈의 영향을 벗어난 상태인데도 이 정도.
나는 오른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더는 없나? 이 싸움도 슬슬 질리는군.”
벨키스트가 수왕을 보며 이죽거렸다.
키아드니는 주먹을 굳게 쥐며 앞으로 나섰다.
“나도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왼눈이니 오른손이니, 시시한 잡술은 재미없지 않나!”
“네년의 투정을 들어주는 것도 이제 질렸다. 해방 같은 허황된 말도 다 부질없다!”
“닥쳐라!”
쾅!
키아드니가 공중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무형의 충격파가 솟구치더니, 모습을 드러낸 성녀가 옆으로 움직였다.
키아드니는 뒤에 앉아 있던 황자를 돌아보았다.
“황자! 이제 내 식대로 하겠다. 간섭하지 마라!”
「리아느, 마안을 풀어라.」
황자가 입을 달싹였다.
「원하는 대로 싸우게 해주거라.」
잠깐 망설이던 성녀가 손을 내저었다.
투기장 상공에서 타오르고 있던 한 쌍의 눈이 사라졌다.
그제야 전신을 휘젓고 있던 낯선 기운이 없어지며, 감각이 되살아났다.
“쟤네들은 왜 같은 편끼리 싸운대요?”
제나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낸들 알겠냐. 저래 주면 우리야 좋지.”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몬스터 웨이브!] [Round 8.] [오염된 인간 병사 Lv.53] X 75 [오염된 인간 기사 Lv.61] X 13우우웅.
성벽 위의 검은 차원문이 요동치더니, 병사와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여덟 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것이다.
‘눈이 풀렸다는 것은…….’
나는 왼팔을 살폈다.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한 줄기 튀어 올랐다.
흑룡혈이 돌아왔다.
“크아아아악!”
병사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뛰었다.
“잡졸들은 비켜라!”
병사들의 앞, 번개처럼 움직인 수왕이 내려섰다.
콰콰쾅!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듯한 충격파와 폭발음이 연달아 빗발쳤다.
뒤이어 인간의 살점으로 보이는 듯한 시뻘건 잔해가 투기장 곳곳에 후두두 떨어졌다.
리아느는 키아드니를 흘낏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성녀의 몸이 어둠에 휩싸여 흩어졌다.
「…….」
뒤이어 옥좌에 앉아 있던 황자도 사라졌다.
투기장에 남은 건,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수왕.
투쾅!
차원문을 비집고 나오던 흑기사들을 수왕이 뭉개버렸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90%에 도달했습니다!] [광휘의 축복이 강화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의 디버프가 영구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25% 증가]치지직.
한계까지 팽창한 수왕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놈의 살갗에서 뜨거운 김이 올랐다.
“영웅? 몬스터? 임무? 그딴 게 다 무슨 장난이란 말이냐!”
“…….”
“나는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싸우고 싶을 뿐이다!”
우직!
마지막 남은 병사를 찢어발긴 수왕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지.”
벨키스트가 피 묻은 검을 늘어뜨렸다.
“저 녀석을 잡아야만 남은 신성력 수치를 채울 수 있는 것 같아.”
눈앞을 살펴보던 카티오가 말했다.
그 말대로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는 90%에서 올라가지 않고 있다.
‘이제 서로 전력이군.’
스킬과 각인이 돌아왔다.
그건 저놈도 마찬가지.
나는 왼팔을 가볍게 털었다.
흑룡린의 방어를 뚫고 들어오던 놈의 주먹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 너다.”
수왕이 나를 가리켰다.
입 밖으로 삐져나온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나는 너와 싸우고 싶은 것이다!”
“헛소리를 하는군. 하찮은 어리광에 어울려줄 필요는 없소, 선배.”
나와 전력으로 싸우고 싶다고.
그래서 방해물을 손수 치워주셨나?
나는 피식 웃었다.
“너희는 먼저 가라. 마침 차원문도 생겼네.”
나는 투기장 구석을 보았다.
차원의 소용돌이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 소용돌이는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신성력 수치가 90%가 넘으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게끔 설정되어 진 듯했다.
“제정신이오?”
“말이라고 하냐.”
딱히 호승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단지, 전력을 나눌 필요가 생겼을 뿐이다.
“본대가 힘겨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주기나 해.”
타오니어의 함대가 필드의 핵심 구역으로 진입한 것 같다.
아까부터 영웅들의 사망 메시지가 연이어 떠오르고 있다.
전 층의 탐색 임무 때, 숲의 안쪽에 잠복해 있던 많은 대형 몬스터들을 보았었다.
본래 1파티가 그들을 전담해야 했지만, 이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그 공백으로 본대의 피해가 극심해진 것이다.
“금방 처리하고 돌아가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다 같이…….”
“가요.”
내게 따지려고 들던 카티오를 제나가 붙잡았다.
카티오는 불만스런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와요. 기다릴게요.”
“당연하지.”
제나와 카티오가 소용돌이 너머로 발을 디뎠다.
나를 말 없이 보던 벨키스트도 뒤이어 들어갔다.
“우리가 없어도 괜찮겠나, 한? 아빠는 무지 강하다.”
“걱정 마.”
“알겠다.”
마지막으로 키샤샤까지 사라졌다.
“크하하핫! 드디어 둘만 남았구나. 이때를 얼마나 기다려왔던지!”
키아드니가 호탕하게 웃더니, 얼굴을 굳혔다.
“한 이스라트, 나는 네 싸움을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광기와 냉정을 한 몸에 담은 네 모습은,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전사 그 자체였지. 좋다, 전사여. 이 내게 보여주거라! 세상을 한 번 더 살 가치가 있었음을!”
크아아아앙!
수왕이 하늘을 보며 포효했다.
콰직.
근육과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
키아드니의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연약한 인간의 가죽 위를, 강인한 사자의 가죽이 뒤덮었다.
[Danger!] [수패왕] [키아드니 비크샤비 Lv.103]그는 완전히 짐승의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높이가 4m에 달하는 사자.
그게 저 녀석의 본체였다.
수패왕이 내게 이를 드러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멸망의 운명을 뛰어넘는다?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와라.’
나는 비프로스트를 모랫바닥에 꽂았다.
[고유 스킬, ‘흑룡린’ 발동!]파지지지지직!
왼팔로부터 시작된 검붉은 번개가 전신을 뒤덮었다.
할기온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나는 맥없이 웃었다.
번개가 몸을 스쳐 갈 때마다 광택 있는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검면에 비치는 나의 눈이 용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나는 왼손을 펼쳤다.
벨트에 걸려 있던 비프로스트의 칼집이 덜컥 떨리더니 왼손으로 딸려 들어왔다.
뒤이어 나는 모래에 박혀 있던 비프로스트를 오른손으로 뽑았다.
수패왕이 다리를 길게 뻗었다.
도약 자세였다.
파지지직.
왼손의 칼집에서 번개가 튀기 시작했다.
우우웅.
오른손의 검날이 빠르게 진동했다.
나는 오른손의 검날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검자루를 느슨히 쥐었다.
“이 기술은 얼마나 세지?”
“그래?”
일단 연계 연습은 해 두었지만,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다.
자칫하다, 훈련소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으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놈이 내게 덮쳐오는 건 한순간,
조금이라도 늦으면, 흑룡혈이 있건 없건 내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크아아아앙!”
대기가 떨릴 정도의 포효.
그리고, 놈의 모습이 사라졌다.
‘만 배.’
오른손의 손아귀가 찢어졌다.
‘버틸 수 있다.’
다른 검이라면 압력을 이기지 못해 찌그러지겠지만, 초월적인 힘으로 벼린 비프로스트로는 가능하다.
‘십만 배.’
덜컹, 덜컹덜컹.
비프로스트가 휘어지기 시작했다.
중력의 일점 집중.
공간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쾅!
나는 진각을 밟았다.
일순간 모래바람이 흩어졌다.
그 너머로, 수패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패도적인 힘을 담은 앞발이 내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칼집을 튕겨 올렸다.
[스킬, ‘패검혼’ 발동!]푸른 불꽃이 비프로스트의 검면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불꽃은 번개와 합쳐져 칠흑색으로 물들었다.
[초중력 발검!]나는 검을 내질렀다.
[연계 스킬, ‘용패혼’ 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