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72
71. 게임 좀 작작 해
* * *
이제 엘 시드와의 볼일은 끝났다.
물론, 그 녀석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긴 하다.
먼저, 엘 시드가 1서버로 가려고 했던 이유.
이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도라도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그는 게임사에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러 직접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불만이란…….’
나는 역천의 서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엘 시드가 게임 속에 떨어진 50층대부터 왕으로 불린 80층까지는 글과 그림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다음.
‘마지막 이야기는 거짓일 확률이 높다.’
책의 뒤편에 어설프게 덧붙여져 있었던 이야기.
엘 시드가 도라도를 구하고 왕이 되어 다시 모험을 떠나는 내용 말이지.
도라도의 정사(正史)는 아마,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었던 페이지에 쓰여 있었을 것이다.
’80층 이후의 스테이지에 문제가 있었군.’
80층부터는 파편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때의 시나리오가 엘 시드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엘 시드가 부하를 먹어치운 것을 보면, 그들은 탑을 끝까지 오른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는데.
의문이 너무도 많다. 엘 시드는 왜 서브 마스터와 합성되지 않고 1성 영웅이 되어 도라도에 떨어졌으며, 그 녀석이 임무의 끝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굳이 자살에 가까운 짓을 하면서까지 나한테 들이댔는가.
‘수준 낮은 마스터한테 죽느니, 차라리 내게 자신의 유품을 넘겨주겠다?’
이제 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의문을 접어두었다. 몇 번이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 해답은 탑을 끝까지 올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레이드의 최종 보상이자, 7성 승급의 핵심 재료인 역천의 서는 암케나의 차지가 되었다.
이셀의 로그 조작으로 본인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역천의 서가 쓸 수 있는 상태였다면, 니플헤임의 1파티 중 한 명에게 건네줬겠으나, 지금 그 아이템은 장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단은 내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와 위령이 타오니어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금 기나긴 정비 시간이 주어졌다.
50층을 거치면서 전력 손실이 상당했다. 에디스를 비롯한 정예 영웅들이 사망했고, 비공정의 대다수가 손실 및 대파되었다. 원래 힘을 되찾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간만의 휴가를 보내고 있다.
사실 말만 휴가지, 사실상의 개인 훈련 타임이었다.
요즘 일이 많아 단련을 게을리한 까닭에 보충이 필요했다.
‘주위 상황도 신경 써보고.’
쭈우웁.
빨대를 빨아들이자, 상큼한 맛의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타오니어 소속의 약제사가 만든 특제 에너지 드링크.
훈련의 효율을 높여준다.
우우우웅.
페달에 올린 발을 움직이자 두 개의 바퀴가 정신없이 회전했다.
내가 타고 있는 이것은 암케나가 4층 훈련실에 들여놓은 새로운 훈련 기구였다.
제나는 무슨 이런 신기술이 있냐며 깜짝 뛰었지만, 나는 지구에서 질릴 정도로 봤다.
헬스용 사이클.
즉 제자리 자전거였다.
암케나의 설계도에 따라 장비 제작소의 목수가 몸체를 만들었고, 카티오가 동력 엔진을 제작했다.
겉모습은 어설펐지만, 나름 완성도가 높았다. 50kg 정도 무게추를 달아놓으면 훈련 효율도 있고.
나는 목에 수건을 걸친 채 때때로 드링크를 마시며 페달을 돌렸다.
왼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홀로그램 창을 터치하면서.
[MyuTube™] [픽 미 업의 마스터, ‘암케나’의 채널] [구독자 13,253명]등반 층수가 50을 돌파하면서 여러모로 편한 점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는 것.
더불어, 이셀의 ‘요정 파워’라는 기합을 듣지 않아도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구독자가 늘었네.’
나는 스크롤을 긁어 내려갔다.
최신 업로드 동영상에 ‘타오니어, 50층’이란 제목의 영상이 게시되어 있다.
누적 조회수는 32만. 어지간한 유명 BJ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다.
나는 그 영상에 들어간 뒤 댓글을 살폈다.
잘 봤습니다 *^^*
이번 스테이지는 스케일이 엄청 크네요!
추천 꾹! 55층도 기대할게요!
여긴 왜 파편 시리즈가 50층부터 나와요?
버그 계정 아니에요? 제가 알기론 무조건 80층 이후부터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버스만 타시는 줄 알았는데, 점점 암케나님 실력도 일취월장하시는 듯.
한도 보면 볼수록 강해지네요! 이 정도면 거의 시리스급 유망주 아닙니까?
하, 진짜 운빨개망겜.
나만 없어! 다들 좋은 영웅 있고 나만 없어!
그래서 암케나 님.
은별 길드 학살하신 건은 사과 안 하실 거예요?
댓글 반응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30층까지만 해도 버스니 뭐니 욕이 반절이었는데, 이젠 그런 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은별 길드 건을 꺼내며 비난하는 녀석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암케나도 많이 늘었지.’
적어도 예전처럼 구경만 하진 않는다.
50층에서도 함대의 진열을 정비하고, 아이템을 보급하며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등, 여러 소소한 활약들을 보였었다.
예전의 암케나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단순한 버스충에서 1인분 이상은 해주는 마스터로 뒤바뀐 것이다.
일개미가 브라키오사우르스로 진화하는 급의 대격변이었다.
‘플레이 패턴도 달라졌고.’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지구의 시간으로 새벽에 가까운 때가 되었지만 암케나는 접속을 끊지 않고 있다.
부지런히 대기실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평균 접속 시간이 배 이상 늘어났다.
하루 이틀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벌써 한 달 가까이 반복되고 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요즘은 며칠 간격으로 10만 원 가까이 젬을 질러대고 있었다.
‘무과금 라이트 유저가…… 핵과금 하드 유저로 바뀌었다.’
암케나의 과금 액수를 다 합치면 백만 원은 우습게 넘어갈 것이다.
뮤튜브 수익이 있다지만 개인적인 출혈도 심하겠지.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군.’
이셀의 보고에 의하면, 암케나는 뮤튜브의 구독자들에게 픽 미 업의 팁도 알려주는 것 같다.
내용도 예전과 달라졌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영웅에게 군마조각상을 주면 캐리해준다’ 같은 쓰레기 팁 따위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영웅을 다루는 법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다.
50층을 클리어한 직후, 암케나로부터 주요 전투직에 대한 포상이 있었다.
키샤샤에게는 최상등품 쇠고기를, 벨키스트에게는 훈련용 사복을, 카티오에게는 끝없는 야근 중 짬짬이 쉴 수 있는 목베개를, 제나에게는 사냥용 활을. 마지막으로 내게는…….
‘나는 왜 아직도 군마조각상이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이젠 뭘 받든 상관없어졌다.
어차피 다른 선물에 욕심도 없었고.
조각상이 아니라면 다 무가치할 뿐이다.
삑.
윈도우의 ‘X’ 아이콘을 터치하자 인터넷이 닫혔다.
웹서핑은 할 만큼 했다. 기초 체력 훈련을 마무리한 뒤, 무기술 훈련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직도 암케나는 접속을 끊지 않고 있었다.
철컥.
나는 비프로스트의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앞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특제 인형.
몇 개나 부숴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다음…….
[띠링!] [마스터, 친구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커뮤니티’ 탭을 확인해주세요.] [친구 요청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 / No]암케나의 조작창에 알람이 떠올랐다.
이제 친구 요청은 낯선 일도 아니었다.
암케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창을 닫으려 했다.
[※알림] [요청을 보낸 유저는 마스터의 ‘주소록’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취소하실 건가요? 한 번 더 확인해주세요!] [Tips/ 설치하실 때 ‘인적사항 제공’ 칸에 동의를 누르시면 각종 서비스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암케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번에 친구 요청을 보낸 녀석은 암케나의 주소록에 등록되어 있는 것 같다.
게임에서 암케나의 휴대폰 주소록을 읽어서 해당 경고를 출력한 것이다.
즉, 저 유저는…….
‘암케나를 실제로 아는 사람이란 건가.’
잠깐 망설이던 암케나가 ‘Yes’를 터치했다.
[띠링!] [‘wlsghWkd’님이 새로운 친구에 등록되었습니다!]곧장 정체불명의 마스터에게서 귓말이 날아왔다.
wlsghWkd> 내일 회사 쉬는 날이야?
암케나의 침묵이 이어지다 끊겼다.
암케나> 아니.
wlsghWkd> 그런데 이 시간까지 게임 하는 거야?
암케나> 요즘 잠이 줄어서.
wlsghWkd> 에이. 회사에서 졸았다고 들었는데? 쉬는 날엔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서 핸드폰만 만지고 있다면서? 이 게임이 그렇게 재밌나? 방금 설치했지만 잘 모르겠네.
암케나> 심심할 땐 괜찮아. 보는 맛도 있고.
wlsghWkd> 오늘 이모가 나한테 아주 하소연을 하시던데. 게임에 빠져서 나오질 않는다고.
‘이 녀석은 뭐지.’
뭐라 불러야 할지 닉네임을 종잡을 수 없다.
더블유, 엘, 에스…….
‘……진호짱?’
한글을 영어로 쳐서 wlsghWkd.
암케나를 초월하는 작명 센스였다.
wlsghWkd> 어쨌든 오늘은 게임 끄고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또 회사에서 자면 안 되지.
암케나> ……ㅠ.ㅠ.
wlsghWkd> 울어도 안 돼. 안 자면 이모한테 이른다? 그리고 전화 좀 받고. 게임 설치하느라 데이터 다 날렸잖아.
암케나> 넌 내일 학교 안 가?
wlsghWkd> 개교기념일이야.
암케나> 부럽다…….
나는 반쯤 뽑아놓은 비프로스트의 검날을 칼집에 되돌렸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wlsghWkd> 그런데 이 게임이 그렇게 꿀잼이야? 이름도 좀 촌스럽고, 내 친구들은 운빨에 돈빨망게임이라면서 욕만 하던데.
암케나> 단풍스토리나 던전앤바이크보다는 낫지 않을까?
wlsghWkd> 언제적 게임이래? ㅋㅋ 반에서 아무도 안하는데. 세대 차이 ㅇㅈ? ㅇ ㅇㅈ! 하긴 ㅋㅋ 아직도 카딩라이더 하고 계시는 분인데.
암케나> 용돈 안 준다.
wlsghWkd> 죄송합니다.
나는 뺨을 긁었다.
저 녀석이 지구의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다.
당연히 친척 동생과 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할 것이다.
암케나> 10분만 하고 자러 갈 거야. 엄마한테 꼰지르지 마.
wlsghWkd> ㅋㅋㅋ 알썽.
암케나> 기왕에 설치했으니까 게임도 좀 해봐. 튜토리얼은 했어?
wlsghWkd> 고블린 잡고 끝나는 거? 끝냈지. 이제 뭐 공짜로 뽑기 한번 시켜준다고 하는데.
암케나> 일단 계속 해봐. 유료 뽑기에서 나오는 애한테 즐겨찾기 무조건 걸어놓고.
wlsghWkd> 노잼 같은데. 멀리서 구경만 하고. 컨트롤도 못하고.
암케나> 튜토리얼 끝까지 깨면 내가 좀 도와줄게.
wlsghWkd> 오. 그러고 보니 이 게임 고수라며? 어떻게 도와주려고?
암케나> 내 서브 마스터 파견 보내줄게. 마침 휴식기거든.
……음?
암케나> 걔가 기본적인 팁이나 게임 방법을 알려줄 거야. 얘는 절대 못 주니까 탐내지는 말고, 배운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하면 돼.
wlsghWkd> 재미없을 거 같은데. 일단 해보긴 함. 내일 아침에 할 거니까 출근 전에 보내줘. 버스 좀 타보게.
암케나> ㅇㅋ.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 * *
암케나가 접속을 끊은 새벽.
나는 개인 훈련을 마무리한 뒤 이셀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로키?]헐렁한 잠옷을 입은 이셀이 눈을 비비더니 내게 날아왔다.
늘어지게 자다가 온 것 같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지만, 급히 물어볼 게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아하.]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가 친구를 만들었다는 거지? 그 친구는 지구에서 가까운 사이였고. 그런데 친구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도우미로 파견을 가게 됐다?]픽 미 업의 시스템은 꽤 복잡하기에 오랫동안 플레이한 유저라도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커뮤니티 시스템. 20레벨 미만의 마스터는 커뮤니티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다. 즉, 암케나가 나를 진호짱의 대기실로 보내고 싶어도, 그 녀석은 아직 ‘차원의 틈’이 열리지 않았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20층까지 임무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진호짱은 암케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지금 내게는 루세트 호와 함께 파견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즉, 명령이 먹혔다는 거지.
“안 된다고 메시지가 떠야 정상인데 말이지. 이거 버그 아니냐? 그래서 너한테 좀 알아봐달라고…….”
[아, 그거 버그 아닌데.]“뭐?”
이셀이 오른손으로 원을 크게 그렸다.
별가루가 휘날리더니, 가운데에 뿅 하고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뉴비의, 뉴비에 의한, 뉴비를 위한 업데이트!] [ 1. 엥? 다 퍼준다고?] [튜토리얼을 끝내신 신규 마스터들에게 고급 소환권을 2장, ‘즉시’ 지급합니다. 무료로 5성 영웅을 얻을 기회! 게임을 시작하세요. 지금이 적기입니다!] [ 2. 친구와 함께 Go!] [새싹 유저가 어려운 난이도로 고생하고 있다구요? 보고 있기 힘드셨다구요? 걱정 NO, NO, NO! 서로 친구 관계를 맺은 상태라면, 20층 이하의 마스터도 제한적으로 ‘차원의 틈’ 기능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3. 친구를 초대하고, 보상 Pak Pak Pak!] [이번 이벤트는 기존 유저분들을 위한…….]나는 공지사항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2번. ‘친구와 함께 Go’라고 쓰인 부분이었다.
‘서로 친구 관계라면…… 20층 이하라도 파견을 보낼 수 있다?’
나는 이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 패치됐냐?”
[로키가 50층에 가자마자.]이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게, 회사에 비상이 걸렸거든. 픽 미 업의 컨셉을 베낀 게임이 앱 스토어에서 치고 올라온다나 봐. 신규 유저들을 다 빨아들이고 있다나 뭐라나. 새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시스템을 바꿨다 이거군.”
[맞아.]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 맞을 줄은.
차원의 틈은 게임 출시 때부터 유지되어왔던 시스템.
하루아침에 바뀔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게임이라 그런 거겠지.’
이곳은 현실이면서 게임이기도 했다.
패치로 인해 언제든 룰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잠깐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이번 파견도 버그가 아닌 거네.”
[곧 마스터 친구의 대기실로 가게 되지 않을까?]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만에 개인 시간 좀 가지나 했더니.
[어차피 파견이잖아. 휴가 간다는 생각으로 쉬다가 오면 될 것 같아. 그곳에 눌러앉을 생각은…….]“없어. 절대로.”
[휘유.]이셀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진호짱이라는 마스터의 대기실이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마음껏 깽판 치고 와! 로키, 화이팅!]내게 오른손을 들어 보인 이셀이 한 바퀴 회전하며 사라졌다.
……도와주러 가는 건데.
‘어이가 없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암케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마스터를 도와줬던 이유는 나를 위해서였다.
타오니어가 강해지는 것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니까.
하지만 이건 내 생존과 상관없잖아.
진호짱이 접어도 내가 피해 볼 일도 없고.
이번 건은 내게 아무 이득도 없는, 순전한 봉사 활동이었다.
‘시간이나 때우다 와야겠네.’
암케나도 나한테 별로 기대 안 하겠지.
내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임무를 깨준다? 소속이 달라 불가능. 클리어한 층을 재도전하는 거면 몰라도 내가 탑을 대신해서 등반해줄 수는 없다.
기껏해야 몇 가지 제안을 하는 정도.
그것도 이셀의 도움이 필요했고, 마스터가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타오니어가 특이한 곳인 거지, 평범한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파견의 출발 예정 시각은 이른 아침이었다.
50층대인 암케나와 10층도 되지 않은 진호짱의 거리는 꽤 멀겠지.
꽤나 피곤한 길이 될 것 같았다.
지금 숙소로 돌아가도 세 시간도 채 못 잔다.
가는 길에서 자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아, 진짜.’
귀찮아 죽겠네.
나는 열려 있던 개인 훈련실의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
나는 멤버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 채 급행 비공정에 탑승하게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003117차원 – 라므]진호짱의 차원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차원의 이름은 라므.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위, 끝 모를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우웅.
내가 탑승한 루세트 호가 탑 구석에서 회전하고 있는 차원의 소용돌이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곳에는 선착장이 없기에 내가 직접 소용돌이로 뛰어내려야 한다. 대기실 시설이 빈약하니까 당연하겠지.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뭐, 대충 시간을 때우다 보면 암케나도 소용없음을 알고 돌려 보내줄 것이다.
때마침 비공정이 차원의 소용돌이 바로 옆을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난간을 가볍게 뛰어넘은 뒤, 나선의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수백 번이나 맛봤던 추락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낯설고도 익숙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운 방.
철제로 만든 진열장이 세워져 있다.
진열장 곳곳에는 크고 작은 종이 박스가 놓여져 있었다.
‘대기실 창고인가.’
창고라기보다는 헛간에 가까운 크기였다.
뭐, 1레벨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타오니어도 한때는 이런 곳에 아이템을 보관했었지.
끼이이익.
음침한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쳐 가더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대기실 광장이었다.
‘마스터는 접속해 있군.’
하늘이 하얗게 번쩍이고 있다.
마스터가 접속해 있다는 표시였다.
진호짱의 화면에서는 친구의 영웅이 도착했다는 안내창이 떠올라 있겠지.
그런데 별 반응이 없는 걸 봐선, 게임을 켜놓은 채 다른 일을 하는 중인 듯했다.
‘영웅은…….’
“우왓, 무지 강해 보이는 사람이 왔다!”
탄성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아저씨. 저 보여요?”
내 얼굴 앞에서 손을 붕붕 흔들고 있다.
“설마, 제가 안 보이는 거 아니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나이는 높이 쳐봤자 20대 초반.
보랏빛 망토와 회색 스커트. 하얀 셔츠를 입고 있다.
윤기가 도는 연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저는 카디아 르루라고 해요. 아저씨는요? 어디에서 왔어요? 저는 세라미 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광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녀석 말고 다른 영웅은 보이지 않는다.
“글쎄, 여신님한테 계시를 받고 일어났더니 여기인 거 있죠. 제가 아무리 천재라도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지 뭐예요. 그 다음에는 심지어…….”
“야.”
“녹색 괴물. 고블린이라고 했던가? 책에서만 봤던…….”
“여기에 너 말고 없냐?”
“제 마법검으로 멋지게…….”
나는 조잘거리는 여자의 입을 움켜쥐었다.
“으압!”
“여기 너 말고 없냐고.”
“아, 아저시가 처흠힌데요.”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맞기 싫으면.”
“그험 머라고 부러요? 오바?”
나는 여자의 입을 움켜쥔 채 생각을 이어갔다.
여기에 있는 것은 이 녀석 혼자뿐.
그렇다면 첫 뽑기로 나온 영웅일 확률이 높다.
‘1성은 아닌데.’
겉모습만 봐도 추측할 수 있다.
어설프긴 하지만 이 녀석은 마법을 배웠다.
3성 이상의 고급 영웅이라는 뜻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이 녀석이 소환됐을 때, 대기실에 영웅이 아무도 없었다면 1성과의 합성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로 좁혀진다. 처음 주어지는 1성 영웅이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경우.
아주 드물지만 없는 일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합성 튜토리얼이 생략된 채 넘어가게 된다.
“이셀은 어딨지?”
“이셀? 누구예요, 그 사람은?”
“대기실을 총괄하는……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원.
숙소에서 잠이나 자기로 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말하다가 말고 어디 가는 거예요?”
“이거 놔.”
“이곳에 대해 좀 아시는 거 같은데,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상황을 잘 모르겠거든요.”
“나도 모르겠는데.”
“우와, 대놓고 거짓말. 어쨌든! 알든 모르든 가지 마요. 계속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하단 말예요. 저랑 이야기나 해요.”
철컥, 철컥.
나는 숙소의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
‘이곳 소속이 아니라서 안 열리는 건가?’
젠장.
파견 왔다고 차별하는 거냐.
“여기 문 열어.”
“싫은데요.”
“…….”
“아저씨, 아니, 오빠가 제 얘기 들어주면 생각해 볼게요.”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광장의 벽에 기댄 채 앉았다.
진호짱이 와서 저 녀석을 임무에 처넣어줬으면 좋겠지만,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오빠도 여신님한테 계시를 받은 거죠? 앞으로 저랑 같이 라므를 위해 싸우게 되나요?”
여신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 녀석의 등급은 최소 4성인 듯했다.
“3층인가? 거기까지 깼는데 말이죠. 분명 여신님 말로는 동료가 있다는데, 쭈욱 저 혼자였지 뭐예요. 외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3층까지 솔로 플레이를 했다 이건가.
지금 뉴비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기에, 진호짱은 고급 소환을 2번 공짜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혼자.
나는 대기실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게임을 설치하면 기본으로 주어지는 대기 장소.
기초적인 훈련소도 설치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진호짱의 플레이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게임에 별 흥미가 없나 본데.’
이런 타입은 많이 접해봐서 알고 있다.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게임이 살짝 안 풀리거나 재미없다 싶으면 바로 접어버린다.
그리고 다른 게임을 찾는 거지.
한 마디로 철새 유저였다.
암케나는 최소한 공략을 찾아보기나 했었지.
그래서 처음에 훈련소를 설치했던 거고.
3층까지 깼는데, 영웅도 뽑지 않았고 시설도 안 만들었다?
게임을 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금, 픽 미 업을 켜 놓은 채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곧 4층에 갈 것 같아요. 아저씨가 도와주면 좋겠지만, 저 혼자서도 충분하다구요. 3층까지는 별거 없었거든요. 5층도 팍팍 끝내서…….”
“5층은 안 돼.”
카디아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죽기 싫으면 단련해. 동료도 있어야 돼. 전략도 잘 짜고. 마스터가 돌아오면 소환을 하라고 제안해라. 훈련소도 만들어달라고 해.”
“소환? 훈련소?”
“그따위 생각으로 5층에 가면 죽을 거다.”
“지금까지는 쉬웠…….”
나는 일어나면서 발을 박찼다.
재잘거리고 있던 카디아에게 뛰어들어 그 녀석의 이마에 내 이마를 붙였다.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비췄다.
“내가 뭐라고 했지?”
“그, 소환이랑 훈련소를…….”
“그래. 소환과 훈련소야. 신입이 들어온 다음에는 그놈의 전력을 분석해라. 리더를 정하고 팀을 만들어. 어떤 임무가 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팀 단위로 연습해라. 5층에 가기 전까지 해놔.”
“아, 아저씨, 빠르네요. 모습이 안 보였어. 엄청 강한 거 아니에요?”
“넌 약해빠졌고 말이지.”
“네? 무슨…….”
딸깍.
나는 벨트 뒤의 단검집에서 단검을 꺼냈다.
카디아는 내가 다섯 번의 칼질을 거치며 그녀의 망토를 난도질할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사르륵.
잘려나간 망토 자락이 광장 바닥에 떨어졌다.
“어라?”
“알겠냐? 너 같은 애가 백 명 있어도 나한테 안 돼. 내가 너보다 여기 훨씬 먼저 왔으니까, 죽기 싫으면 얌전히 내 말이나 따라.”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인가요?”
“그냥 빨리 움직인 건데.”
“……거짓말!”
“짜증 나게 굴지 마라. 하나하나 내 말에 토 달래?”
“체, 뭔 말을 그렇게 한담.”
이 자식이…… 한 마디를 안 질려고.
나는 대기실의 광장에 눌러앉아 카디아와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앉아 있으면 그 녀석이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것뿐이었지만. 카디아는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신상까지도 줄줄이 읊어주었다.
‘시끄러운데.’
진호짱은 여전히 게임을 켜놓고만 있는 모양이었다.
배터리가 아까울 정도.
“그래서, 아저씨는 어느 지방에서 왔어요?”
“타오니어.”
“타오니어? 처음 듣는 지명이네요.”
“당연하지. 네가 살고 있는 라므인가 뭔가에는 없으니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 여기엔 잠깐 있다가 돌아갈 예정이지.”
카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너와 같이 싸울 동료가 아니란 거야. 명심해둬라.”
“어, 그러면…….”
“이런 장소가 여기에는 수천만 개나 널려 있다. 그중 하나에서 너보다 먼저 시작했을 뿐이야.”
“잘 이해가 안 돼요. 이런 장소가 수천만 개가 있다구요?”
카디아는 광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꽤나 혼란스러운 듯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다.
설명해봤자 어지러움만 가중될 테니까.
‘일단 지켜볼까.’
나는 칼집에서 비프로스트를 꺼냈다.
파지지직! 검날을 광장 바닥에 붙이자 검붉은 번개가 격렬하게 튀기 시작했다.
[※알람!] [권한을 요청받는 중입니다.]비프로스트는 그 자체가 간섭력의 결정체.
거기에 이셀이 약간의 조치를 해주었다.
갓 만들어진 병아리 계정이라면…….
[띠링!] [마스터, 영웅이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시야 오른쪽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진호짱의 조작 화면이었다. 이 녀석은 레벨이 낮기에 보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초적인 해킹만으로 손쉽게 뚫린 것이다.
나는 나를 멀뚱멀뚱하게 보는 카디아를 무시한 채 비프로스트를 칼집에 돌려놓았다.
“여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했지?”
“아, 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동료와 힘을 합쳐 라므를 구하라고요.”
“그렇군.”
최소 4성인가.
진호짱이란 놈도 운이 상당히 좋은 것 같다.
쯧쯔. 나는 혀를 차고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카디아가 다가와서 무얼 한 건지 끈질기게 캐물었으나, 나는 입을 닫고 있었다.
진호짱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도 더 지나서였다.
게임 화면에 들어온 진호짱은 곧장 임무 탭으로 들어갔다.
덜컹.
시공의 틈과 이어진 대문이 활짝 열렸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카디아가 시선을 돌렸다.
“신호다! 저, 다녀올게요, 아저씨.”
“…….”
“그런데…… 진짜 못 오시는 거예요?”
“가고 싶어도 못 간다니까.”
“넵! 다녀오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카디아가 옷차림을 정돈하더니, 시공의 틈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광장 중앙의 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4층까지도 1인 파티라고?’
단순한 겜알못 정도가 아니다.
소환권으로 유료 뽑기는커녕 무료 뽑기도 돌리지 않는다.
아이템도 뽑지 않았고, 시설도 만들지 않았다. 기본 영웅을 임무에 출전시키는 것이 전부.
지시를 마친 진호짱은 다시 길고 긴 동면에 길어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비프로스트를 한 번 더 뽑아 들었다.
다시 검을 바닥에 붙이자 검붉은 번개가 튀어 올랐다.
이번에 하는 것은 해킹이 아니다. 어느 정도 전류가 강해졌을 때, 나는 검 자루를 양손으로 잡은 뒤 바닥에 깊게 박아넣었다.
파지지직!
[으갸갸갹!]조그마한 소녀가 공중에서 별가루와 함께 튀어나왔다.
이셀은 광장 바닥에 떨어지더니 몸을 경련시키기 시작했다.
[조, 존버! 조온버어어엇!]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뒹굴던 이셀이 벌떡 일어섰다.
이셀은 앙칼지게 눈을 뜨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 너! 한창 고점 매도 타이밍이었는데!]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
허리춤에는 까만 플라스틱 박스를 끼고 있었다.
박스 틈새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어, 잠깐!]별안간 이셀이 플라스틱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전선이 연결된 직사각형의 부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곧 나는 그것이 소형화된 그래픽 카드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왜 팬이 안 돌아가? 고, 고장 났어? 설마! 고장이…… 난 거야?]“…….”
[으가아아아악! 내 프리덤 XY-46호가!]이셀은 털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 자식, 감히 나의 프리덤 XY-46호를 망가뜨렸겠다!]삐빅.
나를 앙칼지게 노려보던 이셀의 손목시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앗, 벌써 거래 시간이……. 두고 보자, 내가 여길 탈출하면 가만히 안 둘 줄 알아!]“…….”
[그럼 이…….]나는 이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어디론가 들어가려던 이셀이 한 번 더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딜 가려고.”
예전에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이셀을 지켜봐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거지.
“네 담당 계정인데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니냐?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만, 코빼기도 안 보이고.”
[그러고 보니, 파견이 온다고 했었네.]이셀이 나를 멍하니 올려보았다.
그러다 눈을 감았다.
[돌아가.]“음?”
[돌아가라구. 여긴 망했으니까. 딱 보면 몰라? 마스터가 게임을 할 생각이 전혀 없잖아. 저 자식, 픽 미 업을 켜놓고 다른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하늘은 반짝이고 있었지만, 조작 창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제대로 할 생각이 있으면 설치하지도 말았어야지. 요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내가 고작 코인질에나 매달려야 하는 신세라니…….]이셀이 울상을 지었다.
[아무튼! 바쁘니까 건들지 마! 돈 벌어서 여길 탈출해야 되니까! 그리고 네가 망가뜨린 프리덤 XY-46호! 나중에 반드시 배상받으러 갈 거야! 그럼 이…….]나는 후다닥 뛰어서 도망치려는 이셀의 발을 걸었다.
이셀은 광장 바닥에 얼굴부터 들이박았다.
[으갸악!]“말 아직 안 끝났다.”
[뭐야, 할 말 또 남았어?]이셀이 나를 돌아보더니 빨개진 코를 문질렀다.
“게임을 안 하고 있으면 이유를 조사해야지.”
[이유? 게임 안 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냥 재미가 없어서…….]“아닌 것 같은데.”
나는 피식 웃었다.
뭐, 이셀의 말대로, 튜토리얼을 했는데 자기 취향이 아니라서 접을 수는 있다.
픽 미 업이 취향을 꽤나 타는 게임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하니까. 본인이 재미가 없다면 말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상한 점이 없지 않아.
“하기 싫으면 나가면 그만인데, 굳이 켜놓고 있잖냐.”
암케나와의 대화에서 언급하긴 했었다.
친구들은 운빨망게임이라 욕만 하고 자기가 보기에도 재미없을 것 같다면서.
그렇다면 튜토리얼을 끝낸 즉시, 접속을 끊고 게임을 삭제했을 것이다.
‘별것 아닌 의문이긴 해.’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지.
그러나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흥!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이든 나랑 상관없어. 돈이 최고야. 돈이 최고라구. 마구 벌어서, 로키 같은 깔쌈한 마스터랑 새로 시작할 거라구. 알았으면 찾지 마셔. 그럼 이…….]나는 비프로스트의 검날을 이셀에게 가져다 댔다.
파지지직!
[우아갸가아야갸갹!]효과가 직빵인데.
이셀이 갓 낚은 잉어처럼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나의 프리덤 XY가…….]이셀이 옆에 끼고 있던 코인 채굴기는 아예 통째로 망가진 상태였다.
과열된 나머지 전선과 부품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거 원. 도와준다는데도 거절하는 놈은 또 처음 보겠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이잖냐.”
나는 프리덤 XY-46호의 박스를 걷어찼다.
바스러진 그래픽 카드의 잔해가 나뒹굴었다.
[아, 악마…….]“코인질은 하지 마라.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이거 아니면…… 돈을 벌 수단이 없다구……. 돈을 벌어야 윗대가리한테 쌰바쌰바를 해서…… 담당 대기실을 바꿀 수 있단 말이야…….]이셀은 망가진 코인 채굴기를 끌어안은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사님이…… 아주 잘하는 마스터랑 붙여준다고 했었는데…….]“속았네, 뭐.”
[남 일처럼 말하지 마! 너, 너! 잘도 나의 프리덤 XY-46 슈퍼 스트라이크 커스텀을 망가뜨렸겠다! 이렇게 된 이상, 파견이고 뭐고 묵사발을…….]파지직!
[우기아악!]타오니어에 있는 이셀의 말 그대로였다.
정신을 못 차리는군.
“원인 조명을 할 거다. 네가 날 도와줘야겠어.”
[아니, 나는…….]내가 검날을 반쯤 뽑자 이셀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야? 마스터 레벨이 낮아서, 내 힘도 얼마 없는데…….]“모자란 간섭력은 이걸 써.”
촤르륵.
나는 이셀의 발밑에 비프로스트를 던져놓았다.
이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이 검만 없으면 너는 내 밥…….]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멀리 떨어진 비프로스트의 검날에서 전류가 튀어 올랐다.
“뭐라고 했냐?”
[……아무것도.]“진호짱의 핸드폰 사용 기록을 찾아봐라.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면 뭘 하고 있는지. 픽 미 업을 설치하기 전 어떤 걸 했는지. 코코아톡에서 누구랑 이야기했는지도 알아봐. 1시간 안에 검색해서 보고해. 쓸데없는 짓은 할 생각 말고.”
[으, 으으으…….]이셀은 죽을상을 짓더니, 비프로스트를 주춤거리면서 안았다.
그리고 별가루와 함께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광장 정면의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카디아는 4층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것 같다. 자기가 어떤 신세인지도 모른 채 몬스터를 열심히 때려잡고 있겠지.
‘얼마나 많은 대기실이 사라져갔을까.’
그 숫자만 천만 단위겠지.
뭐, 그렇다고 별로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 아프리카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진호짱의 행동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이것만 해소할 수 있다면, 이런 대기실이 망하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카디아가 돌아오기도 전이었다.
이셀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진호짱에 대한 보고서를 가져왔다.
나는 종이 위의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주로 하는 게임은 헬그라운드인가.
모바일 게임은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픽 미 업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안 할 거면 왜 깔아?’
데이터 아깝게시리.
나는 페이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곳에는 진호짱이 며칠 전 코코아톡에서 나눴던 채팅 내역이 정리되어 있었다.
1 대 1 채팅을 했던 대상자의 이름은…….
‘이모.’
이모?
나는 눈을 깜빡였다.
가장 위부터 읽기로 했다.
이모> 진호야, 자니? [오전 12:02] [오전 12:03] 아뇨. 무슨 일이세요?
이모> 이모가 부탁이 있어서 그래. 들어줄 수 있을까? [오전 12:05]
‘이모’와 ‘진호짱’의 채팅 기록이 주르르 펼쳐졌다.
자정에 시작된 대화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이모> 내가 말해도 안 듣는 것 같아. 진호가 예전부터 그 애랑 친했잖아. 좀 설득해줄래? [오전 12:57] [오전 12:59] 알았어요. 말은 해볼게요.
이모> 성공하면 선물도 줄게. 요즘 롱패딩이 인기라며? 누스페이스 거 갖고 싶지 않아? [오전 1:00] [오전 1:01] 어, 진짜요? 더 열심히 해볼게요!
이모> 부탁한다. *^^* 진호 파이팅! [오전 1:05]
코코아톡의 채팅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며칠 전, 이모는 진호짱에게 고민 상담을 한 모양이었다.
그 내용은 암케나에 대해서.
게임에 빠진 암케나가 현실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걱정이로군.’
부모 입장이라면 말이지.
진호짱에게 이모.
암케나에게는 어머니였다.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것 같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회사에 나가 고생하는 것 같다.
집 찬장을 살펴보면 라면 박스만 쌓여 있다.
게임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매일 밤마다 하던 저녁 인사를 빼먹을 때가 있다.
이모는 그 밖에도 10가지 넘는 각종 걱정거리를 진호짱에게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선물 공세와 함께 임무를 맡긴 것이다.
‘암케나가…….’
게임을 접게 해달라.
“재밌군.”
즉, 이 녀석은 자객이라 이건가.
암케나를 픽 미 업에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보낸.
‘훼방을 놓으시겠다?’
나는 보고서를 꾸깃꾸깃 구겨서 버렸다.
누구 마음대로.
암케나가 게임에 빠져들면서 일상에 지장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한창 때의 나도 그랬으니까. 나름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지만 하루하루 출근하기가 어찌나 싫었던지. 상사의 책상 위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올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해방감마저 느꼈다.
‘뭐, 어찌어찌 성공은 했는데.’
이후, 나는 뮤튜브 구독자를 수십만 단위로 늘리며 안정적인 수입원을 얻었지만, 암케나에게 비슷한 상황이 적용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접는 건 안 돼.’
이제 시작이었다.
끝을 보기 전에는 못 나간다 이거야.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임무에 나가 있던 카디아가 돌아왔다.
카디아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저씨, 아직 안 가고 있었네요? 저 기다려준 거예요?”
“용케도 안 죽었네.”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강한데. 고블린 따위는 멋지게 얍, 얍, 처리했죠!”
카디아는 검을 내지르는 시늉을 하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얼굴 구석에 드리워진 피로감은 감출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안다. 이 꼬마는 실전을 얼마 안 겪어본 케이스였다. 피와 살이 튀는 실전은 상당한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 5층부터는 저랑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발목 안 붙잡을게요.”
“가고 싶어도 못 간다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분명 여신님이 함께 싸워줄 멋진 동료가 있다고 했는데!”
“적어도 난 아니야.”
진호짱의 조작창이 움직였다.
스테이지의 클리어 결과를 보고받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스터, 4층을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5층은 난관이 예상되는 보스 스테이지! 전력 강화를 위해 영웅을 새로 영입하시는 건 어떨까요? 현재 이벤트로 고급 소환권 2장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 5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진호짱의 화면에 팁이 떠올랐다.
지금을 위해 이셀을 미리 갈궈놓았지.
대놓고 메시지를 띄워줬는데, 아무리 게임에 관심이 없어도 따라는 해주겠지.
암케나의 어머니가 보낸 자객, 진호짱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녀석도 게임에 빠져들게 하면 된다.
끝까지 할 필요도 없어.
암케나가 100층을 클리어할 때까지 접지만 않으면 돼.
그동안 진호짱은 암케나의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다행히 픽 미 업은 여느 모바일 게임과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신규 유저의 이탈률이 낮았다. 즉, 어느 정도까지만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면, 그 다음은 내가 없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영웅을 뽑은 뒤에는…….’
훈련소 시설을 만든다.
거기서부터 1차적인 공략 파티가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진호짱이 소환을 시작할 때를 기다렸다.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하늘이 어두워졌다.
진호짱이 접속을 종료한 것이다.
소환은커녕 팁 메시지를 닫은 채 게임을 꺼버렸다.
‘…….’
이 녀석은 픽 미 업에 관심이 아예 없다.
게임을 할 의욕이 있다면 암케나 때처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진다. 게임 속의 캐릭터일 뿐인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간섭할 수 없으니까.
‘방법을 바꿔야 할까.’
다른 수가 없진 않았다.
훨씬 귀찮고, 손이 많이 가서 문제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진호짱도 당장 암케나에게 압박을 넣진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의 숙소는 카디아의 옆방으로 정해졌다.
애초에 1레벨 숙소는 방이 열 개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부엌에 있는 식재료는 감자와 물뿐.
그날 저녁에는 오랜만에 감자 구이를 먹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튿날.
진호짱이 다시 접속했다.
[마스터, 영웅들에게 강해질 기회를 제공하세요!] [훈련소 시설을 만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영웅들은 픽 미 업 특유의 정교한 인공지능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할 것입니다! 훈련소를 만드시겠습니까?] [Yes / No(선택)]진호짱은 이셀의 팁을 무시했다.
나는 그 뒤로 이셀을 압박해 몇 번의 팁을 더 띄웠으나, 그때마다 보란 듯이 거절의 메시지가 돌아왔다.
암케나> 잘 되고 있어?
wlsghWkd> 게임 핵노잼인데. 이거, 널리고 널린 오토 게임이랑 뭐가 달라? 영웅 뽑아서 던전 보내놓고 구경만 하잖아. 현질 안하면 노답이고.
암케나> 쪼렙이라 그래. 하다 보면 의외로 할 거 엄청 많아.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조금만 더 해봐. 내 영웅 쓸 만하지?
wlsghWkd> 별로. 게임이 그냥 노잼이야.
암케나> ;;;
나는 혀를 찼다.
해보지도 않고 노잼이라는 거냐.
슬슬 진호짱의 물타기가 시작된 것 같다.
물론, 암케나가 쉽게 접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자연스레 접속 시간이 짧아지겠지.
한창 바쁠 때인 지금으로서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아저씨! 어때요? 이만하면 동료로 충분하지 않나요? 이번 기회에 귀엽고 강한 천재 마검사 데려가세요. 다시는 없을 특별 기회…….”
1레벨 숙소의 로비.
카디아가 내 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검날에서는 푸른 화염이 타오르고 있다.
기초적인 무기 인챈트 마법이었다.
“이얍!”
나는 폼을 잡는 카디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서 앞을 보았다.
이셀이 코인 채굴기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배트코인…… 손절…… 안 한…… 흑우…….]“…….”
[망했어. 여긴 망했다구. 마스터는 접을 거야. 나도 사라지겠지. 젠장…… 하루만 일찍 팔았으면…… 우와아아아!]이셀이 머리를 붙잡고 오열했다.
이젠 이 모습도 익숙했다.
‘잘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지.’
쯧즈.
나는 입을 열었다.
“내일, 마스터가 들어오면 한 번 더 팁을 띄워봐. 그래픽은 바꿀 수 있겠지? 조금 더 잘 보이게 반짝이는 효과를 넣어라. 신규 이벤트 중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그럼 뭐해, 관심이 없는데! 저 녀석은 백빵이야. 하다가 접을 거라구!]나는 비프로스트를 반쯤 뽑았다.
[흐이에엑!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4층에서 고블린이 20마리나 나왔단 말이죠. 제가 어떻게 했냐면…….”
이곳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두 명 모두 머리가 이상했다.
한 명은 꽃밭. 다른 한 명은 호구.
유일한 정상인은 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될까 말까인데.’
지금쯤 5성으로 승급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건만.
여기서 바보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다니.
‘나까지 건드렸다 이거지.’
나는 속으로 화를 삭이고는 시야 오른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진호짱이 암케나에게 보낸 메시지 중의 일부가 떠올라 있었다.
wlsghWkd> 이 한 이스라트라는 영웅. 뭐가 좋다고 떠받들어줘? 얘 좀 이상하던데. 군마 조각상? 이상한 물건이나 들고 다니고. 변태 아니야? ㅋㅋㅋ. 이따위 쓰레기를 누가 좋아해 ㅋㅋㅋㅋㅋㅋ.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군마 조각상을 모욕하는 건…….
‘이게 아닌데.’
어쨌든.
진호짱의 폭언은 허용 범위를 벗어났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스터의 데이터는 찾아왔겠지?”
나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이셀에게 말했다.
이셀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효과음과 함께 휴대폰의 메인 화면이 표시됐다.
일종의 해킹. 이걸로 나는 진호짱의 휴대폰을 조정할 수 있다.
저 녀석에게 주도권을 넘기면 가상거래소나 코인 갤러리 같은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기로 했다.
어디 보자.
코코아톡의 채팅 내역은 수도 없이 훑어봤다.
나는 메인 화면의 하단에 있는 초록색 아이콘을 터치했다.
흔히 ‘Never’라고 불리는 한국 최대의 검색 엔진 사이트였다. 자동 로그인이 되어 있는 상태. 메일부터 천천히 살펴보았다.
‘스팸밖에 없고.’
다음으로는 블로그와 카페를.
‘음?’
이 녀석, 자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진호짱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블로그의 우측 상단에 제목이 떠올랐다.
무지개빛으로 덧칠된 글자 뒤에는, 교복을 입은 트윈테일 소녀가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
나는 블로그의 최신 게시글을 터치했다.
코코아톡의 채팅 내역을 살펴보니 이 녀석은 반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소위 말하는 ‘인싸’였다. 친구들한테 놀러 가자는 연락도 자주 오는 편이었고, 코코아톡의 상대 프로필을 보면 여자들도 많이 보였다.
‘취향은 존중해야지.’
조용히 홀로그램 창을 닫았다.
나는 진호짱처럼 속이 좁지 않아.
취향이 어떻든, 다 존중해준다.
뭘 좋아하든 개인의 자유인 거니까.
‘대신 이용할 건 이용하는 거지.’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익명으로 채팅을 걸어서 학교 단톡방에 블로그 주소를 뿌리겠다고 해볼까.
괜찮은 방법이다.
진호짱의 핸드폰 파일에는 19금 동영상도 몇 개 저장되어 있다.
이 동영상도 같이 던져 주면 효과가 좋겠지. 머릿속에 좋아서 방방 날뛸 그 녀석의 표정이 그려졌다.
[으아앗!]이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냐?”
[아니, 갑자기 한기가 들어서…….]시시한 자식.
나는 혀를 차면서 팔짱을 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 라므에 있었을 때, 얼마나…….”
카디아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나는 카디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아담한 체구와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얼굴.
‘…….’
“이셀, 네 방에 붉은 리본이랑 교복 같은 거 있어?”
[웬 교복? 무슨 말을 하는 거야?]“일단 마스터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뭐라도 해볼 수 있겠지.”
[있긴 있는데…….]심지어 있는 건가.
“좋아.”
나는 카디아에게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마스터 wlsghWkd,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접속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밝아졌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메인 화면으로 들어오는 진호짱.
[영웅에게는 함께 싸워줄 동료가 필요합니다!] [보다 원활한 전투를 위해 고급 소환은 어떠신가요?]진호짱은 이번에도 팁을 무시했다.
나는 옆의 이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셀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별가루를 뿌리며 사라졌다.
[마스터, 영웅 ‘카디아(★★★★)’가 동료를 요구합니다!]진호짱은 짜증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창을 닫았다.
나는 광장에 서 있는 카디아에게 눈짓했다.
“니, 니코…… 니코…… 니?”
주춤거리던 카디아가 머리 위에 손을 모으더니 토끼 흉내를 냈다.
그리고 가볍게 춤추면서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못 본 거 같은데.’
“다시.”
“……이거 꼭 해야 돼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다 라므를 위해서야.”
교복을 입은 카디아가 울상을 짓더니, 재차 동작을 취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언제나처럼 암케나에게 귓속말을 하려뎐 진호짱의 시선이 광장의 카디아에게 닿았다.
[마스터, 영웅 ‘카디아(★★★★)’가 동료를 요구합니다!]카디아는 반쯤 우는 표정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교복을 입혔으며,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고 빨간 리본까지 달아주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야 돼.’
어울리지 않는 쇼를 벌여서라도 말이지.
이 녀석을 게임에 끌어들이는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오지 않겠다고 했었나.’
나는 부들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띠고 있는 카디아를 보았다.
어제 새벽, 나는 한사코 하지 않겠다던 카디아에게 이 세계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코스프레를 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려준 것은 게임의 목적과 마스터의 존재 이유.
카디아가 질문 세례를 퍼부었지만, 나는 가능한 선에서 모두 대답해주었다.
눈치가 없는 것 같아 보였는데, 다행히 머리는 똑똑한 것 같다.
100%까지는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카디아는 마스터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이후 나는 진호짱이 접을 때를 대비해서 제안했었다. 만약 이곳이 안 되면, 내가 있는 곳에 오지 않겠느냐고.
이 녀석은 성격에 조금 하자가 있었지만, 포텐셜은 괜찮았다.
잘만 키우면 타오니어에서도 충분히 1인분을 해줄 재목이었다.
그러나 카디아는 거절했다.
부모와 친구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그렇겠지.
저 녀석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좀 더 귀찮은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이미 진호짱의 신상을 확보해놓았다.
이번 수가 통하지 않으면 저 녀석이나, 나나 서로 피곤해질 것이다.
얌전히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거지.
“니, 니코…….”
굳이 소리까진 안 내도 되는데.
한동안 광장 위의 카디아를 바라보던 진호짱은, 이윽고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띠링!] [마스터, 소환을 시작합니다!]어찌 스타트는 끊은 것 같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덜컹.
광장의 오른편에 있던 철제 대문이 열렸다.
내가 라므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곳.
소환소였다.
[※현재 2장의 ‘고급 소환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료로 ‘2회’ 소환하실 수 있으며, 이후의 소환에는 500젬이 필요합니다.] [Tips/ 초보 마스터에게 드리는 특별한 기회! 뉴비 패키지를 잊지 마세요!]소환소의 문으로부터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던 카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마스터가 동료를 데려와 주네요, 니코!”
“그 말투는 안 해도 된다니까.”
[마스터, 고급 소환을 시작합니다. 어떤 영웅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탈칵, 두루루루.] [투쾅!] [Rare!] [마스터 ‘wlsghWkd’님이 영웅 ‘리온(★★★)’을 습득하셨습니다!] [Rare!] [마스터 ‘wlsghWkd’님이 영웅 ‘베다(★★★)’를 습득하셨습니다!]소환소의 빛 너머로 두 개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이용권을 통한 유료 뽑기 두 번. 진호짱의 조작 화면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소환은 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가끔 이런 녀석들이 있지. 하급 영웅들은 구리다면서 뽑지도 않는 유저들이 말이다. 어쨌거나 아예 손을 놓고 있던 방금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음.”
“알겠습니다, 니코!”
카디아는 활기차게 답하더니 한 번 더 포즈를 취해 보였다.
“당신의 하트에! 니코니코니! 미소를 전달하는……!”
신이 난 것 같다. 알려주지도 않은 대사를 외치고 있었다.
[마스터, 영웅 ‘카디아(★★★★)’가 ‘훈련소’ 시설을 요구합니다!]“러브 니코!”
[시설을 구축합니다. 원하시는 시설 종류를 터치해주세요.] [※신규 마스터 이벤트! – 최초의 시설 건축에는 ‘젬’이 들지 않습니다.] [‘훈련소’를 선택하셨습니다. 건설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우르르릉.
괴성과 함께 이번에는 광장 남쪽의 문이 열렸다.
훈련소였다.
“이럴 수가……. 이건 마법의 주문인가요, 니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코스프레의 효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진호짱은 애니메이션 미소녀를 흉내 내는 카디아를 보더니,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영웅 소환부터 훈련소 건축까지.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효과가 직빵이긴 하지만, 이건 임시 대책이었다.
아무리 코스프레로 시선을 끌고, 쇼를 한들 진호짱이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말짱 헛수고.
물론, 이 부분은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카디아를 안내인 삼아 기초적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기로 했다.
암케나가 진호짱에게 제시한 나의 파견 기간은 일주일 남짓.
얼마 남지 않았다.
‘5층까지인가.’
진호짱에게 픽 미 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스 스테이지를 체험시켜 줘야겠지.
그 다음에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군.
‘이것도 안 되면 협박을 하는 수밖에.’
다만, 협박은 내 정체가 들킬 우려가 있다.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둬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 채 오른쪽을 보았다. 갓 소환된 두 명의 영웅이 광장으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한 명은 마법사.
챙이 넓은 모자와 검은 로브, 구부러진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다.
자신의 직업을 광고하는 듯한 차림새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전사.
가죽 갑옷을 입었으며 등 뒤에 나무 방패를, 허리춤에는 장검을 매달고 있었다.
“니코!”
카디아가 활짝 웃으며 손으로 하트를 그렸다.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베다(★★★)’가 ‘1파티’에 합류합니다!]진호짱은 카디아가 속해 있는 1파티에 마법사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 파티 메뉴가 닫히더니 메인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늘의 색이 뿌옇게 물들었다.
‘최소화를 시켰구나.’
다른 짓을 하고 있다.
이제 이 녀석이 게임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화면을 끄면 색깔이 변하거든.
카디아 혼자 있던 1파티에 마법사가 합류했다.
그러나 진호짱은 같이 소환된 전사는 건들지도 않은 채 잠수를 타버렸다.
대강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진짜인가.’
나와 눈이 마주친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지만,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쳤다.
“당신들, 뭐야? 여긴 어디고?”
건들거리던 소년이 나와 카디아를 번갈아 보더니 침을 퉤 뱉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거친 분위기가 인상을 해치고 있다.
소년은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당신들이 날 여기에 데려온 건가?”
“안녕하세요!”
카디아가 두 명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저는 카디아 르루라고 해요! 앞으로 함께 싸울 동료로서 잘 부탁합니다.”
“함께 싸워? 무슨 헛소리야?”
“어, 그건…….”
카디아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하아, 귀찮게.’
나는 앞으로 나섰다.
둘에게 현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에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세계 멸망이나 여신 같은 건 알려줄 필요도 없다. 믿지도 않을 테니.
핵심은 간단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몬스터들과 싸워서 살아남아라.
생존욕은 무엇보다 강한 동기가 된다.
믿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진호짱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두 명에게 저층 체험을 시켜주었다.
아직 이곳은 자율 행동이 풀리지 않았지만, 그 부분은 비프로스트의 힘을 이용해 몰래 건너뛰었다.
그 뒤에 몇 번의 설명을 거치면…….
“납득했습니다. 어느 정도는요.”
그날 새벽, 훈련소.
여마법사가 바닥에 챙모자를 내려놓았다.
이 마법사의 이름은 베다. 계통은 조작 및 염력이었다.
카디아가 말하길, 고블린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건 탑을 오르다 보면 알 수 있는 거로군요.”
“그렇지.”
“흥미롭네요.”
베다는 부드럽게 웃었다.
상황 파악이 빠르다.
첫 실전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우리하곤 하늘과 땅 차이네.’
상급 영웅은 개뿔.
1성으로만 보스 스테이지를 진행했었지.
타오니어에서 5층에 도전할 때 이런 녀석이 있었다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기분 잡치네. 마스터란 작자가 날 조종하고 있다는 건가?”
3성 전사, 리온이 눈을 찌푸린 채 칼집을 매만졌다.
이 녀석은 베다와 달리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개소리하지 말라며 어찌나 기어오르던지. 나한테 검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뭐, 금방 조용히 만들어줬지만.
“괴물 자식.”
다 들린다.
‘5층까지만 깨면 되는데.’
보스 스테이지 뒤 진호짱의 태도를 살피면 대강이나마 견적이 나온다.
그때쯤 되면 파견 기간도 거의 끝날 테고.
이곳의 임무에 타오니어 소속인 나는 나설 수 없다.
이 세 명으로 5층을 진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진호짱은 그 이상 영웅을 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티 정원이 모자란다 해도 4성 하나에 3성이 둘.
희귀 직업인 마법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클리어 스펙은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조합도 완벽하다. 근접 클래스인 전사가 전방을 맡고 마법사가 화력 지원을 담당한다. 복합 클래스인 마검사가 두 명의 빈틈을 메꿔주면 3명으로도 훌륭한 포메이션이 완성된다. 기초적인 팀워크 정도는 내가 교육시켜줄 수 있고.
‘문제는…….’
나는 진호짱의 플레이를 되돌아봤다.
그 녀석은 영웅을 두 명 뽑았지만, 한 명은 1파티에 넣은 데다가 즐겨찾기까지 걸어둔 반면, 다른 한 명은 방치했다.
각각 베다와 리온.
마법사와 전사였으며,
여자와 남자이기도 했다.
‘…….’
별 되도 않는 이유로 비효율적인 플레이를 고집하는 마스터가 있다.
진호짱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악질적인 타입이었다.
‘여성형 영웅만 쓰는 놈.’
이런 놈이 내 마스터였다면 나는 타오니어를 진작 때려치웠겠지.
진호짱은 전사인 리온을 파티에 넣지도 않았다. 이대로 가면 이 녀석은 5층 공략전에서 대기실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
두 명과 세 명은 단순히 숫자 하나 차이가 아니다.
사용 가능한 전술의 폭이 수십 배나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파티의 기본이자, 핵심인 탱커라면…….
“둘 다 어디서 왔어요? 저는 세라미 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카디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오지랖이 원수야.
편히 쉬다가 오려 했는데 고생만 하고 있다.
‘스트레스받네, 이거.’
암케나는 겜알못에 트롤이었지만, 최소한 게임을 배우려고 하는 태도는 보여줬다.
그런데 진호짱이라는 놈은…….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자식은 누군데?”
“우릴 도와주려고 왔대요. 아주 멀리서요.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엣헴.”
“선생? 저놈이 흑막 아니야? 못 믿겠는데.”
리온이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리온은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
나는 리온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남자치고는 몸집이 작다.
얼굴선도 가늘고.
“이셀.”
[응.]기다렸다는 듯 이셀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교복 남는 거 있냐? 카디아가 입는 옷 빼고.”
[있긴 있는데.]있구나.
“가발은?”
[그것도…… 있는데.]방에 그런 게 왜 있어.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셀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곧 가발을 꺼내왔다. 단발 스타일의 가발은 가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다.
‘진호짱은 여자밖에 쓰지 않는다.’
이 버릇은 녀석이 게임에 적응하면서 점차 고쳐져야 하겠지만, 현재는 그렇다.
일단은 무슨 수를 쓰든 5층을 클리어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발을 오른손에 든 채 리온을 바라보았다.
“……뭐야.”
리온이 흠칫거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너,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냐?”
“뭔 개소리야? 미쳤어?”
“여기선 안 미치면 살아남을 수 없거든.”
리온의 동공이 벌어졌다.
“너희 마스터인 진호짱은 여자밖에 안 쓰는 것 같던데.”
“어, 그런가요?”
“같은 동료로서 임무에 데려가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필요하긴 하겠네요!”
이셀이 커다란 종이상자를 가져왔다.
뚜껑을 열자 속옷부터 교복, 스타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이 수납되어 있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 걸 어떡하나.
“……!”
리온이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러고는 쏜살같은 스피드로 훈련소 출구를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저 새끼, 잡아.”
카디아와 베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날.
진호짱이 접속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진호짱은 공지사항을 스킵하더니 픽 미 업의 메인 화면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디아가 빠르게 포즈를 취했다. 여기까지는 어제와 같지.
하지만 여기에 한 명, 인원이 추가되어 있다.
“읍! 으으으읍!”
양손을 머리 위로 가져가 토끼 흉내를 낸 다음, 춤을 추며 하트 모양을 그린다.
생머리 가발을 눌러쓰고, 여학생용의 짧은 교복과 스타킹을 입은 리온이 정체불명의 신음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후후후…….”
내 옆에 있던 베다가 서늘하게 웃었다.
지금 리온의 신체는 이 녀석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
한동안 두 명을 바라보던 진호짱이 파티창을 불러왔다.
[파티를 구성합니다.] [영웅을 드래그 앤 드롭!] [‘리온(★★★)’이 ‘1파티’에 합류합니다!]됐다.
“예쁘군요. 아주 예뻐요…….”
베다가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위험한 눈빛이었다.
“마스터의 취미가 바뀌기 전까진 복장을 유지해둬.”
“그럼요.”
당연하다는 듯 베다가 대답했다.
파티창을 닫은 진호짱은 대기실 화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광장에서 재롱을 부리는 두 명을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띠링!] [마스터, 미확인 귓속말이 있습니다!]알림창 하단에 채팅 로그가 떠올랐다.
발신자는 암케나.
암케나> 어때? 할 만해?
진호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암케나> 대답 안 하는 거 보니 괜찮은가 보네 ㅋㅋㅋ. 나름 재밌어. 신경 쓸 것도 많고. 깊이도 있고.
wlsghWkd> 신기한 게임이긴 하네.
암케나> 그렇지?
wlsghWkd> 이거 영웅 음성은 없어?
암케나> ? 없는데.
wlsghWkd> 왜 없지? 필수 같은데.
너 같은 놈에게나 필수겠지.
나는 혀를 찼다. 암케나는 자신의 친척 동생이 여자 영웅들의 춤을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으아아아악!”
리온이 비명을 질렀다.
조작 마법이 약간 풀렸나 본데.
“차라리 죽여! 이 자식들아, 죽이라고!”
이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이 녀석의 목소리는 진호짱에게 들리지 않는다.
진호짱은 잠시 동안 암케나에게 영웅 음성 기능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가 자리를 비웠다.
나는 광장 가운데의 두 명에게 눈으로 신호를 줬다. 카디아와 리온이 나란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길……. 가만 안 둬…….”
리온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게 악감정이 만만찮게 쌓인 것 같지만, 저 녀석의 실력으로는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훈련소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5층까지는 도와주마. 너희가 내 말을 제대로 듣는다면,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옙, 선생님!”
내게 경례한 카디아가 훈련소로 뛰어갔다.
선생이라.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다.
‘뭐, 할 것도 없으니까.’
혹여나 라므의 3인조가 5층에서 전멸한다면, 진호짱은 게임을 접고 말겠지.
그렇다면 고생이 헛수고가 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훈련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내 뒤로 베다와 살기 어린 눈빛을 짓고 있는 리온이 따라왔다.
나는 이셀에게서 얻은 호루라기를 불며 세 명을 늦은 밤까지 단련시켰다.
5층 진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단기간에 훈련 효과를 얻기 힘든 체력 단련이나, 무기술 훈련 대신 팀워크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시켰다. 훈련 도중 리온이 몇 번이고 날뛰었지만, 그 정도는 참아주기로 했다.
카디아와 베다는 새벽까지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도 불평 없이 내 지시를 따라주었다.
특히 마법사인 베다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일부러 굴렸는데도 싫은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화염 마법을 쓰던 그 녀석과는 영 딴판이란 말이지.
뭐만 시키면 투덜거리기 일쑤였는데.
‘…….’
완성인가.
나는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진 메모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메모장에는 5층을 깬 뒤 해야 할 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영웅을 더 뽑아야겠지.’
일단 5인 파티를 만들어야 한다.
전투직을 뒷받침해줄 보조직 영웅들도 필요했다.
‘마스터의 버릇도 고쳐야 하고.’
남자 영웅이 나올 때마다 여장을 시킬 수도 없으니까.
진호짱이 픽 미 업에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하면, 저절로 나아지겠지.
메모장에는 그 외에도 내가 니플헤임의 로키와 타오니어의 한으로 지내면서 깨달은 각종 노하우가 기록되어 있다. 쓰인 대로 잘 따라만 한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 명은 아침이 가까워진 지금까지도 훈련소에서 구르고 있었다.
나는 곧 타오니어로 돌아가야 한다. 때문에, 오늘도 진호짱이 5층 도전을 안 하고 미적거린다면 카디아와 리온을 써서 출전 요청을 할 생각이었다.
몇 시간 뒤, 진호짱이 접속했다.
진호짱이 게임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선물 상점!] [30,000골드로 ‘토끼 머리띠(X3)’를 구매합니다!] [‘토끼 머리띠’를 ‘카디아(★★★★)’에게 선물합니다!] [‘토끼 머리띠’를 ‘베다(★★★)’에게 선물합니다!] [‘토끼 머리띠’를 ‘리온(★★★)’에게…….]가지가지 한다.
무료 뽑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일에 골드를 낭비하고 있다.
어쨌거나 마스터의 비위를 맞추긴 해야 한다. 세 명은 진호짱이 접속해 있을 때에는 토끼 머리띠를 낀 채 지내기로 했다.
“여길 나가면…… 죽여버리겠어.”
리온이 위를 보며 이를 갈았다.
카디아가 리온이 쓴 토끼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죽고 싶냐, 어! 짧은 치마를 입힌 것도 모자라서, 이딴 쓰레기 같은 걸 끼고 있어라?”
“얼마나 귀여운데요, 우후후.”
“이런 것들이랑 팀을 맺어야 한다니…….”
세 명은 티격태격하면서 시공의 틈으로 들어갔다.
진호짱이 5층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진호짱은 예상외로 게임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임무를 보낸 다음 바로 잠수를 타기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영웅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볼 생각인 듯했다.
“다녀올게요!”
카디아가 내게 손을 흔들고는 차원의 틈 내부로 들어갔다.
덜컹. 문이 닫히면서 세 명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반나절 가량이 지났을까.
라므의 1파티는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보스 스테이지를 무사통과했다.
인원 미달이라고 하지만, 전원이 3성 이상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파티 조합도 적절했다.
웬만큼 운이 없지 않고서야 5층 정도는 무난히 통과할 전력이었다.
원래 이래야 정상이었다.
한 자리 층수 대부터 고블린 수천 마리가 튀어나오던 타오니어가 유난히 이상했던 것이다.
경험담을 들어보면 5층에서 위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세 명이 힘을 합쳐서 극복한 것 같다.
‘그야말로 이지(Easy) 난이도로군.’
누구는 5층마다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바득바득 기어 올라왔는데.
뭐, 깼으니까 됐지만.
이걸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나는 이제 새벽에 기항 예정인 타오니어 소속 비공정을 타고 이곳을 떠나면 된다.
다행히 진호짱은 게임을 계속할 생각인 것 같다.
이셀의 보고에 따르면, 저 녀석은 암케나의 뮤튜브 채널을 구독한 후 임무 클리어 영상을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최소한 픽 미 업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이 관심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 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지금 당장은 판단할 수 없다.
[10,000골드로 ‘야옹이 잠옷’을 구매합니다!] [‘야옹이 잠옷’을 ‘카디아(★★★★)’에게 선물합니다!]플레이 성향이 뒤틀린 것 같지만 무관심보단 낫다.
나는 이셀에게 메일 주소를 알려준 다음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진호짱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소식이 도착할 것이다. 진호짱의 블로그 주소나 코코아톡 단톡방 링크는 그때 활용하기로 했다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었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번 라므 파견은 임무와 훈련에 치이던 내게 주어진 일종의 휴가였다고 볼 수 있었다.
‘돌아가면…….’
다시 바빠진다.
휴식기는 끝났다.
5성 승급과 전직, 50층 이후의 임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빛나는 검으로 알을 베어 넘기던 프리아를 떠올렸다.
그 뒤에서 수만의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지. 아무 힘 없던 꼬맹이에게 거대한 세력이 따라붙었다. 대륙 곳곳에서 황자와 황녀 세력이 맞부딪히며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프리아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
그리고 예전의 타오니어를 멸망시켰던 정체불명의 적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바깥의 일도 있지.’
갓 50층에 올라온 암케나는 PVP 유저들에게 제법 탐나는 먹잇감이었다.
내 경험상 이때쯤 되면 슬슬 상위 마스터들에게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목적 중 하나는 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암케나가 자신에게 최상급 유망주가 있다고 광고를 때려버렸으니까. 여태껏 그들은 귓속말을 통해서 암케나에게 접근했지만, 이제는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나는 픽 웃고는 옷깃을 여몄다.
가죽 갑옷과 망토의 끈을 단단히 묶은 뒤, 칼집과 작은 주머니를 벨트에 걸쳤다. 갑옷과 무기, 군마 조각상 빼고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기에 이것으로 떠날 준비는 끝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집어넣었다.
방을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파견 종료 안내] [친구인 ‘암케나’님의 영웅 ‘한(★★★★)’의 파견 기간이 끝났습니다. 마스터를 위해 수고한 영웅을 격려해주세요! [※알림!] [‘타오니어’ 소속의 비공정, ‘루세트 호’가 기항을 요구합니다. 마스터의 대기실에는 ‘차원의 틈’이 없으므로 비공정은 외부에 정박하게 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순순히 보내주는군.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면, 진호짱은 내가 못 돌아가게 붙잡은 뒤, 암케나를 압박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 녀석들을 이용한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광장으로 나왔다.
세 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쯤 한창 숙소의 로비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진호짱이 선물 상점에서 세트 메뉴를 사서 풀었으니까. 삼시 세끼 감자만 먹다가 처음으로 맛보는 정상적인 음식이었다. 배 터지게 먹느라 바쁘겠지.
‘내가 창고 쪽으로 넘어왔던가.’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열대 너머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고 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어디 가요?”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서둘러 달려왔는지 카디아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아저씨 몫 남겨놨어요.”
“내 몫은 무슨. 너 다 먹어라.”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말했잖냐. 돌아가야지.”
“어라, 그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시험 아니었나요? 통과하면 나와 함께 싸울 자격을 준다…… 같은?”
카디아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고 있네. 내가 너랑 장난을 왜 쳐? 나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말했던 대로 나는 다른 곳에서 왔고, 이제 거기로 돌아갈 거야.”
“장난이 아니라…….”
“그래, 임마. 너랑은 여기서 끝이다.”
“어, 영원히요? 다시? 다시는?”
“다시는, 영원히.”
“그건 좀 곤란한데…….”
카디아가 난처한 듯이 뺨을 긁었다.
웃기는 녀석일세. 여기서 뼈를 묻는다고 할 때는 언제고.
“책상 서랍에 종이가 몇 장 있을 거다. 그거 참고해서 너희 앞가림하면 돼. 적힌 대로 잘만 따라 하면 어이없이 죽은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카디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차원의 소용돌이를 향해 걸어갔다.
“두 명에게 인사는 안 하나요!”
왜 해.
질척거리는 분위기는 사절이다.
오히려 내가 떠난다고 좋아하겠지.
“진짜 못 만나는 거예요? 영원히? 여어엉원히이이? 진짜? 진짜진짜루요? 진짜진짜진짜…….”
……이 자식이.
나는 뒤를 보았다.
카디아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토끼귀 머리띠를 썼다.
“니코니코니! 당신의 하트에…….”
“토할 것 같으니까 하지 마라.”
“……히잉.”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귀찮게 굴어. 이래서 몰래 가려고 했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저씨는 자기 이름도 안 알려줬어. 완전 너무했네요!”
“타오니어의 한 이스라트.”
“그게 이름이에요?”
“왜, 꼽냐?”
“아아니, 뭐, 기억해둘게요.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너 하기 나름이지.”
진호짱이 암케나의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럼 됐어요!”
“그래.”
“다시 봐요, 한 오빠.”
나는 씁쓸하게 웃고는 발을 움직였다.
차원의 소용돌이로 들어가자 빛이 눈앞을 휘감았다.
그렇게 나의 파견은 끝을 맺었다.
* * *
‘…….’
타오니어 대기실 4층, 1파티 저택의 내 방.
나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역시, 선두는 396번인가.”
나는 396번기를 진열장의 맨 앞에 올려놓았다.
396번은 총 6회의 개조를 거친 나의 ‘자신작’.
군마대의 대장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뭔가 좀 모자라. 그렇지 않냐?”
구구콘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똑같이 생겼다고?’
396번은 다른 군마상과 달리 오른쪽 앞발의 각도가 17.3도가량 틀어져 있다.
어울리는 각도를 찾기 위해 무려 5시간을 고민해야 했지.
이걸 알고서도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흐음.’
396번을 대장으로 삼을 것이냐, 말 것이냐.
짜장면과 짬뽕을 방불케 하는 선택지.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저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둘의 대화처럼.
wlsghWkd> 왜 음성이 없는 거지?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
암케나> 그게 왜 이상해?
wlsghWkd> 목소리가 안 들리면 의미가 없잖아.
암케나> ???
진호짱이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뒤에도 두 명은 종종 이런 식으로 채팅을 하고는 했다.
암케나> 그런데 안 접고 있네. 할 만한가 봐.
wlsghWkd> 모르겠어.
암케나> 뭘 몰라. 딱 보면 아는데. 하면 할수록 끝이 없으니까 계속해봐. 도중에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만 하면 현질 안 해도 할 수 있어.
wlsghWkd> 그런데, 그 한이라는 영웅은 스킨 없어?
암케나> 웬 스킨?
wlsghWkd> 스킨 입히면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거 같은데?
진호짱을 착각시킬 정도로, 리온의 여장이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이 게임에 스킨이 어딨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396번을 마저 살폈다.
결과적으로는, 진호짱도 픽 미 업을 제대로 시작하게 된 것 같다.
진호짱이 암케나에게 보낸 스크린샷을 살펴보니, 나름 적절하게 파티가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남자 영웅도 쓰는 듯했고. 한 가지 의외인 건 리온이 아직까지 여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암케나의 접속 시간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현실도 챙기긴 해야 할 텐데.’
24시간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냐.
현질 할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일상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픽 미 업에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게임은 적당히.
하루 16시간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너로 정했다.’
나는 437번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396번은 위엄이 없단 말이지.
왼쪽 뒷다리의 관절이 3.7도 휘어진 437번이야말로 대장에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