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87
86. 화신(化身)
* * *
나는 심호흡을 했다.
관자놀이가 찌를 듯 쑤셔왔고, 속이 부글거렸지만, 억지로 참아 삼켰다.
아직 7성 승급식이 진행 도중이었다.
“……이제 와서.”
몇 번이나 냉정하게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물론, 한 이스라트가 타오니어의 황족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임무 중간중간 힌트가 주어지기도 했고, 예전 승급식 때 봤던 장면이나 프리아의 언행들을 살펴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이건…….’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때마침, 테라스에서는 산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옆의 철제 의자에 걸터앉아, 천천히 되짚어보기로 했다.
‘방금 내가 봤던 장면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나는 타오니어 출신이었고, 프리아에 의해 지구로 보내졌다는 뜻이 된다. 고아로 자라왔던 것도, 부모나 가족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지도 않았으니까.
“거참.”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개연성이 엉망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너는 이런 놈이었다.’고 해봤자, 그저 허무할 뿐이었다.
“어이가 없구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속았다는 건가.
나는 찡그린 채로 뒷머리를 긁었다. 뭘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바람을 타고 온 정원의 나뭇잎들만 테라스 바닥에 쌓여갔다.
“프리아.”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테라스 너머의 복도, 복장을 갖춰 입은 프리아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마 회의장으로 향하는 것일 테지. 그곳에서는 황자를 비롯한 각 종족의 지도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너는…… 알고 있었군.”
그녀는 죽기 직전, 내게 한 번만 웃어달라고 했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그따위 말을 할 리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76층. 프라이오스가 황궁에서 거들먹거리며 폼을 잡고 있을 무렵이었다.
놈은 프리아에게 수작을 부려, 생전의 기억을 강제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그녀는 눈치챘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로 꽃단장을 하나 했더니,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였나.
그리고 난데없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했었지.
‘내가 타오니어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그대와 만나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장난스레 웃음 짓던 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다시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예전, 우리가 한 약속은 잊어도 좋다. 그대는 임무가 허락하는 일을 하고,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거기서 그대만의 행복을 찾거라.’
MP3의 재생 목록을 연주하는 것처럼, 프리아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되감겼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싸움은 의미 없지 않았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대와 만난 것부터 끝을 앞둔 지금까지 전부 다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 유언까지.
‘한 번만, 나를 보며 웃어다오.’
왜 갑자기 태도나 바뀌었나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타오니어의 1성 영웅인 한 이스라트는, 보잘것없는 열 살 꼬마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구에서의 나는, 20대 중후반을 바라보는 고아원 출신의 청년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야. 키부터 체격까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똑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지. 이셀이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미치겠네.”
그래도, 납득할 수가 없어.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뭐 어쩌라는 건데.
내가 타오니어 출신이라고 해서, 믿고 있었던 게 거짓이라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아.
승급식이 끝난 뒤, 나는 어쩔 도리도 없이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밖에서는 한창 지구행 차원문이 만들어지고 있겠지.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 나는 한 이스라트가 아니다. 옛날엔 그런 이름으로 불렸을지 모르지만, 한 이스라트는 예전에 죽었다. 지금의 나는…….
‘한서진.’
뫼비우스에서는 로키라는 닉네임으로 불렸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변하는 건 없어.’
내 정체가 무엇이든, 어떤 놈이었든.
이 장면을 연출한 놈은 진실을 알게 된 내가 울고불고 질질 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었다.
“아주 재밌는 연극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10점 만점에 1점 주마.”
여기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나는 눈을 감은 후,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쿵!
커다란 진동이 몸을 뒤흔들었다.
낯익은 금속제 벽과 타일들. 대기실의 승급소에 돌아온 것이다. 선명한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의 문양은 희미해져 있었다.
“마스터, 승급 축하드립니다.”
별안간, 그림자와 같이 나타난 니슬레드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 뒤에는 일그러진 공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구의 좌표가 입력된 차원문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준비를 끝마치신 후,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떤 준비를 하면 되지?”
“7성의 힘을 끌어올리신 다음…….”
“아직 난 7성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니슬레드가 주춤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승급은 실패했다. 유르넷이 나한테 불량품을 준 것 같아.”
“속임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스터.”
니슬레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오른손은 이미 벨트 뒤쪽의 단검집에 닿아 있었다.
“유르넷님의 계산에 의하면, 마스터께서는 이번 의식으로 차원 압력을 통과할 만한 간섭력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냐?”
나는 시야 옆을 보았다.
승급 절차는 끝났지만, 성공 메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1035차원, ‘타오니어’에 있는 모든 ‘영웅들’에게 해당 효과가 적용됩니다!] [효과 : 대기실의 ‘지속 회복’ 해제] [효과 : 전 영웅의 능력치 -50%] [효과 : 상태이상 저항 -50%] [효과 : 마력 감소 -50%] [효과 : ‘뫼비우스’ 소속의 NPC에게 전 능력치 +200%] [효과 : ‘뫼비우스’ 소속의 NPC에게 재생력 + 800%] [효과 : ‘뫼비우스’ 소속의…….]한편, 텔의 간섭은 한층 심해진 것 같았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치트를 쓰는 중이었다. 영웅들에게 치명적인 패널티를 덕지덕지 달아놓고, 뫼비우스의 전투원에게는 사기적인 버프를 걸어놓았다.
‘……추하군.’
어지간히 욕심이 나는 듯했다.
암케나의 계정을 강제로 정지시키고, 강제 개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부 코드까지 조정하고 있다.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나를 얻고 싶었나.
“잠깐, 실례합니다. 확인을…….”
“마음대로.”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니슬레드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이윽고, 그 눈이 위로 치켜떠졌다.
“이제 믿겠냐? 아무 일도 없다니까.”
“이건 대체…….”
거짓말이 아니다.
내 몸에는 정말 아무 변화도 없었다.
“유르넷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귀찮게 그럴 필요까지 있나.”
치지직.
제단 옆,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누군가 튀어나왔다.
정장을 늘씬하게 차려입은 흑발의 소녀. 텔은 빙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승급 축하한다, 한.”
순식간에 단검을 뽑아 든 니슬레드가 텔의 목을 베어 넘기려 했으나,
“윽……!”
“로키의 사냥개라면 모를까, 벌레가 분수를 모르는 것 같네.”
텔은 그녀의 목을 짓누른 발에 힘을 주었다.
니슬레드의 입에서 컥컥거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
쾅!
텔이 가볍게 걷어찬 것만으로, 수 미터를 날아간 니슬레드가 벽에 충돌했다.
축 늘어진 니슬레드가 바닥에 쓰러졌다. 목숨은 건졌지만, 당분간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혀를 차고는 텔을 보았다.
“어떻게 들어왔냐?”
“안 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이 게임의 지배자야.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지.”
텔이 쿡쿡 웃었다.
기분이 좋은지, 하얀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내게 걸어와 팔짱을 꼈다.
“어땠어, 한? 놀랍지 않아? 기막힌 출생의 비밀이야. 이게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대박은 떼놓은 당상 아냐?”
“욕 푸짐하게 먹고 망할 것 같은데.”
“욕하면서 보는 게 제맛이거든!”
텔이 꺄르르 웃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
“그럴 리가. 나라고 일억 차원의 전부를 꿰뚫고 있는 건 아니지. 원래였다면…… 넌 시리스와 합성되어, 7성 승급의 재료로서 죽었어야 했어.”
텔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부권? 한낱 영웅에게 그런 게 있을 것 같아? 7성 룰은 게임을 만들 때부터 정한 규칙이야. 강제 집행이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어. 그런데 이변이 벌어진 거야. 기적. 이건 그야말로…… 하하핫! 아하하핫!”
텔이 배를 움켜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눈꼬리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다.”
“…….”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타오니어 같은 더러운 계정에, 소중하기 짝이 없는 7성 재료를 던져넣을 것 같아? 죽으면 어떡하려구?”
텔이 눈가의 물기를 닦았다.
‘뭐, 그렇겠지.’
말이 안 되긴 했다.
탑을 클리어하기 위해 게임 속으로 불렀다니.
나를 그대로 놔두었다면 니플헤임은 무사히 90층을 돌파했을 것이다.
‘사고라.’
놀랄 만도 해.
7성의 제물로 만들어서 죽이려고 했는데,
그놈이 죽기는커녕, 니플헤임과는 관련이 없는 엉뚱한 세계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런 어설픈 거짓말을 했군.’
비로소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로키. 너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물건이다. 우연과 기적이 겹치고 쌓여 만들어진 산물! 그야말로, 우주가 내게 내려준 선물이야!”
텔이 말을 이었다.
유쾌한 미소를 띤 채로.
“니플헤임의 영웅들이 그토록 강한 이유를 알고 있나? 고작 일개 유저일 뿐인 네가, 퍼즐 따위의 하찮은 방법으로 절세의 무구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정말, 네 실력으로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해?”
“…….”
“그건 버그야. 밸런스 팀은 장식 같아? 그런 치트는 금지되어 있어. 네 실력이 엄청났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처음 구상할 때부터 80층은 절대 못 깨게끔 락을 걸어놨다고. 그런데, 네가 그 법칙을 깨버린 거야.”
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흉한 빛이 눈동자의 안쪽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너는 상위 차원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위 차원의 인간이기도 하지.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우주에 허락되어서는 안 될 모순이다.”
“…….”
“로키, 나와 함께라면…… 이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 있어. 보다 완전하게. 보다 완벽하게. 이제 너도 깨달았겠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나한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거냐?”
“바로 그거야.”
텔이 내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약속하마.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뫼비우스를 되살려 보이겠다! 너도 네 가족들을 살리고 싶지 않나?”
“나라면 가능한 건가.”
“그래, 너라면 가능하다. 이 우주의 운명을 바꾸는 것도.”
“이거 경사 났네.”
“하핫, 계약 성립인가! 이딴 하찮은 싸움은 집어치우고, 당장 1서버로…….”
우득.
가느다란 목이 반대로 꺾여 돌아갔다.
휘청거리던 텔의 몸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하, 하하……. 이건……?」
머리가 180도로 돌아간 텔의 신체가 움찔거렸다.
나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풀었다.
“정보 잘 들었어.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다.”
「이런 환영식은…… 예상 못했는데.」
“나라면 가능하다며?”
「맞아, 너라면 가능하다고, 분명히…….」
“내가 가능한 거지, 네가 가능한 게 아니잖아.”
「무슨 헛소리를…….」
나는 텔의 머리를 붙잡아 짓눌렀다.
그리고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도 모르겠냐? 너는 필요 없다는 거다.”
콰득!
손끝에 힘을 주자, 묵직한 저항감과 함께 텔의 머리가 으깨졌다.
나는 일어선 뒤 손목을 털었다. 검붉은 피와 살점이 달라붙어 있었다.
펄떡거리던 텔의 시체는 곧 빛이 되어 사라졌다.
“마스터, 대체…….”
니슬레드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안한데,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저는 마스터를 지구로 돌려보내란 명령을…….”
“시리스에게 전해. 엿이나 처먹으라고.”
나는 오른손을 뒤로 내밀었다.
“이셀.”
별가루가 반짝이며 흩날리더니, 팔뚝 크기의 요정이 튀어나왔다.
[끄아아아앗!]이셀은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역시 있었군. 어디 갔었나 했다. 이셀의 방은 대기실과 격리되어 있다. 이 녀석은 니플헤임이 점령해올 동안, 자신의 방에 꼭꼭 숨어 있었던 것이다.
[로키, 방금 대표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죽을지도 몰라!]“그럼 설설 길까, 응?”
[아니, 그것도 조금…….]“아무튼, 내놔봐.”
나는 이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뭘 내놓으라는……. 아하!]내 말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이셀이 양손을 짝 마주쳤다.
핑그르르 돌며 사라진 이셀이 얼마 뒤 물건을 갖고 나왔다.
[가져왔어!]“잘했다.”
툭.
내 손바닥 위에 한 권의 책이 얹혔다.
‘역천의 서.’
엘 시드가 내게 남긴 유품이었다.
본래 낡아빠진 고물에 불과했던 그 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는 역천의 서를 펼쳐 들었다.
곳곳이 찢어지고, 긁혀 내용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힘은 똑똑히 느껴졌다.
‘처음에는 쓰레기를 줬나 했더니.’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있었잖아.
“마스터, 그만두십시오.”
“내가 왜?”
“유르넷님을 호출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적절한 조치를 끝낸 뒤, 지구로…….”
“나를 지구로 돌려보내 주겠다?”
니슬레드가 휘청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이곳은 마스터가 머물 장소가 아닙니다. 지구로 돌아가셔서…… 안전한 삶을…….”
“네가 내 걱정을 해주는지는 몰랐는데.”
“저 역시 마스터의 영웅입니다. 마스터의 은혜를 받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
“……예.”
“걱정 마라. 지구로 돌아갈 거야.”
“그렇다면 당장…….”
“그게 지금은 아닐 뿐이야.”
우우웅!
승급소의 제단 옆, 회전하고 있던 차원문의 빛이 흐려졌다.
지구와 이어진 통로였다. 아마, 1분도 안 되어 사라지고 말겠지.
나는 역천의 서를 펼쳐 든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책장의 끄트머리에 손을 올리자 승급소 전체에 빛이 퍼져나갔다.
“거부하신다면, 강제로라도 하겠습니다.”
땅을 박찬 니슬레드가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뱀과도 같은 날렵한 움직임. 천장을 거꾸로 역주행한 니슬레드의 손에서 단검이 튀어나왔다.
[그렇겐 안 돼!]“큭!”
한 줄기 빛이 된 이셀이 니슬레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니슬레드의 몸이 뒤로 거세게 튕겨 나갔다.
[으갹! 게갸갸갸갹!]파직! 파지지직!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이셀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영웅을 공격한 페널티가 적용된 것이다. 이번 건은 정당방위고 뭐고 없었으니까. 흰자위를 드러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충격을 먹은 듯했다.
[가가각! 무가악! 나 죽어…….]“안 나서도 되는데.”
[하, 하지만…….]바닥에 떨어진 이셀은 꿈틀거리면서도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잘했다. 부하 1호.”
[헤, 헤헤…….]“잠깐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쾅!
승급소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밖에는 시꺼먼 옷을 입은 채, 복면을 눌러쓴 암살자들이 한가득 서 있었다.
쓰러져 있던 니슬레드가 중얼거렸다.
“……마스터를 보호해라.”
순간, 그림자가 된 십수 명의 암살자들이 사방에서 닥쳐들었다.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위로, 내가 피할 수 있는 모든 지점을 노려오고 있었다.
“늦었어.”
도망칠 필요도, 반격할 필요도 없다.
나는 활짝 펼치고 있던 역천의 서를 힘주어 닫았다.
그것만으로.
번쩍.
찬란한 빛이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내게 달려들고 있던 암살자의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려지다 이내 멈추었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쉰 뒤, 눈을 감았다.
‘이대로는 못 가.’
내 태생을 알아서가 아니다.
프리아나 황자를 위해서도 아니다.
이올카나 에디스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였다.
‘열 받아서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잠은 자고 살아야지.’
비싼 집과 맛있는 요리, 차가 다 무슨 소용이냐.
책임질 것이 있다면 책임지고, 갚아야 할 게 있다면 갚아준다.
지금의 일은 단지, 내가 세웠던 철칙을 지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숨지 말고 나와라.
나는 눈을 떴다.
[인식되지 않은 차원입니다.] [시급한 관리 필요! 담당자를 호출해주세요.]흐려지는 시야 너머, 언젠가 보았던 장소가 나타났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제서야 시야가 선명해졌다.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
흔들리는 밀밭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치직.
나는 시야 오른쪽을 보았다.
홀로그램 메시지가 흔들리나 싶더니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플로어 100.] [임무 유형 – 불명] [임무 목표 – 알 수 없음]100층이라.
“이거 원.”
나는 혀를 찬 다음, 밀밭 안쪽으로 뻗은 길을 걸어 나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가자 익숙한 나무집이 나타났다.
“이스라티오.”
문밖의 의자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섰다.
수수한 천 옷을 걸쳐 입은 청년, 프라이오스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
퍽!
주먹을 얻어맞은 프라이오스가 밀밭 쪽으로 나뒹굴었다.
프라이오스는 쓴웃음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격한 환영이로군.”
시큰거리는 손목을 털었다.
강냉이 세 개쯤은 날려주려 했는데, 저놈의 얼굴이 생각 외로 튼튼하다.
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황자를 내려보았다.
“넌 80층에서 죽은 거 아니었냐?”
“그렇다. 나는 분명 죽었었지.”
황자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고는 일어섰다.
“그럼 뭐냐, 넌. 유령이라도 돼?”
“반쯤은 정답이로군. 나는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기억’이겠지. 내가 만든 이 땅의 특성이라 해두마.”
“너랑 말장난하러 여기에 온 건 아닌데.”
나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밀밭 위에 세워진 작은 집.
‘한 뼘의 땅.’
프리아를 위해 황자가 만들어둔 안식처라고 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성장한 동생의 주먹은…… 이렇게 매서운 것이었나.”
프라이오스가 생글생글 웃었다.
“열 받게 하지 마. 널 때려눕히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
“하하핫.”
“이제 와서 나한테 형 대접을 바라는 거냐? 처음부터 다 연기였군. 가증스러운 새끼.”
“나도 그렇게 염치없진 않아, 이스라티오.”
“그 이름으로 부르지도 마라.”
“원한다면.”
프라이오스가 입안의 피를 내뱉었다.
뒤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으니.”
“…….”
“이대로 가면 뫼비우스는 곧 멸망한다.”
“알아.”
“그렇다면 묻겠다.”
프라이오스의 투명한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
“지구에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희망 없는 투쟁을 이어가겠느냐?”
“그 전에 내가 물어보지.”
“얼마든지.”
“넌 나를 이곳에 붙잡아두기 위해 그런 수작질을 부린 거냐?”
황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설령 내가 봤던 게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이스라티오든 한 뭐시기든 그놈은 아주 옛날에 죽었어. 혹시 내가 널 가족처럼 대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꿈도 꾸지 마라.”
“아하하핫! 당연한 말 아니겠나. 이스라티오. 나는 우리와 함께 타오니어에 남겠다던 너를 버렸다. 무슨 염치가 있어 주장할까.”
프라이오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살아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확률이 아주 낮은 도박이었지.”
“흐음.”
“그런데 너는 무사히 살아남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에 돌아왔다. 네가 아니었다면 타오니어의 시나리오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높은 난이도와 각종 오류로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차원이었으니까.”
“…….”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억겁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겠지. 나도, 프리아도, 영웅들과 고대종들도 오래도록 어둠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인정한다. 나는 네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어.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틀림없는 너 자신의 힘이야.”
프라이오스의 입가가 휘어졌다.
‘또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군.’
아주 고약한 말버릇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이 건방진 놈은 일부러 나를 시험한 것이다.
내가 도중에 죽거나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쳤을 것이다.
‘프리아가 죽어도 상관없었다는 건가.’
글쎄.
17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이놈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승산은 얼마나 되냐?”
“승산?”
“내가 이곳에 남아, 놈들을 이길 확률 말이다.”
“…….”
“나는 승산 없는 도박은 하지 않아. 나한테 황금의 혈통인가 뭔가 하는 힘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파편들을 모조리 때려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차원력은 무적이 아니야. 네가 보았듯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 힘은……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위 차원의 잔재일 뿐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나한테 황제의 피가 섞여 있다면, 그 힘을 일깨우고, 7성으로 각성해서 놈들과 맞서 싸운다면…….
‘눈깔 새끼를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 같은데.
그건 상식을 넘어섰다. 시뮬레이션을 수십 수백 번이나 돌려도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말이지.
“이스라티오, 황금의 혈통은 네 가능성의 극히 일부에 불과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7성 계획이 왜 실패했는지 알고 있느냐?”
“…….”
“그 어떤 우수한 영웅이라도, 마스터라는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복자라고 불렸던 그 영웅도 마찬가지야. 그자의 신체는 차원을 넘어오며 부서졌기에 다른 영웅의 신체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조차도 불완전했고, 7성의 한계점에 달하자 서서히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복자.
랭킹 1위, 엘 시드를 말하는 거겠지.
역천의 서에 그려져 있던 내용을 되돌렸다. 녀석은 처음 소환됐을 때, 보잘것없는 1성 영웅의 몸에 빙의되었었다.
‘과연.’
하위 차원의 존재가 상위 차원에 갈 수 없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뜻인가.
설사 옮겨진다고 해도 얼마 못 버티거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 니플헤임과 싸웠던 단결회의 서브 마스터처럼. 나는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텔은 어떻게 게임을 만들었는데?”
“지구의 아주 일부를 어설프게 조종하고 있을 뿐이야. 그것만으로 신기에 가깝지만, 직접 연결되어 있는 너와는 농도 자체가 다르지.”
프라이오스가 짙은 미소를 띠었다.
“이스라티오, 너는 지구의 존재도, 뫼비우스의 존재도 아니야.”
“그럼 뭔데.”
“나는, 너와 닮은 사내를 한 명 알고 있느니라.”
“…….”
“황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그 이름이 나오는군.
“태초, 황제와 맹약을 맺은 고대종들은 황제를 이렇게도 부르더군.”
황자가 말을 이었다.
“무한의 잔이라고.”
“…….”
“나와 프리아가 가진 황금의 혈통의 원본이지.”
“그래서, 초필살기라도 생기는 거냐?”
“합성을 무한하게 할 수 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만큼은,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준 것 같다.
‘무한 합성.’
나는 내가 알고 있는 7성의 특징을 떠올렸다.
그들은 영웅의 한계 레벨인 99를 돌파할 수 있고, 스킬과 각인을 마음껏 늘리고 재구성할 수 있다. 또한, 근처의 영웅들과 NPC, 몬스터를 자체 합성하여 그 자리에서 간섭력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지.’
999레벨.
영웅의 한계를 벗어날지언정 시스템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합성을 반복하면, 정보가 뒤섞인다고 했었나.’
결국, 데이터와 데이터의 결합이었다.
합성을 이어가다 보면, 처음의 정보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붕괴로 이어져…….
‘그릇이 깨진다.’
엘 시드가 망가졌듯이.
그러나 만약, 이런 패널티가 없다고 한다면.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나는 중얼거렸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
“그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고작 그런 힘으로…… 우주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을 것 같으냐?”
프라이오스가 내게 다가왔다.
황금색 눈동자에서 서늘한 빛이 번뜩였다.
“너도 직접 보지 않았나.”
“그랬었지.”
두 번이나 봤었다.
처음에는 무한히 펼쳐진 파편들의 바다를.
다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규격 외의 존재를.
이것조차도 장난에 불과하다.
내가 본 것은 놈들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도 되지 않겠지.
뫼비우스가 멸망할 때까지, 놈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게 맞는 거니까.’
수명이 끝나면 죽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한낱 벌레나 풀에서부터 인간, 별과 태양, 성계와 은하에 이르기까지.
이는 우주 전체에 통용되는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난 그 규칙을 만든 ‘놈’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로 했다.
‘X 까.’
“이길 확률은 대충 1퍼센트 정도인가.”
“너무 희망적이군.”
“반올림해서 그렇다고 해두지. 어쨌거나 1퍼센트라면 해볼 만해. 여길 나가서, 합성을 이어가면서 힘을 키우면 되겠네.”
“다음에는?”
“전부 죽인다.”
“그 수확자들을 말인가? 수천, 수억 마리의 파편들을, 수조, 수경 마리의 파편들을 전부 죽인다는 뜻인가? 웃기는 소리야.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 뒤에는…….”
“파편을 보낸 새끼들도 다 잡아 족치면 돼.”
“……큭.”
나는 고개를 돌렸다.
프라이오스가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다.
“너는…… 미쳤군.”
“마음대로 생각해라.”
“후후, 후후후.”
프라이오스의 등이 굽어졌다.
내가 입을 열 사이도 없이, 놈은 배를 부여잡고는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핫! 아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핫!”
“…….”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닐 수 없구나! 드넓은 우주의 점조차 될 수 없는, 고작 인간 따위가, 어찌 그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입에 담는다는 것인가! 아하하핫! 나를 웃겨 죽일 셈인가, 이스라티오!”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야.”
“진심…… 그래, 진심인가.”
프라이오스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오두막 뒤를 바라보았다.
「똑똑히 들었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집의 뒤편에서 허름한 로브를 걸쳐 입은 네 명의 괴인이 걸어 나왔다.
후드 속의 얼굴은 그림자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여기 서 있는 미약한 인간이, 전 우주를 거역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행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나, 프라이오스 알 라그나가, 그대들에게 적법한 황금의 혈통으로서 명하노라.」
「…….」
「고대의 맹약을 이행하라.」
우우웅.
프라이오스의 발끝에서 황금빛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놈의 전신을 타고 올라오며, 몸에 걸쳐진 수수한 천 옷을 지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예복을 덧씌웠다. 화려한 망토가 그 등에, 금이 수놓아진 관이 머리에 씌워졌다.
「나는 말했었다.」
프라이오스가 오른손을 펼쳤다.
뻗어 나간 광채가 밀밭을 지워 없애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면, 여기서 시작하겠다고.」
황금빛 불길은 밀밭을 지워, 지평선을 뒤덮고, 하늘을 불태웠다.
화염의 중심에서 프라이오스는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불길이 지나갈 때마다, 사라진 풍경 사이로 새로운 장소가 그려졌다.
‘여긴…….’
한 뼘의 땅이라고 했었지.
정말, 프리아를 위해 준비된 장소가 맞을까.
“제국의 권좌는…… 억겁의 세월 동안 비어 있었다.”
밀밭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드넓은 광장이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실외 광장에는 대리석 기둥이 줄을 지어 늘어섰다.
기둥의 끝에는 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황좌가 놓여 있었다.
“드디어 빈 자리를 채울 때가 왔군.”
프라이오스는 붉은 카펫을 밟으며 황좌로 걸어간 뒤, 그 위에 걸터앉았다.
머리에 얹힌 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황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맹약자들이여.”
로브를 걸치고 있던 네 명의 괴인이 황자 뒤에 직립했다.
가장 오른쪽의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길게 뻗친 검은 머리칼. 머리 위에는 칠흑의 관이 씌워져 있다. 사나운 인상의 청년이 씨익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저 건방진 놈이 아니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겠느냐?」
청년의 위로 네임 태그가 떠올랐다.
[용패왕(龍覇王)] [할기온 시라오스 Lv.999]그 옆의 여성이 후드를 벗었다.
[파동왕(波動王)] [델타리 아시니스 Lv.999]백발을 늘어뜨린 채, 하얀 관을 쓴 여성은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늦었군. 오래 기다렸다.」
그 옆의 소녀가 후드를 벗었다.
[청익왕(靑翼王)] [슈텐베르크 엘슈타트 Lv.999]「…….」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는 속이 비어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왼쪽에 서 있던 소년이 후드를 벗었다.
[적미왕(赤尾王)] [란티아 니아오르 Lv.999]모두 합쳐 네 명.
그들은 나를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몸의 안쪽까지 꿰뚫어 보듯.
“그렇다면…….”
황자가 광장을 둘러보았다.
희열 어린 웃음이 그 입가에 떠올랐다.
“형제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녕 이 남자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는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드넓은 광장.
황금빛 입자가 모여들더니, 기둥 사이로 수많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들의 머리 위에 제각기 칭호가 떠올랐다.
[맹목의 성녀] [리아느 Lv.99] [수신룡] [크타아트 Lv.99] [수왕] [키아드니 비크샤비 Lv.99] [슈텐베르크의 가주] [페르세네 리델 폰 스트라베른 Lv.99] [마학의 구도자] [쿠루샤흐 Lv.99] [교단군 성기사단 총장] [도스메크 카르다 Lv.99] [아시니스의 후계자] [델핀 폰…….]광장을 흐르는 빛은 때로는 뭉치고, 때로는 흩어지며 드넓은 광장을 인파로 가득 채웠다.
수백 쌍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이 녀석들은…….
‘과거의 영웅들.’
내가 탑을 등반하면서 마주했고, 서로 칼을 맞댔으며 숨통을 끊어놓았던 몬스터들이었다.
사대 가문의 가주로부터 각 종족의 지도자, 이름을 날린 용맹한 전사에서 한 계통의 끝에 다다른 대마법사까지.
“왜 황자님이 아닌 거지? 이런 천둥벌거숭이한테…… 타오니어를 맡겨야 한다니.”
청발의 여마법사가 나를 노려보았다.
페르세네 리델 폰 스트라베른.
슈텐베르크 가문의 가주이자, 나와 일전을 벌였던 마도사였다.
“캬하하핫! 어쩌겠나,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수왕, 키아드니가 호탕하게 웃었다.
녀석의 호기 어린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이 몸은 네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강대한 전사여!”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손수 숨통을 끊어놓았던 놈들이 눈앞에 나타나, 힘을 빌려준다고 하다니.
“이 또한 타오니어를 위한 거라면, 받아들여야 마땅하겠지요.”
하얀 로브를 걸친 소녀가 걸어 나왔다.
감겨 있는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텔 이카르 교의 지도자, 성녀였다.
“정말 당신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칵카카카! 무식한 인간, 내 걸작품을 부쉈던 것처럼, 그놈들도 마구마구 부숴라!”
등이 굽은 리자드맨이 지팡이를 흔들었다.
이 녀석은…… 거대 골렘을 조종하던 마학자인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황금의 불길은 광장 너머로 퍼져나가 끝없는 들판을 환영으로 무한히 채워나갔다.
수천수만 명의 병사들과 육중한 체구의 몬스터들, 알려지지 않은 옛 종족부터 신화 속의 동물까지. 내가 상상했었고, 상상할 수 없었던 타오니어의 모든 존재가 구현되었다.
“형제들이여.”
권좌에 앉은 프라이오스가 입을 열었다.
들판 전체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 남자가 길을 나서고자 한다. 우리가 걸어 나가야 했던, 그러나 걸어 나갈 수 없었던 그 길이지. 예전, 나는 그대들에게 해방을 약속했었다. 허나 부끄럽게도 그 짐을 떠맡기에 나는 무력하기 그지없구나. 이 자는 나와 같이 황금의 혈통을 이었으며, 운명의 끝을 목도한 선지자로다. 또한, 수많은 시련을…….”
“끊어서 미안한데.”
“음?”
나는 손을 들었다.
“빨리 끝내줘. 시간 없거든.”
“…….”
“말이 너무 많아.”
눈을 동그랗게 뜬 황자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핫! 아하하하하! 이거 미안하구나! 마지막에 한 번쯤 폼을 잡고 싶었다.”
“알면 됐다.”
“그렇다면, 바로 시작하자.”
프라이오스가 황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남자, 이스라티오 알 라그나가! 타오니어를 되살려준다고 한다!」
“……”
「형제들의 영혼을 해방하라!」
성녀, 이리느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한 줄기 빛으로 변한 그녀의 몸이 내게 쏘아져 왔다.
쿵!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커다란 통나무로 명치를 맞는 듯한 충격.
‘이건 좀…… 아픈데.’
지금까지 여러 번 합성을 겪어왔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해. 합성소를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데이터는 어떤 중간 과정도 없이, 다이렉트로 내게 꽂히고 있었다.
「버티거라!」
비프로스트를 꺼내 땅에 박아넣었다.
그와 동시에, 광장 곳곳에 퍼져 있던 수백의 영웅들이 일제히 빛으로 산화했다.
나는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거대한 빛의 파도가 된 영웅들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부…… 레벨 99.’
한두 명이 아니다.
적게 잡아서 최소 수천.
헤아릴 수 없는 정보의 해일이 뇌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눈앞이 새하얘졌다.
희미한 시야 너머로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과거.
어지럽게 뒤섞여,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도 없다.
소용돌이처럼.
더러운 흙탕물처럼.
일그러진 혼돈처럼.
‘이래서 망가지는 거였나.’
으득.
나는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이성의 끈을 잠깐이라도 놓으면 자아 자체가 소멸해버릴 것이다.
[영웅 ‘한(★★★★★★★)’, 레벨 업!] [영웅 ‘한(★★★★★★★)’, 레벨 업!] [영웅 ‘한(★★★★★★★)’, 레벨 업!] [영웅 ‘한(★★★★★★★)’, 레벨…….]흐트러진 시야 옆, 무수한 레벨업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곳에 오기 전의 레벨이 99였으니, 한계를 돌파한 셈이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모자라.
턱없이 모자라다.
그것들을 상대하려면.
놈들의 머리를 잡아 뜯고, 내장을 쥐어짜고, 시체를 찢어놓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쾅!
나는 비프로스트를 땅에 박아넣었다.
박힌 칼집 사이로 커다란 균열이 퍼져나갔다.
[Warning!] [영웅 ‘한(★★★★★★★)’이 레벨 임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오류 코드 0413 –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한 이스라트!」
권좌 뒤, 할기온이 로브를 벗어던졌다.
전신에 두른 칠흑의 갑옷. 놈의 눈이 붉은빛을 발했다.
「설마, 거기서 끝나진 않겠지?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피 섞인 침을 내뱉은 뒤, 검을 바로잡았다.
“부족해. 더 내놔라.”
[Warning!] [오류 코드 0413 –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오류 코드 0413 –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오류 코드 0413 – 더 이상의 성장은…….]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투둑.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Unknown Error!] [Unknown Error!] [Unknown Error…….]다시 한번, 빛의 파도가 쏟아졌다.
광장과 들판 전역에 서 있던 영웅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네 명의 고대종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들은 각각 검고, 하얗고, 파랗고, 붉은 광채를 발하며 하나의 빛으로 합쳐졌다.
「한 이스라트.」
아시니스의 목소리.
「슈텐베르크와 란티아는 이미 오염됐다. 네가 원한다면, 이들은 제거하여…….」
“그것도 가져와.”
「오염의 우려가 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거 아니냐?”
영웅들과 NPC를 먹어치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진정한 ‘무한’이 되기 위해서는, 파편 그 자체를 먹어치워야 한다.
「크하핫! 당연하지 않나, 아시니스. 한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놈이야.」
「왜 네가 자랑하지? 이 녀석의 첫 번째 계약자는, 너 같은 놈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했거늘.」
「흥. 발칙한 놈. 그래 봤자 안 바꿔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투덕거리는 건가.
「아무튼 가겠다. 잘 받아내거라!」
“어련히.”
「길고 길었다. 이제야 쉴 수 있겠군.」
네 개의 빛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힘의 물결이 내 몸에 천천히 파고들었다.
그 누구보다 강대한 힘이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한 욕조에 잠긴 기분.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한 톨의 간섭력도 놓치지 않도록.
“…….”
그것이 할기온이 내게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는 눈을 떴다.
“어떠한가. 무언가 체감이 되느냐?”
권좌에 앉은 프라이오스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무언가 몸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지만, 달라졌다는 건 크게 체감이 되지 않았다.
“너는 알에서 갓 깬 병아리다. 아직 익숙지 않을 것이야. 시간을 들여 그 힘에 적응하거라.”
“끝난 거냐?”
“그래. 나 혼자 남았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파로 가득했던 광장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수많은 영웅들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던 네 명의 고대종도 사라졌다.
“나한테 먹힌 놈들은 어떻게 되지?”
“존재 자체가 소멸한다. 타오니어가 되살아나도, 이들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모두에게 잊혀지는 것이야.”
“…….”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바라서 한 일이니. 그들 모두, 타오니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 몸쯤은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었다.”
“너도 프리아한테 잊혀지는 거냐?”
프라이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그런가.’
만약 내가 승리해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타오니어에 이 녀석들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바보들이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느냐?”
“뭔데.”
“부디, 프리아를…….”
프라이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빛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타오니어를…… 구해다오.”
“…….”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프라이오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던 그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이라니.’
안 어울려.
그렇게 나를 갖고 놀았으면 갈 때도 뻔뻔하게 가라.
짜증 나니까.
“겸사겸사.”
“겸사겸사?”
“어차피 그놈들한테는 복수할 생각이었어. 아주 개 같은 것들이거든. 가는 길에, 여유가 있다면 해주마.”
“……고맙구나.”
프라이오스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뒤이어 황자의 몸은 작은 빛이 되어 내게 스며들었다.
그것으로, 나는 이곳에 혼자 남겨졌다.
“…….”
권좌의 앞.
대기실과 이어진 차원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인가.’
이 문을 나서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
내가 죽든가, 그놈들이 죽든가.
둘 중 하나의 결말 외에는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아.”
심호흡을 했다.
그 어떤 일이라도 첫 발자국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널브러진 비프로스트를 칼집에 넣은 뒤, 벨트에 매달았다.
뻐근한 어깨를 한번 돌리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뭐부터 해야 할까.’
나가면 꽤 바빠지겠지.
나는 차원문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희미한 목소리.
옆을 돌아보았다.
펄럭.
나는 날아오는 물건을 얼떨결에 받았다.
순백의 늑대 털로 짜인 망토.
“…….”
그 녀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망토를 어깨에 휘감았다.
‘기다림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