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97
96. Epilogue4. 발할라
* * *
“궁정 마법사를 그만둔 이유가 뭐냐고요?”
타닥.
눈앞에서 장작이 타올랐다.
이올카는 손에 낀 장갑을 벗으면서 말했다.
“흥, 말이라고 묻나요. 제 우수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고요.”
“우수한 재능이라.”
“뭐요. 불만 있어요?”
“불 피울 때는 쓸만하더군.”
나무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씨익 웃었다.
허리춤에 검을 찬 사내의 이름은 벨키스트. 용병 협회에서도 그 이름을 인정받는 특출난 강자였다.
으적.
화톳불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소녀가 사슴 넓적다리를 베어 물었다.
부드럽게 찢어지는 살점과 육즙이 소녀의 입에서 헤엄쳤다. 허리에는 세 자루의 단검을, 뒤에는 단궁을 메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제나 시라이였다.
“당신들은 뭔데요? 전 몰라서 그렇다고 해도, 당신들은 사정을 알고 있었을 텐데요.”
“무슨 사정을 말하는 거지?”
“파리만 날리는 거 말이죠.”
이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잘난 자리도 내던지고 밑으로 왔는데, 기대와 너무 다르잖아요. 여기에서도 제 빛나는 마법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구요.”
“고기를 구울 기회는 많지 않나?”
“그 기회 말고!”
이올카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녀는 불만에 차 있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인생 최대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참히 배반당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예요, 이 나라는.’
평화롭다.
평화로워도 지나치게 평화롭다. 인간과 다툼을 일삼던 온갖 이종족들도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0년을 넘게 이어진 번영으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적 떼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용병들이 할 일이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좀도둑 잡기.
가출한 고양이 찾아주기.
여관에서 웨이트리스 일하기.
기껏해야 사소한 심부름 정도였다.
마지막은 이올카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숙박비 대신 한 거였지만.
은관의 여제, 프리아시스 1세의 통치도 10년이 훌쩍 넘어갔다.
여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제국민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어디를 찾아봐도 평화였다. 거리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이름은 이올카 리벨 스트라슈르.
한때 명문이었던 귀족가 출신이었다. 마법에 독하게 매진한 끝에 제국의 궁정 마법사 자리까지 올랐지만 어느 순간 허무감이 엄습해온 것이다.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도전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빠져 있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를 아직까지 알 수 없었다.
“당신! 물어보기만 하고 왜 대답은 안 해요? 남이 알려줬을 때 자신도 답해주는 건 예의의 기본이잖아요!”
이올카는 벨키스트에게 삿대질을 했다.
벨키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게 어딨어!”
“굳이 말하자면, 시시해서겠지.”
벨키스트가 머리를 올렸다.
위를 뒤덮은 나뭇잎과 가지 사이로 밤하늘이 엿보였다.
“이 세계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군.”
벨키스트는 달을 올려보았다.
뒤이어 이올카의 시선이 남은 한 명에게 향했다.
“어, 저요?”
고기를 우물거리던 제나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음, 심심해서?”
“그게 용병이 된 이유에요?”
이올카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이 사람들, 나와 비슷하잖아.
평화로운 시대에 용병이란 괴짜들만 하는 일이라는 뜻이겠지.
용병 협회장이라던 에디스라는 여자도 이상하기는 했다.
‘바보들만 있는 곳이야.’
이올카는 후회했다.
괜히 왔다. 원래는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와인과 스테이크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을 텐데.
약 한 달 전,
외딴 도시에서 세 명은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우연히 동료가 되었다.
‘우연에 우연에 우연.’
그전까지 세 명은 동료를 두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거부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전생에서 같이 생사를 헤쳐나왔었던 것처럼.
“그래서, 유적까진 얼마나 남았어요?”
이올카가 말했다.
일이 없어 농땡이를 피우던 세 명에게 소문이 흘러 들어간 것은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발할라?”
“그거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거잖아요.”
발할라 전설.
타오니어 어딘가에 이름 없는 신의 유적이 있다.
유적의 시험을 통과하면 합격자는 새로운 세계로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했다.
도전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용병은 무가치한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이를 넘겼으나 세 명은 달랐다. 곧장 그들은 계획을 세워 모험을 떠났다.
‘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구요.’
자신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선택받은 천재라는 것을.
‘누구에게?’
그건 모르겠다.
이올카는 머리를 붕붕 휘저었다.
“휘유, 찾았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제나가 작은 금속을 꺼냈다.
산양이 조각되어 있는 황금빛 배지. 우우웅. 제나의 손안에서 배지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배지를 매만지던 제나가 말했다.
“반응 있네요. 가까운 것 같아요.”
“가짜는 아니죠?”
이올카는 의심스런 눈으로 배지를 보았다.
어디서 났는지 물어봤지만 제나는 알려주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언니, 가짜는 아니에요.”
“의심된단 말이죠. 그런 편리한 물건이 어딨어요. 가지고만 있어도 유적의 위치로 인도해준다니. 어디서 난지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
“그건, 제가 전생에 큰 업적을 쌓아서…….”
제나가 이올카의 귀에 속삭였다.
“신님이 내려주신 게 아닐까요?”
이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었다. 세 명은 짐을 정리한 뒤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타오니어의 극동부였다.
울창하기 짝이 없는 밀림이 펼쳐져 있었다. 이올카가 바람 마법에 통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더위에 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래 그녀는 화염 계통밖에 다루지 못했지만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바람 계통까지 깨우칠 수 있었다.
세 명의 용병은 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밀림을 나아갔다.
낮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밤이 되며. 밤이 다시 아침이 되는 여정이 길게 이어졌다.
“이곳인가.”
벨키스트가 중얼거렸다.
밀림 바깥의 높은 절벽.
허름한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양도 일치하는군.”
신전의 입구 위에 산양이 그려져 있었다.
발할라의 상징과도 들어맞는다. 그들이 찾던 장소였다.
벨키스트는 허리춤의 칼집을 단단히 쥐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다.”
“뭐 하는 곳일까요?”
제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올카는 검지를 저었다.
“후후, 보나마나 뻔하죠.”
“……?”
“맛있는 게 잔뜩 있는 장소!”
벨키스트는 피식 웃은 뒤 입구로 들어갔다.
어두운 통로 속으로 그의 몸이 사라졌다.
뒤이어 제나가 뛰어 들어갔다.
“어, 잠깐. 회의는 하고 가야지!”
혼자 남겨진 이올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기본 상식도 없잖아!’
가만히 있어봤자 별 수도 없다.
이올카도 헐레벌떡 그 뒤를 따라갔다.
통로의 마법 전등이 저절로 켜졌다.
신전 내부에는 널찍한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통로 전체에 검을 든 남자가 정체불명의 괴물과 싸우는 듯한 그림이 조각된 게 보였다.
검을 든 남자와 그 뒤의 부하들, 이에 적대하는 괴물들까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띠고 있었다.
‘이 남자는…….’
이올카는 벽에 그려진 남자에게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언니!”
“어, 왜, 왜요?”
“가만히 서서 뭐해요? 끝까지 온 것 같은데.”
이올카가 앞으로 뛰어갔다.
통로 끝에는 넓은 공동이 위치하고 있었다.
공동 저편으로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의 양옆에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전사가 검을 치켜들고 있는 석상이 서 있었다.
“이곳인가?”
“확실해요.”
제나가 배지를 들어 올렸다.
배지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제나는 싱긋 웃었다.
쿠궁!
별안간, 공동에서 큰 진동이 일어났다.
멍하니 있던 이올카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영원의 전쟁에 동참할 전사들이여.]문 옆에 세워져 있던 조각상의 눈이 빛났다.
위엄 어린 목소리가 석상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도전하라.]번쩍.
공동의 오른쪽에 작은 돌문이 생겨났다.
[증명하라.]덜커덩.
돌문이 옆으로 열렸다.
[자격 없는 자는 전쟁터에 발을 디딜 수 없다.]저 문의 시험을 통과하라는 건가.
벨키스트가 열린 문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진작에 되어 있었다.
‘심심하진 않겠군.’
그에게 이 세계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상대도 벨키스트의 충족감을 채워주진 못했다. 이 시험이 그의 허무감을 해소시켜주진 않겠지만, 잠깐의 여흥은 될 것이다. 벨키스트는 칼집에 손을 가져간 채 걸어갔다.
“너희는 구경하고 있어라. 나 혼자…….”
“어디 보자, 오빠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했지.”
벨키스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나가 황금 배지를 거대한 문 어딘가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한참을 낑낑대던 제나가 배지를 문의 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끼익. 콰르르.
공동 정면의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전사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대들은…….]“끝!”
[그대들은……?]“어서 들어가요, 다들.”
[너희, 뭐 하는 거야아!]석상의 입에서 작은 빛이 튀어나왔다.
흐트러진 빛 속에서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요정이 나타났다.
요정이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바락바락 외쳤다.
[어딜 감히 시험에서 꼼수를 부리려 그래!]“히익!”
이올카가 기겁했다.
“저거, 괴물, 괴물!”
“괴물 아니에요. 이셀이라고 해요.”
[누가 이셀이야! 나한테는 어엿한 프레이라는 이름이 있다구! 그나저나 어떻게 문을…… 어라?]세 명의 면면을 둘러보던 요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희, 왜 여기에……?]제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프레이가 제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면 쑥스러워.”
“오빠가 몰래 한번 왔다 갔거든. 오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다 알려줬지롱.”
[숲에서 지내려던 거 아니었어?]“몇 년 동안 가만히 있으려니까, 손이 근질근질하지 뭐야.”
[끄으응!]덜컥.
대문이 완전히 열렸다.
제나는 뒤의 두 명을 쳐다보았다.
“언니오빠들, 수고 많았어요. 우리, 거기서 다시 한번 봐요.”
대문 너머에는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정원의 가운데에 찬란하게 빛나는 차원문이 보였다.
“제나 시라이, 출격합니다!”
바닥을 박찬 제나가 날렵하게 뛰어오르더니, 차원문으로 쏘옥 들어갔다.
벨키스트와 이올카는 제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에휴, 내 신세야.]요정이 벨키스트에게 날아갔다.
날개에서 뿌려진 별가루가 그의 몸에 떨어져 내렸다.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렇게 된 거였나.”
벨키스트는 차원문을 바라보았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평범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안 되었던 것 같군.”
스릉.
벨키스트가 검을 빼 들었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대체 뭔데! 제나 양은 어디로 갔어요? 저 문은 뭐고. 저 괴상한 요정은 또 뭐야!”
“네가 직접 알아보도록, 마법사.”
벨키스트는 검을 늘어뜨린 채 차원문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사내의 뒷모습이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설명은 해줘야 할 거 아냐!”
이올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물론, 그 항의를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 혼자 남았네.]요정은 귀를 파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아서 해. 가든 말든.]“두 명은 어디로 갔어요?”
[그을쎄다.]“건방진!”
차원 마법을 내가 못 다룰 줄 알고!
이올카는 열을 내면서 걸어갔다.
사실 차원 계통에 문외한이기는 했다.
[너도 오려는 거야?]“왜요.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두 명은 모르겠지만, 너는 고생을 꽤나 해야 할 텐데? 도중에 리타이어했으니까.]“뭐라구요? 방금 저더러 아무 재능도 실력도 없는 버러지라고 한 거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감히 저를 우습게 봤다 이거죠!”
이올카는 차원문에게 삿대질을 했다.
“좋아요! 차원문 안쪽에 있는 바보에게 저 천재 마법사, 이올카 리벨 스트라슈르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주겠어요!”
[누가 있는지 알아?]“그거야…….”
그 순간, 흐릿한 기억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
“흥!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
촤륵.
이올카는 드레스에서 부채를 꺼내 펼쳐 들었다.
“알려주겠어요. 제가 누군지.”
[마음대로 하셔.]“우후후후! 각오해두라구요.”
탈칵.
이올카는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세 발짝 걷다가.
“악!”
드레스 치마의 아랫단을 밟고 넘어졌다.
[…….]“못 본 척해줘요.”
허둥지둥 일어난 이올카가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프레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바탕 시끄럽겠네.]저 녀석들 외에 손님은 없는 것 같다.
쿠르르르.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나도 가볼까.’
어떤 일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프레이는 두 쌍의 날개를 펄럭여 차원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영웅이 기다리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