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98
97. Epilogue0. Pick Me Up!
* * *
어느 골목의 이름 없는 카페.
간판 하나 제대로 달지 않은, 커피와 빵을 팔고 있는 작은 가게였다.
카운터에서는 젊은 여주인이 커피잔을 닦고 있었다. 스피커로부터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음악의 선율에 맞춰 여고생들이 조곤조곤 잡담을 나누었다.
“그래서, 있잖아…….”
“어, 정말?”
아직은 어린 소녀들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이 피어났다.
이런 곳에 단골손님은 많지 않다. 크기가 작을뿐더러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유명한 체인점을 선호하니까. 매일 오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한두 명. 물론 그 단골 중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나.”
“응?”
“내 말 듣고 있어?”
멍하니 있던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바깥쪽,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사촌 동생인 진호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명문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상태였다.
“무슨 말이었더라?”
“내가 미쳐. 또 다른 생각 했네.”
진호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모가 소개팅하라잖아, 소개팅.”
“소개팅?”
“저번에 성형외과 의사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놈팽이는 왜 거절했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 아닌데…….”
“저저번에는 판사 나으리도 거절하고. 대기업 회사원, 변호사, 운동선수. 아주 그냥 줄줄이 퇴짜를 놓으시던데. 이모 얼굴에 주름만 늘어가더라.”
“…….”
“누나, 결혼 생각 없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생각 없다고, 싫으면 싫다고 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마음에 점 찍어둔 상대라도 있어?”
“별로 그렇지도 않아.”
“생각은 있는데, 마음에 점 찍어둔 상대가 없으면, 재벌가 왕자님이라도 필요해?”
“그것도 아냐.”
진호가 눈썹을 좁혔다.
뒤이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아직 그 게임에 매달리는 거야?”
“…….”
“1년 전에 망했는데? 1년이면 신작 게임이 100개는 나오는데?”
신작이 100개, 1000개가 나와도 그런 게임은 없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미치겠구만.”
“미안.”
“마음대로 해. 싫은 일을 강요할 수도 없고.”
“미안해.”
“난 알바하러 간다.”
진호가 카페를 빠져나갔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바쁜 모양이었으니까.
그녀는 다시 혼자 남았다.
‘좋을 때구나.’
그녀는 활기차게 떠드는 여고생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저럴 때가 있었지. 세상이 모두 자신의 무대인 것 같았다. 그런 환상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현실을 깨닫자마자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만 말이다.
‘아이 같은 환상.’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1년 전, 그녀가 게임에서 겪었던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벌써 ‘픽 미 업’이란 게임이 잊혀진 지도 1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계절이 4번 바뀌었고 그녀는 회사에서 승진했으며 어머니의 흰머리는 더 많이 늘었다.
“…….”
한 이스라트.
남자는 게임 속의 인물이었다.
그녀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합성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실수로 남자는 죽지 않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싸움을 이어나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녀는 자신이 했던 게임을 떠올리고는 했다.
누구는 망한 게임이라고 하고, 다른 누구는 쓰레기 게임이라며 침을 뱉었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여행보다 값졌던 경험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 적과 싸웠으며, 동료의 죽음에 슬퍼했고, 시련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긴 했다. 어느 누가 게임 속의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는 말을 믿어줄 것인가. 미친 사람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겠지.
그녀는 스마트폰의 앨범을 펼쳤다.
한을 활약상을 찍어놓은 사진이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대한 석상에 검을 꽂은 채 매달려 있는 한. 폭발하는 통로를 빠져나오는 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열심히 수련하는 한. 매 사진마다 그녀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바보일까.’
1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냥 게임일 뿐인데.’
그래픽이 화려하지도 않다.
전투가 딱히 재밌는 것도 아니야.
현질 유도는 심하기 짝이 없었고 서비스 후반부에는 잦은 튕김으로 게임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하지도 않은 매크로를 썼다며 계정이 정지당했지.
그런데도 잊을 수 없다.
1년 동안 그녀는 모바일 게임이란 게임은 다 섭렵해보았다.
하지만 픽 미 업을 할 때 받았던 그 기분은 도저히 느끼지 못했다.
다른 세계의 인물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듯한 그런 감각을.
그녀는 품속의 봉투를 매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 특유의 질감.
봉투 안에는 1년 전 어느 변호사가 건네줬던 재산 명도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아직 꺼내보지는 않았다.
언젠가 올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그녀는 가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한산했던 골목에 어느덧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고 있었다.
벌써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카페의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행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카페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끼이익!
그 속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저 미친 새끼는 뭐야!”
“으아아악!”
“X발, 뒷골목에 차를 끌고 오는 또라이가 어딨어!”
덜컹. 덜커덩. 쿵.
무언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
수다를 떨고 있던 여고생들의 입이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뭔 일 생겼나 봐.”
안경을 쓴 여고생이 자리에서 일어난 찰나였다.
“꺄아아악!”
콰앙!
검은 스포츠카가 카페 유리창을 박살내며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의 파편이 휘날렸다. 찬장에 진열되어 있던 고급 커피잔들은 산산이 깨져나갔다. 앞에 있는 것을 박살내며 나아가던 오픈형 스포츠카는 카페의 한가운데 와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포츠카는 그녀의 바로 앞에서 정지한 상태였다.
까만 스포츠카의 외관은 곳곳이 긁힌 자국 투성이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선글라스를 코 밑으로 살짝 내렸다.
“집에도 회사에도 없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나.”
“누…… 누구?”
“일단 타라.”
문이 위로 열리더니, 남자가 그녀를 조수석에 앉혔다.
“여, 영화 촬영인가?”
“배우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범죄자?”
여고생들이 구석에 모여 쑥덕거렸다.
주인장만 허망한 눈으로 망가진 가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미안하네. 운전이 하도 오랜만이라서. 이 카드로 알아서 메꾸도록.”
남자가 테이블 위에 금빛 카드를 놓았다.
끼이이익! 두 명의 승객을 태운 스포츠카가 옆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S자로 작게 선회하던 스포카는 이윽고 굉음과 함께 골목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미 피난을 끝마쳤는지 뒷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계기판 오른쪽의 내비게이터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알아. 앞으로 가니까 알아서 비켜주던데.”
“그게 그거 아닌가, 유르넷.”
남자는 씨익 웃더니 액셀을 밟았다.
부우웅! 빠르게 가속한 스포츠카가 대로를 향해 나아갔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핸들을 꺾으며 남자가 말했다.
“전화는 왜 안 받지? 회사에는 왜 없고. 한창 일할 시간 아니었나?”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착신 목록을 보자 낯선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건…… 조퇴를…….”
“아픈 곳은 없어 보이는데. 보나 마나 귀찮아서 튀었군. 짤리기 싫으면 적당히 해라.”
세찬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현실감이 없었다. 갑자기 차를 끌고 온 남자가 그녀를 납치하더니, 낯선 곳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아니면 그만두든가. 돼지처럼 빈둥거리면서 살아도 돼. 내가 보낸 돈을 쓴다면 말이지.”
끼익!
사거리에서 스포츠카가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쟤네들은 왜 쫓아오냐?”
“내가 그랬었나.”
뒤이어 남자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어차피 사람 없는 곳으로 가려고 했어.”
“자, 잠깐만요.”
삐이이이이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비로소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괴한이 탄 스포츠카는 4차선 도로를 역주행하는 중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한 이스라트.”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한…… 이스라트……?”
그럴 리가.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알던 영웅과 닮았긴 했다.
까만 머리칼과 자신감 넘치는 눈매. 특유의 표정까지.
하지만 한 이스라트는 게임 속의 캐릭터였다.
‘설마, 진짜로…….’
남자는 기어를 바꾸면서 말했다.
“원래 올 생각 없었는데, 네가 하는 꼬라지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쓰라고 줘도 못 먹는 바보일 줄은 몰랐지 뭐냐.”
끼이이익!
차도를 반쯤 벗어난 스포츠카가 가로수를 스쳐갔다.
부서진 나무 파편이 좌석으로 쏟아졌다.
“이제 드라이브도 끝인가?”
“내 힘을 함부로 쓸 생각은 없는데.”
스포츠카는 도중에 방향을 꺾더니 좁은 골목길로 후진해 들어갔다.
골목의 막다른 곳에 부딪히기 전, 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얘기를 해보려면, 안전한 곳에 갈 필요가 있겠군.”
“…….”
“결정은 네가 해라. 미친놈이 다짜고짜 납치해왔다며 튀어도 상관없어.”
운전석에서 일어난 남자가 차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과 상상이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어댔다.
‘한 이스라트.’
그녀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그녀가 상상해왔던 한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죽 갑옷 대신 최고급 정장을 입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꿈은…….”
“현실이다.”
남자가 단언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암케나.”
“……한.”
“은혜를 갚으러 왔다.”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던졌다.
그녀는 얼떨결에 물건을 받았다.
군마 형태의 작은 조각상.
그제서야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
그녀는 조수석에서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보고 있던 남자가 조수석에 앉았다.
내비게이터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핸들에 손을 올렸다.
“슬슬 출발하지.”
남자가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액셀을 밟기 직전, 그녀는 자신에게 운전면허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부아아아앙!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픽 미 업!’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