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cher's End, Batter's Start RAW novel - Chapter 285
284화
[정우 리가 완전히 레드삭스를 박살내버리며…] [사실상 새로운 황제에 대한 대관식이나 마찬가지…] [정규시즌과 챔피언십 시리즈, 그리고 월드시리즈까지 MVP 3관왕이 거의 확실한……]내가 티비를 켜고 잤던가? 기억이 확실치가 않다. 어제 마지막 공을 잡은 이후의 기억들은 전부 다 조금 흐렸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데도,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정우는 귀를 간질이는 티비를 멍하니 보다가, 찬양일색인 말들에 살짝 민망해져, 아직 잠기운이 남은 몽롱한 눈으로 대충 티비를 꺼버렸다.
‘비 온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닌 것 같네.’
확실한 숙면을 위해 철저하게 쳤던 암막커튼을 걷힌 창밖은 꽤나 화창했다.
일기예보가 틀린 것 같다. 맑은 하늘에는 비는커녕 구름조차 없었으니까.
비가 많이 내리는 편인 보스턴인지라, 혹시나 월드시리즈에서 추위 속의 수중전을 펼치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운이 좋았다.
‘지금 시간이… 이렇게 많이 잤어? 어쩐지 해가 중천이더라.’
꽤 오래 잔 것 같다. 늦게 잔 것도 아니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뻗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오래 숙면했다.
그래도 나쁠 건 없다. 어차피 밤 경기이니, 예상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야 차라리 더 오래 자는 게 나을 테니까.
주섬주섬 준비를 마친 뒤, 간략하게 샤워를 마친 이정우는 상쾌한 몸 상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도 꽤 괜찮아.’
운명의 날이다.
오늘 이긴다면 곧바로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거머쥐고, 우승반지를 맞추러 가는 거다.
그런 물질적인 것들과 비교가 불가능한 영광이 뒤따라오고.
‘우승이라, 그것도 월드시리즈.’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과분한 생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애써 접어두긴 했지만, 무언가 미묘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투수일 때는 수십 년 걸려서 못한 일을. 타자로는 3년 만에 해보네.’
김칫국을 마시는 걸 수도 있다. 아직 시리즈는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여긴 상대의 홈이니까.
하지만 왜인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오만한 자만심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만, 이정우는 그냥 믿었다. 이 감정이 진짜라는 걸.
“요! 왔어?”
“데릭도 이제 일어났어요?”
“한번 깼다가, 너무 일찍 일어나서 다시 또 잤다나봐. 캡틴도 이제 나이가든 거지. 원래 늙으면 잠이 많아지거든.”
“페터슨 네가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지 않나?”
“난 마인드가 젊잖아. 아직 자식도 없고. 원래 자식이 있으면 더 빨리 늙는 법이지.”
대충 준비를 마친 뒤 내려온 식당에는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것 같은 동료들이 먼저 식사 중이었다.
호텔 조식은 아니고, 월드시리즈이니만큼, 철저한 선수단 관리를 위해 구단의 요리사들 식단에 맞춰서 직접 만든 것들이다.
이정우 역시 한 접시를 받아온 뒤 그들에 합류했고. 무척이나 중요한 경기를 앞뒀는데도, 다들 생각보다 반응이 덤덤했다.
“그러니까, 어제 데이지한테 전화가 왔는데…”
“어디서 뭘 잘못 들었는지, 이래야 운이 좋다면서 와이프가 자기 팬티를 주더라니까? 그것도 새빨간 색으로.”
“오… 혹시 우리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거 아니야?”
“뭐, 우리도 빨갛긴 하지.”
그냥 평소처럼 잡담이나 나누며 접시를 비웠고. 이정우와 마찬가지로 딱히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베테랑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달성한다면 구단 역사상 50년만의 우승이니, 그들 역시 경험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여유가 있는 듯한 모습에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을 앞뒀다고 과하게 긴장하는 것보다야 나았으니까.
“아, 잘 먹었다. 이상하게 맛있단 말이야. 재료만 보면 절대로 맛있을 수가 없는 조합인데.”
“그러니까 셰프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선수들은 하나둘씩 일어났고, 마찬가지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이정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때 문득 데릭이 그에게 물었다.
“리, 그럼 준비 됐어요?”
“아, 네, 다 먹었어요. 바로 가죠”
“아니, 그거 말고.”
“그러면… 아, 네, 피로가 거의 없어서 몸도 가볍고, 타격감도 좋은 것 같으니까, 오늘도-”
“그것도 말고.”
뜬금없는 질문에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데릭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될 준비 말이야. 단단히 됐겠지?”
“아…”
별거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도 조금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순간 맑아졌다.
아마도 저 단어가 가진 힘이겠지. 멍한 정신마저 한순간 일깨울 정도의 힘.
“네, 그거야 이미 한참 전에 됐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정우는 데릭과 비슷하게 미소를 지었다.
xxxx
[레드삭스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정우 리! 4타석 4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온통 이런 얘기뿐이다.
[펜웨이 파크에서 ‘완벽에 가까웠던’ 경기를 보여준 브레이브스, 이제 우승까지 남은 승리는 단 하나!]모두가 브레이브스를 칭송했고.
[펜웨이 파크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대의 대관식, 리는 22세의 나이로 Major의 정점으로 나아가고 있다!]그를 찬양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도 있긴 하다.
겨우 스물두 살짜리가 정규시즌을 폭격하더니, 포스트시즌에서도 여러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으니까.
결국에 도달한 월드시리즈에서는 홈런만 세 개에, 1차전에는 끝내기 홈스틸과 5도루라는 진기명기도 보여줬고.
그것을 본 언론은 더 이상 대관식이라는 표현을 자제하지 않았다.
지금 이뤄진 것들만 보더라도 이미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으니까.
“X까는 소리…”
“아직… 아직 경기 남았어!”
물론 그 어린 황제에게 우승을 빼앗기기 일보직전인 보스턴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사실 앞선 말들을 보스턴에서는 보거나 듣기가 어렵다.
이쪽 지역언론이야 말할 것도 없이 레드삭스에 우호적이니까.
리버스 스윕 같은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는 했고.
하지만 인터넷에서 얼핏 스쳐봤던 그것들이 그들을 짜증스럽게 했다. 경기장에 와서도 계속해서 떠올랐고.
어쩌면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으니까.
“거지같은 새끼들. 지들이 뭘 안다고… 아주 노스트라다무스가 나셨어.”
“아직 모르는 거야. 까보지 건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어차피 글 쓴 놈들은 듣지도 못할 텐데도, 고래고래 소리치며 분노를 토해냈지만. 사실 여전히 좀 충격스러웠다.
바로 전날, 3차전에서 그토록 믿었던 에이스가, 그만 나온다면 1승을 적립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크리스티안 고메즈가, 그 어린놈에게 당했다.
그놈에게만 홈런을 두 개나 얻어맞으며, 패전투수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 거다.
레드삭스의 팬들로서 그건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 두려운 일이기도 했고.
“오늘은… 오늘은 이겨야 돼. 이렇게 끝나버리면, 월드시리즈 진출하고도 조롱당할 거라고!”
힘겨운 사투 끝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는 꽤나 자신만만했었다.
상대가 현시점에서, 아니 역대를 통틀어도 세 손가락안에 꼽힐 만큼 최강팀이라고는 하나 그들 역시 강했고. 이미 경험이 있었으니까.
1차전을 졌을 때도, 2차전을 졌을 때도, 홈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어젯밤 그 생각이 보기 좋게 망가졌다.
담장을 수월하게 넘겨버리는 그 개자식 때문에.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는 그냥 무서웠다. 이제는 우승은커녕 1승조차 올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Booooo!”
“Brave Scum!”
그런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서 드디어 입장한 개자식들을 향해 더욱더 강하게 소리쳤다.
나는 절대로 겁먹지 않았다. 승리도 의심하지 않는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개자식들 중 특별하게 나쁜 개자식에겐 더욱더 강하게 욕설을 퍼부어줬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
“…”
더는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다 같은 생각인 건지,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자신들을 훑어보는 그 놈의 눈빛은 마치 살생부를 작성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에게 욕을 퍼부은 사람의 숫자 만큼의 대가를 레드삭스가 치르게 하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 사실 녀석이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들 스스로 지레 겁먹었을 뿐.
어쩐지 월드시리즈가 시작한 이후로 가장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두 눈동자가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힐 만큼 광적인 이들을 손쉽게 압도했다.
“X발 뭔 놈의 눈빛이…”
“벌써 우승이라도 한 거야 뭐야? 왜 저딴 눈으로 우릴 보냐고?”
“우리가 우습게 보여? 레드삭스를 우습게 생각하냔 말이야!”
그런 외침에도 유유히 그라운드를 둘러보는 녀석의 모습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원래라면 소리를 더 높여야 하는데, 그래서 조금이라도 겁을 줘야 하는데. 입이 떨이지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저 새끼는 겁이라는 게 없나? 최소한 귀라도 아파야 정상 아니야?”
원래 저 놈의 루틴이 경기 전에 경기장을 둘러보는 것이라는 거야 이미 익히 들어서 잘 알지만. 이번 시리즈 들어서는 처음이기에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저 행동이 독특한 루틴이 아니라, 자신이 우승할 그라운드를 한번 둘러보며, 눈에 담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아니, 어쩌면 정말 그런 건가?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 속내가 궁금했지만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딱딱한 무표정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토해내지 않았다.
양 떼 사이를 지나가는 맹수처럼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도 유유히 그라운드를 둘러본 녀석은 이내 덕아웃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보면서 얼어붙었던 관중들의 몸은 여전히 해동되지 않았다. 여전히 싸늘하게 식어 있었을 뿐.
그렇게 한 선수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수만 명의 사람들을 홀로 압도하는 것으로.
월드시리즈 4차전.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경기가 서서히 막을 올렸다.
xxxx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심은 경기 시작을 선언했고. 그라운드에는 이미 레드삭스 선수들이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홈팬들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타자가 덕아웃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이정우가 타석에 올라가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는 평소처럼 2번타자로 출전했으니까.
바로 다음 타석이기에 의미는 없겠지만. 어쨌든 관중들은 보기싫은 얼굴을 처음부터 마주하게 되지 않는 것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았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간혹 오늘이야 말로 콧대를 눌러줄 때라며 패기롭게 소리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레드삭스의 선발투수는 1차전에서 등판한 바가 있었던 클리프 크레이머였다.
비록 경기는 패배했고, 이정우의 두 다리에 레드삭스가 영혼까지 털리기는 했지만. 그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피칭을 보여줬었으니까.
그렇기에 레드삭스는 그에게 한번 더 믿음을 걸어보았고. 막중한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보이는데도, 투수 역시 다부진 얼굴로 기꺼이 짐을 짊어졌다.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제구를 잡는군.’
데릭에게 대단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피칭에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으로 바깥쪽으로 잡힌 제구는 꽤나 정교했기에, 딱히 실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크리스티안 고메즈와는 다르게, 그는 스스로 볼배합을 가져가는 타입이 아니니, 아마도 벤치의 생각이리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긴 하겠지. 평소처럼 몸쪽으로 찌르다가, 혹시라도 한방 맞으면. 정말로 월드시리즈랑 안녕을 고해야 하니까.’
먼저 3승을 내준 이상.
레드삭스는 어쩔 수 없이 경기에서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과감해지려고 해도, 순간 멈칫하게 되는 거고.
만약 그런 압박감을 이겨낸다면, 간혹 기적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것이 드러나는 투수의 조심스러운 피칭에 승부는 풀카운트까지 이어졌다.
‘데릭은 패스트볼에 타이밍이 잡힌 거 같은데. 투수는 그러면…’
타자도 투수도 서로가 하나씩 노림수를 가지는 카운트.
서로 자신이 판단이 옳기를 바라며 승부에 임했고. 대결의 승자는.
데릭이었다.
투수는 패스트볼을 던졌고, 코스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날쌘 스윙으로 공을 맞춘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는 경기.
몇몇은 기분이 싸했던 건지, 살짝 제 몸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조금 춥네. 하긴, 이제 거의 11월이니까.’
아니면 그냥 10월 막바지에 다다른 보스턴의 밤공기가 추운 걸지도 모르고.
이정우는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수만 쌍의 눈동자를 생생하게 느꼈다.
혐오. 증오. 분노. 안 좋은 감정은 골라담은 것 같는 눈빛들이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공포.’
두려움. 앞선 경기들의 경험이 그들에겐 트라우마로 남은 건지. 마치 PTSD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하나같이 불안하고 초조한 눈으로 그를 봤다.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열심히 해봐.”
으르렁 거리는 맹수처럼 소리를 내며 포수가 그를 맞이했다.
시리즈 내내 그렇게나 털려놓고도 또 이러는 걸 보니, 존경심마저 솟을 정도였다.
‘입 하나가 연봉의 30%는 차지하겠네.’
노려보는 눈빛에 어깨를 으쓱거리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건지, 포수는 더욱더 사나워졌지만. 냉큼 타격폼을 잡은 이정우에 그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승부에 집중했다.
“볼”
“볼”
“스트라이크!”
승부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투수는 쉬지 않으며 연이어 공을 던졌고, 앞서 대기타석에서 봤던 것처럼 바깥쪽으로 제구된 공을 이정우는 가만히 지켜봤다.
눈 깜짝할 사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의 카운트가 만들어졌고. 지난 타석보다 훨씬 속도감 있는 승부에 관중들의 눈은 빙빙 돌아갔다.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한번 더 잡은 스트라이크.
투수 쪽으로 카운트가 조금 유리해졌지만. 관중들이 그것에 만족할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정우가 연이어 파울 두 개를 만들어냈으니까.
파울 타구가 어찌나 강했는지, 날아오는 공에 관중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간식거리를 뒤엎으며 황급히 몸을 숙이기도 했다.
우스운 장면에 캐스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찌만. 그 외에는 이 경기장 내에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의 유니폼에 묻은 나초 소스 같은 것에 신경쓰는 사람도 없었고.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의 긴장감이 그라운드에 감돌았으니까.
‘체인지업. 하나 나올 것 같은데.’
한바탕 난리에 관중석이 부산스러워졌을 때, 배터박스에서 나와 몇 차례 연습 스윙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이정우는 다시 타석으로 들어갔고.
곧 누군가가 긴장감을 못 이기고 침을 꿀꺽 삼켰을 때. 이번 승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공이 날아갔다.
‘체인지업.’
예상했던 대로 체인지업, 이정우는 미소를 지으며 타격을 가져갔지만. 곧 눈살을 찌푸렸다.
‘낮아.’
구종은 맞았지만, 예상보다 더 낮았다. 이대로면 헛스윙이나 혹은 살짝 스쳐서 병살타가 될 것 같았기에 억지로 배트를 눕힌 이정우는 공을 맞춰냈고.
타격음이 들렸지만, 높이 두둥실 떠오른 타구에 1루에 있던 데릭 역시 잠깐 주춤거렸다.
‘아, 왜 저기로… 아니지, 그래도 진루타는 될 테니. 그 정도로 만족하자.’
중앙지역으로 날아가는 타구. 정확도는 낮아도 힘이 제대로 실린 건지, 높이 뜬 주제에 비거리가 상당했다.
만약 코스만 좋았다면 운 좋게 홈런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충분히 끌어당기지 못한 건지, 타구는 경기장의 중앙에서 약간 우측의 워닝트랙으로 공이 날아갔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움푹 들어간, 간혹 몇몇 이들은 마의 삼각지대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으로.
우측이었다면, 어제의 날렸던 홈런들과 비슷한 코스였다면 충분히 담장을 넘어갈만한 타구였기에 확인한 순간 이정우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터덜터덜 걸은 이정우였지만. 곧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그의 등 뒤편에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기온이 낮은 탓에 그냥 차갑고 서늘했는데. 지금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놈이었으니까.
“어, 어어어어?”
“저거- 저거 왜 안 떨어져?”
두둥실 떠오른 타구는 마치 연처럼 가을바람에 제 몸을 실었고.
그 덕분인지 휘청휘청하면서도, 계속해서 날아갔다.
예상했던 낙구지점을 지나친 타구에 중견수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쫓았고, 결국 눈앞에 나타난 펜스에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리며 힘껏 점프했지만. 바람에 밀린 공은 그의 글러브 위를 스쳐 지나갔다.
중견수도, 관중들도, 다른 선수들도, 심지어는 중계진마저도 모두가 멍해졌고. 그건 타구를 날려 보냈던 이정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게 넘어가네.’
월드시리즈 4차전.
1회 초.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뜬금없는 홈런이 복서가 날린 럭키펀치처럼, 레드삭스의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