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329)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330화
떠날 준비 (2)
“같이 가고 싶다고?”
강우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사실 에르노어행 멤버를 선별할 때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연주라면 실력과 신뢰,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플레이어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길드는 어쩌고?”
그녀에게는 책임져야 할 길드가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한국 최대 규모의 길드가 된 대형 길드가.
짧은 임무라면 모르지만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이세계 행에 그녀를 데려가기는 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만뒀어.”
“…뭐?”
“길드장 때려치웠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강우는 크게 눈을 떴다.
이렇게 뜬금없이 길드장을 때려치웠다니?
레드 로즈가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가디언즈에 버금가는 권력과 세력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차연주는 팔짱을 낀 채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뭐, 정확하게 말하면 때려치운 건 아니고… 현우한테 잠시 임시 길드장직을 맡기고 왔어.”
“…….”
강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말이 임시 길드장직이지 말투만 봐서는 복귀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이렇게 아싸리 때려치워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어차피 길드 운영 쪽으론 예전부터 바지사장이었는데.”
차연주는 관심없다는 투로 손을 휘휘 저었다.
“어차피 나한테 잘 맞지도 않는 일이었어. 이 기회에 잘됐지 뭐.”
“…….”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에르노어인가 뭐시긴가 거기.”
차연주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말했다.
강우는 피식 웃었다.
“설마 나랑 같이 가려고 길드 때려치운 거냐?”
“뭐, 뭐라고?”
차연주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든다.
그녀는 어버버 거리며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내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허, 헛소리하지 마 이 새끼야! 너, 너너너너가 뭐라고 내가 길드까지 때려쳐! 그냥 이제 귀찮은 일 맡기 싫어서 그런 거거든!”
씨익, 씨익 거친 숨을 내뱉으며 외쳤다.
속이 훤히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 강우는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너어!”
차연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차르륵.
손목에 찬 팔찌에서 가시가 달린 쇠사슬이 뿜어져 나왔다.
강우는 그녀가 휘두른 쇠사슬을 가볍게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뭐가.”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작전이야. 아니, 돌아올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마신의 시체를 제거하는 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강우 자신도 알지 못했다.
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하나, 세계는 지나치게 넓었으니까.
“그래도 같이 갈 거야?”
깊게 가라앉은 눈빛.
차연주는 굳게 입을 다물며 힐끗 강우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갈 거야.”
굳은 의지가 서린 그녀의 목소리에 강우는 씩 웃었다.
차연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크, 크흠. 나야말로….”
“아참, 근데 왜 아까부터 너라고 부르는 거야?”
“뭐?”
강우는 차연주가 뽑아낸 쇠사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오빠, 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이, 이익!”
차연주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김이 뿜어져 나올 듯 씩씩거리며 강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진짜 이 변태새끼가 그냥!”
성난 암사자가 집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강우는 낄낄 웃으며 그녀를 피해 도망 다녔다.
‘뭐, 그래도 좋네.’
내심 차연주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한설아, 리리스와는 달리 ‘친구’라는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으니까.
아니, 굳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아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차연주 하나밖에 없었다.
“…….”
한설아가 굳게 입을 다문 채 강우를 응시했다.
낄낄 웃으며 도망치는 강우의 모습.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장난기 가득한 그의 미소에 마음속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한설아의 눈이 빛을 잃었다.
“…연주야.”
“엉? 왜? 지금 저 변태자식 잡아야 해서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
차연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한설아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어? 어어? 뭐, 뭐야 이거.”
한설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의 사슬이 차연주의 몸을 묶었다.
그녀가 타천(陀天)했을 당시, 강우를 묶었던 ‘마(魔)를 구속하는 광휘’였다.
저벅, 저벅.
한설아가 차연주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뭐, 뭐야. 왜 그래…?”
“잠깐 할 얘기가 있어.”
한설아는 방긋 웃었다.
빛의 사슬에 묶인 차연주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방 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야, 야야! 자, 잠깐만! 오강우! 얘 좀 이상해! 나 좀 구해줘 봐!”
“아냐. 이상한 거 아냐.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
호호호.
한설아가 영혼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차연주가 소리쳤다.
“가, 강우! 오강우 이 새끼야! 뭘 구경하고 있어!? 야, 빠, 빨리 설아 좀… 악! 가, 강우! 아니, 오, 오빠!!”
-탕.
발버둥치는 차연주를 방 안으로 끌고 간 한설아가 문을 닫았다.
-찰칵.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
어색하게 내려앉은 침묵.
차연주를 피해 도망 다니던 강우는 멍한 표정으로 방문을 응시했다.
“어, 음.”
난처한 듯 뒤통수를 긁는다.
강우는 고개를 돌리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떠날 준비를 해볼까.”
방문 틈으로 차연주의 처량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 * *
그 뒤로 강우의 생활은 정신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강우가 가장 집중한 것은 새롭게 터득한 9차 각성을 통해 혼돈 계열 스킬을 연습하는 일이었다.
위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고, 컨트롤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수련의 난이도는 극악에 가까웠다.
마기와 성력의 반발력에 팔다리가 터져나간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적도 적지 않았다.
탈태를 활용한 수련과 비슷할 정도의 난이도에 강우는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혼자 수련을 이어갔다.
‘혼돈 제어’ 특성의 도움으로 처음 혼돈 스킬을 터득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 계열의 힘을 다루는 능력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下)급 스킬을 터득하지는 못했다.
혼돈 계열 스킬의 수련이 워낙 난이도가 높고 위험한 탓에 자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급하게 하지 말자.’
몇 달이 지나도록 최하(最下)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지만, 결코 무리해서 혼돈 스킬을 수련하지는 않았다.
조급함에 사로잡혀 무리해서 수련하다가 뒤지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허망한 일이 없지 않은가.
이러한 사정 탓에 혼돈 스킬 수련만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한설아와 함께 잠을 자며 마기 제어력을 키웠고, 틈틈이 대공의 권능을 다루는 법을 연습했다.
에르노어 대륙으로 가기 전에 지구의 치안 및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우.”
“많이 좋아지셨는데요, 형님?”
“개소리하지 마라.”
김시훈의 수련을 도와주며 검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도 했다.
물론, 체계적인 무공을 배워본 경험도 없고, 재능 또한 평범 그 자체 수준인 강우였기에 별다른 성취를 얻지는 못했다.
강우는 신조차 경악하게 만들 마기 제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꿔 말하면 마기 제어력 제외하면 오로지 실전으로만 쌓아 올린 주먹구구식 전투 외에는 할 줄 몰랐다.
‘아니 씨바, 소설에선 실전으로 쌓아 올린 검술이 무공보다 더 뛰어나고 그러던데.’
개소리였다.
전투 경험이 워낙 많다 보니 어지간한 무공에 꿀리지는 않았지만-
‘김시훈 이 개새끼.’
김시훈은 어지간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전에 한 번 마기와 권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기술만으로 대련했다가 복날에 개 패듯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미친 재능충 자식.’
김시훈에게 무공을 배우며 느낀 것은, 김시훈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왜 무공을 배우는 건 난데 지가 성취가 쭉쭉 올라가고 있어.’
왠지 모르겠지만 김기훈은 강우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며 오히려 자신이 더 성취가 올라가고 있었다.
혼자서 익혔을 때는 그냥 감각으로 해왔던 것을 말로 풀어 설명하려니 깨달음을 얻었다나 뭐라나.
“안 해. 안 한다고!”
강우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혀, 형님.”
김시훈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런 말 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해보세요. 형님이 익히는 속도가 절대 느리지 않다니까요?”
이제 곧 도착한다는 중국집 배달원 같은 말투.
강우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주워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보통 전투 경험이 많으면 이런 거 그냥 바로 익히지 않냐?”
“형님의 문제는 오히려 그 전투 경험이에요. 잘못된 습관 같은 게 그냥 몸에 밴 채로 너무 오래 지나서 검술 자체가 굉장히 기형적이 됐어요.”
잘못된 운동 방법으로 백날 운동을 해봤자 예쁜 근육이 생기지 않듯, 아무리 전투 경험이 많다고 해도 한번 잘 못 들인 습관이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 습관만 고친다면 경지가 한 번에 껑충 뛸 거예요.”
“그게 쉽겠냐.”
무려 만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다.
쉽게 고쳐졌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다.
“하하. 형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끄응.”
강우는 답답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오늘 검술은 여기까지 하고, 네 심법 수련이나 하자.”
“아, 예. 알겠습니다, 형님.”
강우도 일방적으로 김시훈에게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다.
아득한 경지에 달한 마기 제어력을 활용해 김시훈에게 어떤 방식으로 내공을 운용해야 더 좋은지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 그게….”
“자꾸 감각에 의존해서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철저하게 계산해서 내공을 움직이라니까?”
“읏.”
심법 수련 시간이 되면 상황이 역전됐다.
김시훈은 강우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강우는 내 마음을 알겠냐는 듯 헹, 하고 웃었다.
“기혈이 수백, 수천 개가 넘잖아?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같은 힘을 사용하더라도 완전히 그 효과가 달라져.”
“예.”
물론, 유치한 복수를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부의 힘을 제어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강우를 따라올 존재가 없었으니까.
-우우우웅!
김시훈이 눈을 감고 집중하자 반투명한 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무형검.
무신과의 동화율이 60%를 돌파하며 처음 얻었던 그 기술은 강우의 도움으로 인해 몰라볼 정도로 정교해져 있었다.
“여기까지 할까.”
한동안 김시훈의 수련을 봐주던 강우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준비 끝내야지. 내일이면 출발하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고작 며칠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어지간히 바빴으니까.”
가이아가 에르노어 대륙으로 가는 게이트를 여는데 들었던 시간은 4개월.
인원도 인원이지만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각 멤버들의 경지가 워낙 높은 탓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내일이면 끝.
가이아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에르노어 대륙에 갈 수 있는 게이트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가자.”
“아… 형님.”
“응?”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갑작스러운 김시훈의 제안에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어머니가 형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김시훈의 어머니.
김재현의 첩으로 살며 온갖 차별과 멸시에 시달리던 여인.
‘그리고.’
김시훈이 지닌 트라우마의 핵심, 과도 같은 인물.
“갑자기 왜?”
“…이제까지 받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음.”
그에게 버림받은 후 병을 얻어 쓰러졌던 그녀는 강우가 연결해 준(정확히는 레드로즈 길드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많이 상태가 호전됐다.
‘김시훈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은혜라면 굉장한 은혜를 베풀긴 한 셈.
“그래.”
강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훈의 머릿속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그녀를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많이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김시훈과 만난 지도 벌써 4년.
솔직히 늦어도 지나치게 늦은 만남이었다.
‘그래도.’
에르노어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늦은 일을 처리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
김시훈은 강우를 데리고 서울 인근에 위치한 저택으로 향했다.
2층짜리 저택은 딱히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았지만 마음이 포근해지는 분위기가 맴돌았다.
“여기가 저희 집입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집에 오는 건 처음이네.”
“하하하. 대부분 수호의 전당에 머무르니까요.”
김시훈은 가볍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집안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어머니가 잠시 시장에 가셨다가 지금 오고 계시다고 하네요.”
“조금 기다리지 뭐.”
그 시간 동안 집 구경이나 할까 하며 돌아다니던 강우는 주방 식탁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커다란 냄비에 담긴 검은색 무언가를 본 강우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악취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버러지는.”
“…어머니가 만드신 김치찌개입니다.”
“아니, 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김치찌개는 뭐냐고.”
너무 맛있어 보이잖아.
“아, 그런 뜻이었군요.”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야.”
하하하.
강우는 환하게 웃으며 김시훈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