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356)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357화
조력자 (1)
“잘 모르겠다고?”
“예…. 죄, 죄송해요, 강우 님.”
아이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쭈물 발끝을 바닥에 비볐다.
죽을죄를 지기라도 한 듯한 모습.
강우는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첫걸음.
그것은 지금 제국 내부에서 제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부패한 귀족들을 척결하는 것이다.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란 거지.’
현재 아르난 제국의 정치 시스템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각 영지를 다스리는 중앙집권형 방식이다.
여기서 무슨 자유 혁명을 일으킬 것도 아니고 그냥 귀족이라고 해서 싹 다 목을 쳐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통치할 존재가 없는 영지는 부패한 귀족이 자리 잡고 있던 시절보다 더욱 끔찍한 지옥이 된다.
약자라고 해서 선량한 것이 아니다.
귀족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짓밟기 시작할 것이다.
지구에서도 무정부 국가가 얼마나 끔찍한 파국을 맞이했는지를 생각하면 현재 제국 시스템에서 모든 귀족들을 쳐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귀족들이 지닌 권한을 모조리 박탈할 수도 없어.’
예전에 고아원을 나와 막노동판에서 구를 때, 걸걸한 목소리로 국회의원 놈들은 돈을 주지 말고 무급으로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말은 좋지.’
듣기만 좋은 개소리다.
적당한 조절은 필요하겠지만, 기득권층에게 그만큼의 권력과 보수를 주는 것은 필요악과도 같은 일이다.
대체 무급으로 그 일을 할 병신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학급 반장 같은 꼴이 나겠지.’
반장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손을 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책임을 주고, 일은 많아지는데 정작 보수는 없다.
귀족들에게서 모든 권한을 뺏어가면 결국 그들은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부패한 귀족과 적당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귀족을 구분해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아이리스는 그런 귀족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제국 정세에 해박하지 않다는 것.
그녀가 멍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피델리오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긴 탓에 판단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너무 부족했다.
이래서는 일명 ‘피델리오 라인’이라고 불리는 부패한 귀족들을 정리할 수 없었다.
“몇몇은 소문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결국 소문에 불과해서요.”
아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결국 소문이다.
고작 소문 하나만으로 어떤 귀족이 부패했고 아니고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제국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누가?
몇 년간 피델리오가 권력을 꽉 잡고 제국을 통치한 탓에 그런 사람은 이미 피델리오에게 넘어갔거나 좌천당했다.
‘피델리오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나.’
썩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다.
그는 영리한 인간이다. 자신이 유리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하려고 들 것이다.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있지만.’
이것 역시 확실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결국 그 정보를 말하는 것은 피델리오 자신.
그의 눈높이와 판단에 근거해서 부패한 귀족을 색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똥 묻은 개새끼한테 가서 누가 더 더럽냐고 물어보는 격이니까.’
역시 제국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혹시 이쪽으로 밝은 사람 알고 있어?”
“음. 잠시만요.”
아이리스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이내, 짧은 탄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있어요.”
“누구?”
“예전에 제국 수석 마법사였던 분이에요. 그분이라면 제국 정세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실 거예요.”
“…….”
강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이리스가 말하는 제국 수석 마법사가 누군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그 변태 자식이.’
제국 정세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레이라와 함께 전체이용가 등급을 뒤흔들었던 마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절로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런 편리한 방법이 갑자기 떠오를 리가.
“제가 그분에게 연락을….”
“아니, 됐어.”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통신 수정 구슬을 꺼냈다.
아이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혹시 더글라스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건가요?”
“뭐… 어쩌다 연이 닿게 돼서 말이지.”
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글라스를 조력자로 불러드리는 것은 강우에게도 반길만한 일이다.
‘더글라스만큼 하이엘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김시훈을 대륙의 영웅으로 만든 것도, 아이리스를 구원(그게 구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한 것도, 제국을 부흥시키려는 것도 결국 최종적으로 하이엘프를 대륙에 현신시키기 위함이었다.
더글라스처럼 하이엘프에 대해 오랜 연구를 해온 학자가 있다면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인가?]통신 구슬에서 더글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는 아이리스를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더글라스 씨.”
다시 일하실 시간입니다.
에로 망가 좀 그만 보고.
* * *
“화, 황녀님….”
강우의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수도로 돌아온 더글라스는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후회와 죄책감,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피델리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가 루시퍼의 하수인이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 대륙에 퍼졌다.
홀로 마탑에 은거해 살아가고 있는 더글라스조차 그 소식을 들었을 정도로.
“그자가 탐욕스럽고 사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신의 하수인이었다니!”
더글라스는 아이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녀님을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돌아오지 않는 과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더글라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아이리스는 착하고 여린 여인이다.
피델리오가 도망쳤다고 해도 그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신이 망가져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냐. 난 괜찮아, 더글라스.”
“…황녀님?”
더글라스의 눈이 커졌다.
매일 같이 피델리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리스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멀쩡해 보였다.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긴 하지만 말이야.”
“화, 황녀님?”
아이리스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광기와 살기에 더글라스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알고 있던 착하고 여린 여인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진득한 살기로 무장한 채, 적을 사납게 찢어 죽이려 하는 맹수가 있을 뿐.
‘대체 무슨 일이.’
피델리오의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이던 여인이 어찌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더글라스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황녀님은 굳은 의지로 피델리오 재상에 대한 공포를 극복해내셨습니다.”
“강우 님 덕분이에요.”
아이리스가 밝게 웃으며 강우의 팔을 슬쩍 끌어안았다.
“으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날드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으로 대했던 아이리스가 왜 저 오강우라는 청년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정말… 다행입니다.”
더글라스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공포에 덜덜 떨고 있던 아이리스의 모습보다, 조금 과격하긴 해도 지금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더글라스도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뇨. 황녀님을 지키지 못했던 무능한 늙은이를 다시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글라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우는 고개를 숙인 더글라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은거 생활을 계속하겠다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지지세력을 거의 잃어버린 아이리스의 입장에서 더글라스는 든든한 아군이자,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더글라스에게 아직 자세한 상황은 전하지 않았다.
강우는 리리스를 통해 전달받은 제국 귀족들의 리스트가 담긴 서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시간 넉넉하다면 더글라스 씨를 위한 파티라도 열어주고 싶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 길을 온 더글라스를 붙잡고 바로 일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살짝 걸리나, 지금은 여유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귀족놈들이 피델리오를 손절을 하기 전에 꼬리를 잡아야지.’
일명 피델리오 라인이라고 불렸던 귀족들은 피델리오가 악신 루시퍼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재빠르게 꼬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 불씨가 자신에게 튀지 않기를 바라며 갑자기 세율을 낮추거나 영지민들에게 재화를 푸는 등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 것.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한 번 욕망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인간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속죄할 리가 없다.
아니, 설사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속죄한다고 해도.
‘이미 저지른 죗값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이미 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국민을 절망 속에 밀어 넣었다.
이제 와서 입 싹 씻고 선량한 척하는 꼴을 눈 뜨고 봐줄 수 있을 리가.
“이 중에서 피델리오 쪽에 붙었던 귀족들을 골라주시면 됩니다. 아, 설사 그쪽에 붙지 않았다고 해도 제국민에게 횡포를 부렸던 귀족들이라면 모조리요.”
“으음.”
더글라스는 곤란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설마 더글라스조차 제국의 정세에 대해 잘 몰랐던 건가, 하는 걱정이 스쳤지만 다행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말이었다.
“숫자가 꽤 많을 것 같네만.”
“괜찮습니다.”
부패한 귀족들을 대거 척살하면 일시적인 혼란을 빚을 수는 있으나,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보다야 몇 배는 나았다.
‘적당히 골라서 처벌을 하긴 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융통성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선량하고 깨끗한 귀족들만 영지를 통치하기 바라기엔 너무 꿈에 젖은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알겠네. 그럼 우선 피델리오 쪽에 붙었던 귀족들부터 추려내겠네.”
더글라스의 작업이 시작됐다.
그는 폼으로 제국 수석 마법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복잡한 서류 작업을 막힘없이 진행했다.
“우선 델피오 공작과 반데르 후작. 이놈들이 제일 악질이었지.”
그는 빠른 속도로 귀족들의 신상이 담긴 서류들을 분류했다.
피델리오 쪽 라인에는 강우가 처음 에르노어 대륙에 왔었을 때 만났던 벨렌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피델리오의 충신이었던 놈들만 추려냈네.”
“이것만 해도 꽤 많군요.”
“…악마가 괜히 악마였겠나.”
더글라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기에게 거스르는 귀족들은 다 숙청을 하거나 좌천을 보냈다네.”
“더글라스 씨도 그 피해자 중 하나인가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럼 이 귀족들에 대한 처우는….”
강우는 아이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형이에요.”
짙은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
더글라스는 아이리스의 입에서 이런 과감한 선택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전부 말씀입니까?”
“예, 피델리오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아 있는 귀족들은 싸그리 다 죽여 버리세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강우에게 가서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마치 칭찬해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강아지와 같은 모습.
강우는 부담스럽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합당한 처벌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나? 귀족들이 지닌 사설 병력들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건 상관없습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강우 파티의 무력은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고작 귀족들의 사설 병력따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우선 피델리오와 관련된 귀족들부터 처벌하고 그 이후는 나중에….”
말을 잇고 있을 때였다.
-달칵!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청년.
“시훈아?”
“시훈 님?”
강우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김시훈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만간 돌아오겠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타이밍 좋게 잘 왔다 인마.’
강우는 아직도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아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아이리스를 떼어내 줄 수 있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시훈아.’
강우는 김시훈에게 눈짓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아이리스를 가리켰다.
바로 지금이 아이리스에게 점수를 딸 최적의 기회였다.
그의 눈짓을 알아차렸는지 김시훈은 거침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그렇지!’
여기서 팍! 아이리스를 끌어안으면서 말이야!
‘보고 싶었습니다, 황녀님’ 이렇게 말하면 그냥 바로 넘어온다니까?
강우는 김시훈과 아이리스 사이에 감동의 재회를 기대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거침없이 걸어오던 김시훈은 강우의 기대대로 아이리스를 지나쳤다.
‘어?’
지나쳤다고?
-와락!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
아니.
나한테 말고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