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44)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45화
라그나로크 (3)
응축된 폭풍의 칼날이 폭탄처럼 터진다.
창날에 휘감긴 폭풍에 쩌적 공간이 찢겨 나간다.
“흐읏!”
가이아는 침음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새하얀 빛의 장막과 폭풍이 격돌했다.
-쿠르르르릉!
소리의 영역을 초월한 폭음이 주변은 뒤흔들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타오르는 빛무리 사이로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는 가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년의 그 잘난 의지라는 것이 고작 이것뿐인가!”
오딘이 사납게 호통을 치며 궁니르를 내려찍었다.
가이아가 양손을 교차하며 오딘의 궁니르를 막았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가이아에게서 흘러나왔다.
“오딘… 그래도 나는, 너를 믿었다.”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라지만, 한때 그는 지구의 수호신까지 맡았던 존재였다.
자신과 의견이 엇갈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신뢰의 대가는 참혹하고, 처참했다.
“네놈도… 자식을 지닌 아버지가 아니더냐! 그런데… 그런데 어찌….”
목이 잘린 제우스의 공허한 시선이 낙인처럼 떠올랐다.
속이 뒤틀어지는 듯한 감각에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오딘은 뚝뚝 눈물을 흘리는 가이아를 바라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헛웃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먼저 시작한 건 네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가이아를 향해 궁니르를 겨눴을 때였다.
‘…잠깐.’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 그를 짓눌렀다.
오딘은 분노에 차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가이아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가이아가 자신의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반응은 상식적이지가 않다.
‘내가 제우스를 죽일지 예상을 못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토르의 목을 잘라 자신에게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제우스를 사자로 보냈는데, 자신이 그를 죽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아니, 잠깐만….’
오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맞물리지 않는 퍼즐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끈적한 불쾌감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하.”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딘은 가이아에게 겨눴던 궁니르를 내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왜.’
왜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
분노에 앞서 미칠 듯한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처음 제우스가 찾아왔을 때부터 깨달았어야 했다.’
아니, 굳이 그때가 아니더라도 깨달을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하물며 방금 전 가이아와 대치하고 있을 때조차.
“…….”
해답은 간단했다.
아니, 간단하다 못해 단순했다.
이건 술책에 말려들었다고도 할 수 없다.
오롯이,
자신의 ‘실책’이다.
‘토르는… 가이아의 손에 죽은 게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이아의 성격상 대화를 원하는 사자를 망설임 없이 목을 쳐서 보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 뒤에 제우스를 사자로 보냈던 것은 어떤가.
애초에 가이아가 토르를 죽였다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어설픈 계책을,
눈치채지 못했다. 깨닫지 못했다.
“…….”
오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토르의 잘린 머리가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을 갉아먹는다.
‘분노, 때문이었나.’
토르의 잘린 머리를 본 순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성이 흔들렸고, 지성을 잃었으며, 판단력이 흐려졌다.
몇 시간이라도, 아니 단 몇 분만이라도 생각하면 알 수 있던 진실을 외면했다.
‘…변명이다.’
오딘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실책을 토르의 죽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의 실책이었고,
그의 잘못이었다.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던가.”
오딘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니르를 내린 채, 고개를 돌려 가이아를 응시했다.
“가이아여.”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오딘의 행동에 가이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대는 광휘의 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
뜬금없는 질문.
가이아는 눈살을 좁히며 오딘을 살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광휘의 신은 나의 아이이자, 희망이다.”
“…….”
“오딘. 너와는 달리… 어떻게든 이 세계를 지키고 혼란을 막으려는 영웅이란 말이다.”
“…….”
오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이아여, 너와 내가 싸울 이유는 없다.”
“…뭐?”
가이아의 두 눈이 커졌다.
오딘과 자신이 싸울 이유가 없다니?
말도 되지 않은 소리였다.
“제우스를… 나의 아이를 잔혹하게 죽여 놓고 감히 그런 소리를 내뱉느냐!”
가이아는 진심으로 분노한 듯 사나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딘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얘기를 들어다오.”
오딘은 전투 의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궁니르에서 아예 손을 떼어냈다.
폭풍에 휘감겨 있던 창이 서서히 땅으로 떨어졌다.
“…….”
가이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오딘을 바라보았다.
오딘은 천천히 그녀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무슨 속셈이냐… 오딘.”
“너는 지금 광휘의 신에게 속고 있다.”
“…뭐라?”
“그자는 세계의 희망이 아니다. 혼란을 막으려는 영웅은 더더욱 아니지.”
그자의 정체는.
“그는….”
오딘의 말이 이어지려고 할 때였다.
-우우우웅!
오딘의 몸에서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궁니르를 놓아버린 손에 검은 마기가 응축됐다.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딘이 두 눈을 부릅뜨며 말을 잇기도 전에.
-슈와아악!!
마기가 응축된 칼날이 가이아를 향해 쏘아졌다.
“아….”
궁니르를 손에서 놓은 오딘의 모습에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탓일까.
전혀 예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타이밍에 쏘아진 검은 칼날에 가이아는 반응하지 못했다.
-촤악!!
붉은 피가 흩뿌려진다.
가이아의 어깻죽지부터 배꼽까지 기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쿠, 쿨럭!”
가이아는 상처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 딘….”
경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슈우우욱!
오딘의 손에서 만들어진 검은 칼날이 다시금 그녀를 노렸다.
가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아아앙!!
귀를 멀게 할 법한 끔찍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이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마기의 칼날이 몸을 베어내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나의, 아이야.”
“…가이아 님.”
검은 마기의 칼날을 막아서며 그녀를 지킨 것은 찬란한 빛에 휩싸인 영웅.
강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미, 미안, 하, 구나.”
가이아는 고개를 떨구며 가슴의 상처를 억눌렀다.
뭐라 변명의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오딘이 바알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제가… 조금 더 빨리 왔었어야 했어요.”
강우는 상처를 입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상처에 손을 올렸다.
과연 최상격 신격을 지닌 신답게,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빠른 속도로 상처가 재생되고 있었다.
“잠시 상처를 치료하고 계세요. 오딘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가이아 님.”
강우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이제까지… 당신의 보살핌만 받아오지 않았습니다.”
“나, 는. 아무것, 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
“예언의 악마가 지구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 가이아 님이 희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막지 못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예언의 악마를 막지는 못했지만, 가이아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미 진즉에 세계가 멸망했을 수도 있다.
“예언에 대비해 가디언즈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을 리도 없었겠죠.”
그녀는 계속해서 지구를,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율법의 제약이 남아 있던 시절 신들이 물질계에 간섭하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나를 생각해본다면, 사실상 소멸을 각오하고 세계를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강우는 그녀의 손을 굳게 쥐며 말했다.
“제가 당신을 지킬 차례입니다.”
“아….”
가이아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마주 잡은 강우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따스한 온기가 가슴의 상처를 보듬었다.
어째서인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왔다.
“나의, 아이, 야.”
가이아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방울져 떨어진 눈물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점멸했다.
“…….”
가이아가 의식을 잃고 난 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딘은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이런 방법으로 가이아의 눈을 속여왔던 거군.”
타자(他者)의 몸을 통해 기운을 발산할 수 있다니, 실로 경악스러운 능력이었다.
처음 마기의 칼날이 쏘아졌을 때만 해도 오딘 스스로도 혹시 자신이 공격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감쪽같았으니까.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가이아가 속아 넘어가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가이아 님을 속였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누가 들으면 내가 뭐 거짓의 신인 줄 알겠어.
“비열하기 짝이 없는 기습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오딘, 너지.”
강우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오딘을 노려보았다.
바알과 손을 잡은 노신(老神).
아득한 과거의 얘기지만 그가 지구의 수호신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오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벙찐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알과 손을 잡았다는 그의 헛소리에 경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경악한 것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강우의 눈을 통해 느껴지는 분노가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까지 조작하는 건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선명한 분노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섬뜩한 소름이 등골을 스치고 퍼졌다.
“…미쳤군.”
미쳤다는 말 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딘은 떨리는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야.”
강우는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나라고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런데 말이지….”
진실을 조롱하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딘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먹잇감을 만들지 않으면.”
갈증이 몸을 태운다.
끔찍한 허기에 몸이 뒤틀린다.
“그 새끼를 이길 수 없단 말이야.”
선악(善惡)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윤리(倫理)는 잊었다. 도덕(道德) 또한 짓밟아 버렸다.
적도, 아군도 상관없다.
고통에 몸부림치건, 절망에 빠져 절규하건 알게 뭐란 말인가.
먹을 수만 있다면.
먹어서 강해질 수만 있다면.
강해져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승리해서 지킬 수만 있다면.
그딴 건,
그딴 쓸데없는 건,
모조리.
-처음 저와 만났을 때 기억나십니까.
목소리가 들린다.
발록의 목소리였다.
-앞에 뭐가 있든, 마왕님이 해야 할 일은 하나라고 말씀하셨죠.
세상 모든 것을 씹어 삼키며,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아득한 곳으로.
더 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신(神)들의 혼란조차,
외계(外界)의 침식조차,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바알조차.
모조리.
씹어먹을 수 있는 곳으로!
까드득.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하아.”
깊은숨을 토해냈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마를 뚫고, 산양의 뿔이 솟아났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가로로 찢어진 노란 눈동자가 오딘을 향했다.
강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쩌적.
광대까지 찢어진 입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났다.
“자.”
만찬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