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83)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84화
가면을 벗다 (3)
“흐윽….”
폐허가 된 궁전.
무너진 잔해로 가득 찬 궁전 안에 여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강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는 가이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쯧,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좀 심한 짓을 한 기분은 들지만.’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없었다.
원래 가이아에게는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이미 다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지.’
바알은 시스템에 개입하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니, 단순히 감시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타인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까지 가능했다.
‘한 번은 어찌 속일 수 있었겠지.’
조금 수고스럽기는 하겠지만, 어찌 속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은? 세 번은?
‘불가능해.’
바알에게 시스템의 권한이 있는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는 밝혀지게 된다.
‘24시간 사각도 없는 CCTV가 감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런 상황에서 계속 정체를 숨기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행동의 제약만 커질 뿐이다.
결국.
‘정체를 알고 나서도 억지로 따르게 만들어야지.’
강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가이아를 내려다보았다.
애처롭게 떨리는 어깨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믿었던 자신의 권속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강제로 예언의 악마를 따라야 하는 상황에 처한 그녀는 서럽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강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밝힐 걸 그랬나.’
사실 몇 번 고민한 적은 있었다.
차라리 정체를 밝히고, 어떻게든 시간을 들여서 자신이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반발이 거셀까 봐 하지 않았던 건데.’
자신을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로서 믿고 따르는 것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예언의 악마를 억지로 따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억지로 애국심을 들먹이며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나 다를 바가 없다.
국가라는 거대한 힘에 대항할 능력이 없기에, 피눈물을 머금고 따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력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실제로 가이아에게 앞으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의에 의한 믿음만큼 부서지기 쉬운 건 없었으니까.
‘그나마 신격에 건 맹약이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라면 최악의 경우 가이아를 제거하는 선택까지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돌이키기는 늦었다.
괜히 구시렁거리며 이랬을 걸 저랬을 걸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했다.
“흑… 흐윽.”
저벅, 저벅.
강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그치지 않고 있는 가이아를 향해 다가갔다.
‘한 번 세게 밀어붙였으니.’
이제는 살살 달래줘야 할 타이밍.
“뭐,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 답답한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가이아는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슬쩍 내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건… 무슨 말이냐.”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이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애초에 멸망시킬 생각이 있었다면 미쳤다고 이 지랄을 하면서 발버둥 치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알아서 멸망할 텐데. 전 그냥 지구에서 평화롭게 김치찌개나 먹으면서 임자랑 오순도순 사는 게 목표라고요.”
“…….”
가이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강우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 그가 없었다면 지금 지구는 악마교도들에 의해 지옥이 되었을 테니까.
에르노어 대륙만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천사들의 힘만으로는 악의 성좌의 태동을 막는 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아니,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며칠 전에 있었던 외계(外界)의 습격 역시 강우가 아니었다면 막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멸망시킬 생각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데, 괜히 예언의 악마니 하도 지랄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겼던 겁니다.”
“하, 하지만….”
“예~ 예. 뭔 말하려고 하시는지 압니다. 이대로 마해가 커지면 제가 그 힘에 집어 삼켜져 세계를 멸망시키리라고 말씀하시려는 거죠?”
“…….”
정곡을 찔린 가이아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강우는 픽 웃었다.
“어디 보자… 그게 구천지옥에 막 처음 진입했을 때니까… 그래, 제가 그 말을 한 천 년 전쯤부터 들었습니다.”
“처, 천 년?”
“예. 그리고 지금 전.”
강우는 그녀의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여기에 이렇게 멀쩡히 있죠.”
“…….”
가이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해(魔海)를 몸 안에 품은 채 천 년을 버텼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뭐, 그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해였지만요.”
“대체 어떻게….”
“몰라.”
강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투를 편하게 바꾸며 말을 이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도 난 나로서 존재할 거란 사실이지.”
개 같은 지옥에서 만 년을 버텼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못한 채.
여흥이건 유흥이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절한 살육과 전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씨발 무엇보다.’
여자.
그래.
씨발 여자도 없었다고.
8천 년쯤 지난 후부터는 상상으로 하려 해도 여자 얼굴이 생각이 안 나서 못 했다고.
내 프랑소와가 진짜 썩어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돼서 만지작거렸을 때의 비참함을 네가 알아?
어? 그 기분을 아냐고?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여자가 있긴 했나? 근데 그걸 있었다고 해야 해?
-찔꺼억.
끈적거리는 점액질 소리와 함께, 악몽과도 같은 ‘■■’가 떠올랐다.
“아냐, 그거 있었던 거 아니야.”
분명 어쩔 수 없이 몸을 섞기는 했지만, 그것을 경험으로 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칠 수 없었다.
쳐서는 안 된다.
“나, 나의 아이… 아니, 오강….”
“씨발! 이런 개 같은! 기껏 잊고 있었는데 또 생각나 버렸잖아!”
강우는 가이아를 향해 버럭 소리질렀다.
움찔.
가이아의 몸이 떨렸다.
“후우, 후우. 못 뺏겨.”
“…….”
“억울해서라도 이 몸 못 뺏긴다고. 알았어? 응? 마해고 나발이고 나 내 몸 절대 안 줘. 아니, 못 줘.”
“아, 알겠으니 잠깐 진정을….”
“진정은 씨발!”
강우는 거친 욕설을 터트리며 가이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응? 어떤 새끼고 내 몸을 뺏을 일은 없을 테니까, 괜한 걱정 집어치우고 눈앞의 일에 집중해.”
“…….”
“어차피 나를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건….”
“그러면 믿어.”
강우는 칼로 내려찍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금처럼 여기 바닥에 주저앉아서 계속 질질 짜고 있든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딱 필요한 말이었다.
“…….”
가이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닥에 손을 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말대로 나는… 무능한 여신이다.”
“…….”
“이 세계를… 나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했지만 결국 그들을 지켜낸 건 내가 아니라 너였지.”
처음 예언의 악마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강우가 했던 날카로운 조롱이 떠올랐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은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세계를 지키고, 수호한 것은 자신이 아닌 예언의 악마였다.
-꾸욱.
가이아는 옷자락을 움켜쥐며, 떨리는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
강우는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믿고 말고는 결국 네 선택이지. 내가 그것까지 관여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정말로 이 세계를 구하고 싶다면, 뭐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어?”
설사 그것이, 멸망을 가져올 악마의 손이라고 해도.
“…….”
가이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강우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궁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쓰으. 하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연상시키듯 어두컴컴한 신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봤어?”
추하게 발버둥 칠 이유가 뭐가 있는가.
필사적으로 진실을 감출 필요가 어디 있는가.
가련하고 불쌍한 여신 하나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굳이 그런 노력조차 필요 없는 간단한 일이다.
“자, 어서 노트 펼치고.”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존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 부분 시험에 나오니까 잘 받아적어라.”
낄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 * *
-콰아아앙!
붉은 모래 언덕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괴성이 붉은 모래 언덕에 울려 퍼졌다.
“오오오오가아아앙우우우우우우!!”
광기에 물든 소년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나왔다.
쿠웅! 쿵!
그가 한 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거대한 모래 언덕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하늘이 검게 점멸하며, 대지가 뒤틀린다.
자연재해나 다를 바 없는 파괴를 만들어낸 소년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악마들은 납작 몸을 엎드렸다.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소년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히스테릭한 비명을 내질렀다.
거칠게 오른팔을 들자, 바닥에 납작 조아리고 있던 악마들이 그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왔다.
“바, 바알 님….”
-콰드드득!
바알은 창백한 표정으로 몸을 떠는 악마의 머리를 통째로 씹어 삼켰다.
“하아, 하아. 하아.”
머리통이 뜯겨나간 악마의 시체를 짓밟아 터트린 소년은 떨리는 눈으로 눈앞의 푸른창을 노려보았다.
-푸흡! 푸하하하하!!
푸른색 화면 너머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배를 움켜쥔 채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게, 아니야.”
그가 기대했던, 마음을 졸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고대했던 마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바닥을 기고, 눈물을 쥐어 짜내며 꼴사납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그의 모습은.
그가 갈망하던… ‘이상적인’ 악마의 모습과 같았다.
“이게! 아니라고!!!”
쿠웅!
바알은 거칠게 발을 굴렀다.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네가 날 따라하면… 나처럼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아, 니야.”
덜덜덜.
바알은 몸을 떨었다.
마치 자신과 대화하듯, 그가 있는 곳을 정확히 올려다보며 마왕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를 찔렀다.
“널, 따라, 하려는, 게, 아니, 라고.”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
바알의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뿌득, 뿌드득. 입술 사이로 산산이 박살 난 이빨의 파편이 흘러나왔다.
-너는 인마.
“말, 하지 마.”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아, 아아.”
바알은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광기에 찬 괴성이 다시금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