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87)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88화
우리에겐 군대가 있다 (1)
“진짜 더럽게 넓네.”
차연주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부채 삼아 파닥파닥 흔들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지닌 기사들의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붉은 쇠사슬에 꿰뚫린 그들의 육체에서는 눈처럼 새하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진짜 피야?”
차연주는 신기하다는 듯 서리 일족 기사들의 육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새하얀 액체를 손가락 끝으로 콕 찔렀다.
“앗 차가!”
새하얀 액체에 손끝이 닿은 차연주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다급히 손가락을 빼냈다.
“야, 오강우! 얘들 진짜 생명체 맞아?”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육체와 액체 질소를 연상시키는 듯한 차가움을 지닌 그들의 피는 도무지 ‘생명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죽어라, 침입자!!”
얼어붙은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서리 일족의 병사가 기다란 할버드를 움켜쥔 채 강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강우는 뒤로 슬쩍 몸을 젖혀 할버드의 창날을 피한 후, 창대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파각!
“뭐, 생긴 건 어딜 어떻게 봐도 그냥 얼음 덩어리지만, 생명체 맞아.”
포식의 권능을 통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던 서리 일족의 정보를 떠올렸다.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생명체라고 납득하기 어려운 신체 구조를 지녔지만, 그들은 어엿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심지어 생식 활동까지 가능했다.
‘뭔가 갈아 먹으면 되게 맛있게 생겼는데.’
움켜쥔 창대를 잡아, 얼음 병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머리통이 보였다.
‘달달한 팥을 얹고, 연유를 듬뿍 뿌려서 먹으면….’
주륵.
강우는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았다.
“히, 히익!”
“오, 뭐야. 감정도 제대로 느끼네?”
강우는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병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성문을 호위하고 있던 얼음 거인은 감정이라는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성문을 지나서 만난 얼음 병사들은 그래도 겉모습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파각!
손아귀에 힘을 줘 얼음 병사의 머리를 가볍게 터트린 강우는 신전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흐흐흐흥~.”
흥분에 찬 콧노래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 찾았다!”
명랑한 목소리로 짝, 손뼉을 치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반투명한 얼음으로 육체가 이뤄져 있지만, 몸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의 굴곡으로 보아 여성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헤헤헤. 너희들이 침입자구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꺄르르 웃음을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너는….”
“난 아리안느! 서리 일족의 왕녀야!”
자신을 아리안느라고 소개한 여인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
강우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가늘게 눈을 떴다.
이제까지 만났던 얼음 거인과 병사와는 확연히 다른 기세가 느껴졌다.
“헤헤! 너희를 죽이러 왔어!”
해맑은 목소리와는 달리,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척, 척, 척!
환하게 미소 짓는 아리안느의 등 뒤로 서리 일족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진형을 갖춘 채 파티를 포위한 그들에게서는 날카로운 기도가 느껴졌다.
“그래, 어쩐지 너무 쉽다 했지.”
강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알이 자신의 군세로 받아들였을 정도의 세력이라고 하기엔 너무 맥없이 쓰러진다 싶었다.
“…강우, 이거 숫자가 너무 많은데?”
차연주는 살짝 긴장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순식간에 강우 일행을 포위한 서리 일족 기사들의 숫자는 천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고작 일곱에 불과한 파티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숫자.
하지만.
“이럴 때를 위해서 널 내 화신으로 만든 거잖아.”
강우는 차연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의 능력만큼 일대 다수의 전투에 특화된 것은 없었다.
“…흥.”
차연주는 기쁨과 부담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촤르르륵.
붉은 쇠사슬을 꺼내 움켜쥐며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헤헤, 네가 침입자의 리더인 것 같네.”
아리안느는 반짝이는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새하얀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나랑 싸우자!”
“싫은데.”
강우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뭐야? 왜? 너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아리안느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던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강우는 귀를 후비며 답했다.
“여기서 더 플래그 꼽으면 진짜 보트 엔딩각 씨게 잡히거든.”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얼음 덩어리는 좀 선 넘었지.”
촉수처럼 혐오감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김칫국 들이마시는 건 아는데.’
이제까지 정신이 맛 간 여자치고 자신과 엮이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더 이상 감당이 안 돼.’
안 그래도 어느새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중국인 히로인이 있지 않았던가.
강우는 몸을 돌려 한설아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임자…. 나 믿지? 난 임자밖에 없어.”
“예? 아, 예.”
“그러니까 막 자르면 안 돼?”
“저… 강우 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응응. 그래. 그러면 괜찮아.”
강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훈아.”
“예, 형님.”
“쟤는 너한테 부탁할게.”
아리안느를 슬쩍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트 엔딩을 피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김시훈에게 그녀의 상대를 맡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와서 내가 상대해봤자 별 의미 없으니까.’
강자와의 전투는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훈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파티원들의 성장 기회를 하나 걷어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시훈이의 재능이라면.’
이러한 기회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그리고.’
강우는 가늘게 눈을 떴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리안느를 살폈다.
‘분명 서리 일족의 왕녀, 라고 했지.’
그렇다면 따로 서리 일족의 왕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대한 힘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지.’
혹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졌다.
“뭐야, 뭐야? 감히 날 상대하는데 부하를 보낼 생각인 거야?”
아리안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정말, 저어어엉마아아알! 웃기고 있어 아주!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날 무시해?!”
“오, 다행이다. 살았어.”
저 대사를 친 이상 플래그 후보는 제외다.
‘보트 엔딩각 가볍게 피해 주고.’
무빙 이 자식아.
“이이이이이익!”
아리안느가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발을 박찼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자락이 펄럭였다.
섬뜩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서리의 검이 강우의 목을 노렸다.
-까아아아앙!!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지는 아리안느의 검을 김시훈이 막았다.
강우를 보호하듯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충격에 김시훈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충격이 만만치 않았는지 표정을 찡그렸다.
‘오우, 야.’
개멋있네 진짜.
아니, 솔직히 너무 잘생긴 거 아니냐.
저저저 땀방울 맺힌 턱선 보소. 아주 그냥 베이겠어.
‘왜 그래, 시훈아.’
형 가슴 떨리잖아.
“네 상대는, 나다.”
꺄아아악! 시훈 오빠!!
“이익! 비켯! 천한 것들에겐 관심 없단 말이야!”
아리안느는 어떻게든 강우와 싸우고 싶다는 듯 신경질을 부리며 서리의 검을 휘둘렀다.
본능에 따라 난잡하게 휘두르는 검격처럼 보였지만, 급소를 정확하게 노리고 파고드는 검격은 노련한 무인의 공격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카앙! 캉! 카아아앙!
“크읏!”
김시훈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날뛰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유려한 검격이 이어졌다.
“…호오.”
강우는 눈을 반짝이며 김시훈과 아리안느의 전투를 관전했다.
‘장난 아닌데?’
적어도 검술이라는 카테고리에서는 김시훈은 자신을 압도한다.
실제 김시훈이 이제까지 패배한 전투를 보면 상대적으로 검술의 경지가 떨어져서 진 것은 태무극을 상대할 때 정도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시훈이한테 전혀 안 밀리잖아.’
아리안느의 검술은 그런 김시훈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까아아앙!
한 차례 격렬한 검격이 오간 후, 아리안느와 김시훈은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이건….”
김시훈의 눈빛에 경악이 서렸다.
설마 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얼음 덩어리와 검술로 팽팽한 전투를 하게 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
“…너, 뭐야?”
경악한 것은 김시훈만이 아니었다.
아리안느 또한 깜짝 놀랐다는 듯 푸른빛으로 빛나는 눈을 가늘게 떨며 김시훈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아리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검술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가 인간 중에 있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
김시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무형검을 고쳐 잡았다.
“헤헤. 그냥 천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아리안느는 방방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콰드득!
그녀는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자락을 길게 찢었다.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다리가 드레스 사이로 나왔다.
“히히. 그럼 다시 시작해 보자고!”
서리의 검이 새하얀 빛으로 빛났다.
한층 더 움직임이 빨라진 아리안느의 검격이 폭풍처럼 김시훈을 난타했다.
“하아, 하아.”
김시훈은 호흡을 고르며 침착하게 검격을 막았다.
“침입자를 제압해라!”
“진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라!”
김시훈과 아리안느의 교전이 다시 시작됨과 동시에 강우 파티를 둘러싸고 있던 서리 일족의 기사들이 점차 포위를 좁혔다.
수호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장군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을 들어 올려 강우를 겨눴다.
“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순순히 투항하라!”
서리 일족의 장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우를 노려보았다.
강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고작 일곱에 불과한 숫자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장군은 헛웃음을 흘리며 강우 파티를 노려보았다.
서리 일족의 검희(劍姬)라 불리는 아리안느와 단신으로 싸우고 있는 전사는 분명 대단한 실력자이나, 이쪽에는 뒤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까지 합쳐서 일만에 달하는 서리 일족의 정예병이 있었다.
일만의 병력과 고작 일곱에 불과한 침입자 무리.
둘 중 누가 유리하게 될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겐 군대가 있다.”
서리 일족의 장군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낄낄낄.
강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에겐 발록이 있지.”
그 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앙!
전신에 검은 갑주를 입은 근육질의 악마가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진형을 갖추고 있던 서리 일족의 기사들 수십이 단 한 번의 일격에 곤죽이 되어 튕겨 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흉포한 데몬 로어(Demon Roar)가 얼어붙은 신전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