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95)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96화
개전 준비 (2)
-탁.
마시고 있던 넥타르(Nectar)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움찔.
가이아의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강우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대부분 참전하기 어렵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가이아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구나. 전에 바알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참전할 수 있는 신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
“그, 그래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신들은 모두 데려가겠다.”
가이아는 변명하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러사이트가 지구를 습격하고 있을 당시, 올림푸스의 신들은 바알의 습격을 받았다.
다행히 바알에게 잡아먹힌 신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신들이 신격이 소멸 직전에 놓일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것도 노리고 습격한 건가?’
당시 바알의 목적은 자신에 대한 정체를 까발려 가이아와 자신 사이에 불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노림수도 숨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아몬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인 걸 수도 있겠지.’
이제까지의 바알의 행보를 떠올려 봤을 때, 바알의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 원리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신이 관련되지 않을 일들에 대해 바알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종말의 날’에 대한 그쪽의 준비는 꽤나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아몬이 바알의 광기를 조율하고 있는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바알이 이 정도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네.”
그의 주요 파티원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푸스의 신들이 한 달 후에 이뤄질 결전에 대부분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뼈아픈 소식이었다.
‘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에 가이아를 찾아오면서 봤던 올림푸스의 신들은 대부분이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이건 설아의 힘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텐데.’
육체의 상처는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단이 있지만, 이렇게 신격에 상처를 입은 경우는 그녀의 회복 마법으로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면목이 없구나.”
가이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내 가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와 우라노스는 저번 바알과의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알이 구천지옥의 악마들을 군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수호자들과 힘을 합친다면 막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느냐?”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구천지옥의 악마들을 어디 저급 게이트에 나돌아다니는 몬스터마냥 무시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건 그렇겠지.”
사실 지금 당장 구천지옥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솔직히 지금 구천지옥의 악마라고 해봤자 별거 없으니까.’
구천지옥의 악마들을 다스리고 있던 일곱 대공은 바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사라졌고, 악마라는 종족의 정점에 군림하는 마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까놓고 말해서, 마왕과 대공이 빠진 구천지옥은 그냥 어중이떠중이 악마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천지옥의 악마 중에서 신격의 보호를 뚫을 존재가 몇이나 있겠느냐?”
강우가 악마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시절에도 신격을 지닌 존재는 따로 없었다.
막말로 말해서 물량만 많지 김시훈, 가이아, 차연주 등 신격을 지닌 존재가 악마들을 상대한다면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 가능하다.
‘하지만.’
강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과연 그것도 생각 안 했을까?”
“그건….”
“애초에 신들을 묶고 있던 율법의 제약을 풀어버린 건 바알이야. 그런데 지가 목줄을 풀어 놓은 신들의 개입을 생각도 안 한다고?”
아무리 바알이 정신 나간 미치광이라고 해도 너무 개무시하는 처사였다.
“놈에겐 마신의 심장이 있어. 그리고 티탄의 율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도 있지.”
그런데.
“신격을 지닌 존재에 대한 아무 대책도 없이 습격할 리가 없잖아.”
“…….”
가이아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니, 부정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생각이 짧았구나.”
“쯧.”
강우는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알았어. 내가 말해준 날짜 전까지 최대한 신들을 끌어모아서 현신해. 굳이 올림푸스의 신일 필요도 없어. 끌어모을 수 있다면 싹 다 끌어모아.”
“알겠다.”
가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저….”
그런 강우의 옷깃을 가이아가 붙잡았다.
“왜.”
“…고맙구나.”
“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언제는 세계를 멸망에 빠트릴 예언의 악마라며?”
“크, 크흠. 잊어주거라.”
가이아는 뺨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흘렸다.
강우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직 두렵고, 불안하다. 네 안에 잠들어 있는 마해가 너를 집어삼키고, 세계를 멸망시키지는 않을지.”
“…….”
“하지만.”
굳은 의지가 담긴 눈빛을 그에게 향한다.
“너를 믿기로 했다. 설사 그 끝에 어떠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무릎 위에 올린 두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그러셔.”
강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강제로 그녀를 따르게 만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너를 믿는다’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뒤돌아선 강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올림푸스를 나섰다.
* * *
‘자, 그러면.’
수호의 전당으로 돌아온 강우는 가늘게 눈을 떴다.
올림푸스의 일을 끝낸 직후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강우는 스마트폰을 켰다.
초록색 배경의 유명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자,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가 하나의 화제로 도배된 것이 보였다.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1. 계엄령
2. 서울 계엄령
3. 계엄령 뜻
4. 서울 집값
“…씨바, 그래 집값 중요하지.”
강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대로, 계엄령이 선포된 한국에는 끔찍한 혼란이 들끓었다.
‘하긴, 갑자기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세계로 이주하라고 공문이 떨어졌는데 혼란이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하지.’
거기서 흔쾌히 수락하고 바로 짐을 싸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반응이다.
강우는 뉴스를 클릭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뉴스피드]제리엠 : 아니, 갑자기 뭔 계엄령;;?
흙수저 : 이게 나라냐!
트레샤 : 전에 서울에 벌레 떼 습격 있었잖아요. 그거랑 관련된 거 아님?
우진 : 와, 근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서울 시민 전체를 이세계로 추방합니까?
로유진 : 헉헉, 갓세계!! 끼요오오옷!! 드디어 내 시대가 왔다!!
갓준만 팀장 : 지금 광화문에서 계엄령 반대 집회 열린다고 하네요 ㄷㄷ.
푸사 : ㅋㅋㅋㅋㅋ님들도 이세계로 쫓겨나가기 싫으면 빨리 광화문에 모이세요.
‘집회라.’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의 혼란은 최악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도 이건.”
어느 정도 대책을 생각해뒀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혼란에 빠진 민심을 돌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뚜르르르.
강우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뭔 일이야?
스마트폰 너머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지금 미친 듯이 바쁜데 중요한 일 아니면 끊….
“연주야.”
-…왜.
“보고 싶어.”
-푸훕! 콜록! 콜록! 뭐, 뭐라고?
“지금 바로 널 보고 싶다고.”
-뭐, 뭐뭐뭐뭐야 갑자기 씨발! 이, 이제 한 달 동안 정신없이 바쁜 거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야.”
-뭐, 뭐?
“이제… 한 달뿐이 남지 않았어, 연주야.”
-그, 그러니까 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 이제는 해야 하지 않겠어?”
-…….
“우리…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으, 으으.
“…….”
-…어딘데?
스마트폰 너머로, 살짝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우리 사는 아파트 옥상. 그쪽으로 나와줘.”
-끄, 끄응. 시, 시간 좀 걸릴 테니까 먼저 기다리고 있어.
차연주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가 끊기기 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꺄아! 어떻게 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전화를 끊은 강우는 그 사이 그녀에게 건네줄 물건을 만들었다.
미리 어느 정도 생각은 해두고 있었던 터라, 제작에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파트 옥상에서 두 시간쯤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철컹.
옥상의 문이 열리며, 차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 기다렸지?”
그녀는 노란 머리핀을 한 붉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평소 그녀가 즐겨 입는 청바지와 흰 티셔츠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기합이 빡 들어간 옷차림이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스커트. 살짝 굽이 들어간 에나멜 구두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액세서리까지.
안 그래도 본판이 좋은 그녀가 이렇게 꾸며 입으니 눈이 번쩍 뜨이는 감각이었다.
“그, 그래서 무슨 일이야?”
차연주는 괜스레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베베 꼬며 물었다.
“부탁할 게 있어서.”
강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차연주의 얼굴이 일순 실망감에 물들었다.
“…이게 뭔데?”
“연설문.”
“연설문?”
차연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우는 스마트폰을 켜서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는 계엄령 반대 집회를 틀었다.
“네가 가서 이 집회를 막아줬으면 좋겠어. 광휘교의 교주님으로서.”
“…….”
차연주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강우가 건네준 연설문을 살폈다.
연설문에는 이 모든 일이 광휘의 신이 계시한 일이라며 더 큰 재앙이 덮치기 전에 에르노어로 향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설문을 쭉 훑은 차연주의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아, 안 해 씨발!! 이, 이게 뭐야!!”
단순히 적힌 대본을 읊는 게 아니었다.
온갖 쇼와 연출을 하며, 종국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수십만 명의 사람 앞에서 ‘오멘’을 부르짖어야 하는 연설.
수치심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 그녀로서는 특히 상상도 하기 싫은 일.
“절대! 저어어어얼대 안 할 거야!!! 죽어도 이런 개짓거리는 못 해!!”
차연주가 발작을 일으키듯 외쳤다.
그때.
-찰칵.
강우가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그녀를 찍었다.
“…뭐한 거야.”
차연주는 흠칫 몸을 떨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메신저를 켠 후 사진을 첨부했다.
‘보내기’ 버튼 앞에서 손가락을 멈춘 후.
“지금 네 모습… 설아한테 보내면 어떻게 될까?”
“꺄아아아아아악!!”
차연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기합이 들어가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옷차림.
심지어 화장도, 헤어스타일도 평소의 몇 배는 더 공들였다.
이 모습을,
이런 모습을,
한설아가 본다면….
“이, 이….”
차연주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 씹새끼가아아아아!!”
뻐억!
강우의 머리채를 잡아 무릎에 내려찍었다.
신격의 보호를 뚫고 들어온 그녀의 공격이 얼굴을 우그러트렸다.
코뼈가 어긋나며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어, 음.’
강우 이성을 잃은 암사자에게 두들겨 처맞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 이건 좀 양심에 찔리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호의를 심하게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야, 연주야.’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라.
‘이번 일 끝나면 내가 진짜, 진짜 잘해줄게.’
골드 찍어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