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16)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517화
기적(奇跡) (2)
“뭐, 뭐야?”
점점 범위를 좁혀오는 점액질을 막아서고 있던 차연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설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반투명한 빛무리.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담긴 그 빛이 검은 해일로 뒤덮이고 있는 대지를 밝혔다.
“무슨 일이야 대체?!”
차연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설아에게 저런 힘이 뿜어져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소랑은 달라.’
한설아의 몸 안에는 대천사 세라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마법들은 성력(聖力)을 기반으로 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건….’
차연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의 힘이었다.
‘그 애송이 도적?’
혜성처럼 등장했던 도적 플레이어.
숨겨진 던전에서 발견한 사기적인 아이템으로 김시훈마저 이겨버렸던 플레이어가 떠올랐다.
저 반투명한 빛은, 분명 김태현이 김시훈과 대련할 때 그가 찬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김태현의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뜬금없이 한설아에게서 뿜어져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전과는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거대하고, 찬란하게.
-꾸르르륵!
“윽!”
그녀의 정신이 팔린 사이, 검은 점액질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차연주는 다급히 뒷걸음질 치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검은 점액질에서 멀어졌다.
“연주 씨! 집중하세요!”
리리스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설아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요!”
“…….”
차연주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촤르르르륵.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쇠사슬의 다발이 쏟아졌다.
“그래.”
지금은 한설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 힘이 누구의 것인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후우.”
차연주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세를 낮추고 쇠사슬을 그물처럼 펼쳐 주변을 감쌌다.
지금 그녀가 할 일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한설아를 보호하는 것.
지푸라기조차 되지 못한 희망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
“홍련(紅蓮) 제3식.”
크그그그긍!
붉은 쇠사슬이 회오리쳤다.
“홍화방천(紅花防天).”
찬란하게 피어난 붉은 연꽃이 넓게 펼쳐졌다. 쇠사슬로 만들어진 꽃잎이 돔 형태로 주변을 감쌌다.
-쿠르르르륵!
“크읏….”
붉은 연꽃이 검은 점액질의 해일을 막았다.
거대한 압력에 덜덜 앞으로 내민 손이 덜덜 떨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비틀거린다.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설아야.”
차연주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한설아를 돌아보았다.
-우우우웅!
한설아의 몸에서는 아직도 수정을 으깨어 뿌린 것과 같은 아름다운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한설아는 몸 안쪽에서부터 끓어 넘치는 거대한 힘에 입을 쩍 벌렸다.
‘뜨거워.’
몸이 타는 것처럼 뜨겁다.
으득. 한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힘의 격류에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지금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방금 전 그건….”
한설아는 눈앞에 떠오른 푸른 메시지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기적’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메시지.
그 아래에는 부가적인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기적(奇跡)’ 스킬은 단 한 번 사용 가능합니다.] [사용 시, ‘노스트리안’이 부여한 모든 힘이 사라집니다.]‘…노스트리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전에 리리스씨가 찾고 있다고 했었지.’
그녀는 티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창조주… 에 가장 가까운 존재.’
강우는 분명 티탄을 그렇게 평가했다.
물론, 유일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한 창조주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경이로운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렇다면.’
한설아는 꾸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발록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디….”
그 이름에 걸맞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
한설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 자신에게 이러한 힘이 들어왔는지, 노스트리안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기적이라는 스킬이 죽은 발록을 되살릴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우우우웅!!
반투명한 빛무리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한설아는 발록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지푸라기조차 되지 못한 희망을, 움켜쥔다.
“읏….”
한설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당하기 힘든 힘의 격류에,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설아야, 멀었어?!”
점액질을 막고 있던 차연주가 소리쳤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 연꽃은 이미 반 넘게 검은 점액질에게 뜯어 먹힌 상황.
더 이상 지체된다면 검은 점액질의 해일이 붉은 연꽃을 넘어 그녀들을 덮칠 것이다.
“…잠깐만.”
한설아는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연주야.”
-우우우우웅!!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반투명한 빛의 무리가 두 손에 모여들었다.
“기적(奇跡).”
그녀의 손을 타고 반투명한 빛이 발록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콰득! 콰드드득!
발록의 왼쪽 가슴의 살이 뜯겨 나가며, 으깨진 심장이 드러난다.
한설아가 재생시켰던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며 육체가 짓이겨진다.
두 팔이 사라지고, 검은 피가 발록의 몸을 뒤덮었다.
“뭐, 뭐야 그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연주의 눈동자가 떨렸다.
한설아가 기껏 재생시켰던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는 모습에,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실패… 한 거야?”
기껏 치료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발록이 피범벅이 되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런 물음이 흘러나왔다.
움켜쥐었던 희망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요.”
그때, 발록의 상태를 지켜보던 리리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환희에 찬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지어졌다.
“실패한 게… 아니에요.”
“뭐?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잖아! 그, 그런데….”
“아뇨.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검은 피를 쏟아내고 있는 발록의 모습.
두 팔이 잘린 채, 온몸을 뒤덮은 끔찍한 상처들이 가득한 모습.
그것은 분명.
“시간이… 되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 봤던 발록의 모습이었다.
* * *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다.
깊고 깊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심연을.
의식은 불에 타 사라졌다.
이성도, 지성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벅.
그저,
-저벅.
걷는다.
앞으로, 앞으로.
왜 걸어가는지조차 모르는 채, 끝없는 어둠을 나아간다.
‘나는….’
문뜩, 의문이 들었다.
‘왜 걷고 있는 거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아니, 애초에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길이다.
끝이 없는 길을 쉬지 않고 걷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있을까.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잖아.’
끝이 없다는 것을 안다.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힘들고, 지친다.
어깨가 무겁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멈추자.’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옳다.
발걸음을 멈추고, 이 아득한 어둠 속에 누워 흩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몇 배는 더 현명할 것이다.
‘나쁘지 않아.’
이 어둠은 포근하다. 아늑하고, 거대하다.
여기에 녹아 흩어지더라도, 아무런 후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야지.’
의미도, 목적도 없다.
애초에 자신이 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걸어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저벅.
하지만.
-저벅.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 으.”
걷는다. 걷는다.
오른발을 떼어, 왼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간다.
이유는 모른다.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 로…. 앞, 으로.”
멈추지 않는다.
무너질 듯 어깨가 무거워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도.
“나, 는.”
걸어간다. 나아간다.
이 아득한 심연을, 그 끝없는 어둠을 지나친다.
그때,
[마왕님.]눈앞에 붉은 근육질의 악마가 나타났다.
이 심연 속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악마였다.
“…발록.”
그래, 그 이름 하나는 선명하게 기억났다.
내가 누군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름조차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발록, 발록, 발록….”
저 붉은 악마의 이름이 발록이라는 것은, 안다.
알고 있다.
기억하고 있다.
[예, 마왕님.]발록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제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왕님.]“…수고?”
[예. 정말… 많은 것을 짊어지시고, 이겨 오셨죠.]“기억, 안나.”
[기억은 사라져도, 마왕님이 해오신 일들은 분명 여기 남아 있습니다.]발록이 손을 들어올렸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무수한 악마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득한 심연을 가득 채울 듯,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었다.
[전부 마왕님이 이겨내신 존재입니다.]“…….”
굳게 입을 다문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왕님.
발록이 자신을 부른다.
[이제….]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쉬셔도 괜찮습니다.]“…….”
[더 이상, 그 끔찍하고 처참했던 싸움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달콤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에 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오고 있었다.
무너질 듯 어깨가 무거웠었다.
여기 앉아서 편히 쉴 수 있다면, 그보다 달콤한 휴식은 없을 것이다.
발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의 왕이시여.]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
굳게 입을 다문 채, 발록을 응시했다.
“이제… 쉬어도 괜찮다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고생 많았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맞지 않은 퍼즐 조각을 발견한 것 같은 이질감.
“…아니, 야.”
[예?]“너는, 발록이 아니야.”
날카롭게 뜬 눈으로, 발록을 노려보았다.
-똑같이, 하시면, 됩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의 발록과 같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그 둘은 달랐다.
저벅.
발걸음을 내디딘다.
천천히 손을 뻗는다.
[나의 왕이시여….]“지랄, 하지 마.”
붉은 악마의 목을 잡는다.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붉은 악마의 목을 쥔 손에 힘을 더한다.
“나는.”
퍼석.
붉은 악마의 머리가 터진다.
검은 피가 쏟아졌다.
“멈추지, 않아.”
멈춘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쿠르르르르륵!
심연이 출렁였다.
찢어지며, 무너졌다.
“아….”
시야가 돌아왔다.
무너진 심연 너머로, 빛이 보였다.
“강우 씨!”
“…임자?”
한설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차연주와 리리스의 모습도 보였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차연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
검은 점액질에 뒤덮인 채, 얼굴만 빠져나와 있는 모습.
차연주가 경악성을 터트릴 만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 는….”
의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기억이 점멸한다. 시야가 흐릿하게 물들었다.
꾸르륵.
검은 점액질이 다시 그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때.
“이번 일 끝나면 저를 가만두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런 모습이어서야 약속을 지키기 어려우시겠군요.”
크하핫.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발, 록?”
붉은 근육질의 악마가 씨익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