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49)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30화
파란의 데이트 (1)
차연주와 흥겨운 술래잡기(?)가 끝나고 집에 들어오자,
“…흥.”
한설아가 삐져있었다.
“임자~ 나 왔다니까?”
“예, 알겠어요.”
평소라면 현관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푹신한 가슴 사이에 그를 끼웠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주방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음, 저… 임자?”
강우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찌릿.
한설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요?”
“…….”
처음 듣는 것 같은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강우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거 삐졌구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표출하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임자, 화났어? 미안해~”
“으읏.”
어리광을 부리듯 부엌에 선 그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한설아는 움찔 몸을 떨더니 입술을 삐쭉 내밀며 중얼거렸다.
“정말… 전에도 말없이 외박하시고, 오늘도 이렇게….”
“이번에는 늦는다고 카톡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해가 뜰 때까지 들어오지 않으실 줄은 몰랐다고요!”
한설아가 버럭 소리쳤다.
강우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정말… 걱정돼서 가슴이 타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하하. 이제 힘도 많이 돌아왔으니 걱정할 필요 없대도?”
“그, 그게 아니라요.”
그녀는 강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연주랑 무슨 일 있었을까 봐요.”
“아… 그건.”
강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연주가 이제까지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열렬한 고백을 했으니.
“정말, 정말, 정말.”
한설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옆에 올려놓은 큰 김치통에서 김치 한 포기를 꺼냈다.
스릉.
도마 위에 김치를 올린 그녀는 날카롭게 빛나는 식칼을 손에 쥐었다.
“강우 씨는 제껀데, 저만 있으면 되는데, 저만 바라보면 되는데, 자꾸 다른 여자나 만나러 다니시고!”
탕! 탕! 탕!
무슨 도끼를 내려찍는 것처럼 식칼을 내려쳤다.
붉은 김칫국물이 마치 핏방울처럼 튀었다.
“제가 혹시 부족하게 해드린 게 있나요? 예? 그러면 얼마든지 말해주세요. 강우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예? 예? 예?”
탕! 탕! 탕!
한설아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것마냥 김치를 잘게 조각냈다.
“저, 그… 임자.”
숨 막히는 광기(狂氣)의 현장에, 강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치 너무 잘게 썰면 맛이 없….”
-탕!
“아뇨,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초점이 흐릿해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자마자 강우는 재빠르게 꼬리를 말았다.
“하아.”
그제야 한설아는 식칼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강우를 마주 끌어안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곤란하네요.”
그녀는 강우의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쩌죠, 강우 씨?”
뭘요.
“이젠 강우 씨를 나누는 방법 외에는 없는 건가요?”
“…어?”
그거 나누는 거 아닌데.
나누면 안 되는데.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살려주세요.”
일단 살인은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죽지는 않지만, 아프긴 아프거든요.
“어, 어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강우 씨를 죽일 리가 없잖아요!”
“하하. 그렇지 임자? 그 나눈다는 건 다른 의미….”
“괜찮아요.”
한설아는 더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강우를 끌어안았다.
“혹시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을 아시나요?”
“아뇨.”
알고 싶지 않은데요.
“팔과 다리가 없어도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에요.”
그거랑 지금 상황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아 참! 그러고 보니 그 책을 쓴 작가도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더라고요.”
“죄송합니다.”
바로 머리 박겠습니다.
“호호호. 너무 마왕님을 책망하지 마렴.”
“어, 언니.”
그때, 방에서 나온 리리스가 한설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마왕님과 떨어지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구속하려만 들면 나중에 싫증 내실걸?”
“허업! 가, 강우 씨가 그럴 리가 없어요!”
“어머, 과연 그럴까?”
리리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무리 임자가 날 구속한다고 해도 내가 싫증 낼 리는 없을 텐데.’
뭐, 그래도 기왕 도와주는 거니 조용히 입을 닫고 있자.
“호호. 남자나 여자나 적당한 거리감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우으.”
한설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리리스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연주 씨와는 새벽 내내 뭘 하신 건가요?”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강우는 난처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불안에 떠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설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타이밍에서 연주가 고백했니 뭐니 말하면 그냥 개망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한설아의 화를 풀어주고 나서 얘기를 꺼내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PC방에서 같이 게임했어.”
“…PC방이요?”
생소한 단어에 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에키드나랑 게임하던 거 기억나지? 그런 걸 할 수 있는 공간이야.”
“어머, 그럼 딱히 야릇한 일은 없었겠네요.”
리리스는 몹시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기회에 동생이 하나 더 생기나 했었는데….”
“언니!”
“호호. 농담이야. 아 참, 마왕님. 저는 오늘 할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리리스는 가디언즈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정보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정보조직은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게이트의 이상 현상들을 분석하며 아카르트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었다.
“엉. 잘 다녀와.”
현관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마중한 후, 강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 강우 씨.”
그곳에는 덜덜 몸을 떨며 울상을 짓고 있는 한설아의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녀는 강우의 옷깃을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시, 싫증 나신 거 아니죠? 그, 그렇죠?”
“내가 임자한테 싫증 날 일이 뭐가 있겠어.”
강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한설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퍼졌다.
‘어디보자, 임자의 기분을 좀 풀어줘야 할 텐데.’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뭔가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연주가 고백했다는 걸 알려주려면 임자 기분을 업시켜야 하니까.’
최대한 한설아가 거부감 없이 연주를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기분을 띄워줄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전처럼 누나 플레이라도….’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강우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 참.”
“왜, 왜 그러신가요, 강우 씨?”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데이트한 지 엄청 오래되지 않았어?”
심연에서 돌아온 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기 때문에 정작 밖에 나가 데이트를 즐긴 기억은 없었다.
“데이트… 요?”
미처 생각지도 못 했다는 듯, 한설아의 두 눈이 커졌다.
강우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오래 지났는데, 예~ 전에 임자가 같이 놀이공원 가자고 했던 것 기억해?”
“…아, 예. 기억나요.”
잠시 기억을 더듬던 한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일본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오늘 가자.”
한설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그녀의 두 눈이 마치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가, 강우 씨랑 단둘이 데이트…!”
한설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짜릿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이성이 녹아 버릴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머리를 자극했다.
“하아, 하아.”
한설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강우의 손을 꽉 쥐었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강우 씨?”
“엥? 뭐가 괜찮아?”
연인끼리 데이트를 하는데 괜찮고 말고가 뭐가 있겠는가.
“그… 저, 그….”
한설아는 강우에게서 시선을 슬쩍 돌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야, 야외에서 해본 적은 없으니까 긴장돼서요.”
야외에서 대체 뭘 할 생각인데.
“그, 가, 강우 씨가 원하신다면 저는 괘,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아니.
“…….”
강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설아를 바라보았다.
순수하고 상냥했던 그녀를 대체 누가 이렇게 타락시켰단 말인가.
“…레이라.”
머릿속에 떠오른 범인의 얼굴은 하나뿐이 없었다.
“네 머릿속에 레이라가 가득하구나!!”
“꺄악! 가, 강우 씨!!”
“이리 와. 임자! 레이라가 임자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어!!”
“농담! 농담이었어요, 강우 씨!”
한동안 서로 엎치락뒤치락 투닥이던 강우와 한설아는 이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선 씻고 준비할게.”
둘 다 모두 밤을 꼴딱 새운 상황이지만, 고작 하루 잠을 안 잤다고 문제가 되는 신체는 아니었다.
“아, 저도 같이 씻어요, 강우 씨♥”
한설아가 배시시 웃음을 미소를 지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강우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설아와 함께 목욕을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헤헤헤. 몸 구석구석까지 제가 씻겨드릴게요.”
그녀는 벌써부터 기분이 많이 풀어진 듯 평소와 같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참, 강우 씨. 그러고 보니 어디 놀이공원에 가실 생각이세요?”
“기왕 갈 거면 좀 큰 곳으로 가자고.”
어깨를 으쓱이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금부터 향하려고 하는 놀이공원의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여긴….”
한설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웅성, 웅성.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빛.
수많은 인파가 자리 잡은 놀이공원에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와따, 사람 많네.”
백인, 흑인, 황인 여러 피부색을 지닌 인종들이 놀이공원 내에 북적거렸다.
“확실히 수호의 전당이 대단하긴 하네요. 이렇게 멀리 있는 외국까지 순식간에 올 수 있다니….”
“가디언즈가 세계의 권력을 모두 휘어잡을 수 있게 된 원동력이니까.”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한국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유창한 영어 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등교육은커녕 중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강우의 입장에서 영어는 굉장히 낯선 언어였지만,
‘요즘 시대에는 아무 상관없단 말이지.’
바알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카드가의 영혼을 갈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통역 마도구는 지금 일상생활에도 널리 쓰이는 대중적인 물건이 되었다.
일반인들도 구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이제는 언어의 장벽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
“그럼, 가볼까?”
입구에서 티켓을 산 강우는 한설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예!”
그녀의 환한 미소가 더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났다.
강우와 설아가 오랜만에 데이트 장소로 꼽은 놀이공원은,
미국 LA에 위치한 유니버셜 스튜디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