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53)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34화
파란의 데이트 (5)
쿠구구구궁!!
수호의 전당이 뒤흔들렸다.
발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투기(鬪氣)에 에키드나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진정해, 근육 돼지.”
리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 왕께서 납치되셨는데 진정할 수…!”
“진정하지 않으면 뭐 어쩌려고? 강우 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
움찔.
발록의 몸이 떨렸다.
그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미안하군, 어린 용이여.”
“우응. 괘, 괜찮아.”
에키드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발록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이라 씨.”
리리스는 덜덜 몸을 떠는 에키드나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기며 레이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은 신계에는….”
“예, 알려지지 않도록 할게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신계의 신들이 함부로 지구에 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이아의 통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오강우’라는 괴물의 존재가 두렵기 때문인 것이 더 컸다.
그들 또한 바알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강우가 얼마나 절대적인 위용을 보여주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강우가 사라졌다는 정보가 신계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말았다.
“지금 당장 가디언즈 전원에게 긴급 소집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김시훈은 허리에 찬 검자루를 움켜쥔 채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돌렸다.
“아뇨,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기다릴 틈이 어디 있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강우 그 자식이 사라졌다며! 꾸물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김시훈과 차연주는 초조함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외쳤다.
“지금 바로 길드 애들을 소집할게! 가디언즈랑 같이 조사한다면 단서 한두 개쯤은….”
“진정하세요, 연주 씨.”
리리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대적으로 사람을 풀어 조사하는 건 납치범에게 도망치라고 경고를 보내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 그건 그렇지만….”
“이번 일은 우선 제게 맡겨주세요.”
“가, 강우를 찾을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두 눈을 크게 뜨며 차연주의 눈빛에 희망의 빛이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아 맞다! 리리스 네가 강우의 정보보안을 담당하고 있다며!”
분명 전에 PC방에서 강우가 패드립을 먹은 것을 자신의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착각했을 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럼 그 뭐냐, 걔 스마트폰도 네가 관리하는 거지? 그러면 GPS 기능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거 아냐?”
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당연히 저도 여러분을 불러모으기 전에 강우 님의 스마트폰부터 확인했어요. 하지만….”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설아가 강우 님의 스마트폰에 몰래 위치 추적 어플을 깔았을 때가 있거든요. 그때 걸린 이후로는 평소에 GPS 기능을 아예 꺼두고 다니세요. 안 그러면 어딜 가든 계속 설아 씨가 쫓아온다고….”
“…….”
차연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 그럼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리리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어도 무작정 사람을 풀어 찾는 것보단 더 효과적으로 찾을 자신 있어요.”
“…….”
차연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멍청한 새끼…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대체….”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뜨거운 분노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차올랐다.
혼란에 빠진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던 레이라가 리리스를 돌아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리스 씨가 개인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정보조직을 이용하실 생각인가요?”
“어머? 알고 계셨나요?”
“가디언즈의 정보력을 무시하시면 안 되죠.”
리리스가 육성하고 있는 정보조직은 그 숫자에 비해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가디언즈 산하에 있는 정보조직은 압도적인 물량과 가디언즈라는 막강한 권력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면.”
“오늘은 두 조직의 힘을 합치기로 하죠.”
리리스와 레이라의 시선이 교차했다.
가디언즈의 막강한 권력과 물량에 리리스가 직접 공들여 육성한 정보원들이 함께한다면 말 그대로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낼 수 있었다.
“…….”
“…….”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다른 사람들은 초조함에 찬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우선, 강우 님이 마지막에 어디서 목격됐는지를 찾아야 해요.”
조사의 첫 단추는 대체 강우와 설아가 둘이서 함께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내는 것부터였다.
“한국에 설치된 CCTV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실….”
“아뇨.”
레이라는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강우 씨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수호의 전당을 이용하긴 기록이 남아 있어요.”
테블릿으로 수호의 전당의 출입기록을 확인한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은… LA 쪽으로 통하는 게이트로 나가셨어요.”
수호의 전당은 전 세계 곳곳과 이어진 게이트가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갈 일이 있는 가디언즈의 간부들이 종종 편리한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다.
“미국? 둘이서 미국에 뭐 하러 간 거야?”
차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리리스는 품속에서 통신용 수정구슬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연락했다.
“강우 님 계정으로 접속해서 검색 기록을 살펴줘.”
짧은 시간이 흐른 후, 통신용 수정구슬이 반짝였다.
“강우 님의 검색 기록 중에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있었대요.”
“그러면… 두 분이 함께 놀이공원에 가신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설아가 강우랑 둘이서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한 적 있었어!”
에키드나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렇다면 유니버셜 스튜디오부터 조사를 시작하면 되겠네요.”
“…무슨 방법으로? 거기 사람 엄청 모이는 데잖아.”
차연주가 절망적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갔다는 것을 알면 뭐 하는가.
하루에도 몇만 명 이상이 출입하는 대형 놀이공원에서 두 사람이 어디로 향했는지 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우선 유니버셜 스튜디오 내부의 CCTV 서버 접속 권한을 드릴게요.”
두 사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낸 리리스와 레이라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레이라는 가디언즈라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CCTV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간단하게 입수했고,
리리스의 정보조직원들은 CCTV의 정보를 토대로 추적을 시작했다.
“이 수정구슬을 통해 실시간으로 진행 상황을 보고할 거예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수정구슬에서 홀로그램처럼 영상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CCTV에 찍힌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스캔해서 강우와 설아의 모습을 찾아내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미국 첩보영화 보는 것 같네.”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람들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며 차연주는 입을 쩍 벌렸다.
“찾았어요.”
5분도 지나지 않아 강우와 설아의 모습을 찾아낸 리리스의 정보조직원들은 그 정보를 토대로 두 사람의 위치를 추적했다.
“두 분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산타모니카 쪽에 있는 모텔이에요. 그 이후로는 일주일 동안 흔적이 사라졌어요.”
“모텔?”
차연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연인끼리 모텔을 가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설마.”
무언가 어처구니없는 상상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그쪽으로 가보자.”
* * *
“여기야?”
“예.”
차연주와 리리스는 굳게 닫힌 모텔의 문 앞에 선 채,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망설일 시간이 어디 있나?”
“아, 잠깐….”
인간의 모습으로 모텔 안에 들어온 발록은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갔다.
차연주와 리리스가 말릴 틈도 없이,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모텔의 문이 형편없이 박살나며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
침묵이,
내려앉았다.
“끄어, 어으어.”
방안을 가득 채우는 열기와 짙은 땀 냄새.
희미한 불빛 사이로 보이는 열두 장의 검은 날개.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망자(亡者)가 내뱉는 듯한 음산한 신음소리.
“하아. 하아. 어때요, 강우 씨? 기분 좋으시죠?”
“그만… 그마안….”
검은 날개 너머로 열띤 흥분에 차 있는 한설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어, 음.”
모텔 안의 모습을 확인하고 완전히 벙찐 발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리리스가 방긋 웃었다.
“발록. 우선 다 데리고 나가줄래?”
“…이건.”
“빨리. 지금 당장.”
“…….”
발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아, 연주 씨는 남아주세요. 아무… 연주 씨랑 관련된 일일 테니까요.”
“아, 응.”
차연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만 빼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어?”
그제야 한설아는 다른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아. 설아야.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리, 리리스 언니.”
한설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연주를 본 한설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연주야.”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믿고 있었는데!”
“…….”
차연주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한설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설아가 왜 저런 모습이 됐는지, 왜 리리스가 자신만 남아 있으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으니까.
“내가… 강우에게 고백한 것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아냐!”
한설아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엥? 아니라고?”
“연주 너도 강우 씨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어! 그리고 강우 씨도 연주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언제가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연주 또한 리리스처럼 받아줄 생각도 있었다.
차연주는 자신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강우 씨랑 해버릴 줄은 몰랐다고!”
이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일을 벌이기 전에 말을 해두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모 게임회사에서 사전에 말도 없이 리그를 폐지한 것으로 한때 큰 이슈가 되지 않았던가.
‘말하고 하는’ 것과 ‘이미 하고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강우 씨는 내껀데!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데! 왜, 왜, 왜, 왜!”
광기까지 느껴지는 살벌한 눈빛.
차연주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뭔 소리야 그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엉?”
“아, 아니. 그러니까….”
“나 강우랑 한 적 없는데?”
“……?”
한설아와 차연주의 시선이 교차했다.
둘 다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벙찐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설아야. 연주 씨 말이 맞아.”
리리스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차연주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꺄악! 무, 무슨!”
능숙한 동작으로 차연주의 몸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 이 상큼한 반응. 후훗. 내가 보증할게. 연주 씨는 아직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처녀란다?”
지금은 인간의 몸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정체는 음욕의 악마인 서큐버스였다.
처녀인지 아닌지는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어? 어?”
한설아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네모난 상자를 다급히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 그럼 이건 대체 뭔데?!”
“허업!”
상자를 본 차연주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건.”
차연주는 치밀어오르는 수치심을 참으며, 강우가 자신을 놀렸을 때의 일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그러니까….”
한설아는 손에 쥔 네모난 상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강우 씨랑 한 게 아니라고?”
“내, 내가 그 자식이랑 미쳤다고 그 짓을 하겠냐! 아, 아니 그… 하, 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그… 아악! 어쨌든 안 했다고오!!”
“…….”
방 안에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꺼흐으으으으윽. 허어어어엉!!”
그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그러니까… 진짜 풍선 부는데 쓴 거라고 씨발….”
서러움에 가득 찬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