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88)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69화
몽마(夢魔)의 우리 (6)
“여기가 언니가 말한 게이트인가?”
펄럭.
열두 장의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흑발의 여인이 건물 위에 착지했다.
푸릉.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는 가벼운 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봉긋 솟은 두 개의 언덕이 크게 출렁였다.
“…강우 씨.”
한설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게이트를 내려다보았다.
리리스는 걱정할 필요 없다 말했지만, 불안하고 꺼림칙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집착이 심한 걸까.’
강우에 대한 소유욕과 독점욕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옷을 사러 가는 게 아니었어…!”
강우를 놀래켜 주기 위해 조금 대담한 옷을 고르러 간 사이 이렇게 갑자기 훌쩍 게이트에 가버릴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강우 씨. 강우 씨. 강우 씨. 강우 씨. 강우 씨, 강우 씨.”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아무 일 없으실 거야. 응. 그럼. 강우 씨가 누구신데. 괜찮으실 거야. 괜찮고말고. 응응. 아니….”
까드득.
“괜찮아야 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축된 동공. 빛을 잃은 공허한 눈빛이 게이트를 응시했다.
사실 리리스의 말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강우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
물론 아직 완전히 힘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력했다.
심지어 그와 함께 발록이 갔다고 들었다.
그 둘이 함께 있는 이상 어지간한 일은 위험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
눈을 감으면, 수영장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진 강우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의식을 잃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낙인처럼 머릿속에 새겨진다.
한없이 절망스럽고, 아득했던 기억.
살점을 천천히 도려내어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
“하아, 하아.”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등 뒤에 펼쳐진 열두 장의 날개가 검은빛으로 점멸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튀듯, 검은 번개가 날개 사이에서 튀어 올랐다.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게이트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근, 두근.
곧 강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숨통을 조이듯 답답했던 불안감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고, 그 자리를 짜릿한 전율과 환희가 채웠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고 싶다.
상냥하게 끌어안고, 입술을 겹치며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지금.
지금 바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더는기다리기힘들어요미칠것같아요만나고싶어요끌어안고싶어요키스하고싶어요강우씨사랑해요사랑해요사랑해요미친듯이사랑해요미칠듯이사랑해요강우씨가없으면죽을것같아요머리가터질것같아요다죽여버리고싶어요갈기갈기찢어버리고싶어요어디있어요강우씨강우씨강우씨강우씨강우씨.
“강우 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당신의, 당신만의,
“임자가 가요.”
꺄르르.
한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러니까.”
강우는 쯧, 혀를 찼다.
“역시 구천지옥이랑은 전혀 연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 말이구만.”
“…구천지옥이요?”
“거, 거긴 어딘가요?”
“묻는 말에나 답해. 괜히 멋대로 아가리 털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외계(外界)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지옥.
서큐버스를 통해 들은 판데모니움은 같은 악마가 산다는 것 외에는 구천지옥과 아무런 연관 점이 없는 장소였다.
‘얘기만 듣기로는 악마들의 무력 수준은 오히려 구천지옥 이상인 것 같은데.’
직접 보지 못했기에 정확한 비교는 어려웠지만, 얘기만 들어서는 구천지옥의 악마들이 실수로 초코우유가 아닌 민트초코 우유를 사 온 빵셔틀마냥 일방적으로 두들겨 처맞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이거 뭔가 좀 자존심 상하는데?’
만 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을 피똥 싸며 살아남았던 지옥이 다른 외계의 지옥에 밀리다니.
왠지 모르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솔직히 너희만 보면 존나 믿을 수가 없는데. 진짜 걔들 센 거 맞아?”
“저, 저희는 몸으로 하는 싸움은 많이 약해서요.”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은 엄청나게 강력해요!”
“현계로 현신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현신만 한다면 ‘탑’ 최상층의 사도들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나랑 비교하면?”
“아….”
“그, 그건.”
서큐버스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눈앞의 소년에게는 비할 수 없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강우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일반적인 악마와 자신은 비교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구천지옥의 악마들을 가볍게 털어버릴 악마들이라 해도, 그의 앞에서는 그냥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으니까.
“그 잘난 판데모니움의 악마라는 놈들은 그럼 대부분 지금 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거지?”
“그건 그런데… 최근에는 좀 상황이 달라졌어요.”
“달라졌다고?”
뭔 소리야 그건 또.
“원래 물질계로의 현신을 막는 강력한 벽 같은 게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 그 벽이 많이 얇아졌어요. 그래서 저희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남자들을 사냥하고 있었고요.”
“…….”
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어째 상황이.’
티탄의 율법이 망가져 구천지옥과 지구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 세계와 연관된 일인가?’
그건 솔직히 알 수 없었다.
티탄의 율법이 망가진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삼원(三元)의 세계였지 이름 모를 외계(外界)의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악마들이 현신해서 날뛰고 있는 상황이라고?”
“나, 날뛰지는 않아요. 물론 그런 악마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목적으로 현신했을 거예요.”
“다른 목적?”
“예. 아마 강력한 유물(遺物)을 찾아 본신의 힘을 키울 생각이겠죠.”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서로치고 받고 싸우던 사도들도 유물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다.
“그 유물이란 게 뭔데?”
“…예?”
“유물을 모르신다고요?”
서큐버스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내가 아까 뭐라고 말했지?”
“아…! 죄, 죄송합니다! 묻는 말에만 답할게요!”
“좋아. 그래서 그 유물이 뭐라고?”
“…탑에서 만들어진 신비한 힘을 지닌 무구(武具)예요. 무구라고는 하지만 형태는 하나하나 제각각이고, 애초에 형태 자체가 없는 유물도 있지만요.”
아티팩트 같은 건가.
아니, 형태가 없는 것도 있다 하니 정확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또 그놈의 탑이 나왔다.
“그 아까부터 말하는 탑이란 건 대체 뭐야?”
“…….”
탑에 대해 알지 못하는 강우의 모습에 서큐버스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떨었다.
아무래도 강우가 그들 세계의 주민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짐작한 모양.
“주인님은….”
“쓰읍.”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우는 나체의 서큐버스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창세(創世)의 탑에 대한 것은 사실 저희도 잘 몰라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도요. 다만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강력한 유물과 힘, 값진 재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건 악마건 다 그 탑을 오르려고 한다는 것만 알아요.”
“몇 층까지 있는데 그거?”
“…타, 탑이 몇 층까지 있는지는 몰라요. 상층과 저층을 나누는 것도 이제까지 공략된 층들을 기준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럼 지금 몇 층까지 공략됐는지는?”
“그것도 잘… 타, 탑에 대한 건 정말 저희도 잘 몰라요!”
“쯧.”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니 일부러 정보를 숨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창세의 탑이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깊은 한숨이 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뭔데 씨발 뭐가 하나씩 계속 튀어나와.’
아카르트에 판데모니움, 이번에는 창세의 탑까지.
‘외전이라며.’
50화 정도에 끝난다며, 이 새끼야.
“뭐, 그래. 일단 알았어.”
“도, 도움이 되셨나요?”
“그래.”
서큐버스들의 정보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저 창세의 탑인지 뭔지 있는 외계(外界)가 지구에 점점 침식하고 와중에 이런 정보들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헤헤! 주인님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내가 언제부터 너네 주인님이 된 거냐.
“다른 명령은 없으신가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저희를 마음껏 다루셔도 괜찮아요!”
“주인님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 드릴게요!”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일까, 서큐버스들은 눈을 반짝이며 강우에게 한층 더 달라붙었다.
나체의 여인들이 단체로 달라붙는 진풍경에 강우의 눈빛이 잠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이내 차갑게 식었다.
“저리 안 꺼지냐?”
“히익!”
“읏…!”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니 서큐버스들이 단체로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정보도 다 얻었겠다, 다 죽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뒤편에 가만히 서 있던 발록이 앞으로 나섰다.
“아앗!”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서큐버스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머리를 납작 조아렸다.
“잠깐 기다려 봐.”
강우는 손을 들어 발록을 막았다.
‘이것들 그래도 쓸모 있을 것 같은데.’
나름 능력도 있겠다 정보원으로 쓰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리리스가 정보요원으로 쓸 만한 인재가 부족하다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꿀꺽.
서큐버스들을 바라보며 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연인들에게 일편단심이라고 해도 사지 멀쩡한 남자인데 백이 넘는 나체의 서큐버스들을 보고 아무런 음심이 생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
물론.
‘쟤들한테 손댈 생각은 전혀 없지만.’
소중한 연인들을 두고 감히 외도(外道)를 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다만─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간질간질한 욕망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서큐버스들에게 손을 댈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남자의 욕망을 모아 만들어낸 것 같은 관능적인 육체를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솔직히.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
백이 넘는 미녀들이 나체를 볼 수 있는 기회라니.
그가 앞으로 만 년을 더 산다고 해도 과연 두 번 다시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광경이었다.
“그, 그럼 저희는 살려주시는 건가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절절한 애원이 귓가를 울렸다.
강우는 크흠, 헛기침을 내뱉더니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우선 저기 널브러져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
넓은 공동에는 아직 그에게 두들겨 맞은 수십 명의 사도가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들은 이미 자신과 서큐버스 사이의 대화를 모두 들어버렸다.
저들이 사는 세계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지구를 침식하는 이상, 혹시 모를 변수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처리라면….”
“죽이라는 거지. 너희들한테도 좋은 얘기잖아?”
애초에 서큐버스는 남자의 정기를 약탈하기 위해 이곳에 우리를 만들었다.
서큐버스가 살아있는 남자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서큐버스의 단체 포식 장면을 상상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어차피 저들을 제거해야 하고, 서큐버스를 정보요원으로 부려먹을 생각이라면 여기서 한 번 배를 채워줘야 하지 않은가.
결코, 하늘에 맹세코 다른 사심은 없다.
“알겠습니다!”
“후훗, 저기 쓰러진 놈들의 정기를 흡수해 죽이면 되는 거죠?”
서큐버스들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음마(淫魔)의 포식이 시작됐다.
“아아악! 놔! 놓으라고오!”
“사, 살려줘!!”
“쿡쿡. 얌전히 있으면 아프게는 하지 않을게?”
“가만히 있으렴~”
서큐버스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도들의 정기를 흡수했다.
“…허허.”
수십 명의 사내들이 서큐버스에게 둘러싸여 정기를 흡수당하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진귀한 풍경이었다.
‘이건 이것대로.’
강우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나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해 좋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진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흐흐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서큐버스의 포식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강우, 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틈조차 없다.
들릴 리 없는,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흘러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아아,
그곳에는.
검은 날개의 【천사】가 있었다.
“임자아아아아아아!!!”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다.
상황을 판단할 시간 따위는 없다.
본능에 맡겨,
발을 박찬다.
“흐윽! 임자아아아!”
눈물을 흘렸다.
격렬한 전투 도중 흐트러진 옷들을 몸을 비틀어 일부러 더 흐트러트렸다.
한설아를 끌어안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되신, 일이신가요?”
“크흑! 저, 저 사악한 서큐버스들이 날, 날…!”
꾸욱.
입술을 짓씹으며 외쳤다!
“날 억지로 덮치려고 했어!!!!”
“…….”
초점이 사라진 공허한 시선이 서큐버스를 향했다.
“아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검은 날개의 천사는,
감정이 사라진 듯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