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699)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180화
낙원(落園) (10)
천상(天上)까지 뻗은 거대한 빛기둥.
장엄하게 대지를 밝히는 빛기둥 속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보는 순간 ‘하얗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청년.
머리칼도, 눈썹도, 피부도 심지어 그 눈빛조차.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雪原)을 바라보듯.
더없이 순수(純粹)하고, 한없이 고결(高潔)하며, 끝없이 숭고(崇高)한.
감히 발을 디디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지는 존재.
태초(太初)에서 탄생하여, 창세(創世)의 기적을 이룩한 거인.
아카르트.
그가 낙원(樂園)에 강림했다.
“이, 건….”
새하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의 시선이 루케오 푸레의 창공 위에 의연히 떠 올라 있는 악마에게 향했다.
귀밑까지 찢어진 흉측한 입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짐승의 이빨에 끈적한 침이 맺혀 떨어졌다.
“…마왕(魔王).”
자신의 낙원에 있을 리가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 어떠한 악마들보다도 사악(邪惡)하며, 간악(姦惡)하며, 극악(極惡)한 악마.
악마들의 왕.
그자가,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반가워. 오랜만이지? 아, 오랜만이라고 할 것까진 아닌가?”
강우는 낄낄 웃으며 길게 혀를 내밀었다.
“네 말이 맞네. 그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 그치?”
아카르트의 말마따나, 둘의 재회(再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길게 내민 혀로 입술을 핥았다.
“종말(終末)을 맞이한다는 세계가 어딘지는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드넓게 펼쳐진 루케오 푸레의 전경(全景) 너머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당, 신….”
새하얀 눈동자에 떨어진 파문이 한층 더 커진다.
요동치는 목소리로, 아카르트는 말을 이었다.
“루케오 푸레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별거 안 했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주 간단하게, 지극히 단순하게.”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살짝 등을 떠밀어준 것뿐이야.”
“…….”
아카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눈앞의 악마가 루케오 푸레에 무슨 수를 쓴 건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가 직접 루케오 푸레에 강림한 것은 파견 보낸 마흔여덟의 사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악마가 낙원(樂園)을 더럽혔다는 것은,
까드득.
아카르트는 사납게 이를 갈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흐흐흐. 왜, 꼴에 걱정되기는 하나 봐?”
이딴 세계를.
뒤틀리고, 비틀린 낙원을 만들어 놓고도.
“…걱정?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카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삼원(三元)의 세계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멸망이 확정된 세계의, 종말이 정해진 세계의 마지막 구조선.
한 줌의 생명만이 이 구조선에 승선할 수 있었지만, 이 구조선이라도 없다면 모조리 죽어버리고 만다.
이 세계는, ‘루케오 푸레’는 오롯이 절망만이 가득 차 있는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티끌 같은 희망이었다.
“‘구원’을 통해 이곳에 도착한 영혼들에게 새로운 삶을! 새로운 기회를 줄 땅이란 말입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純潔)하며 세상.
멸망의 걱정 없이, 종말의 공포 없이.
그저 행복함만이, 그저 즐거움만이 가득한 세계.
그래.
그 이름 그대로.
‘순수하게 빛나는’ 세계.
“이곳은!”
아카르트가 사납게 뜬 눈으로 강우를 노려보았다.
“감히 악마 따위가 더럽혀서는 안 되는 세계란 말입니다!!”
피식.
강우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아가리로 똥을 싸네.”
이곳은 순수하게 빛나는 세계 따위가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빛나기만 할’ 뿐인 세계다.
“그런다고 감출 수 있을 것 같아?”
눈 부신 빛으로 욕망을 억누르고, 슬픔을 짓누르고, 절망을 뒤덮는다고 할지라도.
감춰질 리가 없었다.
감춰질 수가 없었다.
“넌, 이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이 머저리 자식아.”
“…제가 만든 세계입니다.”
“원래 이런 건 만든 놈이 더 모르더라고.”
킹든 갓택2를 만든 놈도 지는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아카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루케오 푸레는 그가 직접 만든 세계였다.
이 세계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흐흐흐. 그래?”
강우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뭐… 그거야 나중에 보면 알겠고.”
쩌억.
오른 손바닥이 갈라지며 검은 점액질이 흘러나왔다.
진득하게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검푸른 검신.
[꺄하하핫!! 뭐야? 이제 싸울 시간이야?]미디르는 광적인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싸우자!!! 빨리 죽여 버리자!!!]11성으로 각성한 후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아 몸이 근질거리기라도 한 걸까.
검푸른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그를 재촉했다.
“아직 준비 안 끝났으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준비? 무슨 준비?]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의문에 강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11성으로 만족할 거야?”
[…설마.]미디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잠깐. 주변에 아무런 절망도 느껴지지 않잖아!]“그러니까 입 다물고 기다리라고.”
마지막 각성 조건이 갖춰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군요. 예, 맞습니다.”
뭘 납득한 건지 아카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찬 천칭 문양의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당신과 저는, 어차피 대화를 통해 해결될 사이가 아니었죠.”
그의 대적자(對敵煮)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느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다.
-짤그락.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기다란 천칭(天秤)이 아카르트의 손에 쥐어졌다.
“오라.”
쿠웅.
천칭의 끝으로 가볍게 바닥을 찍으며, 아카르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진리의 구도자(求道者)들이여.”
아카르트를 중심으로 눈부신 빛무리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우우우우우웅!!
[태양의 계단]에서 루케오 푸레로 이어지는 황금빛 길이 생겨났다.그 계단을 따라 셀 수 없는 숫자의 빛의 군세가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빛의 군세의 선두에 선 것은 새하얀 호랑이와, 그 호랑이 위에 올라탄 황금빛 갑주의 기사.
얼굴까지 모두 가리는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는 처음 보지만, 그가 올라타고 있는 새하얀 호랑이는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이야, 위키 홀릭 이 자식 오랜만에 보네.”
강우는 새하얀 호랑이를 바라보며 정겹게 중지를 추켜올렸다.
“오늘은 저번처럼 안 끌려간다 이 X냥이 새끼야.”
육체의 구성이 이제 막 시작됐을 무렵, 무력하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르니 괜히 뒷덜미에 열불이 차올랐다.
“위키 홀릭?”
“아, 우리는 그렇게 불러.”
“…저 아이의 이름은 위키 홀릭이 아닙니다. 그는 제 충실한 두 번째 추종자 페루스….”
“걍 위키 홀릭이라고 해 인마.”
어차피 위키 홀릭과 싸울 것은 자신이 아니다.
-스릉.
허리춤의 검을 빼드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한기(寒氣)가 뺨을 간질였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니 그의 동료들이 일렬로 쭉 서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푸흐흐! 그렇게 서니까 뭐 크로우즈 제로 보는 것 같네.”
“틀.”
“아니.”
공중에서 내려온 강우는 짤막하게 내뱉는 차연주의 말에 상처를 입었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에휴, 그나저나 드럽게 많네. 이거 진짜 우리만으로 되는 거 맞아?”
차연주는 [태양의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빛의 군세를 올려다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적은 수천, 수만은 넘어 보이는 데 비해 이쪽을 꼴랑 일곱.
아무리 그 하나하나의 전력이 막강하다고 하나 너무나 압도적인 숫자 차이였다.
“하아. 역시 가디언즈 전원을 끌고 오는 게 맞지 않았을까요?”
레이라 또한 답답하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깐.”
강우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왕님, 슬슬 준비할까요?”
“엉. 부탁해.”
리리스가 우아한 몸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넓게 펼쳐졌다.
“자, 그럼.”
강우는 가볍게 몸을 돌린 후, 아카르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까 전에 내가 루케오 푸레에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지?”
낄낄낄.
악마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카르트. 들리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루케오 푸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 아아!!!”
“아카르트 님이!!! 아카르트 님이 현신하셨어!!!”
“전능하신 아카르트여어어어어!!!!”
“우리에게 빛을!! 진리를!!!!”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는 함성.
거대한 빛기둥을 보고 밖으로 나온 주민들은 그들이 믿고 섬기는 ‘신’의 현신에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루케오 푸레의 주민.
낙원의 인간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카르트를 섬기며, 받들며, 따르는 독실한 신도(信徒)들.
그들은 현신한 아카르트를 바라보며 광적인 기도를 올렸다.
“…과연. 주민들을 인질로 쓰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아카르트는 경멸에 찬 눈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푸헤헤헤헿!!! 인질?”
올해 들어 최고의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강우는 배를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힘없고 나약한 주민들을 인질로 사용해 이 세계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 ‘필요’ 따위는 없었다.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아카르트.”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카르트 님의 규칙을 어겼는데, 죽이지 않는다고?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떠오른 것은 검은 의자에 묶인 한 사내의 모습.
아카르트가 그토록 지키려고 노력한, 낙원에 살아가는 ‘평범한 주민’의 모습이었다.
-네가 규칙을 어겼다는 걸 아는 건 나랑 당신밖에 없잖아?
울려 퍼지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거짓말을 하면 돼.
-거짓말?
영상이 이어졌다.
“…이 영상은 뭡니까, 대체?”
아카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안 돼!!! 안 돼에에에에!!!”
그때, 발작을 일으키듯 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영상 속에 비치고 있는 사내였다.
“머, 멈춰!!!! 멈추라고!!!!”
“푸흡!! 푸헤헤헤헤헿!!!”
“제, 제발!!! 제발 멈춰줘어어어어어!!!!!”
찢어질 듯한 절규 속에서, 악마는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아카르트, 거짓말쟁이가 언제 가장 절망하는지 알아?”
-여보!!!
-아빠!! 오셨어요?!!
“거짓말쟁이는 말이야.”
-하하하하핫!!!
“원래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게 됐을 때 절망하는 법이야.”
-오늘도 참 보람찬 하루였어!!!
호탕한 웃음소리. 가슴을 치며 ‘거짓말’을 내뱉는 사내의 모습.
“아, 아니야!!! 내가, 내가 아니라고!!!”
사내는 필사적으로 절규했다.
‘절망’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믿고 섬겼던 신의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악(罪惡)이 낱낱이 밝혀진다.
그것은, 더없이, 한없이, 끝없이.
‘절망’적인 일이었다.
-엄마! 오늘은 빵 두 개가 덜 들어왔어요!
-어머머! 급한 약속이 생겨서 오늘은 저녁 식사를 만들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사내만이 아니다.
영상이 증식하듯 늘어난다.
루케오 푸레의 하늘을, 행복하고 즐거움만이 가득한 낙원(樂園)의 창공을 무수한 영상들이 채운다.
“━아.”
아카르트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덜덜덜.
몸이 떨렸다.
그곳에는, 낙원의 하늘에는.
무수한, 셀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거짓말’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아, 아카르트.”
악마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이게 네가 만든 ‘순수하게 빛나는 세계’의.”
춤을 추듯, 노래를 부르듯, 흥겹고 즐겁게 몸을 흔들며.
절망만이 가득한 낙원(落園) 속에서.
“진실이다.”
악마는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