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723)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후일담 12화
용과 함께 춤을 (2)
“그러니까….”
사연을 들어보자면 이랬다.
현재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월드 투어 중인 에키드나는 이번 호주 공연에서 같은 소속사에 있는 아이돌 하나와 합동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것.
어젯밤 그 아이돌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소형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는 것.
에키드나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숙소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즉.
“한 명 빵꾸가 났단 말이지?”
“빵꾸…?”
“아, 한 자리가 비게 됐다는 뜻이야.”
“흐응! 맞아! 공연이 당장 내일인데 한 명이 부족하게 됐어!”
내일이 공연인데 갑작스럽게 한 명이 비게 됐다, 라.
확실히 에키드나가 초조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엔 일본 아이돌 애니메이션을 보고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아이돌 일이었지만, 어느새 그녀는 진심으로 이 일을 좋아하게 됐으니까.
“그래, 사정은 잘 알겠는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아이돌이 되어달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그… 가, 강우는 겉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잖아? 그러니까… 강우가 아리 대신 공연해줄 수 있어?”
“…뭐?”
“아 참, 아리는 어젯밤 몬스터한테 습격당한 애 이름이야! 엄청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애….”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나보고 공연 대타를 뛰어달라고?
그것도 현역 아이돌의?
“노, 노래까지는 안 해도 돼! 그건 립싱크로 때울 테니까! 동선을 따라서 춤만 춰도 괜찮아!”
“…….”
아무리 겉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아이돌 대타를 뛰어달라니.
‘지금 그러니까 나보고 여장을 한 다음 공연을 하라는 거잖아?’
과거 딱 한 번 여장을 해본 경험이 있긴 하지만.
단순히 여장을 하는 것과 여장을 한 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춤을(특히 아이돌의 춤을) 추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미친.’
그 모습을 상상하자 등골을 타고 오싹한 감각이 퍼졌다.
강우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립싱크로 때울 수 있으면 그냥 한 명 빠진 채로 공연해도 되잖아?”
다른 이유도 아니고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한 충격으로 무대에 못 서게 됐다는데 누가 뭐라 비난하겠는가.
‘몬스터가 어디 동네 개새끼도 아니고.’
에키드나야 자신을 따라 숱한 전장을 겪어왔기에 몬스터가 익숙하겠지만, 일반인 입장에서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일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일이었다.
“어… 그, 그러니까, 그게….”
잠시 할 말을 생각하듯 눈을 굴리던 에키드나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마, 만약 아리가 무대에 못 서게 되면 엄~처엉 비싼 위약금을 물어내야 한대!”
“위약금?”
몇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공연에서 아이돌이 불참한다면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내야 한다는 건 이쪽 세계에 별 관심이 없는 강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고가 나서 어쩔 수 못 나가는 건데도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으, 응! 그래야 한데!”
“아니 뭔 계약이 그따구냐.”
솔직히 계약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그쪽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고도 아니고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한 피해자보고 공연에 불참했다고 위약금을 뜯어내려는 건 해도 해도 좀 너무하지 않은가?
‘뒤진 사탄도 벌떡 일어나서 물개 박수를 치겠네.’
하여간 이래서 X간 놈들이란.
“그래. 뭐, 사정은 잘 알겠어.”
“그, 그럼…!”
“안 해.”
아린지 뭔지 얼굴도 모를 아이돌이 위약금을 내야 하는 게 자신과 뭔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아리라는 애랑 에키드나가 친한 사이일 수도 있으니 조금은 상관있다고 쳐도.
“그 위약금을 내가 물어주면 되는 거 아냐?”
수만 명짜리 대규모 공연의 위약금이면 천문학적인 단위겠지만, 어차피 돈이야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여장을 한 채로 수많은 관중 앞에서 춤추는 것보다야 돈으로 무마하는 편이 나으리라.
“아, 아니! 그건 안 돼 강우!”
다급한 표정으로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에키드나.
“이런 건 위약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어겼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으음. 그건 그렇지만.”
“부탁할게! 강우가 한 번만 대신 무대에 올라서 줘!”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거야?”
“강우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니.
아이돌 이름은커녕 노래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인간이 무슨 아이돌을 한단 말인가?
그래.
조건을 다시 생각해 보자.
첫째, 겉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둘째, 에키드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며.
셋째. 내일 있을 공연의 춤과 동선을 하루 만에 뚝딱 익힐 수 있는 피지컬을 지닌 능력자가….
어라 X발?
‘나밖에 없네?’
어떻게든 다른 후보를 떠올려 보려고 해도.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인재는 자신 외에 없었다.
“…잠깐 공연에서 출 춤 좀 보여줄 수 있어?”
“흐응! 잠시만!”
에키드나가 특유의 콧바람을 내뿜으며 가방 속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곧이어 요란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든 시선을 빼앗기는~ 넌 완벽한 궁극의 아이돌!
에키드나의 이미지에 맞추기라도 한 걸까.
프릴이 과하게 달린 치마를 펄럭이며 손으로 하트를 만드는 동작이라던가.
상큼한 윙크를 날리며 ‘츄~’라는 자막과 함께 입술에 댄 손바닥을 정면을 향해 뻗는 동작이라던가.
보기 거북할 정도로 귀엽고 깜찍한 컨셉의 안무가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이걸 나보고 추라고?”
자신이 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속이 뒤틀리는 듯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겉모습을 바꿔 다른 사람을 속이면 뭐 하겠는가.
정작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이 그 비극적인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데.
“안 해! 아니 못 해!”
“걱정하지 마! 강우라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발작을 일으키듯 거절하자 에키드나가 ‘후잉’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옷깃을 잡아당기며 몸을 밀착하는 에키드나.
“으윽.”
울먹이는 에키드나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강우… 정말 안 돼?”
“이것만큼은 절대….”
“정말… 정말 안 되는 거야?”
옷깃을 꽉 붙잡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에키드나.
“…강우.”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예전에… 나 기억나? 강우를 처음 만났을 때.”
“그건….”
기억한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마룡이라 배척받으며, 하지도 않은 일에 누명을 쓴 채 마녀사냥을 당했던 그녀의 과거를.
드넓은 레어 안에서.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지독한 고독에 잠식되어 가던 어린 소녀의 악몽을.
“혼자 아무도 없는 레어에서 책만 읽고 있을 때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
“세상 모든 사람이 날 마룡이라고 싫어하고, 무서워할 줄만 알았어.”
에키드나는 당장 부서질 것처럼 가냘픈 미소를 지은 채 강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강우랑 만나고 나서… 달라졌어.”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기쁨을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을 아껴준다는 행복을 깨달았다.
이 드넓은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강우랑, 설아랑, 연주랑, 리리스 언니랑… 발록 아저씨랑 태수 삼촌이랑 시훈이 오빠랑 그리고 또….”
이제껏 만나온 인연들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에키드나.
“모두와 만나면서… 나도 달라지고 싶다 생각했어.”
그렇기 때문에.
‘아이돌’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 세상 모두에게 배척받았던 자신이, 이제는 달라졌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
“…에키드나.”
강우는 눈물을 글썽이는 에키드나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상처 입은 채 지구로 소환됐을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아이돌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엄청 많아졌어.”
“…….”
“나… 이번 공연 꼭 성공하고 싶어. 내 공연을 보러 와준 소중한 팬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
“…아니.”
강우의 잎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에키드나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던 강우가 각오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어. 할게, 하면 되잖아.”
“지, 진짜?!”
에키드나가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바짝 강우에게 다가왔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내가 그… 아린가? 걔로 변장해서 공연하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에키드나를 만날 당시에는 강현이가 옆에 있었지만.
눈치 빠른 강현이답게 둘만 얘기하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저 올라갔기 때문에 지금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강우와 에키드나 말고는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이 마누라들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아주 난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연주와 리리스가 알게 됐을 때도 문제지만.
‘특히 임자는 절대 안 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에키드나가 막 아이돌 일을 시작했을 때였던가.
설아가 뜬금없이 아이돌 복장을 입고 한 번 춤춰달라고 부탁한 적 있었다.
물론 단칼에 거절하긴 했지만.
‘그때 임자 눈이 좀… 많이 위험해 보였지.’
자신에게 강아지 귀나 꼬리를 달아주며 좋아하고, 얼마 전에 쪽쪽이마저 물려주려고까지 했던 설아의 기괴한(?) 취향을 생각한다면.
‘만약 내가 여장을 하고 춤을 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방 하나 전체를 공연 때의 사진으로 도배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때 입은 복장을 어디서 구해와서 잠자리에서 입으라 강요할지도 모른다.
‘임자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임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뒤틀린 취향은 가끔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었다.
‘어쨌든 절대 임자한테 들키는 것만큼은 안 돼.’
임자에게 들킬 바에 차라리 연주에게 들키는 게 나았다.
처음에는 신나서 깔깔대며 놀리겠지만, 이쪽에서도 반격(?)할 수 있는 무기는 많았으니까.
‘애들한테 알려지는 것도 당연히 안 되고.’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아버지가 아이돌로 변장(변신에 가깝지만)해서 귀염뽀짝하기 그지없는 춤을 추고 있다는 걸 애들이 알아버리기라도 한다면 진짜 마해를 폭주시켜 자살해버리고 말 것이다.
“흐응! 절대 말 안 할게!”
“…후우. 알았어.”
그렇게.
일곱 대공을 집어삼키고, 만마萬魔를 발아래 둔 채 공포에 떨게 했던 악마의 왕은 하루아침에 여장 아이돌이 되었다.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