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725)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후일담 14화
막간–무대 뒤의 이야기
“어쨌든, 강우가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에키드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강우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아직 공연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음을 알려줬다.
강우는 근처 테이블 위에 놓인 깨끗한 수건을 하나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줬다.
“에헤헤. 강우, 친절해.”
배시시 웃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에키드나.
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말없이 에키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제 변형의 권능을 풀어야 하니까 잠깐 탈의실에 좀 다녀올게.”
“흐응! 그냥 여기서 권능을 풀어도 돼! 공연도 끝나서 대기실엔 아무도 안 와!”
“아니, 네가 있잖아.”
변형의 권능으로 외모는 바꿀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옷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바로 변형의 권능을 풀어버린다면 프릴이 가득 달린 짧은 치마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라는 심연과도 같은 조합이 탄생해 버리고 만다.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아니면 옷부터 먼저 갈아입어도 되잖아?”
“그러려고 탈의실에 간다고 한 거잖아!”
“어느 쪽 탈의실로 가려고?”
“…앗.”
생각해보니 지금 상태라면 남자, 여자 탈의실 중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좀 애매하긴 했다.
어디든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의 성별이 달라질 테니.
“끄응. 그럼 여기서 갈아입을 테니까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봐.”
“흐응! 싫어!”
“아니 왜.”
“공연도 끝났으니 강우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갈 거 아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와락 안겨드는 에키드나.
어리광을 부리듯 뺨을 문대며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강우의 허리를 굳게 끌어안았다.
“강우.”
“하아. 왜?”
못 살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키드나의 등을 토닥이는 강우.
에키드나는 강우를 끌어안은 채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앞으로 몇 년만 더 있으면 성룡이 돼.”
“…….”
짙게 내려앉은 침묵.
그녀가 갑자기 왜 ‘성룡’이 된다는 걸 강조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키드나가 성룡이 된다면.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나에 대한 에키드나의 감정.’
그것이 그저 사역마와 주인 사이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 에키드나가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어리다는 이유로 대답을 미뤄두고 있었지만.
언젠가 그 감정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설아는 에키드나까진 괜찮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설아만 괜찮다면 에키드나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런 얄팍한 생각으로 에키드나의 감정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
그녀가 진지한 만큼, 자신 또한 그녀의 감정을 진지하게 대함이 옳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은….
“에키드나. 난….”
“말하지 마.”
에키드나가 말을 자르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
에키드나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어깨.
아마 그녀 또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말해, 에키드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인간 기준으로는 어린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수만 명의 관중을 열광시킬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강우도 사지 멀쩡한 남자인 이상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오는 에키드나를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안 돼.’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자식만 셋이다.
안 그래도 다른 가정과 달리 엄마가 여럿이라는 게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또 한 명의 엄마가 생기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되리라.
자식들을 위해서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궁색한 변명처럼도 들리지만.
지금 강우의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흐응! 괜찮아! 지금은 그래도 나중엔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에키드나는 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난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에키드나.”
이렇게까지 나오는 에키드나에게 단호한 거절의 말을 내뱉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으음.”
“그리고, 뭐?”
“아무것도 아냐!”
“뭐야 그게.”
괜히 더 궁금하게.
의문을 담아 에키드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으스대듯 가슴을 내밀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흐응! 나라고 가만히 손가락만 빨며 기다릴 건 아니라구!”
손가락만 빨며 기다릴 게 아니라니.
그 사이 뭐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짓을….”
“흐응! 그건 비밀이야!”
에키드나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강우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듯 착, 검지를 내밀었다.
“두고 봐! 꼭 강우의 마누라가 되고 말 테니까!”
“…….”
당돌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선전포고에 강우는 헛웃음을 삼켰다.
“일단 성룡이나 되고 말하세요.”
그래.
지금 당장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감정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거니까.
언젠가 자신이 에키드나를 받아들일 마음이 될 수도, 아니면 반대로 에키드나에게 다른 소중한 인연이 생길 수도 있었다.
“흐응! 성룡이 되면 지금보다 몸도 훠~얼씬 어른스러워질 거야!”
어른스러운 에키드나라니.
파인애플과 피자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연주보다 가슴도 커질 거야!”
“지금도 더 크지 않아?”
난 우리 연주보다 작은 가슴을 상상할 수 없어.
“그, 그럼 설아보다도 더 커질 거야!”
“에이, 그게 되겠니?”
에키드나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게 아니란다.
“어쨌든! 각오해 강우! 성룡이 되면 강우를 앙 먹어 치울 테니까!”
“드래곤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되게 심경이 복잡해지네.”
에키드나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에키드나 씨! 지금 호주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공연 스태프 하나가 에키드나를 불렀다.
“강우, 나 잠깐 다녀올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분일초도 자신과 떨어질 수 없다고 떼를 쓰던 에키드나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프로는 프로라는 건가.”
아직 성룡이 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맡은 일에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더 이상 그녀를 ‘어린애’ 취급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지금 기회에 권능을 풀어야겠군.”
강우는 대기실의 문을 잠근 채 변형의 권능을 풀었다.
부욱.
체형이 바뀌며 입고 있던 옷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맞다 씹.”
미리 옷을 갈아입고 권능을 푼다는 게 마음이 급해서 깜빡 잊어버렸다.
‘절대 거울을 보지 마.’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자괴감에 죽어버릴 수도 있다.
‘빨리 갈아입자.’
그래도 다행히 혼자만 있을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돼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 모습을 남에게 들키기라도 했다면….
“…죽일 수밖에 없었겠지.”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이야, 다행.”
보고만 있어도 흉물스러운 라이브 복장을 재빠르게 갈아입은 강우는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사납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내.
익숙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으음. 나 정도면 그래도 평균 이상 아닌가?”
거울 앞에 선 강우는 이리저리 얼굴 각도를 틀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까똑!
“응?”
정겨운 소리에 스마트폰을 꺼내 보니 김시훈에게 톡이 와있었다.
[오랜만에 연락드려요, 형님. 잘 지내시죠? 이번 주말에 시간 어떠세요?]안부 메시지 옆에 딸을 안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김시훈의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이 새낀 왜 점점 더 잘생겨지지?”
김시훈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투덜거리던 강우는 다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갓 잡아 올린 오징어 한 마리가 팔딱이고 있었다.
“…아, 아냐! 시훈이 이 새끼가 사기인 거지 내가 오징어 정도는 아니라고!”
우리 임자가 나 잘생겼다고 했어!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다급히 대기실 밖으로 나가는 강우.
소란스러운 복도를 건너 정리가 한창인 공연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아… 저, 저기.”
“응?”
“오강우 씨… 맞으시죠?”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인… 아니, 소녀 한 명이 강우에게 다가왔다.
마스크를 벗자 드러난 소녀의 얼굴은 강우에게 있어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에키드나에게 얘기 다 들었어요!”
“아, 네가 그….”
“네! 에키드나랑 같은 소속사에서 아이돌로 활동하고 있는 ‘성아리’라고 합니다!”
아리는 강우를 향해 자기 대신 공연을 해줘서 고맙다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래,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아, 예. 괜찮아요. 에키드나가 지켜준 덕분에 넘어지면서 무릎 까진 것 말고는 상처도 안 났으니까요.”
하긴.
애초에 공연에 나오지 못한 이유도 어디 다쳐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라고 들었으니까.
“벌써 이렇게밖에 돌아다녀도 괜찮겠어?”
“…아직 좀 무섭긴 하지만.”
아리는 강우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텔 방에서 라이브를 보니 꼭 제 입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예의 바른 꼬맹이로구만.
강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정신 차리고 다음 공연에는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그래.”
또 아이돌이 되는 건 사양이다.
“그, 그래서 보상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가 받기로 한 공연료를….”
“아냐, 됐어.”
“하지만….”
“대신 앞으로도 에키드나랑 친하게 지내달라고.”
“무, 물론이죠! 에키드나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인걸요!”
아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볼… 아, 맞다. 너희 소속사 사장한테 전해줘라.”
“무슨….”
“앞으로 공연 계약 좀 똑바로 하라고. 몬스터한테 습격당한 애가 충격받아서 못 나온다는데 위약금이 뭐냐, 위약금이.”
아무리 공연 한 번에 수십억 단위의 돈이 움직인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위약금이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리.
“이번 일은 피치 못할 재난으로 인한 거라 불참한다 해도 따로 위약금은 없었는데요?”
…뭐?
* * *
서울 근교에 있는 임대주택.
강우가 10주년 결혼기념일 선물해 준 추억이 깃든 집 안에 한설아는 조용히 앉아 무언갈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릉!
테이블 위에 놓은 스마트폰이 울렸다.
-설아!
“에키드나니?”
-응응!
“공연은 잘 끝났고?”
-응! 팬들도 아주 좋아해 줬어!
“후훗. 그래?”
설아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약속한 동영상은….”
-잠시만 기다려봐!
에키드나가 보내온 동영상에는 공연 전날 강우가 아이돌 복장을 입고 열심히 춤을 연습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으으으으!”
동영상을 본 설아는 스마트폰을 끌어안은 채 행복에 겨운 발장구를 쳤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이번에 보내온 것은 사진.
바로 변형의 권능을 푼 강우가 사이즈에 맞지 않는 아이돌 복장을 입은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 어머, 어머, 어머! 이건 대체 어떻게 구한 거니?!”
-흐응! 운이 좋았어! 거울 쪽에 몰래 카메라를 숨겨뒀는데 다행히 안 들켰거든!
한설아는 바로 사진을 스마트폰에 저장한 후 개인용 클라우드에 업로드했다.
“하아. 강우 씨의 아이돌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귀한 사진까지….”
세상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베베 꼬는 설아.
-저… 서, 설아. 시킨 대로 했으니까… 그….
“걱정하지 말렴. 약속은 지킬 테니까.”
한설아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에키드나 네가 강우 씨의 네 번째 부인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고, 고마워 설아!
그렇게.
무대 뒤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