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Don't Propose to Me! RAW novel - chapter 119
늦게 편지를 보낸 거에 대해서는 할 변명이 많아. 나와 아버지는 3년간 처신을 조심해야 해. 여행은 꿈도 못 꾸지.
1년이 지난 지금에야 편지를 보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야. 아마 이 편지도 너보다 란도국 사람이 먼저 읽었을걸?
그래도 괜찮겠지? 별 내용 없으니까 말이야.
이제 1년 하고도 조금 남았네. 그때라고 남들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가고 싶어.
내가 작성한 버킷리스트 첫 번째가 그거거든. 너를 만나러 교황령에 가는 것.
그때까지 잘 지내. 나 보면 꼭 좀 반겨 주고, 비비.
선배 줄리아가.
* * *
“알레스! 뤼디어 박사님!”
한겨울이 꺾이고 마침내 교황령에 봄이 찾아왔다.
작은 밭을 관리하는 중이던 알레스와 뤼디어 박사는 날 발견하고 싱긋 웃었다.
나는 서류를 들고 질펀한 땅을 밟았다. 어젯밤 잠깐 비가 와서인지 발이 푹 꺼졌다. 빗물이 묻은 싹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 걷던 난 마침내 뤼디어 박사 앞까지 도달했다.
“우리가 나가면 되는데, 왜 여기까지 들어왔어?”
뤼디어 박사가 더럽혀진 내 신발을 보고 잔소리했다.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물뿌리개 주세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물뿌리개를 들었다.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구나. 뤼디어 박사는 내 행동이 불안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봤다.
“저 잘하죠?”
“……어제 비가 와서 그곳엔 물을 뿌릴 필요가 없어, 비비.”
“아.”
그렇구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물뿌리개도 슬며시 내려놨다.
“오늘 주말인데 일하러 간 거야?”
뤼디어 박사님이 잡초를 뽑으며 물었다. 나도 박사님을 도왔다.
“네, 갑자기 일이 있다고 의원님께서 불러서요. 큰 인계를 앞두어서 그런지 도서관이 항상 바빠요.”
“그런데도 이사까지 한다니. 타이밍을 너무 잘못 잡은 거 아니니?”
“그쪽 일은 코스탄스가 거의 다 하고 있어요. 주말에 쉬니까요.”
뤼디어 박사가 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와 코스탄스의 이사가 결정된 순간부터 박사님은 저런 꽁한 표정을 자주 드러냈다.
이곳에 온 지 이제 1년 조금 지났는데 벌써 이사할 필요가 있냐는 뜻이었다.
1년. 짧은 시간이긴 하였으나 우리는 그사이 교황령에 적응했다.
나는 시험을 준비하여 교황령 도서관 사서직에 합격했고, 코스탄스는 팔라딘 소속으로 현재 교황청 재판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뤼디어 박사와 알레스는 전공에 맞는 교육 기관에 들어가 아이들이나 사제를 가르치니, 다들 착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다잡았다.
“비비!”
뒤에 있던 알레스가 날 불렀다.
“거기서 잡초만 뽑지 말고 나 좀 도와줘!”
들려오는 소리에 뤼디어 박사님의 눈치를 흘끗 보았다.
“이사가 끝나면 꼭 초대하고.”
“당연하죠. 특급 손님인데.”
“그래, 어서 가 봐.”
허리를 일으키곤 서류를 챙겼다. 푹 꺼지는 발을 떼자 알레스가 부담스러운 눈으로 내 행동을 좇았다. 앞에는 잡초 하나 없는 깨끗한 밭이 있었다. 알레스가 다른 일로 불렀구나, 나는 예상했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인지 또한 얼추 예상되었다.
“줄리아한테 편지 왔죠?”
알레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뭐?”
“모른 척 마요. 알레스한테도 왔잖아요, 편지.”
“……별 내용 없었어.”
“줄리아가 궁금해하던데요. 알레스가 결혼했는지요.”
알레스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했으면 주말마다 박사님과 밭에 나와서 잡초를 뽑고 있진 않을걸?”
“박사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시겠어요.”
다행히 뤼디어 박사님은 듣지 못한 듯싶었다. 잡초 뽑기에 집중하는 박사님 뒷모습을 보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이사한 집은 좋고?”
“아직 짐 정리 중이에요.”
“교황청과 멀어서 불편하지 않아?”
“그래도 차 타고 30분 거리인데요. 제가 코스탄스가 운전을 열심히 배우고 있단 말 했나요?”
알레스가 웃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코스탄스의 늘지 않는 운전 실력에 대한 소문이 박사님뿐만 아니라 보육원 아이들, 교황청에 계시는 예하들 사이에서도 쫙 퍼졌다.
코스탄스는 아직 눈치 못 챈 거 같지만.
그게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멀더라도 유진과 함께 살려면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게 좋지.”
“네. 그러기 위해서는 어서 짐을 정리해야겠지만요.”
“그래, 코스탄스가 기다리겠다. 얼른 가 봐.”
“짐을 다 정리하면 초대할게요. 박사님과 함께요.”
내가 슬슬 갈 준비를 하자 알레스도 허리를 일으켰다. 알레스의 팔을 붙잡고 밭에서 나온 후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리고 뤼디어 박사와 한 번, 알레스와 한 번 포옹했다.
“답장하는 거 잊지 마세요.”
알레스를 안으며 속삭였다. 그는 못 들은 척했으나, 오늘 밤 편지지 앞에서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고민할 알레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 * *
교황령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1년이 훨씬 넘어갔다. 버스에 올라탄 후 바다를 끼고 달리는 좁은 도로를 살폈다.
투명한 바닷물 위로 물고기를 잡는 어선이 여러 척 보였다. 창문을 살짝 열자 바다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교황청이 마련해 준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사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만의 공간을 원했다. 한 달 전 교황령 측에서 붙인 감시망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부터였다.
그때 코스탄스와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술을 마시며 종일 얘기하는 일탈을 저질렀다. 그 작은 일탈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는지 몰랐다.
다른 하나는 서류상으로 유진이 코스탄스의 남동생이 됐다. 우리는 유진과 같이 살 넓은 집을 원했다.
그래서 고른 게 오늘 이사한 집이다.
숲 안쪽에 있는 정원 딸린 집으로, 안나나 세스가 놀러 와 뛰어다니기도 충분했다. 학교까진 거리가 조금 있는 게 흠이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아 하니 마음이 놓였다.
1년 사이에 많은 게 변했다. 우리 모두 교황령에서 자리 잡았고, 나는 공식적으로 비비 페런이 되었다.
14년간 사용했던 이름이기에 비비 페런이라 불려도 편했으나 박사님들은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지금은 그들도 제법 비비라는 이름에 적응한 것 같다.
……그렇듯 많은 게 바뀌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토람드와 란도국에서도.
그간 미루었던 국제 체육 대회가 올해 여름에 개최되었다. 란도국, 토람드가 손잡고 함께 개최한 대회는 큰 관심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대회 내내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한마음으로 선수들을 응원했다. 식당에는 늘 사람이 넘쳤고, 다들 맥주나 와인을 시켜 놓고 종일 그날 벌어진 시합이나 대회에 대해 얘기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메달을 놓치게 되어 모든 이들이 안타까워하기도 하지 않았나.
끼익.
버스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버스에서 내려 고요한 동네를 살펴보았다. 앞에 보이는 것은 나무가 일렬로 나열된 넓은 길이었다. 그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작은 성당과 학교가 나왔다. 드문드문 있는 주택 지붕 색깔도 다 달랐다.
나는 옆쪽에 난 샛길로 들어갔다. 나무를 헤집고 조금 걷자 트인 공간과 함께 꽃이 핀 정원이 보였다. 나무로 된 이층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코스탄스의 집.
“비비!”
코스탄스가 날 발견하고 불렀다. 정원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아침과 다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새 짐을 다 옮기고 정리했는지 깨끗했다. 집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코스탄스!”
내가 달려가자 코스탄스가 팔을 옆으로 활짝 벌렸다. 나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다녀왔어요!”
“빨리 오셨네요. 일은 괜찮았습니까?”
코스탄스가 내 머리에 입 맞추며 물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것보다 벌써 다 정리한 거예요?”
“네. 무척 재밌었습니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비비.”
코스탄스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안방으로 안내했다. 얼굴에 걸린 환한 미소와 어서 빨리 보여 주고 싶어 안달 난 코스탄스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여긴 침실입니다. 제가 침대를 옮겼죠.”
“혼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큰 침대를? 이 전등은 당신이 꾸민 거예요? 꽃은 언제 장식했어요?”
“다 제가 했습니다.”
“예뻐요. 되게…….”
“그렇습니까?”
코스탄스는 완전 아이 같았다.
“감상평 더 들려주십시오.”
감상평이라니. 이리 완벽한 곳이 있을까? 햇살도 잘 들어왔고, 쾌적한 방은 내가 꿈꾸던 그대로였다.
아기자기한 옷장에 곳곳에 놓인 녹색 식물은 눈을 즐겁게 했다.
“말이 안 나오는데요. 이 침대에서 종일 나오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럼 종일 있으세요. 제게도 기쁜 일이니.”
나는 코스탄스 옆구리를 툭 쳤다.
“식당도 다 정리해 놨습니다. 어서 가요, 비비.”
내가 뜸 들이자 답답했는지 그가 날 안았다.
“아, 잠시만요! 코스탄스.”
코스탄스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도착한 식당에서는 6인용 식탁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나마 식탁은 어젯밤까지 나도 꾸몄던 터라 익숙했다. 그러다 안쪽 주방에 놓여 있는 새로 산 식기와 아기자기한 컵들을 발견했다.
“어떻습니까?”
“이 그릇, 내가 그때 고른 거네요.”
“저도 이 그릇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그릇이 아니니…….”
코스탄스는 다시 이동했다. 미소를 활짝 지으며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그는 매우 기뻐 보였다.
식당을 지나 쭉 나오면 붉은색 카펫 위에 놓인 커다란 소파가 있다.
편안히 누워 티브이를 볼 수 있는 공간에 코스탄스는 날 소파에 눕힌 후, 자신도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진짜 안락하네요. 저번에 앉았을 때보다 더 편한 거 같아요!”
“위층은 더 놀라울 텐데.”
그는 내 머리를 만지며 속삭였다.
“2층은 유진 방이랑 책방이 있죠?”
“네. 2층을 구경한 다음 정원 뒤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랄 거예요, 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