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op our Pope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3.
“기특하네.”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 피어오른 새하얀 성화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지자로서 피워 낼 수 있는 성스러운 불꽃.
성화.
저 불꽃은 틀림없이 지구에서 각성한 우리 교단의 선지자 중, 유일하게 이번 전쟁에 동원된 주원이의 불꽃일 것이다.
무협 소설에서 후지기수들을 양성하는 스승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레이스도 내가 열심히 가르치긴 했다만, 결국 바티칸에서 위탁 교육을 보낸 거였기 때문에 딱히 막 뿌듯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전장을 수놓는 저 성화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막내가 큰일 했어.”
선지자 중의 막내.
비록 첫째랑 둘째가 나이가 너무 어린 바람에 전장에 데려오지는 못했지만…… 아마 전장에서는 주원이를 따라가지 못했을 거다.
실전 경험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다.
주원이는 재각성을 통해서 우리 교단의 선지자가 된 케이스.
이능관리부에 속했던 시절 쌓았던 경험이 고스란히 개화했다.
이번 전투는 주원이의 첫 데뷔기도 했다.
그간 선지자였음에도 큰 존재감이 없었던 주원이.
그런 주원이가 이제 한 명의 선지자로서 온전히 전장 위에 서 있다.
우리 교단에 있어서 그건 큰 축복이었다.
어쩌면 리멘이 신경을 많이 써 준 게 아닐까?
선지자의 존재는 우리 교단에게 있어서는 모닥불과도 같다.
어둠을 밝히며, 주위에 온기를 나눠 준다.
-환한 불빛입니다. 교황님께서 피워 올리시는 줄 알았더니만, 불지기는 다른 친구인가 봅니다?
귓가에 라파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교단의 미래죠. 불이 밝죠?”
-보는 것만으로도 따듯합니다. 보기 좋습니다.
“우리도 슬슬 끝냅시다.”
본대가 전장에 참여한 순간, 이미 적들은 패배를 직감했다.
아무리 덩치가 큰 놈들이라도 갈갈이 찢겨 나간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자현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적들의 충원 병력들을 막아 내고 있었고, 라파엘의 화력은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적의 우익을 휩쓸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서 발악을 해 대던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뽑아 버린 다음, 천천히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승기는 이미 이쪽이다.
대승, 그것도 엄청난 대승이 눈앞에 있었다.
이레귤러 전원을 투입한 엄청난 규모의 전투.
각 지역에 투입된 이레귤러들은 이름값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줬다.
전술?
어쩌면 처음부터 전술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크하하하하하하!”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사기를 깎아 내리는 에이든.
콰아아아아앙-!
-우익 반파.
엄청난 화력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라파엘.
-적 증원군 끊었습니다.
거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자현이까지.
이레귤러들의 활약 속에 전투는 어느새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적들은 생존을 위해서 한 점으로 뭉친다.
지능이 있는 놈들은 저런 게 무섭다.
살기 위해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되어 있고, 아군이 밀리고 있을 때.
불완전한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저거다.
일점 돌파.
가용한 모든 전력을 이용하여, 포위망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꿰뚫고 도망친다.
“그래, 쉽게 죽으면 재미없지.”
나는 드론을 통해 샅샅이 들어오는 적들의 진형을 살피면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저 녀석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게다가 저 녀석들이 노리는 ‘취약한 부분’이 어딘지도 잘 보인다.
우리 리멘 교단의 병력이 활약하고 있는 좌측면.
난전으로 인해 두께가 헐거워진 바로 그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녀석들의 중심에는 백명교의 잔당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대가리는 좀 돌아가는 놈들답게 본인들의 유일한 돌파구가 어디인지 찾아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미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이상, 녀석들에게 탈출구는 없다.
처음부터 부서져 가던 희망.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우우우웅.
격을 움직여서 공간을 접었고, 곧바로 탈출을 꿈꾸는 녀석들 앞으로 이동했다.
전투의 패잔병들.
셀 수 없이 다양한 이종족으로 구성된 그 패잔병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절망에 물들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희미한 희망을 짓밟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특히, 나를 마주하자마자 잔뜩 쫄아 버린 저놈들이라면 더더욱 쉽다.
“슬슬 끝내야지?”
지겨운 전투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나는 손을 가볍게 까딱여서 신성력을 방출했다.
잠시 후.
우우우우우우웅-!
내 등 뒤에 수천 개의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를 빼곡하게 메우는 수천 개의 창을 본 순간, 적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본인들의 죽음을 직감한 걸까?
녀석들은 떨리는 손으로 무기를 움켜쥔다. 그리고 괴성을 내지르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끼아아아아아아!
최후의 발악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들을 비웃어 주면서 한 번 더 손가락을 까딱였다.
“끝이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창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이어진 소낙비.
소낙비가 그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깊숙이 파여 버린 구덩이를 들여다보면서 가볍게 숨을 뱉어 냈다.
승리였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
이제 남은 건 최대한 신속하게 패잔병들을 제거하는 것뿐.
그렇게 나는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다시 전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4.
그로부터 2시간쯤 뒤.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대승입니다.”
“아군 측의 피해를 집계하고 있지만, 사망자가 굉장히 적습니다. 부상자들은 현재 리멘 교단의 사제들이 치료 중입니다!”
“미리 지급한 최상급 성수가 큰 효과를 봤습니다!”
임시 사령부로 복귀한 참모들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아군 측의 피해를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었으나, 적은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공중을 통해서 도망가려고 했던 마지막 패잔병 무리들도 결국 라파엘의 화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잿더미가 되었으니, 사실상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압도적인 교환 비율.
동북아시아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 정도 스케일의 전투는 없었다.
전쟁의 승기를 좌지우지할 규모의 전투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으니 다들 표정이 밝을 수밖에.
나는 사령부의 천막에 가만히 앉아서 루나가 전해 주는 보고를 들었다.
“사망자 170명. 부상자 305명. 이상입니다. 사망자들 중 110명이 에덴에서 넘어온 성기사들입니다.”
“……내가 예상하고 있는 그 이유 맞아?”
“그들은 교단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죽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의 죽음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미리 작성한 유서에 따라, 그들의 시신은 서울 신전에 함께 안장될 예정입니다.”
전투 규모에 비해서 사상자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전투는 언제나 죽음을 부른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항상 이 보고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저려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료의 죽음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그 고통에 익숙해질 뿐.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상자들 치료에 전념해 주고.”
우리 교단이 가장 먼저 적진에 침투해 준 덕분에 본대의 피해는 우리보다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걸 위안 삼기로 했다.
쓰러져 간 동료보다는 구해 낸 동료가 많다는 것.
죽어 간 이들이 산 자들을 지켜 주었으니, 그걸로 그들은 편히 눈을 감을 것이다.
루나는 내 말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천막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채아가 위로의 말을 전해 왔다.
“리멘 교단의 희생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살아남았습니다. 위대한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 말은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리멘 교단은 이곳에서 재정비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점령 작업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레귤러들이 없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과만 보자.
결과는 대승이고, 승기는 이쪽으로 왔다.
이번 전투에서 적이 이레귤러급 전력을 동원할 거라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갔다.
그래서일까?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우리가 무언가 놓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이래서 의심이 많으면 귀찮다니까? 대승인데도 마냥 기뻐할 수도 없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천막 내부에서 활발히 의견을 교류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향후 전략을 논의하기 전에 간단히 기도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합동 장례식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그들의 명복을 빌어 줘야 한다.
악한 이들을 막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이들에게 예의를 표하는 건, 교황인 내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내 말에 천막 안의 모든 이들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정의로운 길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 이들에게 당신의 따듯한 품을 내주옵소서.”
사르르르.
기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빛 가루가 천막을 빠져나가 허공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당신이 그들을 찬란한 길로 이끌 것을 믿사옵니다. 당신의 사랑이 그들에게 닿기를.”
기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응답은 확실했다.
「걱정하지 마, 시우. 그들 모두를 내 눈에 담았으니까.」
귓가에 리멘의 따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이 지구에서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에덴에서처럼.
내 모든 기도에 응답을 해 준다.
그것만큼 든든한 게 또 어디에 있을까?
나는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다시 강채아 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화자 쪽 전선에 대한 첩보는 들어왔습니까?”
비슷한 시각, 정화자들 역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질문에 강채아 씨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교황님께서 ‘루시퍼’라고 명명한 개체가 이끄는 병력이 타이위안을 돌파 중입니다. 해당 방어선이 뚫리면 베이징까지 최단 경로가 뚫리는 셈이에요. 역시 교황님께서는 마지막 전장을 베이징이라고 보시네요.”
“확신합니다.”
테라의 말에 따르면 고대 신 놈들이 그곳에서 ‘회합’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모든 건 그곳에서 끝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르지 않는 게 어디인가?
그나저나 루시퍼 그 새끼, 에덴에서는 최종 보스 느낌을 풀풀 풍겨 대더니만.
여기에서는 그냥 ‘허접한 졸개 1’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구나.
과연, 그 녀석은 변수가 될까?
지난번에 봤던 무명의 힘을 생각해 본다면…… 변수가 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무명은 언제든지 루시퍼를 잡아먹을 수 있을 거다. 그럼에도 그냥 두는 건, 루시퍼가 지닌 전술적 역량을 버리긴 아까워서겠지.
루시퍼는 에덴의 전쟁을 총지휘했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아.”
그래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전투의 대승을 통해 우리들은 가장 큰 장애물을 치워 냈다.
이제 남은 건 베이징까지 확 뚫어 버리는 것.
내가 그렇게 참모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쯤이었다.
[시스템의 관리자가 당신에게 대화를 신청합니다.]갑자기 테라가 말을 걸겠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고, 곧 귓가에 테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황, 우리가 당한 것 같은데?
……뭐가?
-양면 전선을 연 이유, 대강 파악했다. 이번 전쟁에서 희생되는 모든 영혼이 제물이다. 녀석들은 양쪽에서 제물을 흡수하는 거였어. 인구가 많은 그 땅에서 회합을 여는 이유도 바로 그거다. 이세계에서 데려온 놈들을 그냥 죽게 놔둔 것도…….
아무래도 아까 전에 느꼈던 불길함의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우리 교황님 좀 말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