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op our Pope RAW novel - Chapter (93)
93화
5.
백명교와 루나가 동시에 공동에 모습을 드러내자, 공동 내부의 분위기는 빠르게 식었다.
백명교가 내뿜는 기세에 설화 길드와 포터들은 전부 뒤로 물러섰고, 오직 루나만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루나는 내 오른팔에 둘러진 붕대를 바라보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붕대에 묻은 피를 보고 꽤 놀란 모양이었다.
“성하가 피 흘리는 건 분노의 마왕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같이 들어올 걸 그랬다. 회복이 아직도 안 되고 있는 거예요?”
“회복이 많이 더뎌. 자세한 건 이따가 신전 가서 얘기하자. 보는 눈이 좀 많네.”
“굳이 저런 피라미들까지 신경 쓰실 것까지야. 말씀만 하세요. 마침 동굴이기도 하니까 생매장시키면 딱이겠네.”
“우리가 성직자란 사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구나?”
“쟤네들이 모시는 신의 곁으로 보내 주는 것이야말로 성직자로서의 진정한 책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루나는 그 말이 진심이란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허공에서 본인의 철퇴를 꺼내 들었다.
확실히 루나라면 생매장이 가능……할 수야 있겠지만,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래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명분은 일단 저쪽에 있는 상태라서 우선 말로 해결 보는 것이 먼저였다.
“백명의 대구, 경북 교구장을 겸하고 있는 손기열이라고 합니다. 리멘 교단의 교황님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쁘지만, 장소와 시기가 적절치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녀석들은 지난번처럼 우리를 적대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수 접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말투와 함께 나를 바라볼 뿐, 교구장이라는 놈의 표정에선 여유가 엿보였다.
그들 역시 명분은 자기들 쪽에 있다는 걸 아는 모양새였다.
“이 던전은 전각련 소속의 설화 길드가 낙찰받은 곳입니다. 리멘 교단 측에서 허가도 없이 토벌에 참여한 것은 논란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상황은 김 실장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내가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인 상황에서, 위법에 준하는 짓을 저지르는 건 정부로서도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저 녀석들은 우리 교단이 무단으로 던전을 빼앗았다며, 여론전으로 끌고 갈 터였다.
안 봐도 뻔하다.
이럴 줄 알고 미리 백설화로부터 참가 승인서를 받아 두기는 했지만, 혹시 모른다.
사람은 원래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다른 법.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 백설화가 참가 승인서를 순순히 인정해 줄지는 의문이었으니까.
나는 이런저런 경우의수를 따져 본 다음, 손기열을 향해 말했다.
“별일 없었는데, 그냥 우리 보내 주면 안 될까?”
“신을 모신다는 분께서 거짓을 말씀하셔야 되겠습니까? 이레귤러가 부상을 입은 게 별일이 아니면, 도대체 별일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는지요.”
“동업자들끼리 깐깐하네. 내가 별일이 없었다고 하면 별일이 없었던 거지. 자꾸 그렇게 따지면 섭섭해지려고 해.”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던전에서 얻으신 것이 있다면 저희들에게 내어주십시오. 조용히 내어주신다면 저희도 더 이상 잘못을 묻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
명분이란 게 원래 저런 거다.
명분을 신경 쓰지 않는 미친놈들은 몰라도, 명분을 신경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명분은 아주 훌륭한 협상 수단 중 하나다.
명분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몇 개 있기야 하지만, 그 대부분이 교황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방법들 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품속에서 참가 승인서를 꺼냈다. 그리고 신성력을 통해 손기열에게 날려 보낸 다음, 녀석을 따라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토벌 참가 승인서다. 백설화가 직접 사인한 거야.”
“……그녀가 직접 말입니까?”
“확인해 보면 알잖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내 당당한 태도를 본 손기열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참가 승인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신성력으로 축성을 해 뒀기 때문에 녀석이 찢고 싶어도 찢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녀석이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녀석으로도 안 보였고 말이지.
“믿을 수 없군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력 탈진 현상 때문에 기절해 있는 상태인데, 왜?”
“백설화에게 직접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이건 전각련과 백명교 사이의 협력 관계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녀가 이런 멍청한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지금 그 서류를 조작했다는 소리?”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는…….”
콰아아아아앙!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루나가 철퇴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백명교도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면서 대치를 시작했다.
“이분은 리멘 교단의 첫 번째 사도시자 리멘의 대리자시다. 네깟 놈들이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하께서 내 옆에 계시는 것에 감사해라, 이교도들. 성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직접 너희들에게 불경죄를 물었을 것이다.”
루나가 분을 삭이면서 말했다.
나 역시 그녀의 행동이 절대 과한 행동이 아니란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레벤톤 경이 다혈질이라서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해. 당신이 내 말을 대놓고 의심할 정도의 위치는 아니잖아.”
손기열은 내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뒤쪽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낙찰받은 던전이예요. 다들 그만하시죠.”
설화 길드원들이 마력 포션을 퍼부었던 덕인지, 백설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그녀는 발밑에 얼음 지대를 생성하며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와 백명교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마력 탈진 현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안 그래도 하얬던 그녀의 얼굴에 핏기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면 아까 내가 걸어 준 치유의 축복이 꽤 효과가 있었던 듯했다.
“백설화 대표님. 백명교에서 나온 손기열 교구장이라고 합니다. 지원 요청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저희 쪽에서 지원 요청을 한 건 맞아요.”
“좋습니다. 그런데 이 참가 승인서, 대표님께서 서명하신 게 맞습니까?”
손기열은 백설화에게 승인서를 건네주었고, 백설화는 조용히 그 승인서를 넘겨받았다.
그녀는 승인서를 손에 든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쯤에서 나와 계약을 없었던 걸로 잡아떼고, 백명교의 편을 들어도 전혀 이상한 그림은 아닐 거다.
사실, 그 경우에 대비해서 이미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제가 승인한 거 맞아요. 김시우 각성자로부터 아주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설화 길드 전원이 전멸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제 은인이기도 합니다.”
“응?”
혹시 아까 각혈하면서 뇌손상이라도 당한 건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백설화의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6.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극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 백 대표님의 말씀은 전각련과 본 교의 신뢰 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설화 길드 측에서 김시우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맞습니까?”
손기열은 심각한 표정으로 백설화에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가 우리에게 당당할 수 있었던 근거가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설화의 대답 역시 단호했다.
“네.”
“혹시 사전에 리멘 교단 측과 교감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설화 길드는 전각련에서 제명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럼 제가 묻죠.”
백설화는 싸늘한 표정으로 손기열에게 말했다.
“그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던전에 입장했습니다. 맹세하죠. 저는 제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김시우 각성자의 토벌 참가를 승인했고, 김시우 각성자는 계약에 따라 적법하게 저희를 도와줬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지원 요청을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저희들을 기다리셨어야 합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귀 교를 기다리면서, 저희 길드 헌터들이 죽어 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었나요?”
백설화의 논리는 간단했다.
대표로서 부하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했어야 할 행동이었다는 것.
손기열은 그녀의 논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표로서 부하들의 안전을 우선시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길드에 속하지도 않은 타인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 끝에 결국 손기열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대표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본 교와 전각련 측에서 대표님을 이해해 줄지는 의문이군요.”
“상관없어요.”
“……지금 뭐라고…….”
“이 던전에서 나가는 대로 전각련에서 탈퇴할 생각이에요. 저희 길드의 탈퇴 신청서를 수용하든, 아니면 먼저 제명하든. 그쪽에서 알아서 하시죠.”
생각지도 못했던 급발진이었다.
그야말로 폭탄선언.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온 백설화의 돌발 행동에 눈을 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루나 역시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화끈한 친구네요. 새로 사귄 친군가요, 성하?”
“아직 친구까지는…….”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죠. 성하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사람 취향 모를 일이라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루나의 성격상 들어 처먹지도 않을 테니 해명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은 백명교도 놈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구경하기도 바쁘다.
“표정 참 맛있다.”
“맛집 인정.”
나와 루나의 감탄사 속에서, 결국 설화 길드와 백명교의 대화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백 대표님의 의견에 유감을 표합니다. 부디 그 선택,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
“손기열입니다.”
“잘 들어요. 손기열 씨. 이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고, 당신 따위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한 번만 더 제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인다면.”
사르르륵-.
어느새 생성된 얼음 화살들이 손기열을 겨누었고, 백설화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 혓바닥부터 얼어붙게 만들 겁니다.”
손기열은 백설화의 서슬 퍼런 위협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돌아간다.”
그는 몸을 돌리기 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부하들을 이끌고 빠르게 공동에서 이탈했다.
나는 백명교 놈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녀석들을 지켜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퇴장이었다.
그렇게 한바탕의 대치 상태가 종료되었고, 백설화는 몸을 돌려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한테 도움받았다고 전각련까지 탈퇴할 줄은 몰랐다.”
“착각하지 마. 널 도와주려고 탈퇴한 건 아니야.”
“그럼?”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수장당할 생각은 없거든. 안 그래도 조만간 탈퇴할 생각이었어. 단지 그 시기가 빨라졌을 뿐이야.”
자존심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다.
나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백설화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라면 이 정도의 프라이드는 있어야지. 맞다, 둘이 인사 나눠. 이쪽은 루나 레벤톤. 루나? 이쪽은 백설화. 꽤 괜찮은 냉기 마법사야.”
그 순간, 루나와 백설화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먼저 손을 내민 건 루나였다.
“반가워요, 리멘 교단의 성기사 루나 레벤톤이라고 합니다.”
“백설화예요.”
둘은 손을 맞잡은 채로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으로 대화라도 주고받는 줄 알겠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슬슬 판 정리하고 돌아가자. 팔에 구멍 뚫려서 피곤하다.”
“우리 성하는 참 눈치도 없으셔. 후후.”
루나는 은근슬쩍 나와 팔짱을 끼려 들었고, 나는 루나의 팔을 밀어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은 다친 팔이다. 붕대 감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럼 다른 쪽 팔은 된다는 말씀?”
“되겠냐?”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셨으면서, 내숭 떠시기는.”
피곤하다.
레오야, 네가 보고 싶구나.
나는 치근덕거리는 루나를 계속해서 밀어낸 다음, 백설화에게 말했다.
“던전 토벌 끝났으니까 너희들도 돌아가야지? 살펴서 가라. 오늘 고마웠다. 덕분에 큰 손해 없이 잘 먹고 간다.”
“잠깐만.”
백설화는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일은 제대로 마무리 짓고 가야지.”
“일? 무슨 일.”
“전각련과 대놓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어. 서진 아저씨의 도깨비 길드도 너희 쪽에 합류했다고 하더라?”
백설화 얘, 최서진 대표와 아는 사이였던 건가?
하지만 나는 뒤 이어진 백설화의 말에, 다시 한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설화 길드도 그쪽에 가담하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우리 교황님 좀 말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