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op our Pope RAW novel - Chapter (94)
94화
29. 함께 갑시다
1.
노을빛을 머금은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별장.
하얀색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하얀 코트를 입은 손기열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보고를 이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저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습니다. 김시우가 먼저 도착하여, 성유물을 획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대교구장님.”
“그건 손 교구장께서 죄송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번 일을 예지하지 못한 예지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대교구장이라고 불린 소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의 금발을 스쳐 지나갔음에도 그녀에게선 추워하는 기색을 엿볼 수가 없었다.
그저 붉은색의 눈동자만 고요히 빛나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어떤 성유물을 획득했는지는 확인했나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현장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손기열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색의 점액질이 담겨 있었다.
“신성력을 품고 있는 점액질입니다. 그 특성이 너무 기이하여 이렇게 가져와 봤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군요. 고생 많았어요.”
“교의 연구실로 보내서 성분을 확인…… 대, 대교구장님?”
손기열은 본인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수처리한 유리병을 통해서 겨우 가져온 점액질이었다.
점액질을 이곳까지 운반하는 과정에서 다섯의 부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위험한 물질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대교구장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유리병을 개봉했다. 그리고 그 어떠한 보호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맨손으로 점액질과 접촉했다.
눈보다 하얀 그녀의 손과 검은색 점액질은 잠시나마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으나 그 대비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파스스스슥-!
그녀의 손에 닿은 검은색 점액질이 순식간에 하얀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했어요, 손 교구장님.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본부로 돌아가셔서 예지자들이 이 물질과 접촉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들의 시야가 더욱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위대한 분의 희고 밝은 빛이 당신께 있기를.”
하얀색으로 변색된 점액질을 다시 병에 담은 손기열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시야에서 손기열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을빛이 그녀의 원피스 끝자락에 맺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음산한 목소리가 뻗어 나왔다.
【아이야, 나의 사랑스럽고도 불경한 아이야.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니?】
“김시우.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자는 천칭을 기만하는 자란다.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단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질 하루살이란다. 변절한 우리의 형제들을 잘라 내기 위한 사냥개에 불과하단다.】
“사냥이 끝나면요?”
【통째로 집어삼키면 될 뿐이란다.】
소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난간에 자신의 몸을 잠시 기대었다.
“잡아먹기에는 이제 너무 커 버렸는걸요. 그리고…… 이제 그도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게 될 거예요.”
【달은 차면 이지러진단다. 그러니 기다리면 된단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가 없단다.】
목소리의 은근한 속삭임에,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파도 소리가 서서히 소녀를 덮어 가고 있었다.
2.
옛말에 유유상종이라고 있다.
쉽게 풀이하자면 끼리끼리 논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확실히 우리의 조상님들이 현명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대중교통이냐? 네 마음대로 환승하고 말고 하게?”
막무가내인 사람에게는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꼬이는 법.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백설화 덕분에 유유상종의 참뜻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
“리멘 교단의 미튜브에서 봤어. 리멘님은 한없이 자비롭고 따스한 분이셔서, 갈 곳을 잃은 자들에게 언제든지 품을 내어주신다. 혹시 틀린 말이야?”
“그러니까 그거랑 너희 설화 길드의 ‘환승’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전각련에서 나온 순간, 우리 길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어.”
백설화는 정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뜻을 또박또박 전한 다음, 레오가 내려준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녀석의 마음에 드는 맛이었는지, 커피를 목으로 넘긴 백설화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맛있다. 감사합니다, 레오 대주교님.”
“별말씀을. 쿠키라도 내오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지요.”
“레오야. 올 때 나 위스키 한 병만. 거기 신전 계단 옆 공간 있지? 거기에 몰래 숨겨 뒀어.”
“……레벤톤 경. 신전 내부는 금주 구역입니다.”
“영업 끝났는데 어떻게 안 되나?”
진짜 교황 앞에서 못 하는 이야기가 없다.
아마 레오를 저렇게 놀려 먹을 수 있는 인간은 세상 어디를 뒤져 봐도 루나밖에 없을 것이다.
반으로 접혀질 걸 각오해야만 하는, 문자 그대로의 킬링 조크를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루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야, 너 그냥 나가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어. 아까 보니까 달도 예쁘게 떴더만.”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저에게는 성하 옆에서 성하를 지켜야 하는 숭고한 의무가 있어요. 누가 성하를 보고 응큼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옆에서 지켜 드려야만 한답니다.”
루나는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백설화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런 걸로 따지면 네가 제일 위험해.”
“어머, 들켰네.”
“레오야! 나가는 김에 너네 의누나 좀 끌고 나가라!”
“예, 성하.”
내 명령에 레오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루나를 질질 끌면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집무실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백설화에게 말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설화 길드가 갈 곳이 없고, 리멘 교단 세력에 합류하고 싶다고. 거기까지 말했어.”
“네가 생각하는 ‘세력’ 같은 건 딱히 없다는 것부터 미리 말해 둔다.”
“리멘 교단. 도깨비 길드. 바바리안 플레이어 K, 이능관리부. 전부 너 하나로 인해서 모여든 사람들과 단체야. 네가 뭐라고 말해도, 너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이래서 똑똑한 애들이 싫다.
잡아떼는 것도 힘들고, 쉬쉬하는 것도 힘들다. 나와 상성이 안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
나는 똑 부러지게 말하는 백설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는 걸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백설화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백명교와 네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게 된 순간, 이런 결과는 각오했어.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녀의 선택에는 분명히 내 책임이 존재했다.
백설화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 던전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일어났던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그녀와 그녀 부하들을 구해 준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래의 대가였을 뿐이다.
애초에 그 거래에는 설화 길드의 전각련 탈퇴라는 조항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생각해, 내 편을 들어…….
“너 때문에 그런 선택을 내린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나는 단지 대표로서 내가 해야 하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을 뿐이야.”
……아니라고 한다.
겉보기와 다르게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인가?
“그 자리에서 내가 백명교를 편들었다고 하더라도, 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럼 그들은 당연히 나를 의심하려 들겠지. 사실 그건 토벌 참가 승인서에 사인을 한 순간부터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때 이미 전각련을 탈퇴할 각오까지 한 거라고? 도대체 왜?”
“아까 말했잖아.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릴 바에야, 네 손을 빌려서 내 부하 한 놈이라도 더 살리는 게 낫다고. 내 부하 놈들이 좀 모자라긴 해도, 나만 보고 모여 준 놈들이거든. 딸린 가족 있는 놈들도 꽤 많은데…… 한 놈이라도 더 살려서 보내야 하잖아.”
문득 그녀가 아까 던전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검은색 점액질에 뒤덮인 자신의 부하들에게 비정하게 마법을 시전했던 모습.
아마도 그건 최선의 판단을 통해서 한 명의 부하라도 더 구하겠다는 판단이었을 거다.
그 뒤에 보여 주었던, 피를 토하면서까지 던전의 붕괴를 막았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서야 이 백설화라는 사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탈퇴하겠다고 말했으니 전각련 쪽에서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불이익을 줄 거야. 여태까지 그랬으니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김시우, 네가 필요해. 나는 네 도움 없이도 거뜬히 버틸 수 있지만, 내 멍청한 부하들은 안 그래.”
백설화가 쥐고 있던 커피 잔이 살짝 떨렸다. 내색은 안 하고 있으나 그녀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묵묵히 커피를 목으로 넘긴 다음,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것 참.”
나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내가 나쁜 새끼가 되어 버리잖아.”
“긍정적으로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
“말이라도 못하면. 쯧.”
외통수였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쁜 외통수는 아니었다.
“시간을 좀 줘. 늦어도 내일 점심까지. 다른 사람들 의견도 물어보게.”
“좋아.”
내 대답에 긴장이 풀렸던 걸까?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잠깐이나마 미소가 엿보였던 것 같았다.
3.
다음 날 아침.
오래간만에 신전에서 모인 동료들에게 백설화와 백설 길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꽤 설전이 오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결과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뭘 고민합니까? 받으시죠.”
“저도 최 대표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저 역시 차마 그분들을 내치자는 말을 할 수 없군요. 수하들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뭐야. 다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반대할 수 없잖아? 그럼 나도 찬성.”
최 대표, 민수 씨, 레오, 루나.
전원 찬성.
다들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똑 부러지는 친구입니다. 경험해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임기응변을 비롯해서 판단 능력도 좋습니다. 오히려 대외적인 이미지로 인해 과소평가되는 편이었죠.”
이쪽은 최서진 대표의 솔직한 평가.
“저는 최 대표님처럼 감히 그분을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백설화 대표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 파워는 아주 큰 도움이 되어 줄 겁니다. 그녀는 900만 구독의 미튜브 채널뿐만 아니라, 전각련의 얼굴마담이기도 했으니까요.”
이쪽은 민수 씨의 평가.
루나와 레오는 사실 백설화에 대해 크게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결국.
“그럼 제 표까지 해서 찬성 5 반대 0, 만장일치로 설화 길드와 백설화를 받아들이기로 합시다. 이의 없으시죠?”
백설화와 설화 길드의 합류가 확정되었다.
우리 교황님 좀 말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