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엄밀히 말해, 육철완의 랭킹전은 성공적이라 평할 수 있었다.
실제로 B랭커의 등급으로 A랭크 에스퍼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으니까.
티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육철완은 그것을 해냈다.
하나, 랭킹전 이후 그의 얼굴은 한 번도 밝은 적이 없었다.
‘이대로는 짐만 될 뿐이다.’
구건이를 상대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유효타를 한 대라도 꽂기를 바랐건만, 유효타는커녕 개미 눈곱만큼의 대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그 결과, 천해선의 양팔이 찢겨 나갈 때 그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이레귤러의 멤버들은 천해선이 위기에 빠졌을 때 각자의 능력으로 그를 보필했다.
강정현은 자신이 소환한 나무가 썩어들어 갈 때까지 2차 대미지를 막았고, 마리아와 비수는 피를 한 사발 토하면서도 스킬을 거두지 않았다.
한데, 자신은?
간신히 숨만 붙은 채 회복실에 있는 게 전부였다.
기생충.
구건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칼날로 변해 하루가 멀다하고 폐부를 찔러 왔다.
랭킹전이 끝나고, 육철완은 천해선에게 진지한 말을 꺼냈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좀 더 강해지고 싶다고.
마음 착한 천해선은 ‘지금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고 했으나 육철완은 완강했다.
이대로라면 제 발로 이레귤러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 그러기에는, 눈앞의 동료들이 너무나 좋았다.
클린업클랜의 리더로 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
육철완은 멤버들에게 진한 동료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강해지고 싶었다.
당당한 이레귤러의 일원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공들인 디바이스’라는 진 박사의 말은 육철완의 가슴을 격동하게 만들었다.
“디바이스라고 부를 만한 건 다 나온 거 같은데…….”
비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훑는다.
프라니움처럼 오색으로 빛나는 소재가 있었다면 진즉에 알아봤을 터.
그녀의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물건은 없어 보였다.
“어?”
무심코 테이블을 훑던 비수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테이블 위에 감촉이 느껴졌던 것.
비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물건을 확인했다.
투명하고 아주 얇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식별하기 힘든 물건이 있었다.
독침처럼 가늘고 긴 디바이스.
물건을 확인한 천해선이 입술을 움찔했다.
“저…… 건…….”
“아는 물건이야?”
“알다마다.”
천해선은 쓰게 웃었고, 다른 멤버들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천해선이 고개를 돌려 진 박사에게 묻는다.
“서큘레이터(circulator)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그래. 맞다.”
“일반적인 헌터에게도 사용해도 될까요?”
“궁합이 잘 맞으면 가능할 게다.”
“과연……. 그렇군요.”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비수가 버럭 성을 냈다.
“우리도 알려 달라고! 우리가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야?”
“낄낄.”
천해선이 한차례 고소를 짓고 난 뒤 진 박사에게 청했다.
“박사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세요.”
“……그러지.”
진 박사가 비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비수는 순순히 서큘레이터(circulator)를 넘겨주었다.
“해선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해선이는 막 각성을 끝냈고, 신체가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헤에. 저 무식한 괴수가 상태가 안 좋을 때도 있었어요?”
“하하하. 상상이 가질 않지요?”
진 박사가 손가락으로 투명한 디바이스를 빙빙 돌린다.
거대한 바늘이 연구소 조명을 받아 수시로 반짝거린다.
“해선이의 말처럼, 이건 서큘레이터(circulator)라고 부릅니다. 몸 안의 에테르를 순환시켜 주는 용도지요. 각성을 한 지 얼마 안 된 헌터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아항. 에테르를 컨트롤하는 용도군요?”
“그렇습니다.”
“어……. 근데 그러면…….”
비수는 뒷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차마 디바이스를 만든 당사자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육철완에게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아니, 육철완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헌터들에게 쓸모가 없다.
이제 막 각성한 헌터라면 모를까, 헌터 자격증을 딸 때가 되면 대부분은 자신의 에테르를 갈무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톱 티어 헌터들이 아닌가.
단순히 에테르를 순환시키기 위해 만든 디바이스라면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수는 입을 꾸욱 다문 채 눈치를 살폈고, 진 박사는 그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수 양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
“하지만 이 서큘레이터(circulator)는 헌터 본인이 가진 에테르만을 케어 하지 않습니다. 외부로 들어온 긍정적인 기운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하지요. 게다가 디바이스가 가진 특별한 메커니즘이 해당 효과에 영속성을 불어넣습니다.”
비수는 ‘헤~’ 하고 입을 멍하니 벌렸고, 천해선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셔야 돼요, 박사님. 얘 헌터 자격 시험 필기도 턱걸이로 합격한 친구라서요.”
그러자 진 박사와 비수의 얼굴이 동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수는 당연히 창피해서 그런 것이고, 진 박사는 ‘그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아닌가’라는 얼굴이었다.
“야…… 야!! 내가 그때 벼락치기로 해서 그런 거잖아!”
“벼락치기도 성과가 나올 때 쓰는 말이지. 그 정도면 벼락은커녕 정전기도 아깝다.”
비수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고, 천해선은 재빨리 ‘독보’로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감히 에스퍼 주제에(?) 어딜 물리력을 행사해?
라는 비웃음과 함께.
“죽어! 이 새끼 죽어!”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 습니다.”
스스로 납득하려는 듯한 진 박사의 말에 비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흥! 놀릴 만큼 놀렸으면 이제 쉽게 설명 좀 해 보시죠?”
“오해입니다, 비수 양. 흠흠. 앞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면…… 이 서큘레이터는 외부의 기운을 사용자의 것으로 치환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 보내 주는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누군가 보내 주는 에너지라면…… 버프?!”
“맞습니다.”
“시바, 개쩌네!”
비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어른 앞에서 쓰는 표현치고는 너무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날것의 반응이 절로 나올 만큼, 이 서큘레이터가 가진 기능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비수가 보내 주는 ‘버프’를 일회용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몸 안에 축적할 수 있다면?
이론상 육철완은 끊임없이 강해지는 게 가능하다.
“철완 헌터님.”
“네, 네.”
“그전에도 비수 양의 버프를 받고 난 이후에 조금씩 강해졌다고 하셨죠?”
“네…….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확실히 이전보다 에테르의 양이 많아졌습니다. 천해선 헌터님께서도 확인을 해 주셨구요.”
“원체 ‘버프’를 사용할 수 있는 헌터가 극소수이긴 합니다만, 그중에서도 비수 양의 버프는 유니크 한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선이의 말에 따르면, 비수 양의 버프는 시간이 지나도 효력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철완 헌터님처럼 티어가……. 흠흠, 낮은 헌터일수록 그 잔상이 많이 남는다더군요.”
그래서 고안해 낸 물건이 바로 이 서큘레이터였다.
천해선의 몸 안에서 독과 치유 능력이 격돌하는 것처럼, 육철완의 몸에서도 본인과 비수의 에테르가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가지 기운을 하나로 잘 섞으면, 육철완은 모든 헌터들이 바라는 꿈의 영역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무한 성장이라는 영역에.
“이 서큘레이터를 통해 비수 양의 버프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진 박사가 잠시 동안 견적을 내 본 뒤 말을 이었다.
“두세 달이면 ‘S’티어에 준하는 에테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우와……!!”
그 감탄사는 육철완이 아닌 강정현과 비수에게서 튀어나왔다.
정작 당사자인 육철완은 입이 쩌억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리아 또한 감탄사를 터트리는 대신, 휘둥그레진 눈으로 육철완과 서큘레이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티어는커녕 에테르 수치 한 자리를 올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진 박사의 말대로라면, 이건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발전이었다.
“정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육철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진 박사는 대답 대신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놀라지 마십시오.”
진 박사가 육철완의 두꺼운 가슴 앞쪽에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는 서큘레이터가 둘러쳐 있었고, 곧 디바이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무슨…….”
육철완이 무어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서큘레이터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확.
“으…… 으아아아아아아!!”
“꺄악!!”
“낄낄.”
이 경악스러운 광경 속에서 이상한 반응이 하나 새어 나온다.
낄낄이라니.
비수가 앙칼진 눈을 하고 천해선을 노려본다.
“웃어? 지금 이 장면이 웃겨?”
그러나 천해선은 비수에게 대답하는 대신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육철완에게 물었다.
“철완 아저씨.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서큘레이터는 살아 있는 것처럼 심장을 파고든다.
하나 무슨 귀신의 조화인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 천해선도 깜짝 놀라 세상 무너지는 소리를 내었지만, 곧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실제로는 전혀 아프지 않았으니까.
“……쥐구멍을 좀 찾고 싶군요.”
역시나 육철완은 귀밑이 시뻘게진 상태로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힘껏 내지른 비명 소리가 무색하게, 그는 너무나도 멀쩡한 상태였다.
“뭐야, 안 아픈 거예요?! 어휴! 사람 놀라게!”
비수가 육철완에게 눈을 흘기며 그의 태산 같은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어쨌거나 서큘레이터는 그렇게 육철완에게 장착되었고, 진 박사는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매일 비수 씨로부터 일정량의 버프를 받으십시오. 서큘레이터가 알아서 그 기운을 흡수해 줄 겁니다. 한동안은 정상 컨디션이 아닐 겁니다. 속도 메스껍고, 육체의 온갖 곳에서 격통이 일어날 겁니다.”
마치 몬스터 독에 중독되었을 때의 내 모습 같군.
천해선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삼켰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지면 쉬었다 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스스로 페이스 조절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네. 쉬엄쉬엄하겠습니다.”
육철완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저 신세 지기 싫어하는 남자의 성정을 보건대, 죽기 일보 직전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킬 것이다.
“고통이 멈추는 그때, 서큘레이터의 활동이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는…….”
진 박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한 채 말을 이었다.
“육철완 헌터님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 될 겁니다.”
* * *
“와!!! 저거!!! 저거!!!”
잔뜩 들뜬 목소리가 공항 전역에 울려 퍼진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가락으로 쉴 새 없이 삿대질을 하는 ‘S’랭크 에스퍼.
수려하지만 날카롭게 생긴 청년이 그녀에게 핀잔을 준다.
“비행기 처음 타냐. 촌스럽게 이러지 마.”
“헤헤. 미안. 너무 신나서.”
혀를 살짝 내밀고 머쓱해하던 그녀가 돌연 정색을 한다.
“가만. 따지고 보면 너도 처음 아니야? 아파서 빌빌댈 동안 어디 못 갔을 거 아냐.”
“오호. 전세기치고는 사이즈가 제법 크네.”
“시바! 천해선! 딴청 부리지 말고 대답하라고!”
붉은 머리칼의 에스퍼가 천해선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허공을 움켜쥐고 만다.
“저런 똥물에 튀길 놈!”
십 대 후반의 욕설이라고는 도저히 밑기지 않는 말이 사방에 퍼졌고, 홍수처럼 밀려오는 쪽팔림에 마리아는 황급히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강정현은 입을 헤 벌린 채 톰과 제리를 바라보다, 이내 육철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철완 아저씨…….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들뜬 기색의 동료들과 달리 육철완은 영 안색이 어두웠다.
어찌나 진땀을 흘리는지 목 뒤가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날만큼은 쉬어 가도 좋으련만, 육철완은 서큘레이터를 장착한 이후로 단 하루도 버프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
어린 강정현만 숨기지 못하고 있을 뿐, 이레귤러의 멤버들 전원은 같은 걱정을 품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헌터 협회 직원 두 명이 그들을 알아보고 게이트 쪽으로 안내한다.
‘WHPO’
세계 헌터 수호 기구(world hunter protect organization)의 약자가 쓰인 전세기가 게이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각 나라의 정예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세계 헌터 포럼으로 향하는 길에 발을 디디며, 천해선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가시죠. 두바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