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차원의 문……?!”
차분하던 컨벤션 룸이 순식간에 어수선하게 변했다.
던전을 통해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이계에 비해, 영계는 공식적인 출입 방법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아니, 여기 있는 정예 헌터들을 제외하면 영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영계를…… 인간이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인가?”
“놀라운 일이군. 탈혼수가 아니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 세계에서 취할 수 있는 물질이 뭐가 있을까?”
“영물들의 코어를 잔뜩 얻어 올 수만 있다면……!”
‘탈혼수’라는 말에 몸을 움찔했지만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흠.
나 말고도 탈혼수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많나 보군.
하기사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어디 보통 헌터들이던가.
좌중들의 동요가 꽤나 만족스러운 듯, 래더 총재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동안 영계는 제한적인 방법으로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년간의 노력과 연구 끝에 영계로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WHPO의 연구부서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래더 총재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간헐적인 박수 소리가 들렸다.
“허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차원의 문을 개발했다고는 하나 영계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과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 될 겁니다. 그리고 연구 조사에 따르면, 영계에서의 활동은 굉장히 고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숱 없는 백발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래더 총재가 좌중을 돌아보았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에테르가 소모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들께 제안합니다.”
팟.
래더 총재의 말이 끝나자 대형 스크린에 던전 입구의 사진이 올라갔다.
그 정체를 알아본 몇몇 헌터들이 눈을 부릅떴다.
“저건……?”
“Stairs of hell(지옥의 계단)……!!”
“알아보시는군요. 이 던전의 이름은 Stairs of hell(지옥의 계단)입니다. 두바이에 있는 단 하나의 출입 금지 던전이자,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이름’이 붙여진 던전이지요.”
래더 총재의 말처럼, 대부분의 던전에는 이름이 없다.
‘대치동 8성 던전’처럼, 그저 지역의 이름과 던전의 난이도를 붙여서 부를 뿐.
그러나 던전의 형태가 아주 특수할 경우, 헌터 협회에서는 이름을 부여한다.
던전의 최종장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
10성(★★★★★★★★★★)이라는 난이도로도 측정이 불가능할 경우.
그 밖의 다른 이유로, 던전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경우.
그리고 ‘Stairs of hell’은 그 모든 조건에 해당하는 던전이다.
“우리는 영계에 진출하기 위한 스페셜 팀을 구성할 겁니다.”
“!!”
“아마도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참가 신청을 해 주시겠지요.”
래더 총재의 말에 대부분의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들인다는 건 헌터로서 대단한 영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 역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뒤따를 것이다.
길드와 나라의 명예는 물론이요 나아가 인류 전체에 기여를 할 수 있는 프로젝트.
시정잡배가 아닌 초일류 헌터들이 모인 자리인 이상, 이 달콤한 기회를 마다할 인물은 없어 보였다.
“해선아. 우리 신청할 거지? 우리가 포이즌 던전 공략한 짬바가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어?”
비수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친다.
그녀의 눈동자에 달러 표시가 있는걸 보니, 명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일단 설명 마저 듣고.”
“치. 더 듣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저기 들어가면 부르는 게 값인 물질들이 한 가득일 거라고.”
“알았으니까 기다려 봐.”
나 역시 동료들의 동의가 있다면 당연히 영계에 들어가 보고 싶다.
던전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당연히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탈혼수를 마시고 영계 체험을 했을 때 먼발치에서 확인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릴.
그녀는 분명 영계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키릴은 어떻게 영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그녀가 쫓기는 몸이란 걸 생각하면, WHPO와 협력해 영계로 넘어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는 건…….
‘차원의 문이 아니어도 영계를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로군.’
그렇다.
이 정보야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공정한 경합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 기회가 바로 ‘Stairs of hell’이라는 겁니까?”
나에게 호감을 표했던 네덜란드의 헌터, VAN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더 총재가 진행요원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팟.
스크린에 있던 던전 입구 사진이 여러 장의 표로 바뀌었다.
“두바이에 계시는 동안 헌터 여러분들께 ‘Stairs of hell’의 입장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이 지옥의 계단을 가장 많이 돌파한 국가에 스폐셜 팀의 멤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
“스폐셜 팀에 편성되는 인원은 총 열다섯 명이며, 국가별로 다섯 명의 인원 제한을 둘 겁니다. 다시 말해, 스폐셜 팀에 편성되는 나라는 총 세 개의 국가가 될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헌터의 국가만도 100여 개가 될 터.
참여한 나라의 개수를 생각하면 상당히 제한적인 숫자라 할 수 있었다.
‘일리가 있는 방식이야.’
미지의 영역을 공략한다는 건 영계나 ‘Stairs of hell’이나 마찬가지.
현재까지 헌터들이 정복한 ‘지옥의 계단’은 고작해야 5층뿐이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각 층의 최종 보스를 없애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6층 던전의 보스를 깨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Stairs of hell’가 최대 몇 층까지 설계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분들에게 미지의 영역을 돌파하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테스트를 하자고 소중한 인력을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해서 길드마다 다섯 시간의 제한 시간을 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한된 시간 동안 ‘Stairs of hell’을 공략하면, 그 성과만큼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흠.”
“오…….”
선별 방식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층을 공략한 쪽이 아무래도 영계에서 적응을 잘할 테니까.
하지만 래더 총재의 발언에 헌터들은 동요의 빛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숫제 자리를 고쳐앉고 옆의 동료와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는 헌터들도 보였다.
지금의 선발 방식은, 명백히 다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대항전’.
자국 내에서 헌터의 랭킹을 산정하는 경우는 있어도, 국가의 무력에 서열을 매기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나라 간에 굉장히 예민한 일이 될 수 있고, 국가 간의 협력에도 딱히 득 될 것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
하나 지금의 선발 방식은 대놓고 국가 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 똑같은 스테이지.
그리고 다른 결과물.
오히려 스폐셜 팀의 구성보다, 국가 간에 서열을 매긴다는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벌써부터 언론사들이 호들갑을 떠는 게 그려지는구나.”
육철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계 헌터 포럼에 참여한 자국의 헌터들이 어떤 성적을 거두게 될 것인가.
언론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될 것이다.
비수가 큭큭대며 육철완의 말을 받았다.
“안 봐도 뻔하죠. 저희가 만약에 일본이나 중국 길드에 개발린다면? 그 날 이후로 SNS 계정은 폭파된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네. 계정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야 천해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도 공항에 입국하자마자 바로 계란 노른자로 샤워하게 될걸?”
“쩝.”
본의 아니게 나라의 체면을 걸고 싸우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서 ‘이레귤러’를 만든 건데, 꽤나 무거운 걸 짊어지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잠자코 듣고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해당 국가의 지위는 크게 상승하게 될 거예요. 전 세계에서 기껏해야 세 나라 정도일 뿐이니까.”
“올. 언니. 웬일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셔?”
“글로리 길드가 약해진 지금, 한국은 다른 나라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될 거야. 이럴 때 한국에 강한 헌터가 있다는 걸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어.”
마리아의 말투에는 꽤나 단호한 면이 있었다.
인류애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지만, 국제 정서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사명감을 불어넣은 것일까.
‘책임감을 가지고 있나 보네.’
글로리 길드가 약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리아의 탈퇴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그녀는 글로리 길드의 약세, 나아가 한국의 전력이 약해진 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헌터님…….”
“마리아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구건이가 사라지고 글로리 길드는 리더 둘을 잃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는 더 이상 글로리가 아닌 ‘이레귤러’다.
우리가 스페셜 팀에 합류한다면 그 모든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네.”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술을 한번 굳게 다문 뒤 내게 대답했다.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신뢰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 * *
“역시나 이사순 회장은 나오지 않았네.”
-꾸.
“처음에는 WHPO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용케도 두바이에서 걸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잖아?”
-꾸.
“저녁에 보자는 말은 뭐였을까? 파티장에도, 회의장에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면 어디서 만날 생각인 거지?”
-꾸우.
계속해서 추임새를 넣던 뽀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긴, 나도 모르는 걸 저 조그만 머리로 어떻게 알겠어.
“그나저나, 우리 바로 앞 순서가 프랑스더라. ‘지옥의 계단’ 말이야. 프랑코가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어.”
-꾸르르…….
엥.
조그마한 눈을 깜빡이며 짧게 대답하던 뽀리가 갑자기 그로울링 소리를 낸다.
“왜 그래? 프랑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꾸르…….
아니다.
날이 바짝 선 뽀리의 울음은 명백히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경계라니.
무엇을?
키긱.
오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나는, 유리창 쪽에서 무언가가 긁히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 염탐하는 이가 있다……!’
나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흡사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쪽을 염탐하고 있는 녀석을 급습하기 위한.
파박.
부지불식간에 유리창 쪽으로 달려간 나는 황급히 사라지는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냐!”
창문을 열었을 때 검은 그림자는 호텔 벽을 타고 달아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예사 몸놀림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처럼 들키더라도 손쉽게 도망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겠지.
하나,
‘너만 그런 게 가능한 줄 알아?’
어깨 위에 올라탄 뽀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히 빠져나온 뒤, 두 발을 빠르게 굴렸다.
‘독보’.
워낙 경황이 없어 ‘level 3’의 능력을 테스트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판을 깔아 줄 줄이야.
파바바박.
귓가를 스치는 공기의 감촉.
휘휙.
그리고 거친 바람 소리.
변화한 독보의 위력이 피부로 체감된다.
호텔의 벽면을 마치 대지처럼 가르며, 나는 검은 그림자에게 빠르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