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아,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어요.”
첸과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에, 나는 팀원들에게 당부의 말을 꺼냈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칼부터 빼 드는 놈이거든요.”
“그 질문? 천해선. 그 질문이 뭔데?”
“그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비수를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하.
당신들도 보면 알 거야.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머…….”
제법 가까운 거리가 되자, 비수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한다.
“진짜 예쁘다. 몸집도 여리여리하고. 쟤 정말 나이트 맞아?”
“응.”
“헌터를 겉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지만……. 정말 안 어울리네.”
비수가 첸의 용모를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비범한 헌터들 사이에서도 신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
일전에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먼 옛날에 입을 법한 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꼭 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아요.”
“그렇지?”
강정현에게 웃어 보인 나는 첸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와 줘서 고마워.”
“임무일 뿐이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임무’라는 말에 이레귤러 멤버들이 흠칫 놀랐지만, 나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거지. 함께 열심히 해서 영계에 진입해 보자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팀원들에게 돌렸다.
어쩜 저렇게 태연하게 구라를 칠 수 있을까.
그런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지만, 무시하기로 하자.
“이쪽은 대만에서 온 첸이야. 타입은 나이트고, 검을 다루지.”
첸은 그 흔한 ‘잘해 보자’는 이야기 없이 고개만 까닥 숙였다.
“이쪽은 알지? 이레귤러 전에 글로리에서 활동했던 마리야 헌터야. 그리고…….”
한차례 설명이 지나간 뒤,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네 명의 동료들이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해 미치겠다……!’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
매서운 눈매와 각진 턱을 보면 분명 남성미가 넘치는데, 오뚝한 콧날과 가녀린 팔다리를 보면 도저히 남자로 생각 되지가 않았다.
이들은 지금 격렬하게 묻고 싶을 것이다.
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하지만 앞서 단단히 일러 둔 덕분에, 첸이 칼을 빼 드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우선 우리의 플랜을 말해 줄게.”
‘이레귤러’ 멤버들의 포지션을 설명해 준 뒤, 나는 3층에서의 전략을 안내해 주었다.
사실, 전략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3층은 나 혼자 돌파한다.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키를 확보할 때까지 2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지.”
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이레귤러 멤버들조차 너무 위험하다고 만류한 전략.
그러나 첸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짧은 시간 합을 겨루다 보니 내 능력에 신임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 내가 죽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겠지.’
첸은 내게 위험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각자의 포지션은 알겠는데, 정작 내 역할은 듣지 못했어. 난 뭘 하면 되지?”
“그건 물어보나 마나지.”
어쩌면 오늘의 공략이 끝나고, 니콜라스는 내 요청을 허락해 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만 모였다는 세계 헌터 포럼.
그중에서도 첸의 무력은 ‘아웃라이어’ 수준이었으니까.
“베어 버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 * *
“저기다!”
Stairs of hell(지옥의 계단)의 위치는 아주 먼 곳에서부터 확인할 수가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기세지만, 수많은 사람이 현장에 모여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WHPO의 관계자.
차례를 기다리거나, 공략을 마친 헌터들.
그리고 출입이 허용된 언론사들까지.
던전 입구의 주변이 황량한 사막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나 이색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휘유. 많이도 모였네.”
비수가 손날을 이마에 대고 휘파람을 불고 있을 무렵,
위잉.
“나온다!”
현장의 분위가 소란스럽게 변했다.
“어? 뭐지? 아직 프랑스 팀이 나오려면 멀었잖아.”
다들 말은 안 해도 같은 생각이었다.
제공된 시간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프랑스 헌터들이 하나둘 던전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모양인데.”
“응? 천해선. 그게 무슨 소리야?”
“영계 진출이라는 엄청난 보상이 있는데, 주어진 시간을 일부러 남기진 않을 거 아냐?”
“그야…… 그렇지?”
“그럼 둘 중에 하나겠지. 정해진 시간 안에 Stairs of hell(지옥의 계단)을 모두 격파했거나…….”
동료들이 ‘설마’ 하는 얼굴을 내비친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Stairs of hell(지옥의 계단)의 최종장을 경험조차 하지 못했는데, 프랑스 헌터들이 일사천리로 모든 스테이지를 정복했을 리 없다.
그것도, 다섯 시간이라는 타임아웃 안에서.
“그게 아니라면…… 졸라 힘들어서 예정보다 빨리 포기한 거겠지.”
“우웨엑!!!!!!!!!!!”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듣기 거북한 소리가 던전 입구로부터 들렸다.
던전을 빠져나오자마자 프랑스 헌터 한 명이 속 안에 있는 것들을 연신 게워 내기 시작했다.
“크윽……. 빌어 처먹을 던전 같으니…….”
뒤이어 나온 헌터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힐러들의 치유력이 바닥이라도 난 건지, 헌터들의 몸에는 크고 작은 부상이 가득했다.
에스퍼 타입인 프랑코 또한 각혈을 했는지 입가에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WHPO는 제정신이야? 이런 곳을 테스트로 사용하다니……!!”
나이트 타입의 헌터 한 명이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의 한쪽 팔은 무언가에 뜯긴 듯 너덜너덜했는데, 이를 지켜본 강정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이빨 자국이 보였던 것이다.
“힐러! 힐러를 불러 줘!”
이럴 때를 대비해 대기시켜 둔 힐러들이 부랴부랴 프랑스 헌터들의 치유에 나섰다.
“휘유. 들어가기도 전부터 참 분위기 좋네.”
비수가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표정이 영 밝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강한 길드.
그중에서도 정예 요원 10명만을 추려 낸 인원이다.
이만하면 정수 중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을진대, 그들은 모두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최소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모양이군.’
4층?
아니 3층조차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을 수 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회복을 받는 프랑스 대표 헌터들.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 속에서, 나는 빠르게 눈을 굴려 한 남자를 찾았다.
커다란 체격에 길게 늘어뜨린 갈색의 곱슬머리.
한국에서 온 ‘이레귤러’를 엿 먹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는 빌어먹을 놈.
프랑코.
큰 덩치 덕분에 녀석의 위치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멀리서 날아오는 눈빛이 따갑기라도 했던 걸까.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프랑코와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던전 공략은 몰라도, 녀석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함정은 제대로 준비되었음을.
‘지옥의 계단’을 나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던 프랑코.
그런데 놈이 나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 순간만큼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 한번 x뺑이 까 봐라.
표정은 만국의 언어라더니, 대화를 하지 않아도 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 차례는 어디지?”
“한국…… 그러니까 ‘이레귤러 외 1인’ 팀입니다.”
“외 1인? 그게 뭐야?”
“한국에서 온 이레귤러 팀 외에 대만 헌터 한 명이 합류합니다. WHPO 간부진 회의에서 특별히 허가해 준 사항이라고…….”
“그런 내용이 있어? 며칠 전까지도 전혀 없던 말이었잖아. 공문 이리 줘 봐!”
현장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니콜라스가 확실히 일을 잘하는 모양이군요. 규정을 급하게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육철완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아마 최선을 다해 간부진들을 설득했을 거예요. 그는 명예와 신의 같은 거에 목숨을 거는 타입이니까. WHPO 입장에서도 적당히 생색내기 좋은 의견일 테고.”
“생색이요?”
“이번 선발전에 대해서 말들이 많잖아요. 10명을 꽉 채워 온 나라가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다섯 명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만약 이런 선발전이 있다고 진작부터 말했더라면, 모두가 열 명을 채워서 왔겠죠.”
“음. 그 점은 저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공정성에 대해서 분명히 뒷말이 나올 텐데, WHPO에서는 왜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걸까요? 이번 선발전에 대해서.”
“공정하기가 싫은 거죠.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정해져 있으니까.”
“……!”
다소 욕을 먹게 되더라도, WHPO와 우호적인 국가들에 혜택을 준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영계에 발을 내디디는 건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었던 특권이다.
거기서 어떤 이득을 취하게 될지 감히 예상조차 어려운 상황.
이왕이면 협회와 가까운 나라들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게 그들에게도 이득일 것이다.
“협회에서 일부러…… 불공정한 싸움을 유도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심증에 불과해요. 하지만 노골적인 국가들이 몇 보여서 의심하고 있는 중이에요.”
“노골적이라 하시면…….”
“지난 몇 년 동안 인원을 많이 보내지 않다가, 갑자기 올해 들어 열 명을 꽉 채워 보낸 국가들.”
“……!”
“어쩐지 뒤가 좀 구리지 않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리가 있군요.”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예요. 이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와중에 ‘이레귤러’가 첸을 달라고 했으니, WHPO로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죠.”
“과연…… 생색내기 좋다는 말씀이 그런 거였군요.”
첸 하나 넘겨주고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얄팍한 처사지만, 적어도 ‘노력은 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네? 뭐가요?”
“저는 사실 니콜라스가 헌터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죠. 헌데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충분히 가능한…… 아니, 그쪽에서도 원할 만한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보니 헌터님께서는 선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까지 고려해 그런 제안을 하신 거로군요.”
“하하.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아닙니까?”
“백 프로 확신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비빌 언덕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육철완은 한 번 더 감탄사를 토했다.
“가끔 보면 헌터님이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는 블랙 에테르가 아니라 심계인 것 같습니다. 썩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집단에조차 원하는 것을 얻어 내시니…….”
“오늘따라 비행기를 너무 태워 주시네요.”
“첸을 거짓말로 설득한 것도 필경 숨은 계산이 있으신 거겠지요? 그게 뭔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엥?”
“……?”
음.
아무래도 이번 일로 인해 나라는 인간에 거품이 생긴 모양이다.
“그건 정말 순도 100%의 뻥인데요?”
“!”
육철완이 기겁을 하더니 내 쪽으로 찰싹 붙는다.
“……감당이 가능하시겠습니까? 헌터님의 말을 들어 보면 첸이 보통 실력자가 아닌 모양이던데요.”
“하하. 뭐 어떻게든 되겠죠.”
나는 천하 태평한 얼굴로 멀찍이 있던 동료들을 불렀다.
“슬슬 들어가죠. 예정보다 앞당겨질 것 같은데.”
위이이잉.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특이한 공명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던전의 입구는 대부분 검은 막으로 싸여 있다.
그 막을 통과하는 순간, 헌터들은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겪어 본 적이 없었던 이질감을 느낀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그 느낌.
그러나 지옥의 계단은 굳이 발을 들이지 않더라도 충분한 이질감을 맛볼 수 있다.
“와……. 이런 건 처음 봐.”
비수의 말처럼 그동안 봐 온 던전의 입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옥의 계단’ 던전의 입구에는 여러 가지 빛무리가 한데 뒤엉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무지개처럼 예쁜 색이 아닌, 바라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불투명한 빛들.
마치, 층을 내려갈수록 가혹해지는 환경을 예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준비됐죠?”
영계 진출과 국가 대항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것을 양손에 쥐기 위한, 이레귤러의 도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