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래더 총재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자의식 과잉이 하늘만큼 솟은 자이거나, 모두가 인정할 만큼 능력이 뛰어난 자여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사일리아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헌터였다.
“거부라고 하셨습니까.”
래더 총재의 말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일부 헌터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여기 모인 헌터들도 보통은 아니지만, 래더 총재는 전 세계 헌터 집단의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차라리 조금이나마 언짢은 기색이라도 비쳤다면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래더 총재의 얼굴에서는 한 치의 동요를 찾을 수가 없었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번 결정을 납득할 수 없어요.”
“왜지요?”
“아까 말씀하시기를, 선발조가 가장 힘든 역할을 담당한다 하셨죠?”
“그렇습니다.”
“하면 로테이션을 돌 게 아니라, 가장 강한 팀에게 몰아주는 게 맞아요. 만에 하나 약한 팀이 선발조로 나서다 변을 당하면, 모두가 다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사일리아는 ‘약한 팀’을 언급하면서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은 바로 한국의 대표 헌터들.
이레귤러였다.
“저런 x년이?”
“워워. 욕도 번역된다.”
천해선이 재차 타일렀지만, 이번만큼은 비수도 참지 않았다.
“씨바. 들을 테면 들으라지. 우리도 당당히 테스트 합격해서 탐사대 들어온 건데, 어따 대고 약팀 취급이야?”
“……!”
바락바락 소리치는 비수의 모습에 헌터들이 다른 의미로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하게도, 비수의 앙칼진 목소리는 사일리아에게도 닿았다.
‘리더나 팀원이나 주제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네.’
턱을 살짝 든 채 오만한 얼굴로 이레귤러를 내려다보는 사일리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래더 총재를 바라보았다.
“출정식 전에 탐사대 계획을 수정해 주세요. 수정의 여지가 있으니까 미리 저희에게 귀띔해 주신 거잖아요? 저희는 영계에서 숨이나 제대로 쉴까 싶은 팀에게 생사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근데 저 니언…… 읍.”
천해선이 비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야 천해선. 왜 자꾸 말려? 우리가 지금 병신 취급 받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자 천해선이 슬쩍 웃었다.
“알아. 그리고 말리는 거 아니야.”
“엥?”
검지로 머리를 한차례 긁적거린 뒤, 천해선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잘됐네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호?”
사일리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막상 여기 와 보니까 쫄리는 모양이지?’
위험한 조를 교대로 돈다는 계획 때문인지, 자신이 아까 전부터 보냈던 표독스러운 기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천해선이 꼬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 꼴이 우습게 됐군.
사일리가 턱을 살짝 들어 올린 특유의 자세로 천해선에게 물었다.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선발조는 우리가 담당할 테니 대기조로 빠지세요.”
그녀의 말투는 다분히 명령조였고, 차분한 성정의 마리아조차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듣자 하니 한국 국민들한테 뻥카 좀 친 모양이던데…… 모양은 좀 빠지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타고난 능력.
말투.
그리고 생김새까지.
중세 시대의 여왕이 환생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오만하고 고압적인 모습이었다.
“…….”
천해선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은 채 잠자코 사일리아를 응시했다.
조금 날카로운 느낌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자의 모습이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의 모습에 기묘한 감정이 피어오를 무렵, 천해선은 시선을 래더 총재에게 돌렸다.
“총재님. 이레귤러 헌터 천해선입니다.”
“그렇게 소개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래더 총재가 한차례 웃음소리를 흘린 뒤 대답했다.
다짜고짜 거부하네 어쩌고 하는 사일리아와는 달리 천해선은 총재에게 먼저 발언권부터 얻으려 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
똑같이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총재 또한 사일리아를 대할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일리아의 발언은 일리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팀에게 선발조를 몰아주는 게 타당한 것 같습니다.”
“흠. 그렇습니까?”
사일리아가 입가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띄웠다.
스스로 약팀을 자처하며 대기조로 빠지겠다고 할 줄이야.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처 허풍 덩어리가 알아서 기는 게 너무나 흡족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어진 천해선의 다음 말에 그녀의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총재님께 건의드립니다. 저희 이레귤러에게 선발조를 몰아주시기 바랍니다.”
“!”
“?”
“?!”
그건 정말이지 어느 누구도, 심지어 이레귤러 멤버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실실 걸어 나가서 사일리아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했을 때는 저 인간이 왜 저러나 싶었다.
헌데 천해선은 로테이션에 찬성하는 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사일리아처럼 선발조를 자신들에게 몰아달라 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경악에 찬 눈으로 천해선을 바라보던 헌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사일리아에게로 돌렸다.
당연하게도.
사일리아의 얼굴에는 표독스러운 독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천해선 헌터님. 방금 하신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심지어 래더 총재조차 곁눈질로 사일리아의 동태를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천해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네. 이 자리에 모인 팀 중에서 저희 이레귤러가 제일 셉니다.”
천해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당 안에 술렁거림이 넘쳐났다.
혹자는 다소 언짢은 말을 뱉었고, 혹자는 천해선의 강단에 놀라며 실없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길드를 모아 놓은 뒤, 그중에서도 최고만을 추려 만든 자리다.
이레귤러 또한 당당히 그 자리를 꿰찼으나, 그들의 인원은 여섯에 불과하고 초월급 헌터도 없었다.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이레귤러를 내심 가장 아래 급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해선의 발언은 꽤나 큰 파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강단이 대단하네.’
또 한 명의 초월급 헌터.
프라이센 길드의 잉센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천해선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잉센은 초월급 헌터 이전에 과학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천해선에 대해서 제법 정확한 추론을 할 수 있었다.
‘공개된 정보보다 훨씬 강한 존재다.’
물론 잉센으로서도 천해선이 얼마나 센 헌터인지는 정확히 추정할 수 없었다.
로이와의 대련(?) 때 그랬던 것처럼, 오픈된 공간에서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주로 싸워 왔으니까.
하나 지옥의 계단을 통과한 점, 내로라하는 헌터들을 연이어 박살 낸 점, 랭킹전 능력 때 보여 준 능력들을 감안하면 천해선은 단순한 ‘S’랭커가 아니라는 게 잉센의 생각이었다.
‘일부러 사일리아를 도발한 것 같은데…… 어쩔 생각이지?’
잉센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천해선과 사일이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이 아는 사일리아라면 이런 도발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일반 헌터라면 비싸서 엄두도 못 낼 전투복을 수십 벌씩 가지고 다니는 여왕님.
하고 다니는 차림새만큼이나 도도하고 오만한 성정을 가진 헌터가 사일리아였다.
고오오오오.
과연, 잉센의 예상대로 사일리아의 얼굴에 노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딱히 힘을 끌어올린 게 아님에도 그녀의 몸 주변으로 흰색의 빛무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잔뜩 열이 받을 거라는 건 잉센이 아니라 여기 모인 헌터 모두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태연하게 총재와 대화를 이어 나가는 헌터.
천해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전에 여러분들께 고지를 하기를 잘했군요. 다들 이렇게 열정적으로 임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총재가 허허하며 잔뜩 쉰 웃음소리를 내었다.
말이야 ‘열정’이지, 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이미 환갑을 넘어 일흔을 달려가는 래더 총재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잉센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래더 총재가 직접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내친김에 프라이스 길드의 입장도 들어 볼까요?”
“…….”
불똥이 갑자기 이쪽으로 튀는 건가.
평화주의자 잉센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천해선은 묘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잉센을 바라보았고,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하던 사일리아 또한 총재의 질문에 일단은 들어 보자는 스탠스로 변경했다.
그만큼 지금의 구성원 중에서 잉센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높았다.
일단은 사일리아와 다르게, 잉센은 이성적이고 말이 통하는 ‘초월급’ 헌터였으니까.
스윽.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안 그래도 작은 잉센의 머리가 더욱 조그맣게 느껴진다.
테 없는 안경알을 살짝 매만지며, 잉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존중합니다.”
잉센의 대답에 대부분이 쓴 미소를 짓는다.
그럼 그렇지.
평화주의자 잉센은 타인과의 분쟁을 극도로 기피하는 편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잉센은 그런 성정을 가진 헌터였고, 혹시나 싶어 기대했던 헌터들은 역시나 하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담당한 조가 어디든 영계에 발을 디디는 건 분명 멋진 일이 될 겁니다. 저희 프라이스는 로테이션을 돌리든, 어느 한 조를 고정으로 수행하든 상관없습니다.”
과연 다른 프라이스 길드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은 품을 필요가 없었다.
사일리아와는 대조적으로(?), 잉센에 대한 프라이스 헌터들의 신임은 가히 신앙 수준이었으니까.
함께 일하는 동안 잉센이 내렸던 판단은 대부분 정답에 가까웠다.
다소 시시한 대답이기는 하나, 프라이스 헌터들은 잉센이 옳은 판단을 여겼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럼 답이 나왔네요.”
사일리아의 입가에 찐득하고 살벌한 미소가 그어졌다.
“서로 자기가 더 세다고 주장하면, 현장에서 입증하면 그만 아니겠어요?”
‘큰일이군.’
래더 총재는 사일리아의 미소를 보며 마음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더 이상 말리기 힘든 상태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증이라 하시면…….”
“간단하죠. 저희 스틸 실드와 이레귤러 대표가 한판 붙어 보는 거예요. 깔끔하게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잉센과는 정반대의,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당신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총재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시선은 천해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왕님에게 대답하는 천해선의 대답 또한 가관이었다.
“좋습니다.”
“아까부터 말이 잘 통해서 좋은데요? 오호호!”
사일리아에게서 특유의 하이톤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카랑카랑했지만, 어쩐지 강정현은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스틸 실드에서는 제가 나가죠. 이레귤러는?”
당연히 천해선, 네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여왕님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아닌데요?”
“아…… 아니라구? 그럼?”
이레귤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분명 천해선일 텐데.
얼빠진 얼굴이 되어 버린 여왕님을 향해, 천해선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는, 첸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