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점입가경.
사일리아와 첸의 대결은 그 네 글자로 함축할 수 있었다.
첸의 검격은 쾌속과도 같았지만, 사일리아는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것처럼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하나 승패가 어느 정도 기울었다 생각될 무렵, 첸이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캉!
전투에 경험이 없는 자라도 능히 알 수 있을 만한 변화였다.
일방적이었던 두 헌터의 대결이 순식간에 대등한 구도로 바뀌어 버렸다.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상대하던 사일리아가 이제는 양손을 사용해 첸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쐐액.
‘또냐……!’
사각지대에서 날아온 첸의 검을 피하고자 사일리아가 가녀린 허리를 뒤틀었다.
사실 ‘환격’을 처음 상대하는 입장에서 이 정도로 대응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내린 재능이라 할 만했다.
천하의 천해선조차 무예의 재능은 자신을 앞선다는 생각을 품을 정도였으니까.
‘초월급’이란 명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듯, 사일리아는 조금씩 ‘환격’에 적응해 나갔다.
‘쥐새끼 같은 수를…….’
‘카테나’라는 무기를 보면 알 수 있듯, 사일리아 또한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다중 능력자였다.
그녀는 ‘환격’이 일반적인 격투술에 염동력을 가미한 것이란 걸 마침내 파악해 냈다.
파캉!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첸과 사일리아의 거리가 벌어졌다.
언뜻 보면 한숨 돌린 것 같아 보이지만, 사일리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해 뒤로 물러난 것일 뿐.
저릿저릿.
아려 오는 손목에 첸이 이를 악물었다.
‘……괴물 같은 자다.’
겉모습과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여왕님’이었지만, 그녀의 안에는 무지막지한 괴물이 살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에테르의 양.
검무에 ‘환격’을 얹은 자신도 소모되는 에테르가 만만치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카테나를 사용하는 사일리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그래서 첸은 의도적으로 지구전을 벌였으나, 자신의 선택이 오판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에테르가 바닥을 드러내는 건, 되려 이쪽이었다.
“후우.”
지구전으로 승부를 볼 수 없다면 일 합에 결정을 보는 것이 좋을 터.
첸이 자신의 에테르를 한곳에 응축해 오른손에 모았다.
파직.
“?”
어디선가 들려오는 스파크에 사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첸의 검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그녀의 눈이 한층 더 가늘게 변했다.
파지직.
첸의 검에 흐르는 전류가 이제는 육안으로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오색 찬란히 빛나는 첸의 보검에서, 백색의 전격이 이빨을 드러냈다.
꽈르릉.
“엇……!”
수준 높은 헌터들조차 몸을 움찔할 만한 커다란 천둥 소리.
마른하늘에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첸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파지지지직.
에테르로 만든 전류와 에테르가 만든 사슬이 허공에서 격돌한다.
“으앗…….”
“앗따거.”
그 스파크가 멀찍이 구경하고 있던 헌터들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비전투 계열인 헌터들은 첸와 사일리아가 격돌한 충격파만으로도 저릿저릿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저 친구…….’
‘제법인데.’
‘위력을 떠나서 굉장히 신박해.’
이레귤러 팀이 그러했듯, 첸의 ‘벼락검’을 처음 본 헌터들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처음 사일리아와 대련을 한다고 했을 때 보였던 걱정스러운 눈빛이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첸이 평생을 갈고닦은 벼락검과 사일리아의 ‘카테나’가 벌이는 합을 보자니,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이레귤러에는 천해선과 마리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비수는 버프를 사용한다지? 그것도 S랭커까지 키워 주는.’
‘첸을 보니 나머지 헌터들도 다들 한 가닥 하는 모양인데…….’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더 적은 인원으로 지옥의 계단을 통과할 수 없었겠지.’
글자 그대로 소수 정예.
첸이 분전하자 자연스럽게 ‘이레귤러’에 대한 평가도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첸이 정말로 사일리아를 이길 거라 생각하지는 없었다.
아직 그녀의 능력은 반의반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사일리아는 묵묵히 첸이 펼쳐 낸 기술들을 받아 낼 뿐, 선공을 취하지 않았다.
환격과 벼락검을 처음 봤을 때는 잠깐 안색이 변하기도 했으나,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에테르의 정수를 담아 만든 카테나.
그리고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전투 재능.
이 두 가지의 조합은 첸의 벼락검조차 막아 내고 있었다.
꽈르르릉.
파지지지직.
“허억…… 헉.”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첸의 호흡은 이미 거칠게 변해 있었다.
반면 사일리아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상태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얼굴에 가득 묻어나 있던 조롱과 무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는 것.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으나, 첸은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인가.’
첸의 호흡을 확인한 사일리아가 좌우로 뻗은 팔을 주욱 앞으로 모았다.
자연스레 그녀의 카테나가 서로 부딪쳤고, 백색의 사슬이 마치 꽈배기처럼 합쳐지며 첸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
“!”
그동안 상대했던 카테나와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
벼락검을 사용할 틈도 없이, 첸은 황급히 가슴 앞으로 보검을 세워 들었다.
콰과과광!!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백색의 섬광이 번쩍인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헌터들이 이내 탄성을 터트렸다.
“막았어?!”
사일리아의 고유 스킬 중 하나인 ‘컴바인드 체인(combined chain)’을 막아 낸 것이다.
기술의 위력에 몸이 십여 미터 뒤로 밀리기는 했으나, 첸은 여전히 검을 든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프라니움이 좋기는 좋네.”
사일리아가 투박한 말투와 함께 사슬을 거두어들였다.
주륵.
그와 동시에 첸의 입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어찌어찌 몸 안의 에테르와 보검의 힘으로 막아 내기는 했지만, 과부하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훌륭하다.’
잉센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사일리아의 주력 스킬을 사용하게 만든 첸에 대해서.
그리고 그 스킬을 견뎌 낸 그의 디바이스에 대해서.
‘정말 견고하게 만든 모양이구나.’
프라니움이 단단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칼 전체가 프라니움으로 되어 있지 않고서야, 나머지 부분은 일반적인 디바이스 소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서 기술이 필요한 것이고, 잉센은 보검을 만든 자의 ‘기술’에 정말로 감탄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천성이 과학자여서 그런 것일까.
잉센은 눈앞의 이레귤러보다 ‘보검’을 만든 자에 대해서 더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첸에게 물어보면 누가 만든 물건인지 알 수 있겠지.
‘슬슬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이기도 하고…….’
잉센은 그런 생각과 함께 본격적으로 에테르를 끌어올렸다.
대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두 명의 헌터는 자신의 본 실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초월급’과 ‘S’랭커의 대련에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잉센은 그럴 만한 힘을 가진 남자였다.
고오오오오오.
벌써 합을 나눈 회수가 꽤 되거늘, 사일리아의 카테나엔 여전히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아니, 어쩐지 이전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무한 리필이라도 해 오는 것처럼 그녀는 에테르를 사정없이 끌어다 쓰고 있었다.
반면……
“후우…….”
첸은 누가 보더라도 이전만 못한 기색이었다.
승부의 추가 어느 정도 기울어진 상황.
사일리아는 이 승부의 끝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슬슬 항복하지 않을래?”
그녀가 양손을 좌우로 벌린 채 물었다.
“안 그럼 정말 뒤질 텐데.”
“…….”
첸은 말없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찬란히 빛나는 프라니움이 그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난 죽어도 몰라. 원망하려면 네 리더를 원망하렴.”
천해선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크게 이야기한 사일리아가, 또 한 번 컴바인드 체인(combined chain)을 사용했다.
촤촤촤촤촤촤촤
그와 동시에, 첸도 벼락검을 발동시켰다.
꽈르르릉.
백색의 체인과 전격이 정면으로 맞붙기 일보 직전.
“오르비스(orbis).”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지면에서 푸른색 기운이 솟아올랐다.
휘이이이잉.
파지지지지직.
“?!”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맞붙던 기운이 푸른색 기운에게 휘말려 회전하기 시작한다.
에테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게 생긴 기운이, 두 사람의 에너지를 뱅뱅 돌리고 있었다.
‘뭐야, 저게?’
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고, 반면 사일리아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잉센! 무슨 짓이야?”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안경 쓴 민머리의 사내를 향했다.
잉센은 난처한 웃음과 함께 뚜벅뚜벅 가운데로 나아갔다.
“영계에 들어가기 전부터 부상자가 나와서는 곤란하잖아? 이 기세면 부상자가 아니라 사망자도 나올 것 같은데.”
“빨리 이거 안 치워?”
“지금 두 에테르가 부딪치면 이곳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릴 거야. 네가 수리비 낼 거야?”
잉센은 말투는 지극히 침착했고,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사일리아도 ‘돈’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이성을 찾았는지, 더 이상 힘을 추가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오르비스’라 칭한 푸른색의 에테르는 두 개의 기운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장관이네.”
천해선은 진심으로 눈앞의 광경에 탄복하고 있었다.
과학자이자 ‘초월급’ 헌터 잉센.
그는 에테르를 정밀하게 가공하는 것에 도가 튼 인물이었고, 그 결과 에테르에 무려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쉽게 말해 에테르를 기계 부품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조금 전 잉센이 구현한 ‘오르비스’도 마찬가지.
푸른색의 에테르는 에너지라기보다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였다.
어떠한 장비로도 둘의 에너지를 버티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잉센의 ‘오르비스’는 둘의 기운을 담아 회오리처럼 회전시켰다.
슈우우…….
아무리 강렬한 기운도 시간이 다하면 쇠락하는 법.
사일리아의 몸에서 끊어진 카테나도, 보검의 끝에서 발동된 벼락검도 기운이 다했다.
‘역시 대단해.’
‘어쩌면 사일리아보다 더 강한 거 아냐?’
‘에테르를 무슨 찰흙 주무르듯 다루네…….’
현장에 모인 헌터들이 잉센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사일리아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인간 같지 않은 능력의 소유자였다.
“더 이상 승부를 진행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건물도 보호해야 했구요.”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부탁을 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잉센의 말에 총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단단한 소재로 만든 건물이라 한들, 뼈대에 프라니움이라도 박아 넣지 않은 이상 강당이 부서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잉센의 대처에 수긍했지만, 딱 한 명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 거죠?”
하이톤의 오만한 목소리가 강당을 카랑카랑하게 울린다.
첸을 참교육하지 못한 것 때문인지 그녀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누가 봐도 제가 이긴 거니, 선발조는 스틸 실드의 것이 되는 거죠?”
그 말에는 총재도, 잉센도 반박하지 못했다.
언뜻 보면 막무가내처럼 보이지만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다.
돌아가는 전황이 그녀에게 유리했다는 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었으니까.
잉센을 포함한 대부분의 헌터들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고,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딱 한 명.
천해선을 제외하고.
“아닌데?”
천해선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사일리아의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