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첸과 사일리아.
두 사람의 힘을 가득 실은 에테르가 격돌할 무렵, 천해선의 동공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첸을 보호하기 위해 여차하면 ‘메루스’를 꺼내 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황금빛이 형형한 천해선의 동공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기운의 중앙에서, 푸른 에너지가 솟아오르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이러면…….’
천해선은 몸 안의 메루스를 모조리 회수했다.
누군가가 자신보다 앞서 행동을 취한 것을 확인한 이상,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 막대한 기운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잉센밖에 없겠지.
결과적으로 천해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두의 앞에서 메루스를 발동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잉센.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천해선은 사일리아를 설득하는 잉센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천성이 평화주의자라던데, 과연 그는 중재에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잉센은 앞장서서 대신해 주었다.
물론 천해선을 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커져 버린 사선을 수습하기 위해서겠지만.
같은 ‘초월급’ 헌터라지만 사일리아에 비하면 잉센은 선녀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싶을 때, 천해선은 한 발자국 나아갔다.
그리고 또 한 번 사일리아의 속을 긁었다.
“아닌데?”
“……아니라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빛 머리칼이 크게 출렁인다.
훤하게 이마를 드러낸 도도한 여왕님이 천해선을 잔뜩 노려보았다.
“눈알을 파내고 그 안에 호두라도 집어넣은 거니? 누가 봐도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혀에 독약이라도 바른 듯 사일리아의 말투는 표독스럽기 이를 데 없었으나, 천해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리한 거랑 이긴 거는 다르지. 이 대련은 무승부야.”
“개소리하지 마!”
아직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사일리아의 카테나가 출렁였다.
금방이라도 천해선을 향해 출수를 할 기세.
그런데,
“사일리아!”
오싹.
사일리아는 카테나를 쏘아 보내지 않았다.
그녀를 만류하는 잉센의 외침 때문에? 아니었다.
천해선에게서 느껴지는 무형의 기운이, 그녀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 것이다.
‘주저했다고? 이 내가?’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른 뒤에 얻게 된, 일종의 ‘통찰력’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지금 천해선과 싸우게 된다면, 팔 하나쯤은 없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일리아는 천해선의 기운 때문에 출수를 멈춘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을 들키기 싫었는지, 그녀는 되려 잉센에게 고함을 쳤다.
“막지 마, 잉센! 너도 봤잖아. 네가 막지만 않았어도 승부는 진작에 났을 거라고!”
“아닌데?”
또다.
또다시 속을 사정없이 긁어내는 빈정거림이 들렸다.
눈앞의 남자, 천해선에게서.
‘이 새끼. 사람 빡치게 하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네.’
잉센도 가끔씩 열 받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천해선은 정말 급이 다른(?) 깐족거림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적어도 방금의 합은 대등하거나 별반 차이가 없었어. 그건 첸의 최후의 보루였거든.”
일방적인 백색의 번개가 아닌, 프라니움의 기운까지 결합한 오색의 전격.
물론 그 이후의 첸은 탈진해 버리고 말았지만, 마지막 혼신의 공격만큼은 능히 사일리아에 맞설 만했다.
당연히, 사일리아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사기를 치려고 하는군.”
“방법이 왜 없어? 잉센한테 물어보면 되지.”
“하! 좋아. 잉센, 네가 답해 봐. 방금 네가 간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잉센이 난처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게 으르렁거리지 않아도 돼. 거짓말할 생각은 없으니까.”
무테안경을 고쳐잡으며, 잉센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힘은 사일리아 네가 근소하게 앞섰을 거야. 하지만 첸의 기운을 밀어낼 정도까진 아니었어. 그렇게 되면 두 기운이 서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되지. 건물이 무너지고, 애꿎은 다른 헌터들이 피해를 봤을 거야.”
“……!”
사일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놈의 기운이 그렇게 강대하단 말인가?
어떤 에테르건 송곳처럼 뚫어 버리는 ‘컴바인드 체인’이 경로를 이탈할 만큼?
“확실해?”
사일리아의 눈빛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잉센은 한 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확실해.”
잉센의 대답은 사일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컴바인드 체인’이 사일리아의 가장 강한 스킬은 아니나, 이것만으로도 8성 이상의 보스 몹들은 몸에 구멍이 나 버리곤 했다.
한데 그 기운과 대등한 수준이라니.
헌터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첸을 보며 놀라고, 중앙에 나와 있는 남자를 보며 한 번 더 놀랐다.
대관절 저 녀석은 뭐길래, 첸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말인가.
첸이 천해선의 말을 따른 건 어디까지나 ‘보검’과 관련된 계약 때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지시를 내린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천해선의 실력이 첸보다 앞설 것이라 추측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실제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 이야기 끝났네.”
천해선이 비실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생각보다 기억력이 별로인가 봐? 두뇌 대신 힘 스탯을 몰빵 해서 그런가?”
일단 다른 건 몰라도 입 터는 실력은 확실한 것 같다.
주변의 헌터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죽고 싶어?”
영계 탐사고 뭐고 이 자식을 당장 도륙 내고 싶다.
사일리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일리아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처럼 자신을 도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히, 어느 누가, 초월급 헌터에게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천해선이 사일리아에게 하는 도발은 드물다 못해 차라리 신선하게 느껴질 만한 일이었다.
“네가 직접 한 말도 기억을 못 하니까 하는 말 아니냐.”
“……무슨 말을 했다는 거지?”
“네가 그랬잖아.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놀아 보자’고.”
“……?”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머리 꼭대기까지 승천한 사일리아의 분노가 아주 살짝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까 전부터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기억이 날 리 없었다.
그녀는 ‘스틸 실드’의 헌터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간 ‘카테나’가 이쪽으로 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한 건 맞아.”
잉센이 대신 대답을 해 주고 나서야, 스틸 실드의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천해선은 고개를 돌려 래더 총재를 바라보았다.
시시비비가 명확해진 이상, 사일리아에게 더는 용건이 없었다.
“총재님. 사일리아와 첸은 건물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대련을 진행했고, 확실한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말에 사일리아가 다시 울컥했으나, 딱히 반론할 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비등했다고는 하나 첸이 승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래더 총재님께서 말씀하신 로테이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요.”
래더 총재가 잔뜩 처진 눈으로 천해선을 유심히 살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늘어나는 게 눈칫밥이라고 하던데, 과연 총재는 타인의 의도를 꽤나 정확하게 알아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로서도 천해선의 속을 알아맞히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사일리아처럼 선발조로 써 달라고 떼를 쓰더니, 이제는 후련하다는 듯 로테이션에 동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첸이 사일리아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을 텐데.’
강당이 날아가지 않는 선이라면 첸은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일리아를 통해 첸을 테스트해 보려 했다는 건가?
감히 ‘초월급’ 헌터를 상대로 팀원의 능력을 평가한다고?
래더 총재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천해선에게 어울리는 직장은 헌터가 아니라 갬블러일 것이다.
‘어쨌거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굳이 사일리아의 의중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세 팀 중 두 팀이 동의를 했으니, 나머지 한쪽의 의견은 힘을 잃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반대쪽 의견을 제시한 헌터, 사일리아는 첸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힘을 제대로 입증하지도 못했다.
서로 풀 파워로 싸웠으면 당연히 격차는 벌어졌겠지만, 스스로 내뱉은 말이 있으니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일리아. 대련에서 보여 준 당신의 실력은 출중했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라 로테이션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
사일리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자존심이 상해 차마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반대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련은 좋든 싫든 결과를 가리지 못했고, 여론도 등을 돌린 상태.
사일리아는 그렇게 침묵으로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요. 좀 있으면 탐사대 출정식이 진행될 겁니다. 오 분 후에 메인 홀에서 뵙겠습니다.”
래더 총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고, 헌터들은 삼삼오오 모여 좀 전의 대련에 대해 떠들어 댔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수치스러웠는지, 사일리아는 헌터 중에서 가장 먼저 강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초월급 헌터.
잉센은 출구 대신 이레귤러 일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칼. 프라니움인가요?”
“?”
천해선이 고개를 돌려 잉센을 바라보았다.
“칼 주인은 저쪽에 있는데 왜 저한테 물어보는지?”
“저 친구는 대답을 안 해 줄 것 같아서요.”
“하하. 저 친구 까칠해 보여도 굉장히 솔직해요. 어지간한 질문에는 전부 진실만을 답하죠.”
“오, 그렇습니까?”
“대신 대답하기 싫은 질문을 던졌을 때는 칼부터 뽑고 봅니다. 아까 사일리아가 했던 질문 기억나시죠?”
잠시 기억을 더듬은 잉센이 익살스러운 제스처를 취했다.
“오, 이런. 나도 첸에게 그걸 묻고 싶었는데. 역시 당신한테 찾아오길 잘한 것 같군요.”
“흐흐.”
천해선과 잉센이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앞선 대련에서 서로 오간 눈치가 있었기 때문인지, 둘은 서로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첸의 칼에 씌워진 건 프라니움이 맞아요. 제가 반 억지로 이레귤러에 편입을 시킨 터라, 일종의 영입비로 사용했죠.”
“저만한 양의 프라니움을 영입비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지구상에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 칭찬 고마워요.”
나이는 잉센이 천해선보다 열 살은 많았지만, 그는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천해선으로서도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가면 저 디바이스의 제작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어 음……. 그건 당사자한테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아.”
“그래. 기회가 되면 그분의 의사를 내게 알려 줘.”
잉센에 대답에 천해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초월급 헌터가 한국까지 날아와 만남을 청하는데, 이쪽에서 ‘상황 봐서’라고 대답을 하는 형국이다.
물론 천해선으로서는 진 박사의 편집증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도 썩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잉센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나중에라도 꼭 대답을 들려달라 청했다.
같은 초월급 헌터인데, 이렇게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
천해선은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잉센!”
프라이스 길드의 누군가가 잉센을 불렀고, 그는 곧 따라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너한테도 궁금한 게 있어. 그러니 기회가 되면 그 능력을 구경시켜 줘.”
“그 능력이라니?”
“메루스.”
“!”
훈훈한 표정이던 천해선의 얼굴에 갑자기 날 선 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잉센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변화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도 다섯 개의 별 중 하나거든.”
“……!”
잉센은 그렇게 말한 뒤 프라이스 길드를 향해 달려갔다.
“……다섯 개의 별이라.”
어쩐지.
그래서 메루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구나.
천해선은 멀어져 가는 잉센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이사순 회장이 포함된 다섯 개의 별.
잉센은 바로 ‘파이브 사이더스’의 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