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표정 관리라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누군가 내게 돈다발을 쥐여 줄 때라면 더더욱 말이다.
“칠억오천만 원.”
얼마요?
그 어마 무시한 금액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입술을 제어하는 게 블랙 에테르를 컨트롤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실화냐 진짜.
두 달 만에 실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이쯤 되면 중급 헌터 연봉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왜 말이 없지? 부족한가?”
저 자식이 아무래도 내 생각을 읽은 것 같다.
비열한 웃음을 지은 채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알바조차 하지 못한 내가 7억이 넘는 돈을 일시에 거머쥐게 되었는데, 표정 관리가 될 턱이 있나.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좋아. 넘기지.”
야차의 거래는 여전히 칼 같았다.
금액이 크다 뿐, 내가 가져온 희귀초는 실제로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오늘은 평가사로 보이는 노파가 와서 내가 가져온 의귀초를 평가했고,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거래를 승인했다.
거래를 하다 구라를 치면 사지가 뜯겨 나간다지만, 정직한 거래를 할 때에는 이만한 장사꾼도 없는 것이다.
야차의 부하가 내게 가방을 넘긴다.
영화에서나 보던 돈 가방이다.
“듣자 하니 헌터 시험을 친다던데.”
“그래.”
“왜 그때 헌터인 척을 했지?”
거래가 다 끝난 마당에 그건 왜 물어?
표정을 보아하니 추궁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뭐랄까. 단순한 호기심 같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내가 대답한 건 ‘힐러’ 타입이라는 것뿐이었으니까.”
“……음?”
그러자 야차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표정이 나왔다.
‘아, 그랬나?’ 하는 얼빠진 중얼거림과 함께.
그리고 난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을 삼켜야 했다.
비수를 치료해 줄 때, 야차는 내게 힐러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했다.
힐러 타입으로 헌터 자격 시험에 응시하는 건 사실이니, 특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뭐, 정작 헌터냐고 물어봤을 때 솔직히 대답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 게 뭐냐.
메롱이다, 이 자식아.
“시험은 힐러로 응시할 생각이고?”
“그래.”
“왜지?”
“뭘 그렇게 자꾸 물어봐. 더 알고 싶으면 돈을 내라.”
비수가 한차례 몸을 움찔했지만, 예전에 당한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쉽사리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특별히 누가 언급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곳 암시장에서 내가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통은 야차와 직접 거래를 하는 경우가 없고, 심지어 야차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는 경우도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한다.
오지호를 포함한 주변 심복들조차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기에 추측이 가능하다.
야차는 나를 단순한 ‘희귀초 수집가’로 보고 있지 않다.
나에게서 어떤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하다.
그 말은 즉, 나도 발 뻗을 구석이 있으니 똥배짱을 부린다는 말이다.
“와하하하하하하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목소리에 특별한 기운을 담는 통에 한 가지 팁이 생겼다.
목소리가 거슬릴 때 귀 근처의 블랙 에테르를 활성화시키면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다.
비수뿐만 아니라 심복 몇몇이 가늘게 몸을 떨었지만, 나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 답변에 따라 가치를 매길 테니 들어 보도록 할까.”
야차의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특별한 거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쪽에서 먼저 빚을 지겠다 하니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반적인 헌터와 조금 다르다.”
“어련하시겠나. 단독으로 포이즌 던전에 들어가 희귀초를 캐오는 미치광이신데.”
“칭찬으로 알아듣지.”
구라를 칠 생각은 없다.
잘못하면 손모가지가 날아갈 테니.
하지만 암시장의 총수에게 모든 것을 오픈할 이유는 없다.
심플하고 간단하게.
“본래의 힘을 사용할 경우 헌터가 되기 힘들다.”
“호오…….”
야차는 날것의 느낌이 가득한 남자다.
그래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 보인다.
놈은 내게 굉장히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난 저게 싫단 말이야.
뭔가를 알고 있는 척하는 특유의 거만한 눈빛.
“다른 부수적인 이유도 많지만, 난 대외적으로 힐러 활동을 할 거다.”
“그리고 음지에서는 이렇게 희귀초 거래나 하면서 말이지?”
“아마도.”
포이즌 몬스터의 코어를 통해 성장이 가능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래. 뭐 일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돈 내놔.”
“……나이에 비해 너무 속물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아니면 다른 거로 주든가.”
야차가 ‘요놈 봐라?’ 하는 얼굴이다.
이 문답 속에서 내가 뭔가를 준비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실실대며 농담 따먹기만 하는 줄 알았겠지.
“다른 거라면?”
“얼마짜리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으로 때우는 거로 받고 싶은데.”
“흐흐. 뭐 내 쌍판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아니. 질문에는 질문으로 받는 게 도리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격투라기보다 차라리 예술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 주었던 남자.
야차의 곁에 머물고 있는 심복 중 하나.
오지호를 향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저 관리인의 격투술을 배울 수 있지?”
순간적으로, 평온하던 오지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야차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한순간 커지더니, 실소를 머금은 채 묻는다.
“환격이 말이냐?”
환격이 누구야.
저 아저씨 이름은 오지혼데.
아.
이곳에서는 가명만 사용한다고 했던가.
이름을 발설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힐러가 격투는 왜 배우지?”
“남이사.”
“흐흐. 정말 때려죽이고 싶군.”
농담이지만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야차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일 테니까.
하지만 놈에게 나는 이미 꽤 중요한 거래상이 되었다.
세상 누구도 희귀초를 이렇게 다발로 제공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저 관리인에게 격투술을 배우고 싶다.”
“공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방금 넘겨준 가방을 고스란히 되돌려줘야 할 수도 있다.”
“상관없어.”
물론 구라다.
상관이 없기는 왜 없냐.
눈앞에서 칠억오천이 있다가 사라지면 한동안 밤에 잠도 못 잘 거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내 각오를 피력할 필요가 있었다.
왜?
내가 가진 살상력에 비해, 내 전투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니까.
지금까지의 내 공격 패턴은 일자무식, 마구잡이 수준이다.
‘독보’로 배후에 접근한 뒤, 손에 닿는 아무 곳이나 긁어 버리는 것.
그러나 상위 레벨로 갈수록 이런 막무가내식 공격이 언제까지 먹히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전혀 닿지 않거나, 신체에 두르고 있는 강기(罡氣)에 엑사의 칼날이 먹히지 않을 경우가 올 것이다.
신체 능력을 극대화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직은 키릴이 사용했던 화려하고 강력한 공격을 사용할 그릇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니까.
돈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겠다는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내가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지 느낌이 온 모양이다.
“절실하군.”
“절실하지.”
“나한테 배우는 건 어떻겠나. 환격의 기술은 내가 전수한 건데.”
맙소사.
그랬던 건가.
하지만 고작해야 ‘E’랭크의 피지컬로도 B랭크 나이트를 박살 내는 기술인데, 야차가 직접 시전하는 격투술을 받아 낼 자신은 없다.
“배우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다.”
“크크크. 물불 안 가리는 줄 알았는데 자기객관화는 또 잘되어 있군.”
야차에게서 긍정적인 신호가 나오자, 오지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누구를 가르칠 생각이…….”
“해라.”
오.
이게 절대 존엄의 스웩이라는 건가.
무겁게 말을 꺼낸 걸 보니 정말 싫었던 것 같은데, 야차의 명령 한마디에 오지호는 침묵을 지켰다.
상황이 술술 잘 흘러가는군.
생각보다 혹독한 시련이 될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말이다.
야차는 내게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 들르라고 했다.
교육을 받을 때는 굳이 자신을 볼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
웃기는 놈이다.
내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보수는?”
“교육을 수료하면 그때 제안하지.”
“그때가 되면 이 돈을 홀랑 까먹을 수도 있을 텐데.”
“괜찮다. 돈으로 받을 게 아니니까.”
시발.
또 무슨 꿍꿍이야.
저 음흉한 얼굴을 보건대 돈으로 주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싶다.
“그럼, 볼일은 끝났군.”
야차가 씨익 웃더니 몸을 돌린다.
본 계약은 물론 추가 계약까지 끝났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정이 좀 들었을 텐데. 작별 인사라도 하지 그래?”
등을 진 상태에서 야차가 고개만 돌려 나에게 묻는다.
“그래. 한밤중에 소파 위에서 날 덮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와우…….”
“야이 미친놈아!! 그때는……!!”
얼굴이 빨개진 비수가 핏발선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달아오른 볼이야 그렇다 쳐도, 벌게진 눈은 방금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
누나와 헤어지고 이곳 초입에 들어올 때부터 비수의 눈은 계속 충혈된 상태였다.
“또 놀러 와. 누나가 보고 싶어 할 테니까.”
“……!!”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암시장을 탈출하려다 잡혀서 입이 찢겨진 녀석이 아닌가.
야차에게 비수가 빚진 금액이 얼마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내가 뭔데.
내 코도 석 자다.
고작해야 두 달 남짓한 인연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힘이 생기고 돈을 많이 번다면.
그때는…….
“간다. 몸조심하고. 은신일 때 자만하지 말고.”
“너나 잘해.”
-꾸왕!!
어깨 위 안 보이는 곳에서 뽀리가 비수를 향해 인사를 한다.
암시장에 오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내던 녀석인데.
어쩐지 오늘은 은신을 풀지 않는다.
* * *
유정화.
그녀는 헌터 협회 접수처에서 일한다.
매 분기 말일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응시료 납입을 연기해 달라는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오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주기로 한 집주인이 이체 한도가 막혔다고 해서…….”
“주식을 팔면 돈이 이틀 뒤에 들어오는 줄 몰랐다니까!”
“사장님이 월급을 안 줘서 돈이 조금 모자라요……. 일단 이것부터 드리고…….”
사연으로만 따지면 ‘세상의 이런 일이’를 여기서 촬영하면 될 듯하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들고 왔나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변명들.
하지만 매 분기마다 일이 반복되면서, 유정화는 점점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안 됩니다. 다음 분기에 신청하세요.”
“야이 나쁜 년아!!”
삐익.
조금이라도 시비의 낌새가 나면 유정하는 호출 벨을 눌렀다.
그 후에는 대기하고 있던 시큐리티 직원이 응시자를 끌어낸다.
이날만큼은 평소보다도 많은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응시자들이 대부분 각성자인 만큼, 혹시 모를 유혈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응시 접수를 하면서 돈을 내는 게 일반적이다.
최근 헌터 시험의 트렌드는 가진 자들의 몫이니까.
접수를 할 때 돈을 못 내고 만기일까지 끈다는 자체가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소리다.
만기일에 맞춰서 돈을 내고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툭.
누군가 지폐가 가득 든 봉투를 접수대 위에 올려놓는다.
“어서 오세…… 어머.”
마감일에 치여 굳은 얼굴로 일하던 유정화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돋는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잘생긴 남자가 접수처를 찾았기 때문이다.
다소 마른 감이 있지만 멀리서도 눈이 확 뜨일 만한 용모의 사내였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유정화는 찰랑이는 곱슬머리만큼 찰진 목소리로 고객을 응대했다.
모든 응시생을 이렇게 대했다면 고객의 소리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은 없을 터.
백옥같이 흰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를 소유한 남자가 무심하게 대답한다.
“응시료 납부하러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아. 그러시군요.”
유정화는 사내와 친근감을 형성하고 싶었는지, 평상시에 하지 않는 말들을 뱉어 냈다.
“접수 진행 도와드릴게요. 마지막 날에 와서 납부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 응시생분은 약속을 잘 지켜 주셨네요. 호호.”
그러자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하도 강조를 하셔서.”
강조라니.
내가 눈앞의 미소년에게 눈치라도 줬다는 말인가?
유정화는 기억을 되돌려 보았지만,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어 본 기억이 없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급히 남자의 신분증으로 신원을 조회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천해선.
화면 속의 남자는 예전에 보았던 보기 흉한 반점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이 사람이었어??????????’
보기 거북한 반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반점뿐만이 아니다.
예전의 앙상하던 몸이 날렵한 근육질 몸으로 변했고, 피부 또한 비단결같이 고와졌다.
그동안 반점에 가려져 있던 날렵한 콧날과 입술도 이제 와서야 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겠네…….’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변화다.
외모도 외모지만, 저번에 그 거적때기 같은 옷은 어디로 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한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유정화는 천해선이라는 남자의 변화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날 자신의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렇게 환골탈태를 할 줄 알았다면, 그렇게 그지 대하듯 매몰차게 굴지 않았을 텐데.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내일모레 센터 1층으로 모시면 되세요.”
“고맙습니다.”
수험표를 받아 든 해선이 슬쩍 웃으며 눈인사를 한다.
유정화는 그 모습에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직업 윤리고 뭐고, 응시표에 기입된 전화번호를 당장 휴대폰에 추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선은 어느새 건물을 빠져나간 뒤였다.
유정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비에 있는 선임을 찾아갔다.
“티, 팀장님. 저 휴가 취소할게요!”
“어쩐 일이야, 유 주임? 접수 마감일 다음에는 항상 쉬었잖아. 진 빠진다고.”
“괜찮아요!!! 갑자기 일하고 싶어졌어요!!”
유정화는 늘상 내던 휴가 스케줄을 취소해 버렸다.
정작 천해선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