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누구라고?”
“누구?”
비수와 나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는 인물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농담이겠지.
농담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어?
하지만 잉센의 얼굴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야차. 지금은 암시장에서 활동하지, 아마?”
“맙소사.”
비수는 붉은 혀를 쑤욱 내밀었고,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야차.
야차라고?
암시장의 그 폭군이 10년 전 전쟁에 참여한 초월급 헌터란 말인가?
“…….”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적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다.
긴 침묵이 끝난 뒤 내가 취한 행동은 조소를 머금는 것이었다.
“다들 비위가 좋네.”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이다.
잉센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 전쟁 이후로 야차가 저지른 일들은 전부 일반적인 것들이 아니니까.”
“일반적이고 아니고의 수준이 아니야. 그놈은 이계에서 만든 마약을 팔고, 여기 있는 이 친구는 빚을 갚을 때까지 노예처럼 부려졌어. 그런 놈이 파이브 사이더스 중 하나였다고?”
“파이브 사이더스의 가장 큰 목표는 정보의 공유야. 너도 지금까지 겪어서 알겠지만, 모든 조직원이 행동까지 공유하지는 않아.”
“정보만 공유하고,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한다?”
“맞아. 비상시국이 아니면 다 같이 모이는 일도 없어. 일반적인 길드나 너희들 이레귤러와 같은 구조가 아니야.”
“…….”
정보를 공유하되 행동을 함께하지는 않는다.
조직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집단.
잉센의 말마따나 파이브 사이더스는 일반적인 길드와 여러모로 달랐다.
“네가 알면 거부감만 더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야차는 파이브 사이더스의 자금이 부족할 때마다 엄청난 거금을 내놓았어. WHPO와 각 나라의 협회를 피해 움직이는 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소모되는 일이지. 야차는 세상을 등질지언정 파이브 사이더스까지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나는 머릿속으로 야차를 만났던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처음 만날 때는 정말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위압감을 느꼈다.
비단 몬스터 고기를 찢어 먹는 장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늘 같은 기운이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야차가 전투를 벌이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어떤 타입인지조차 모른다.
2m에 달하는 신장과 터질 듯한 전신의 근육을 보면 나이트 계열이 아닐까 싶지만, 모든 헌터가 그러하듯 보이는 것과 능력은 상관이 없을 때도 있다.
나름대로 한 가닥 하는 헌터였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초월급’ 헌터였을 줄이야.
“야 천해선. 누가 보면 엄청 고상한 인격인 줄 알겠다야.”
비수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뭐?”
“암시장에서 신나게 희귀초 팔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난리야?”
“……이건 그런 교환 차원이 아니잖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특히나. 당사자인 나는 다 잊었거든?”
“미안하지만 네 지분은 1%도 되지 않아.”
“뭐 이 자식아?”
나와 비수의 대화에 굳어졌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워낙에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비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풀고자 일부러 농담을 걸어온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긴 하지. 원한 건 아니지만, 그놈을 통해서 내가 얻은 정보도 있을 테고.”
“맞아, 해선. 정보를 공유한 뒤 각자 최선이라 생각하는 행동을 취한다. 이게 파이브 사이더스가 가진 단 하나의 원칙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네.”
“뭐가?”
“각자가 알아서 취했던 방식 하나하나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았다면 조직이 진작에 망해 버렸겠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건 일종의 칭찬이었다.
각자의 구성원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잘 맞았다는 의미니까.
우리말로 하자면,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
생각을 정리해 보자.
잉센은 비상시국이 아니면 파이브 사이더스가 모이는 일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그 ‘비상시국’이고, 잉센과 첸은 한국에 있다.
평상시라면 각자 알아서 행동했겠지만, 지금은 모여야 할 시기라는 의미다.
“네가 나와 함께 있다는 걸 그 자식도 알고 있으려나?”
“하하. 해선. 그건 우리 정보망이 아니라 말단 기자들도 예상할 만한 일이야.”
“아, 그런가.”
하기사.
영계 탐사가 끝나자마자 한국에 왔으니 누구라도 짐작했을 일이다.
“함께 가 줬으면 좋겠어. 해선. 야차와 함께 뭔가를 하자는 말은 아니야.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알았어. 같이 가지.”
“정말 고마워.”
잉센의 표정에 진심이 가득 묻어났다.
무슨 정보가 얼마나 공유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꽤나 특이한 별종일 것이다.
무식하게 힘만 세기로 유명한 사일리아조차 마물 하나를 상대하는 데 애를 썼거늘, 이쪽은 구건이를 포함해 열 마리 이상의 마물을 혼자서 제압해 버렸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내가 ‘키릴’과 같은 포이즈너라는 걸 알고 있다.
거창하게 인류의 희망! 같은 건 아니더라도 분명 의지하는 바가 있을 거다.
눈앞에 보이는 잉센의 간절한 표정처럼 말이다.
“내일 해 뜨는 대로 바로 출발하자. 나도 묻고 싶은 게 많아.”
“그래.”
대략의 스케줄을 잡은 뒤, 우리는 서로가 상대했던 마인에 대해 디테일한 정보를 나눴다.
두 명의 마인은 각자 생김새도 조금씩 달랐고 전투 방식에 있어서도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
마치 인간과 똑 닮았다.
“저…….”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강정현이 손을 들었다.
“응? 왜 그래?”
강정현이 한차례 좌우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사님께서…… 저를 개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모든 동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갑자기 시야가 트이는 걸로 보아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개, 개조?!”
“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아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원래…….”
생체 실험을 끔찍이도 싫어했잖아, 라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조차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강정현이 어렸을 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강정현이 얼굴에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 녀석도 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첸은 달라졌다.
어지간하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던 녀석이, 이제는 마치 강도처럼 이것저것 얼굴 두꺼운 요구를 하고 있다.
마인과의 전투 이후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강정현의 표정에서도 첸과 비슷한 마음이 느껴졌다.
비장하고 절박한 마음 말이다.
강정현은 살짝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팔에 감은 섬유 디바이스를 작동시켰다.
슈르르.
텅 비어 버린 어깻죽지에서 몇 가닥의 어린 이파리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저게 뭐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두 명의 과학자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오오!”
“와우……!”
진 박사와 잉센.
그들은 마치 합이라도 맞춘 듯한 얼굴로 강정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뭔데 그래?”
“해선. 이건 평범한 식물이 아니야.”
“그럼?”
잉센이 대답 대신 강정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거, 영계의 식물이지?”
“네.”
“!”
오우.
그래서 놀랐던 거구나.
“영계에 있을 때 혹시나 싶어서 어린 식물들을 가져와 봤어요. 그리고 어깨에 심어 봤더니…… 몇 송이가 살아남았어요.”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인간계의 토양도 아닌 숙주의 몸에서 영계의 식물이 살아남다니…….”
잉센은 마치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안경을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갑자기 ‘아차’ 하는 얼굴로 강정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정현. 그런 표현은 해서는 안 됐는데.”
아마도 ‘숙주’라는 단어가 뒤늦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평상시 말실수와 거리가 먼 잉센이다.
그런 잉센이 섣부른 단어 표현을 할 만큼, 강정현의 몸에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헤헤. 아무렇지도 않아요.”
강정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두 명의 과학자가 잘 볼 수 있도록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오오…….”
영계의 식물이라는 말에 우리도 강정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확실히 영계를 돌아다녔을 때 주변에 피어난 식물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뭐, 한편으로는 우리 같은 동물(?)도 다른 차원에서 잘만 활동했으니, 식물이라고 다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건 익스큐라는 식물이야. 워낙에 귀한 품종이기 때문에 나도 영계에서 몇 개 가져온 건데…… 네 몸에서 자라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잉센이 연신 호들갑을 떨며 뚫어져라 식물들을 바라보았다.
“잉센. 이게 그렇게 귀한 거야?”
“응. 이 꽃의 이파리에는 화합물로 만든 진정제보다 더 효율이 뛰어난 성분이 들어 있어.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때 진통제가 없다면 이 이파리를 씹어 먹어도 될 정도야.”
“호오.”
잉센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식물의 이름을 불렀지만, 당연히 우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옆에 진 박사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뻔했다.
‘영계의 식물을 키울 수 있다니. 신기하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잉센의 호들갑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정에 도달했다.
“!”
최근 들어 애타게 찾아 헤매는 한 가지 물질.
‘아니마’ 또한 영계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추출하는 것이지 않은가.
만약이지만, 그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나는 영계를 헤매지 않고도 ‘메루스’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해선 헌터님. 혹시……!”
나와 같은 가정을 했는지, 육철완이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아니마 생각하신 거죠?”
“네. 맞습니다.”
“정현이가 아직 아니마를 접한 적이 없어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있을 마인과의 대전에서 ‘메루스’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첸의 전투 정보로 미루어 보건대, 일반 헌터들의 스킬에 메루스가 섞이면 철벽 같던 마인의 몸에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헌터들에게 메루스를 나누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 안에 있는 메루스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내가 직접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헌터들이 사용한 메루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래저래 많은 양의 메루스가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다음번에 영계에 가면 아니마 몇 개를 뽑아 와야겠어요. 대범이 몰래.”
“그 정도라면 차원 간섭에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육철완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갑자기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 속담이 떠올랐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흠흠.
“잠깐 살펴봤는데…… 살상용 식물이 보이지는 않더구나. 영계의 식물들은 이계와 달리 대부분 온순한 모양이다.”
“그런가요.”
살짝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든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식물이 없어서 아쉬워하는 소심한 얼굴의 소년이라니.
“히힛. 너무 실망하지 마, 정현아. 나머지 식물들은 아직 정보가 없다고 하니까. 혹시 알아? 개쩌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네. 비수 누나.”
이곳에서의 볼일은 일단락되었다.
첸과 잉센을 위한 프라니움을 전달했고, 강정현은 당분간 이곳에서 진 박사와 함께 ‘개조’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안 가?”
“가, 가야지.”
잉센은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제 곧 여러 가지 실험에 들어갈 강정현이 궁금한 거겠지.
“진 박사님이 허락해 주셨어. 앞으로는 매일 여기에 와도 돼.”
“!”
단박에 잉센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어쩌면 과학자들의 호기심이란 메루스보다 더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결됐으면 빨리 가자. 10년 전 전쟁을 겪은 반 미친놈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