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고생했군.”
초췌한 표혁규의 모습을 본 야차는 단 네 글자로 자신의 감상을 피력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평소 그의 성정을 알고 있는 이라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아닙니다. 죄송할 뿐입니다.”
표혁규의 반응 또한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야 어쨌건 그는 이사순의 곁을 보좌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비록 자의가 아니라고는 하나, 표혁규는 마인에게 농락당한 자신의 무능함을 통감해야 했다.
그 묵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천해선이 야차에게 물었다.
“그동안 뭐 얻은 정보 있어?”
“없다.”
그 단순 명료한 대답에 천해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졸라 뻔뻔하네. 누구는 파이스 사이더스 빼 오려고 도끼까지 맞았는데.”
“흐흐. 이곳은 암시장이다. 정보를 얻으려 하는 대상이 음지에 있다면 쉽지만, 밝은 곳일수록 뒤를 캐기가 힘들다. 뭐, 그런 놈들이라도 뒷구멍으로 딴짓을 한다면 가능성이 생기겠지. 허나 유감스럼게도 래더는 교과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과서?”
“아침에 조깅을 하고, 직접 건강한 식자재로 요리를 해 먹고, 주말에 손주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마인과 내통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역겹기 짝이 없는 놈이군.”
“흐흐. 그렇지.”
전 인류의 등에 칼을 꽂아 놓고 본인은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래더는 천해선이 가장 싫어하는 전형적인 인간형이었다.
“그런데……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아?”
잉센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천해선에게 물었다.
“래더는 아들을 마인에게 잃었어. 그가 가족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면 마인에게 협조할 리가 없잖아. 헌데 주말에는 또 손주들과 시간을 보낸다니…… 너무 이상한데?”
“듣고 보니 그러네.”
미친놈이 미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지만, 적어도 일관된 행동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해선은 그 부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마음이 없었다.
“의심의 눈을 피해서 코스프레하는 것일 수도 있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그러려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이 안 된다는 거야. 그게 제일 중요하지.”
“……네 말이 맞아. 해선.”
잉센이 천해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어떠한 미사여구를 붙여도 래더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것이 이 자리에 보인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최근 들어 래더에게서 수상쩍은 일이 없었다 이거지?”
“그렇다.”
“흐음…….”
천해선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놈이라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야차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서로 정보를 모은 뒤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자리다.
표혁규를 비롯해 이런저런 정보을 모아 온 천해선에 비하면, 야차가 얻어 온 것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될 수준이었다.
‘그런데, 저 당당함은 뭐지.’
천해선은 그 위화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도출했다.
“새로운 정보가 없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정보가 되는 건가?”
“호…….”
야차의 눈이 한순간 이채롭게 빛났고, 그 모습에 천해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차가 감탄 어린 표정과 함께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늙은 살쾡이 같다는 생각은 했다만…….”
“심계가 깊다는 말이지? 고마워.”
야차는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천해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네 말이 맞다. 수상한 낌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론은 두 개 중 하나다. 래더가 무죄이거나,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된 작업이거나.”
“아…….”
잉센이 그제야 이해한 듯 눈을 빛냈다.
“그래서 집 안을 뒤져야 한다는 거구나?”
“맞아. 부지성이 준 데이터도 그렇고, 모든 방향이 래더 총재의 집을 향하고 있어.”
“부지성?”
야차가 묻자 잉센이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랭킹전 당시 부지성의 부서진 디바이스가 파장을 측정했던 일.
그리고 셉티뭄이 협회 건물에 결계를 쳤을 때, 부지성이 데이터를 추출했던 일.
마지막으로, 그 파장이 래더 총재의 집에서 발견되었던 일까지.
“그렇군. 심증에 물증까지 더해졌으니 망설일 건 없겠어. 날짜를 잡아서 바로 총재를 죽이러 가자.”
야차의 말에 잉센이 고개를 꿀꺽 삼켰다.
‘총재를 죽이러 가자’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피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자신들의 추론이 틀린 것이라면, 그들은 전 세계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총재의 집에 들이닥칠 때 셉티뭄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분명 놈들도 주의를 기울일 텐데 말이야.”
잉센의 말에 천해선과 야차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같은 결론을 도출한 상태였다.
“나오게끔 만들어야지.”
“나오게끔 만들면 된다.”
천해선과 야차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머리를 굴리는 데 있어 그들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어떻게 나오게 만들면 될까?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셉티뭄을 말이야.”
잉센이 좌우를 번갈아 보며 물었고, 야차가 곧 손가락을 튕겼다.
딱.
“내 대답은 이거다.”
곧 어둠 속 저편에서 한 개의 조명이 켜졌다.
그 자리에는 둥그스름한 인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천해선과 잉센은 그 실루엣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딱.
조명이 한 개 더 추가되자,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경악성을 토했다.
“아니……!!”
“이럴 수가……?!”
특유의 통 큰 재킷과 인심 좋아 보이는 미소.
영민함이 잔뜩 묻어난 눈매까지.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이사순 회장이었다.
“어떻게…… 이런…….”
잉센이 허둥지둥 이사순의 앞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죽은 이사순이 이곳에 살아 돌아온 것일까.
잉센과 달리 천해선은 우두커니 서서 먼발치의 이사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벼락처럼 천해선의 뇌리를 강타했다.
“너……!!”
“음?”
“너, 너 설마 이사순 회장을……!!”
죽은 자를 사계에서 강제로 소환하는 네크로맨서.
그것이 야차가 가진 능력이었다.
천해선이 죽일 듯이 야차를 노려보았으나, 정작 그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이사순은 내 몇 안 되는 동료다. 설마하니 이사순에게 그런 모욕을 줄 것이라 생각하는 거냐?”
“…….”
“게다가, 죽은 생명체를 수하로 만드는 건 조건이 굉장히 까다롭다. 이사순이 사망할 당시 나는 암시장 내에 있었어.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저기 있는 건 뭔데.”
“저건 엑셈플라르(exemplar)라고 한다. 이 녀석의 일부지.”
스스스…….
야차의 뒤로 풍선을 닮은 기형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코인지, 아니 어디가 머리인지조차 구분이 어려운 백색의 몬스터였다.
“엑셈플라르는 한번 인지한 대상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전투력은 형편없지만, 가진 재주가 뛰어나 수하로 삼았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엑셈플라르가 손처럼 보이는 좌우의 덩어리 중 하나를 잘라 내었다.
떨어져 나간 하얀색 덩어리는 흡사 밀가루 반죽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곧, 그 덩어리는 특정한 형태로 모습을 만들어 갔다.
허여멀건 빛깔이 갖가지 색을 갖추기 시작했고, 뭉글뭉글한 외피도 뚜렷한 실루엣을 만들어 갔다.
“이럴 수가…….”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조금은 까칠해 보이지만 매끄럽게 잘생긴 이목구비가 눈을 사로잡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미남자.
그건 바로, 천해선이었다.
“나잖아?”
“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잉센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성은 이사순이 확실했다.
하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천해선의 복사본(?)처럼, 그녀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구나…….”
잉센이 자그맣게 한숨을 토했다.
그럴 리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잠시 희망을 품었다.
이사순이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 눈앞의 이사순은 엑셈플라르가 만들어 낸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성능 하나는 끝내주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자신.
모조품을 바라보는 천해선은 절로 나오는 실소를 막을 길이 없었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뿐, 이건 의심의 여지 없는 천해선이었다.
천해선이 자신의 모조품의 볼을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펑.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모조품이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남은 몇 줌의 흰색 가루를 바라보며 천해선이 물었다.
“조금의 자극만으로도 이렇게 되나 보네.”
“맞다. 행동을 할 수도 없고,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 버리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녀석이다. 조금 전 너희 두 명이 그랬듯이 말이다.”
야차가 말한 것처럼, 천해선과 잉센은 엑셈플라르를 보며 완벽하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그렇군. 래더 총재와 셉티뭄이 혹시라도 저 모조품을 본다면 미끼를 물 수밖에 없겠어.”
“마인들이라면 이런 몬스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진위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기울일 테지.”
“그래서 우리가 마계로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던 거군. 놈들이 모조품이 진짜인지 확인하려 할 테니까.”
“그렇다. 이만하면 유인책으로 손색이 없을 거다.”
야차는 자신만만했지만, 천해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음?”
“놈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겠지만, 만약 총재가 확인을 한답시고 한국에 온다면? 우리의 목표는 래더 총재가 아니라 그의 집이야. 그 녀석을 집 안에 두게 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해.”
“일리가 있군.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네가 준비해 온 전략과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네.”
천해선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야심한 밤.
따르릉.
너무 낡아 골동품처럼 보이는 구형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불 속에 있던 노쇠한 손이 느릿느릿 전화기를 잡았다.
“누구요…….”
잠이 덜 깨 흐릿한 목소리.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확인한 노인은, 스프링처럼 상반신을 일으켰다.
“처, 천해선?”
-네. 총재님.
그건 분명 천해선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천해선이 자신의 핫라인 번호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총재가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천해선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안이 급하니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순 회장의 죽음과 관련해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단서? 무슨 단서를 말하는 거요.”
-이사순 회장이 살해당했을 당시, 망가졌던 CCTV 영상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
래더 총재는 하마터면 거짓말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셉티뭄은 교활하리만큼 일 처리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가 주변 전파 장치를 망가뜨리는 일을 소홀히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래더 총재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만큼 얼간이는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보시오.”
-아시다시피 이사순 회장의 죽음은 한국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 관계자와 사법부까지 총동원되어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찌어찌 영상을 빼돌리기는 했는데, 해킹한 자료를 외부에 공표하기가 애매한 상황입니다.
“그렇겠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잉센이 한국에 있기는 하지만, 저희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해서 가능하면 총재님께 직접 보고를 하고 싶습니다.
“내게…… 직접 보고를 한다고? 미국으로 오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래더가 당황한 얼굴을 한 채 본능적으로 셉티뭄을 찾았다.
고양이의 모습을 한 셉티뭄은 어느새 협탁 위에서 그들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셉티뭄이 고개를 끄덕이자, 총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천해선 헌터가 말한 대로 이 일은 극비로 진행하는 게 좋겠군요. 언제 오실 생각입니까.”
지잉.
총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한 벨 소리였기 때문이다.
지잉.
“!”
야심한 새벽.
전화와 문밖의 벨 소리가 동시에 울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 확률에 대답이라도 하듯, 수화기 너머로 천해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