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총재는 공범이 확실하다.
천해선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사순의 죽음이 그와 무관한 것이라면, 엑셈플라르(exemplar)로 만든 이사순의 형상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반가워했으면 반가워해야지, 귀신 보듯 하며 뒷걸음질을 치는 게 말이 되는가.
잉센과 야차의 얼굴을 보니 그들도 천해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거로 보였다.
심증은 차고도 넘친다.
관건은, 가장 강력한 물증을 찾아내는 것.
‘셉티뭄’이라는 물증을 말이다.
“어디 들어 봅시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잠을 깨우고, 초대한 적 없는 집에 발을 들인 이유가 뭔지.”
이사순의 얼굴을 보고 패닉에 빠졌던 래더 총재는 어느새 평정심을 찾은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야차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그는 권위 넘치는 WHPO의 총재로 돌아와 있었다.
만약에 합당한 근거를 들고 오지 못한다면,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천해선 일행에게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사순 회장은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죽었습니다. 기다란 원통 모형의 무언가에 관통당했죠. 이를테면…… 사람의 손 같은 것 말입니다.”
“그건 나도 부검 결과로 확인했소. 영상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마치 그깟 영상이 무에 그리 중요하냐는 뉘앙스였다.
천해선은 그 반응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하지만 영상이 아니면 확인하기 힘든 것도 있었죠.”
“그게…… 뭐지?”
“이사순 회장은 최후의 순간 자신을 죽인 배후를 지목했습니다. 피로 바닥에 글씨를 써서요.”
“!”
래더 총재의 얼굴이 딱딱히 경직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순이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거…… 거기에 무슨 글씨가 쓰여져 있었소?”
“직접 보시죠.”
천해선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목록에 있는 파일 하나를 선택하자, 노이즈 가득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으음…….”
래더 총재가 한껏 눈을 가늘게 뜬 채 영상을 주시했다.
여기에 자신과 관련된 단서가 나오면 큰일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집중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놓치고 말았다.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천해선의 동공을.
‘나와라……!’
천해선은 모두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쏠리는 동안 빠르게 눈을 굴렸다.
스스로가 셉티뭄이라고 가정을 해 보자.
래더 총재가 핸드폰으로 확인한 영상을 전해 들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 할 것인가.
천해선은 무조건 후자라고 생각했고, 마침내 찾아내고 말았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바로 위.
시야의 사각지대 위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를 말이다.
화악.
천해선의 손끝에서 황금색의 가느다란 줄이 튀어나왔다.
몸의 왼쪽은 백색 털이, 오른쪽은 흑색 털이 뒤덮인 고양이를 향해.
-!?
만약 처음부터 천해선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가볍게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래더 총재와 마찬가지로, 셉티뭄은 핸드폰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일반적인 영상도 아니고, 노이즈가 잔뜩 낀 영상을 확인하려면 누구나 주변 시야가 어두워지기 마련.
천해선은 그 시야의 사각지대를 노렸고, 마침내 고양이의 한쪽 다리를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하악.
“이게 무슨 짓이오!”
래더 총재가 경악에 물든 목소리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야차가 그의 뒤에서 목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래더 총재는 또 한 번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야차가 내뱉은 말도 말이지만, 현관에서 경험했던 차디찬 기운이 다시 한번 자신의 몸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
-캬옹.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황금색의 밧줄을 끊어 내려고 했다.
앞발로 후려치기도 하고, 이빨로 물어뜯는 등.
그러나 천하의 마인도 메루스의 기운을 어쩌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천해선도 딱히 다음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어쩔 셈이지?’
한동안 기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천해선은 셉티뭄을, 야차는 래더 총재의 행동을 제약한 채로.
잉센은 스카우터처럼 생긴 디바이스로 현재의 상황을 빠짐없이 촬영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래더 총재는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잉센의 디바이스에 마인이 찍히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계획이 모조리 틀어지게 된다.
-비이…….
작은 생명의 날갯짓.
기묘한 대치 상황에 변화를 준 것은 천해선이 날려 보낸 황금 벌의 날갯짓이었다.
스륵.
메루스를 출수한 손으로 ‘비’가 살며시 스며들자, 천해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잉센! 2층 서재야!”
“알았어.”
래더 총재의 집에 와서 딱히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던 잉센.
그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잉센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볼록하니 솟아올랐다.
무언가 어마어마한 힘을 쓰는 것 같은데, 주변에 딱히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뭐지……? 뭘 하려는 거야?’
래더 총재가 구속당한 상태에서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다.
오히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더 두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곧, 귀가 먹먹한 폭발음이 위로부터 들려왔다.
쾅!!!!!!!!!!!!!!!!!
어찌나 큰 충격이었는지 대리석이 갈라지고 벽이 좌우로 흔들릴 정도였다.
“으악!!”
래더 총재가 눈을 감은 채 비명 소리를 질렀다.
얄궂게도, 야차가 자신의 몸을 잡아 준 게 도리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뜬 래더는, 대치 관계에 특별한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눈앞’의 전경은 그랬다.
휘잉.
솨아.
하지만 그는 곧,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래더 총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이내 감전된 듯 몸을 떨었다.
“지…… 집이……!!”
하늘이 보였다.
본래 천장 위로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날아가 버렸다.
잉센은 방금, 래더 총재의 저택 절반을 날려 버린 것이다.
쿠우우우웅.
깔끔하게 날아간 집 너머로 거대한 머신이 위용을 드러냈다.
에테르의 빛으로 가득한 초대형 포클레인이 먼지를 털듯 저택의 잔해를 털어 내고 있었다.
“…….”
순식간에 자신의 보금자리가 개박살이 난 래더 총재.
그는 자신이 구속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은 채 바락바락 악을 썼다.
“잉센!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아시오!”
일개 협회 직원도 아니고.
감히 WHPO 총재의 집을 부숴 버리다니.
별다른 이유 없이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초월급 헌터든 뭐든 간에 당장 국제 헌터 수용소에 갇힐 만한 일이었다.
잉센이 일을 벌이기 전에 입술을 깨문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세상의 모든 헌터들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을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그러나,
쿠우우웅.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셉티뭄이 도망가기 전에, 차원의 문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해선이 외친 ‘2층 서재’라는 건 필경 차원이 문이 있는 장소일 터.
쾅!!!!!!!!!!
잉센은 서재 전체를 포클레인으로 퍼담았다.
셉티뭄은 천해선이, 래더 총재는 야차가, 차원의 문은 잉센이 각각 확보하게 된 것이다.
‘방 한 칸을 모두 담을 크기라니…….’
래더 총재는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잉센이 에테르를 활용해 각종 머신을 만들어 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에테르는 일반적인 금속보다 강도가 훨씬 강하고, 전자 신호보다 반응이 빠르다.
같은 타입의 머신이라 하더라도 잉센이 만들어 낸 것이 성능이 좋은 이유다.
하지만 정작 래더 총재가 질려 버린 건, 그가 소환한 포클레인의 크기에 있었다.
어지간한 10층 건물보다 더 크고 웅장한 포클레인이라니.
환갑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즈였다.
“와……. 개쩌네.”
오죽하면 천해선조차 잉센이 소환한 에테르 머신을 보며 입을 헤 벌릴 정도였다.
“너 진짜 세구나. 잉센.”
그러자 잉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하. 아무래도 영계에서보다는 쓸 만할 거야.”
“과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계에서 딱히 제약이 없었던 천해선과 달리, 사일리아와 잉센은 마인들처럼 차원 간섭에 영향을 받은 채로 싸웠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계에서 잉센의 본래 실력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였다.
아무런 제약 없이 가진 힘을 마음껏 쏟아 내는 잉센의 힘은, 땅을 가르고 산을 옮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드래곤에 견줄 만한 크기의 에테르 포클레인.
그걸 보면서 천해선은 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네게 ‘지략가’라는 수식어를 붙여 준 거야? 저건 그냥 야만 그 자체잖아.”
잉센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는 에테르 머신을 움직여 서재의 가구들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마침내 정육면체로 생긴 금고를 하나 발견해 냈다.
“해선……!”
“응.”
천해선의 동공이 다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금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은 그 본질을 숨기지 못한다.
천해선의 시야에, 정육면체 안에서 맴돌고 있는 진회색의 소용돌이가 보였다.
“맞아. 차원의 문.”
천해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테르 머신이 정육면체의 금고를 일행에게로 보냈다.
텅.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해선은 손에 힘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
에테르의 힘에 구속돼 이리저리 저항하던 고양이가 행동을 멈춘 것이다.
녀석은 마치 약이라도 한 듯 추욱 늘어졌고, ‘금안’으로 확인했던 마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스윽.
늘어진 고양이의 옆에 가늘고 기다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됐네.”
마침내 셉티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 *
‘마인이라고? 저게?’
잉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영계에서 마주한 ‘이더스’는 그래도 인간과 닮은 구석이라도 있었지, 눈앞의 셉티뭄은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의 영역과도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몸의 형상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기체로 만들어진 것처럼 불규칙하게 흐느적거렸다.
-잘도…….
그 음울한 음성에 래더 총재는 물론이고 잉센조차 몸을 움찔했다.
‘강하다.’
어찌 음성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느냐마는, 잉센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셉티뭄’은, 자신이 영계에서 만났던 ‘이더스’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으드득.
잉센의 귓가에 불협화음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지, 야차가 부서져라 이를 갈아 버린 것이다.
“나와.”
야차의 몸은 여전히 래더 총재를 구속한 상태였지만, 그가 내직이 뱉은 한 마디에 땅속에서 까마득한 숫자의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래더 총재의 저택이 던전처럼 변했고, 갖가지 모습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셉티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워.
-캬아악.
-…….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던 셉티뭄이 몬스터의 발톱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빠르다.’
잉센이 안구에 힘을 주며 셉티뭄의 신형을 쫓았지만, 번번이 놓치기에 일쑤였다.
야차가 소환한 몬스터를 조롱이라도 하듯, 그는 유유히 신형을 움직여 수없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기보다는…….’
몬스터들을 한쪽으로 몰아넣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크게는 골렘부터 작게는 하이에나들까지.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래더 총재의 집은 이미 ‘집’이라 부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슈아아…….
몬스터들을 적당히 몰아넣은 셉티뭄이 갑자기 몸을 팽창시켰다.
“……?”
매캐한 연기처럼 커다란 셉티뭄의 몸이, 곧 몬스터의 눈과 입, 코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케엑.
-퀭.
‘저건……?’
몬스터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기 시작한다.
기체화한 셉티뭄의 몸은 때려 봐야 무의미한 것이었다.
몬스터들은 필사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갈랐고, 반면 셉티뭄의 기체는 몬스터의 몸 안으로 들어가 내장 기관을 파괴했다.
단 1분.
야차가 불러낸 모든 몬스터가 사라지기까지 단 1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달칵.
“오. 열렸다.”
천해선이 금고를 열기까지의 시간도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