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29)
229화
“괜찮아?”
“네, 언니.”
땀으로 온몸이 흥건히 젖었지만, 비수는 마리아를 향해 브이 사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애써 밝게 지어 보인 표정과 달리 그녀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였다.
볼이 패인 게 눈에 보일 만큼 얼굴이 핼쑥해졌고, 입술이 시퍼런 것이 폭주 일보 직전까지 간 듯 보였다.
“요새 너무 무리하고 있어.”
“히히. 언니처럼요?”
“…….”
마리아는 비수의 도발적인 미소에 더는 무어라 꺼낼 말이 없었다.
못내 걱정스러운 듯 조언했으나, 사실 사정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비수만큼은 아니지만, 마리아의 얼굴에도 탈력감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천해선은 악마였다.
적어도 이 훈련 스케줄을 고안했을 때만큼은.
석 달의 시간 동안 이레귤러 멤버들은 이를 갈아 가며 훈련량을 소화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천해선이 짜 놓은 훈련량을 마치고도 몸에 과부하가 없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뼛속까지 와닿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헌터들의 욕심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첸은 하루 훈련치를 끝내고 나서도 한 번 더 검을 휘둘렀고, 강정현은 메루스를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지독하게 훈련량을 늘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비수였다.
“다 같은 마음인 거죠. 저도 언니도. 먼저 들어갈게요.”
비수가 팔꿈치로 마리아를 툭 치며 샤워실로 향했다.
마리아는 좀처럼 말을 놓지 않는 편이다.
십 년 넘게 전장을 함께 누볐던 구건이는 물론이요, 아직까지 천해선에게조차 존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수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그런 만큼 비수는 마리아가 퍽 고맙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편한 존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너스 인생인데 뭔들 두렵겠어?’
비수는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암시장에 팔았을 때 이미 그녀는 한번 죽었다.
도망가다가 붙잡혀 입이 찢어졌을 때.
평생 동안 끔찍한 흉터가 남았을 때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때 죽었으니까.
말로는 언젠가 빚을 다 갚고 자유의 몸이 될 거라 호언하고 다녔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대가로 사들인 이계의 마약은 금보다도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해선 덕분에 빚을 청산할 수 있었고, 야차가 자신을 묶어 둔 것 또한 나름의 ‘보호’였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부하를 위해서 금영화를 사용하는 보스는 세상에 없었으니까.
비수는 새롭게 얻은 자신의 삶에 백 퍼센트 만족하고 있었다.
천해선과 함께하는 바깥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몬스터들에게 쫓길 때는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앞으로의 싸움이 위험할 수 있다며, 걱정되면 빠져도 좋다는 천해선의 말이.
비수는 순간 서운한 마음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반대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동안 어떤 던전이나 전장에 나갈 때도 천해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큰 게 오고’ 있었다.
“나 집에 좀 갔다 올게.”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터프하게 털어 내며 비수가 인사를 건넸다.
접시를 나르던 천해선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지금 천해선의 집 2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첸도 마찬가지.
본래대로라면 훈련을 마치고 함께 돌아가야 할 터였다.
“집을 왜?”
“옷 좀 가져오려고.”
“옷? 이미 가져온 옷이 몇 벌인데…….”
“계절이 바뀌었잖아, 멍충아. 너처럼 맨날 추리닝만 입고 다니는 줄 알아?”
“흠. 그래도 밥은 먹고 가지?”
“아까 토해서 입맛 없어.”
“오버페이스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아아아아아 에베베.”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두르던 비수가 곧 문고리를 잡았다.
“먼저 갑니다. 맛있게 드세요. 충성!”
달칵.
“거참.”
밖으로 나간 비수를 보며 천해선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영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정해진 양만 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들으니…….”
마리아가 옆에서 천해선의 접시를 받아 들었다.
“아무래도 미안해하는 거 같아요.”
“미안해한다고요?”
“며칠 전에 따로 저녁을 먹었는데, 자기가 최근 들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며 침울해했어요.”
“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었다.
에테르를 다루는 헌터들에게는 천금이 아깝지 않은 버프였으나, 싸워야 할 대상이 ‘마인’이고 다뤄야 할 힘이 ‘메루스’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초에 천해선이 사용했던 ‘블랙 에테르’에도 잘 먹히지 않았던 것처럼, 비수의 버프는 메루스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리아의 치유력과 강정현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정도?
과거 이레귤러 전체 전력을 한 등급 올려 줬을 때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봐야 했다.
“네가 쓸모없다고 면박 준 거 아니냐?”
첸의 질문에 천해선이 억울하다는 듯 도리질을 했다.
“그런 적 없어 자식아. 머리 나쁘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
“……그건 괜찮고?”
첸이 피식 웃더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젓가락을 들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젓가락을 집은 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첸은 네 번의 시도 만에야 만두를 입에 넣는 데 성공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헌터님.”
육철완이 두꺼운 손을 천해선의 어깨에 올렸다.
“제가 바로 비수가 가진 능력의 산증인 아니겠습니까. 뒤따라가서 힘을 북돋아 주고 오겠습니다.”
“네? 철완 아저씨도 아직 저녁 안 드셨잖아요.”
“하하.”
육철완이 조금 더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비수 집 근처에 맛있는 소고깃집이 있거든요.”
“……그게 목적이셨구만.”
천해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말은 저렇게 해도 비수를 다독여 주고 싶은 목적이 클 것이다.
비수에 이어 육철완이 트레이닝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수를 잡기 위해선지 발걸음이 꽤나 빠르게 들렸다.
“그럼 우리도 식사할…… 첸! 벌써 접시에 있는 거 다 처먹었냐!”
“그어 빠이아(그럼 빨리 와).”
천해선과 첸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며 마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쳐 있는 비수의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최근 들어 헌터들의 실종 사건이 빈번하게 발행하는 터라 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겠지……. 은신도 쓸 수 있고…… 뽀리도 있으니까.’
마리아는 그렇게 찜찜한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작은 만두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 * *
부아아앙.
그녀의 머리칼만큼 새빨간 스포츠카가 도심을 가로지른다.
몸이 지칠수록 집으로 가는 운전은 급해지는 법.
그녀는 피로한 눈을 부벼 가며 신호등 앞에 차를 세웠다.
-또 한 건의 실종 사건이 뉴저지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번 실종자는 S랭커 나이트 트레제게로…….
“헤…….”
라디오로 전해지는 뉴스에 비수가 입을 반쯤 벌렸다.
“또야? 이제는 뭐 하루에 한 명꼴로 사라지네.”
이 정도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뉴스에 나온 것처럼, 지난 3개월 동안 엄청난 수의 헌터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냥저냥 일반적인 헌터가 아니다.
사라진 헌터들은 대부분 길드에서 손꼽히는 S랭커들이었다.
“큰일이네. 점점 게이트는 늘어 가는데…….”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의 S랭커 헌터들이 사라졌다.
그 말은 곧, 난도 높은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피해가 늘어난다는 이야기였다.
헌터의 인프라가 약한 대만의 경우, 게이트가 터졌을 때 해당 구역에 S랭커가 없는 일도 벌어졌다.
다른 지역의 길드가 부랴부랴 헬기를 타고 지원을 나섰지만,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작은 도시 하나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렸다.
“보나 마나 마인이겠지? 쥐새끼 같은 놈들. 한국에 왔으면 우리가 혼내 줬을 텐데.”
-꾸왕!
말 한번 잘했다는 듯 뽀리가 배를 내밀며 포효했다.
마인들의 계획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헌터들의 실종 사건은 철저하게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고 있었다.
협회장이 된 도이수가 운영하던 사업체, 엄브렐라 인더스트리의 파장 측정기는 마인의 출몰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국에 파장 측정기가 깔린 나라는 아직까지 한국이 유일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설치할 돈이 없거나, 한국의 장비를 신뢰하지 않거나, 신뢰를 하더라도 설치해야 할 국토가 너무 넓은 문제가 있었다.
마인들은 이레귤러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은 곳에서 은밀하게 헌터를 납치해 데려갔다.
이레귤러가 하루 종일 초음속 비행기를 타고 있지 않는 한, 실시간으로 실종 현장을 덮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놈들은 헌터를 납치해 어쩔 생각인 걸까.
‘아마도 ‘그걸’ 만들려고 하는 거겠지.’
암흑 물질을 주입해 만든 반인만마의 생명체.
그들의 목적은 아무래도 더 많은 수의 키메라를 만들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마인들이 계획하는 종착지에 자신이 있을 수도 있었다.
키메라가 강제로 자신의 버프를 개방시켜 ‘각성’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뭐.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지켜 주는 거겠지. 안 그래?”
-꾸!
뽀리가 그녀의 어깨에서 다시 한번 배를 내밀었다.
비수에게 보호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시사철 동료들과 동행할 수는 없다.
상대가 마인인 이상, 어쭙잖은 헌터로는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뽀리는 훌륭한 멘탈 치료사이자 든든한 보디가드라 할 수 있었다.
부우웅.
어느덧 비수의 차량이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비수는 차에서 내려 늘씬한 몸을 한껏 펼쳤다.
“끄응.”
한차례 기지개를 켠 비수가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딱 챙겨서 나오……?”
비수가 말을 끊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언제나 자신의 어깨 위에 있었던 뽀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곳이라면 뽀리는 대부분 은신을 풀었다.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라진 것이다.
“뽀리야.”
쿵!
둔탁한 소리가 등 뒤로부터 들린다.
조금 전 주차한 차량 쪽이었다.
비수는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스포츠카 앞으로 갔고, 이내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쿵!
그 둔탁한 소리는 뽀리가 낸 것이었다.
평소와 달리 날개를 비대칭적으로 흔들면서, 연신 자신의 이마를 유리에 박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자해’였다.
쿵!
“너…… 왜 그래?”
비수의 물음에도 뽀리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머리를 박아 댔다.
튕겨 나가면 다시 날아와서 들이박고, 몸을 휘청거리다가도 다시 유리를 향해 돌진했다.
쿵.
쿵.
“그만해!”
비수가 비명 같은 말과 함께 뽀리의 행동을 멈추려 했다.
-크왕!
하지만 주먹만 한 뽀리는 비수의 손을 빠져나갔다.
‘울음소리가 변했어……!’
비수가 이를 악물고 뽀리를 잡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울음소리만 변한 것이 아니다.
귀엽고 앙증맞던 뽀리의 얼굴이 무서우리만큼 일그러져 있었고, 완벽히 대칭을 이루던 날개 또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뽀리는 지금, 자해보다 더한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젠장!”
뽀리의 광기 어린 동작을 맨손으로 잡는 건 무리였다.
더군다나 비수는 에스퍼 타입인지라 행동이 빠른 편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차례의 충돌이 더 있었고, 결국 뽀리는 유리창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와장창-
“!”
뽀리가 유리창을 뚫고 조수석 시트에 추락했다.
비늘에 유리 조각이 박힌 데다 피 칠갑까지 되어 있어 온몸이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뽀리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비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급하게 차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파앗.
주차장의 모든 빛이 꺼지고,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