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면목이 없습니다.”
육철완은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를 헬기에 싣고, 트레이닝 센터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
금영화로 치료가 되었다고는 하나 테르티가 남긴 마력은 그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육철완이 처음 한 행동은 사죄였다.
눈앞에서 비수가 속박된 걸 보고도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쓱.
마리아의 따듯한 손이 그의 두꺼운 손에 닿았다.
특별히 치유를 한 게 아님에도 따스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철완 헌터님은 갖은 노력을 다하셨잖아요.”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차장에 남은 전투의 흔적으로 보건대, 보통 수준의 공방이 아니었다.
육철완이 가지고 있던 메루스도 전부 동이 났고, 마력으로 인한 정신 오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구 하나 육철완에게 왜 비수를 지키지 못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가 가진 성정으로 보건대, 분명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서 그녀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빨리 회복돼서 다행이에요.”
천해선이 육철완에게 다가오며 나머지 동료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가 기절했을 당시, 천해선은 동료들에게 ‘금영화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함구하라’고 했다.
비수를 눈앞에서 빼앗긴 것도 모자라 소중한 자원인 금영화까지 사용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나 마나 더 깊은 죄책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덜컥.
누군가 급히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왔다.
민머리에 명석해 보이는 인상.
독일의 초월급 헌터 잉센이었다.
“해선. 그게 사실이야? 비수가…….”
누군가로부터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온 모양이다.
원래는 천해선 일행과 함께 훈련을 했지만, 잉센은 오늘따라 해야 할 일이 있다며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 전체에 낭패감이 가득 떠올랐다.
전장을 함께한 뒤로 잉센은 이레귤러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느낀 유대감은 길드 생활을 하면서도 좀처럼 느껴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됐어.”
천해선이 잉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꽤 차분하네.’
그를 바라보는 잉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잉센이 알기로 천해선과 비수는 처음부터 헌터 활동을 함께한 사이였다.
비수가 헌터 자격 시험을 보러 갈 때 천해선이 동행을 할 정도였으니, 둘의 친밀함은 말해 봐야 입 아픈 수준이었다.
모든 이레귤러 멤버들이 다 아픈 손가락이겠으나, 특히나 천해선이 받아들이는 충격은 이만저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이 인간계라는 점, 그리고 뽀리가 지켜 주고 있다는 점을 너무 맹신했나 봐.”
천해선은 비수가 납치된 것이 자신의 탓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잉센은 알고 있었다.
마인들이 작정하고 한 사람을 노릴 경우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빨리 마계로 가서 누나를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영계의 수호령들이라면 마계로 출입할 방법을 알려 줄지도 몰라요.”
강정현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았다.
하지만 천해선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해.”
“왜…… 요?”
“우리가 영계에 처음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봐. 분명 영계 이상의 차원 간섭을 받게 될 거야. 그리고 마계에서는 인간계와 달리 우리 쪽의 능력만 반감되지.”
육철완이 마인들과 그나마 비빌 수(?) 있었던 건, 장소가 인간계였기 때문이다.
헌터들이 가진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었던 반면, 마인들은 인간계에서 발생한 차원 간섭으로 본 능력을 다 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터들이 한 번도 겪지 못한 마계에 무작정 입성한다?
그건 필경 자살행위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럼……!!”
“걱정하지 마, 정현아. 비수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야. 당장은 마인들도 비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야. 만약에 비수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진작 죽였겠지. 비수에게 활용 가치가 있는 한 우리에게도 시간이 있어. 그리고 어쩌면…….”
이어진 천해선의 말에 모든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놈들이 데려간 곳은 마계가 아닐지도 몰라.”
“?!”
육철완이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물었다.
“천해선 헌터님.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좀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요. 저희가 당장 마계에 진입하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될 겁니다. 영계에 처음 들어갔을 때 =처럼요. 그런 상황에서 비수가 자신의 버프를 마음껏 쓸 수 있을까요?”
듣고 보니 그랬다.
일전의 전투에서 키메라가 강제로 비수의 버프를 빨아들였을 때, 그녀는 탈진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고작 한 마리를 각성하는 데에도 그만한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인간계에서.
“키메라가 된 헌터들을 한곳에 모아 두고 거기서 일을 진행할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마인들이 전쟁을 서두른다면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아직은 모르죠. 이계가 될 수도 있고, 의외로 영계가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한시바삐 그곳을 찾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엄브렐라 인더스트리와 진 박사님 연구소의 장비를 모두 꺼내 와야겠어요.”
천해선의 말에 모든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암담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찾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흠흠…….”
잠자코 천해선의 말을 듣고 있던 잉센이 슬쩍 손을 들었다.
“어쩌면 오늘 내가 만나고 온 사람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
잉센이 훈련을 빠지는 건 트레이닝을 시작한 이래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했기 때문에 성과도 좋았다.
몸이 아프지 않고서야 빠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단순히 ‘볼일이 있다’며 오늘 훈련에 불참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어. 오늘 누구를 만나고 온 거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훈련장으로 향하는 잉센의 발을 멈출 수 있을까.
“그건…….”
잉센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온 순간, 모든 동료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 * *
“볼품없어.”
특유의 오만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깔아보던 그녀가, 곧 그런 결론을 내렸다.
“당연하지. 여긴 그냥 트레이닝 센터이니까.”
천해선이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트레이닝 센터로써도 볼품없다는 말이야. 고작 구속구 몇 개와 실드 파장기만 설치돼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렇게 한가하게 남의 시설 평가나 하려고 여기 왔나? 할 일이 많을 텐데?”
씨익.
그녀의 입가에 매혹적이고 도전적인 미소가 서렸다.
전 스틸 실드 길드의 대표.
이제는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존재.
금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전형적인 서양 미녀, 사일리아가 검지를 까닥거렸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서, 이곳의 사건이 가장 중요하거든. 이럴 때 총재가 나서 줘야 하지 않겠어?”
“흥.”
천해선은 사일리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가 중요한 사건이냐.
단순히 메루스를 얻고 싶어서 온 주제에.
사일리아는 그동안 잉센과 지속적인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천해선이 아닌 다른 헌터들도 메루스를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
그건 지난 마인과의 대결에서 절망감을 느꼈던 사일리아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WHPO의 총재가 된 이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터.
대강의 일이 정리되자마자 사일리아는 한국 땅을 밟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유일하게 마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에너지, 그것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쩌나.”
“?”
천해선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메루스는 넘겨주는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사용할 수가 없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일리아의 고개가 잉센 쪽으로 돌아간다.
왜 진작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는 얼굴이다.
잉센은 그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젠장. 납작 엎드려 빌기라도 하라는 거야?”
“오……. 그거 정복감 장난 아니겠는데?”
“망할 자식.”
사일리아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녀가 알기로 메루스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총 세 명.
천해선과 강정현, 그리고 키릴이었다.
키릴이야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고, 결국 여기 있는 둘의 허락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사일리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강정현이 몸을 움찔한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날 무서워하는 것 같군.”
한 명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고, 한 명은 마음을 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사일리아는 한차례 한숨을 내쉰 뒤,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좋아. 비수를 찾으러 갈 때 나도 합류하겠어.”
주변 헌터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예전 ‘스틸 실드’의 수장이었다면 무덤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사일리아의 위치는 ‘총재’가 아니던가.
오죽하면 천해선조차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다시 물어볼 정도였다.
“그렇게 자리를 비워도 돼? 총재라는 자리.”
“안 돼.”
“그런데?”
“지금 인류에게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메루스를 얻고 싶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공짜로 낼름 받아먹기만 할 수는 없는 것 같군.”
사일리아의 솔직한 대답에 이레귤러 헌터들이 저마다 눈을 마주친다.
사일리아의 전투력은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지금 당장 마인과 붙는다면 이레귤러 헌터들이 더 도움이 되겠지만, 그녀가 메루스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첸.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천해선은 처음부터 사일리아에게 메루스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분명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지만, 전장에서 보여 준 희생 정신과 리더십을 볼 때 자격이 있었다.
조금 전 그녀를 살살 약 올린 건 그녀가 어떤 자세로 전쟁에 임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총재가 되고 나서 몸을 사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함께…… 비수 누나를 찾아 주신다구요?”
강정현이 조심스럽게 사일리아에게 다가갔다.
워낙에 여왕님 포스가 강하다 보니 접근하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비수를 구하러 함께 가겠다는 소리에 강정현은 천해선보다도 먼저 마음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사일리아는 물끄러미 강정현을 바라보았다.
천해선이 조숙한 건지 강정현이 성장이 더인 건지.
아니면 이 왜소한 체격 때문인 건지.
자신이 알기로 천해선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어리게 느껴졌다.
묘한 눈으로 강정현을 바라보던 사일리아가, 돌연 웃픈 미소를 지었다.
“비수가 부럽군. 이렇게 좋은 동생도 다 두고.”
“……?”
“난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아. 비수를 찾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어. 복잡한 서류 업무 따위는 부하들을 시키면 그만이야.”
대놓고 직무유기를 선언하는 사일리아를 보며 나머지 헌터들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노력해 볼게요.”
“좋아. 내일부터 당장 훈련 준비를 하지.”
그것으로 이레귤러의 일정은 종료가 되었다.
트레이닝을 마치자마자 비수를 찾아나서다 보니 다들 체력이 말이 아니었다.
이레귤러는 서로를 향해 격려의 말을 나눈 뒤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넌 왜 안 가?”
혼자 멀뚱히 남은 사일리아를 보며 천해선이 물었다.
“어디로 가라고?”
“한국의 수많은 호텔들이 서운해할 소리를 하네.”
“여기 호텔들 별로야. 너네 집에 갈래.”
“?”
천해선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번역 프로그램이 오류가 났나 체크를 해 보기도 했다.
“우리 집?”
“어. 그 집에 비수도 같이 살았다며. 주인 없을 때 신세 좀 질게.”
“허…….”
어떻게 된 게 조금만 엮였다 하면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말부터 꺼내는가.
천해선의 머릿속에 몇몇 헌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훈련하기도 그쪽이 편할 테고. 가자.”
“…….”
말문이 막힌 천해선이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사일리아가 먼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