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이공간(異空間)에 떨어져 귀환석을 찾지 못하면 이런 기분일까.
수여식이 끝난 뒤, 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흥미, 탐욕, 선망, 기타 등등.
강렬한 눈빛으로 내 앞에 선 자들이 수십 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오늘 안에 집에 갈 수 있을까?
“민국일보 기자 제갈천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인터뷰를……!!”
“이 사람이. 아까부터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만, 상도덕을 지켜!”
“천해선 씨! 10년 만에 ‘S’랭커 판정을 받으셨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비켜! 우리 천해선 헌터님은 아까 나랑 만나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내가 언제 이 사람아.
나를 향해 손을 내밀다 못해 심지어 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급하긴 급한가 보다.
빨리 집에 가서 누나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싶은데, 이래 가지고서는 집은커녕 본사를 빠져나가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공평하게 모든 분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오!!”
공평하고 심플하게.
“굉장히 기쁘고, 전 당분간 인터뷰 안 합니다.”
“엑???”
나는 정중한 자세로 앞에 있는 기자들을 하나하나 밀쳤다.
평범한 힐러였다면 인파를 밀치는 게 어려웠을 테지만, 이미 내 신체는 ‘D’랭커 헌터에 준하는 수준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살짝 살짝 손을 내젓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일개(?) 기자의 몸으로 내 행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천해선 씨.”
음.
기자에 이어 빡빡이 아저씨인가.
도복 같은 복장을 한 중년의 민머리 사내가 나를 부른다.
“저는 비숍 길드의 대표. 가열찬이라고 합니다.”
‘오호라.’
비숍 길드.
글로리 길드만큼은 아니지만, 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망 높은 길드다.
부산 지역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넘버 투 길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혹시 저희 비숍 길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가열찬의 입술이 좌우로 크게 늘어난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가 보군.
“그거 아주 듣기 좋은 소리로군요. 저희 비숍 길드는 천해선 씨 같은 유능한 인재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아, 그런데요.”
“??”
“지금은 비숍 길드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좌우로 늘어난 입술이 떠억 하고 벌어진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네.
뭔가 말을 하면 리액션이 찰져서 대화할 맛이 나는 아저씨다.
“왜 벌써 그런 결정을……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멀어서요.”
멀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적인 것이었나.
지하 1층으로 내려간 가열찬의 턱이 순식간에 3층까지 하강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눈치다.
하지만 멀다는 건 내게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비숍 길드의 관할 구역은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다.
필연적으로 누나와 따로 지내 살아야 한다는 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비숍 길드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
서울 근처 관할 구역을 따낸다면 모를까.
“머…… 멀다면…… 수도권 길드로만 알아보는 것이로군요. 혹시 그럼 글로리 길드를……?”
“아니요. 글로리 길드는 안 갑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 집단 글로리 길드.
오늘 합격한 대다수 헌터가 그곳과 계약하기를 원하겠지.
그러나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글로리 길드와 계약할 일은 없다.
“글로리 길드도 아니고, 저희 비숍 길드도 아니라면…….”
머리를 너무 굴려서 그런 걸까.
가열찬의 정수리에 뜨거운 기운이 맺힌다.
아, 이 아저씨 에스퍼라고 했지.
이대로 가다간 가열찬의 열기로 내 얼굴이 익어 버릴 것 같다.
“지금 당장은 길드 가입할 생각이 없어요. 따로 생각한 곳도 없구요. 천천히 저한테 유리한 곳을 찾을 생각입니다.”
“오, 그렇군요.”
최소한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아니니 희망은 있다는 걸까.
가열찬의 눈에서 긍정의 빛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 그 눈빛이 누군가의 목소리로 차디차게 식어 버렸다.
“……구 대표.”
“가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특유의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글로리 길드 대표 구건이.
녀석이 뾰족뾰족한 머리를 꼬집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지난번 안부를 물을 겸 전화를 드렸었는데, 바쁘셨나 봅니다.”
“바빴지. 서울의 어떤 길드가 계약을 앞둔 헌터를 빼 가느라 인력 보충을 해야 해서 말이야.”
가열찬의 태도를 보건대 그 서울의 길드가 어디인지는 쉽게 추측이 가능했다.
가계약이 된 헌터들도 위약금을 물어 가며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국내 2위 길드와의 분쟁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 같다.
“하하하하. 오해가 있으셨나 보군요.”
“오해?”
“저희는 공식적인 루트를 밟아서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가계약은 말 그대로 가계약일 뿐이니까.”
오우 이런.
간신히 식혀 놓은 가열찬의 정수리가 다시 뜨거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한다.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스멀스멀 그의 뒤로 물러섰다.
이봐 가열찬.
열 받은 김에 시뻘건 레이저라도 저놈에게 쏴 버려.
그러면 내 계약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초년 출세는 3대 재앙 중 하나라지. 그렇게 계속 안하무인 하다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명심하지요.”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가열찬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기 전에 자신의 명함을 내게 주는 꼼꼼함을 보여 주었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고.
그런 사람인가.
그러니 한 지역의 정점이 될 수 있었던 걸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구건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날의 일은 사과하지.”
“……사과?”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아주머니가 억울해할 만하더군. 게다가 너도 그 지역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고.”
“…….”
“충분히 나에게 반감을 가질 만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희생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듯한 발언들이다.
그날 헌터 협회 본사에서 듣고 싶었던 말들.
아쉽네.
처음 마주한 날 이런 말들을 들었다면 글로리 길드를 이해해 보려고 했을 텐데.
‘S’랭커 헌터를 영입하려고 하는 ‘지금’의 상황 말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그래. 괜찮으면 가까운 커피숍에 가서…….”
“앞으로도 그런 마인드를 유지하길 바라지.”
나는 벙 쪄 하는 구건이의 얼굴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놈은 글로리 길드의 위세를 너무 믿은 게 아닌가 싶다.
겨우 그따위 사탕발림으로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다니.
“나는 널 마리아의 후계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에테르를 담은 묵직한 저음이 내 발걸음을 막아선다.
아, 저놈이랑 이야기할 때는 귀를 보호해야 한다는 걸 또 잊었네.
저놈은 꿈에도 모를 거다.
내가 누군가의 후계자를 꿈꾼다면, 그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란 걸.
“관심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난 구건이와의 대화를 종료했다.
* *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포텐셜이 충분한 친구이니 곧 승급할 겁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본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구건이가 유인원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천하를 다 얻은 듯 밝아 보였던 아침의 유인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E’랭커 힐러를 자식으로 둔, 나라 잃은 표정의 아버지만이 존재할 뿐.
“기분 전환은 좀 됐어?”
“네. 임페리얼 타이거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신기했어요. 그렇게 완벽한 치유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입만 열면 천해선 이야기뿐이군.’
마음 한구석이 거북했지만 구건이는 만족하기로 했다.
마리아의 목소리가 전과는 달리 꽤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개방동 사태 이후 기나긴 자해 행위를 했던 그녀가 아닌가.
이쯤 되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나저나…… 부회장님이 걱정이네요. 자신의 일보다도 중요한 게 자식의 일인데…….”
“우린 할 만큼 했어. 더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뭘 할 만큼 했는데요?”
아차.
무심코 대답한 구건이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마리아는 상냥하고 유약한 심성을 가졌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본심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자네를 심사위원으로 편성해 줬잖나. 우리로서는 최대한의 호의인 거지.”
안 그래도 마리아가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스스로 이실직고를 할 수는 없지.
유지원을 연구소로 데려가 에테르를 잔뜩 주입한 건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한 거겠지…….’
능력과 에테르는 정비례하기 마련이다.
단계적으로 쌓인 에테르에 맞추어 각성자의 스킬도 덩달아 자란다.
하지만 유지원은 능력을 개화하기도 전에 에테르 폭탄을 맞았고, 수치만큼의 치유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따로 강사를 불러서 개인 교습까지 시켰거늘…… 결국은 그 정도 그릇이라는 이야기다.’
유지원은 실패했다.
천해선은 글로리 길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구건이의 표정은 그다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유지원이 실패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건이는 ‘윈 윈’ 전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 대신, 유인원 부회장이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원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A’나 ‘B’랭커가 됐다면 부회장으로서도 아쉬울 게 없지만, ‘E’랭커 힐러는 글로리 길드에는 무쓸모한 자원이었다.
굳이 거두지 않아도 되는 유지원을 거두어 줌으로써, 앞으로 협회에 무언가를 요구할 ‘키’를 얻게 된 것이다.
관할 구역을 확장하든, 방송사의 독과점 의혹 보도를 강제로 중지시키든.
협회에 요구할 만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천해선인데…….’
마리아의 후계자.
그건 힐러 타입의 헌터에게는 최고의 제안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 말을 꺼낸 당사자가 글로리 길드의 대표가 아닌가.
실제로 천해선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골드 코어를 사용해도 측정이 불가능한 에테르의 양.
다 죽어 가는 임페리얼 타이거를 순식간에 치유해 낸 SSS급의 치유 능력.
그리고 잘생긴 외모에서 우러나오는 스타성까지.
녀석을 잘만 키우면, 글로리 길드의 향후 10년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보아하니 비숍으로 갈 것 같지는 않고…….’
글로리도 아니고 비숍도 아니다.
그럼 대체 천해선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녀석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다.
일부러 개방동 주민들을 죽게 놔두었다는 사실을 녀석이 알 리 없다.
그건 마리아조차 모르는 사실이니까.
그러니, 아직 회유가 가능하다.
어느 길드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이 어디든 강제로 멈춰 세워야 한다.
‘천해선. 네게 어울리는 길드는 우리나라에 단 한 곳뿐이다.’
창밖 너머 한강을 바라보며, 구건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쾅!!
유인원이 핏발 선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본다.
1차 시험장의 총감독관.
표혁규에게서 전해 들은 보고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사실입니다. 오늘 사용한 골드 코어가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찬란한 황금빛에 검붉은 금이 가 버렸고, 내재한 에테르 수치가 제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황당한 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속에서 천불이 나 죽겠는데, 협회의 소중한 자산 하나가 쓸모없어졌다는 보고에 유인원은 목 뒤가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
감독관에게 고함을 치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표혁규 감독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허용 범위 이상의 응시생이 등장했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골드 코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유인원에게는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젠틀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어느새 헝클어져 있었고, 표정은 여느 악인(惡人) 못지않았다.
아니, 대외적인 이미지를 꾸미고 있었던 것일 뿐.
지금의 이 모습이 유인원의 본질이라 할 수 있었다.
“곧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가 됐는데……. 지랄 났네.”
유인원은 책상 위에 놓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야. 글로리 길드가 지원이를 받아 줘서 그나마 다행이지…….”
인상을 벅벅 쓰며 담배를 피우는 부회장을 향해, 표혁규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변질된 골드 코어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유인원이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씨발!! 알 게 뭐야!! 코어 에너지 반응이 제로라며!!”
“네……. 하지만 명목적으로는 협회 자산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물어보지 말란 말이야!! 쓰레기통에 쑤셔 박든지, 구멍 뚫어서 볼링장에나 줘 버리든지 알아서 해!!”
순간적으로 바닥을 향하고 있던 표혁규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한다.
그러나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유인원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면이었다.
표혁규는 부회장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마지막 보고를 마쳤다.
“그럼…… 망가진 골드 코어는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