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천해선이 내민 손은 어느새 가운뎃손가락만 세워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게 혈육은 천송화 하나뿐이라.”
껍데기만 인간인 천해선은 ‘태초의 종’인 퀴스케 대신 자신의 누나를 선택했다.
선택받은 종이고 나발이고, 자신은 인간으로 살 것임을 피력한 것이다.
-……유감이에요, 형.
퀴스케가 양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진심으로 슬픈 표정을 한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심을 전하면 이야기가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오오오…….
퀴스케에 이어진 검은 구름의 줄기가 한층 더 굵어졌다.
소름 끼치게 희던 피부가 이제는 숫제 보랏빛으로 변했고, 텅 비어 있던 동공에 백색의 띠가 생겼다.
퀴스케.
천해선과 마찬가지로 ‘마인’이라는 수식어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마인을 초월한 ‘태초의 종’으로 형태를 변형시켰다.
‘온다……!’
푸욱.
“?!”
온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퀴스케가 늘린 딱딱한 손이 천해선의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커헉……!”
천해선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메루스를 익히면서 오감이 더욱 발달했지만, 지금 퀴스케가 시전한 공격은 도저히 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 퀴스케를 봤을 때 느꼈던 절망감.
그것이 다시 천해선의 온몸을 휘감았다.
“큭…….”
천해선은 누운 상태로 스스로의 몸을 치유했다.
‘치유가…… 되지 않아…….’
‘태초의 종’이 사용하는 에너지라 그런 것인가.
자연적으로 치유되었어야 할 몸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지에 먹물을 흘린 것처럼 천해선의 혈액이 바닥에 번져 갔다.
“쿨럭.”
치유를 시전하려 할수록 되려 몸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았다.
천해선의 시선에 암흑 물질로 뒤덮인 구름이 보였다.
갑자기 구름 속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나.
이레귤러 동료들.
진 박사.
사일리아와 잉센, 등등.
“재수 없게…….”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떠오른다는 주마등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마지막에, 키릴의 한쪽 얼굴이 보였다.
왜 다른 사람들은 정면인데 키릴만 한쪽 얼굴만 보이는 걸까?
“안녕? 강아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키릴만 천해선의 옆에 실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
천해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것을 볼 수는 있지만, 환청까지 동반되는 경우는 드물다.
마침내 키릴을 확인한 천해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키릴……!!”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잊은 채 천해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정말로.
키릴이었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코트를 입고,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천해선의 앞에 서 있었다.
“키릴…….”
천해선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전장에서 단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거늘, 어느새 그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지내 왔는지.
얼마나 성장했고, 어떤 승전고를 울렸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살려 준 목숨이 어떤 나비효과가 되었는지도.
크라수스 드래곤과의 대화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에는 키릴을 만나자마자 따져 물을 생각도 했었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런 의심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고생했네, 강아지.”
천해선의 감정을 더욱 북받치게 한 건 그녀의 변화 때문이었다.
일부러 한쪽 얼굴부터 보여 준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멀쩡한 반쪽 모습과는 달리, 나머지 신체가 심각하게 변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공은 사라지고, 피부는 창백하게 변했으며, 없던 비늘 같은 것이 생겼다.
믿기 어렵게도 공허했던 소매에는 허여멀건 팔이 새로 돋아나 있었다.
키릴의 몸 절반이 ‘마인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지하에서 고생을 좀 해 가지고.”
키릴이 천해선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천해선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 같았다.
-어쩐지…… 옥티엔스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요.
퀴스케가 숙제를 다 푼 학생처럼 속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몸의 절반이 마인이라면 얼마든지 인간 냄새를 지울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처음에는 고생 좀 했지. 근데 이제는 괜찮아.”
촤아아악.
자신을 대놓고 무시해서일까.
스승과 제자의 상봉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일까.
퀴스케의 손날이 다시 뻗어 나왔다.
파캉.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손이 닿질 않았다.
새로 돋아난 마인의 팔이 퀴스케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어…… 어떻게.”
키릴이 원래의 손으로 천해선의 볼을 쓰다듬었다.
“잘 들어, 강아지. 퀴스케의 말대로 우린 선택받은 종이야. 어떠한 에너지도 흡수가 가능하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봐.”
키릴은 대답도 듣지 않고 퀴스케를 향해 뛰어들었다.
파캉!!
눈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공방이 이루어졌다.
천해선은 조금 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어느새 ‘이테룸’과 ‘바우’가 자신의 턱밑까지 도달해 있었다.
화악.
금빛으로 물든 천해선의 동공에 마인들의 움직임이 훤히 들어왔다.
퀴스케의 공격은 당해 내기 힘들었지만, 마력이 전부인 생명체에 호락호락 당할 천해선이 아니었다.
휘릭.
천해선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두 마인의 합동 공격을 피했다.
키릴이 합류했다는 고양감이 천해선의 몸을 더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굳이 생각을 많이 할 것도 없어.’
아니.
키릴이 준 힌트는 이미 전부터 고민해 오던 것이었다.
포이즈너.
퀴스케가 ‘태초의 종’이라 부른 존재들은 그 무엇도 흡수할 수 있었다.
에테르와 블랙 에테르.
그리고 메루스까지.
그렇다면, ‘암흑 물질’이라고 흡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날렵하게 움직이던 천해선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마리아에게는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했지만…….’
푸욱.
이테룸의 단단한 손이 천해선의 옆구리를 뚫었다.
퀴스케에게 당해 완벽한 치유가 되지 않은 부위였다.
“커헉…….”
천해선의 등이 기역 자로 꺾였다.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한 것일까.
이테룸이 득의만만한 얼굴로 천해선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곳 세계에서는 바퀴벌레가 가장 오래되고 끈질긴 종이라고 하던데…… 네놈도 바퀴벌레 못지않구나.
이테룸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천해선을 죽일 생각이었다.
퀴스케가 ‘태초의 종’ 운운하며 인간과 마인을 싸잡아 묶은 것 때문이었다.
퀴스케를 섬기던 마인에게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태초의 종’이고 뭐고, 인간의 껍데기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빠직.
-?
처음에는 천해선의 뼈가 부서진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테룸은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부서진 건 천해선의 몸에 박힌 자신의 팔이었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천해선의 주위에 퍼졌다.
이테룸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뒷걸음을 치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퀴스케에게 느꼈던 공포를 눈앞의 ‘인간’에게서 경험하게 될 줄 몰랐다.
스스스스…….
놀랍게도, 천해선은 부서진 이테룸의 몸을 흡수하고 있었다.
아니, 흡수라는 표현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암흑 물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독도 먹는데 암흑 물질이 대수냐.’
독 먹는 힐러, 천해선.
마침내 그가 사상 최악의 물질을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번뜩.
그의 눈에서 동공이 사라지고, 곧 원형의 백색 고리가 생겼다.
퀴스케 저리 가라 할 끔찍한 기운이 천해선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퍽.
한 번.
퍽.
그리고 또 한 번.
두 번의 움직임 끝에 천해선의 양손이 채워졌다.
검은 심장 두 개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퀴스케에 필적하는 스피드로, 천해선이 마인의 심장을 단숨에 움켜쥔 것이다.
-……무슨…….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이테룸이 확인한 건, 자신처럼 비늘이 생겨 버린 천해선의 피부였다.
지금의 천해선은 마인과 인간 사이.
그 어디쯤에 있었다.
쿵.
심장을 잃은 마인의 몸이 풍선 인간처럼 바닥에 추락했다.
‘목이 타…….’
곧 천해선의 눈에 백색 고리가 사라지고, 동공 없는 눈이 주변을 배회했다.
처음으로 암흑 물질을 흡수한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천해선은 비척비척 걸어가며 자신의 갈증을 해결해 줄 대상을 찾았다.
눈앞에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금발 머리의 헌터가 보였다.
턱.
천해선이 사일리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살육과 피를 갈망하는 게 영락없는 키메라의 모습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 모습을 지켜보는 헌터가 있다면 영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천해선은 사일리아의 목을 움켜쥔 채 가만히 있었다.
덥석.
그러고는 곧 빠르게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입 안에 넣었다.
다행히도 그건 사일리아의 신체 기관이 아니었다.
천해선의 안주머니에 있었던 유기물 덩어리들.
그건 마인들이 죽었을 때 땅에 떨어졌던 ‘태초의 생명’이었다.
“그냥…… 이것저것 다 처먹는구나…….”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사일리아가 나직이 욕설을 뱉은 뒤 다시 혼절해 버렸다.
잠시 후.
“……!”
초점이 없던 천해선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뭐야 시발.”
천해선은 깜짝 놀라 사일리아의 몸을 놓은 뒤, 전황을 살폈다.
“그래, 분명 암흑 물질을 몸 안에 받아들였고…….”
바닥에는 마인 두 명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느새 바스러진 사체의 옆에는 자그마한 유기물들만이 남았다.
“하하……. 짜릿했지?”
키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천해선은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퀴스케의 공격에 의해 키릴의 몸이 벌집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키릴!”
천해선이 한달음에 달려가 키릴의 몸을 안았다.
절반은 마인의 몸이어서 그런 걸까.
인간이었으면 죽어도 수백 번은 죽었을 부상이었다.
그의 코트는 검붉은 피로 완전히 절여져 있었고, 마인화 된 한쪽 귀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좀 빨리 잡지 그랬냐……. 똥강아지야……. 어서 치유해 줘.”
“네……!”
천해선이 치유를 위해 몸 안의 모든 기운을 잠시 거두어들였다.
그때,
푸욱.
“어……?”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그건 메루스를 불러일으킬 때의 고양감과 꽤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의로 일으킨 메루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부우우우웅.
“으아아악!”
천해선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검은 구름을 타고 퍼져 나갔다.
“키…… 릴!!”
“하하…… 하하하하……!!”
키릴의 마인화 된 한쪽 얼굴은 웃었고, 나머지 한쪽 얼굴은 울고 있었다.
에테르와 메루스, 암흑 물질과 마인에게서 추출한 태초의 에너지까지.
천해선의 모든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키릴에게 먹히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포동포동 살을 찌웠구나. 기대 이상이야!”
키릴의 목소리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반면 천해선의 상태는 보기 흉할 정도로 수척해져 갔다.
누가 보더라도 천해선의 에너지를 키릴이 수탈해 가는 모양새였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천해선은 끝없이 절망했다.
결국은 테르티의 말이 옳았다.
크라수스 드래곤과 키릴이 나눴던 대화에 반전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껍데기로 퀴스케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키릴은 혼자가 아닌 둘의 힘을 키워 대항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같은 포이즈너였던 천해선을 살려 주고, 능력을 개화시켜 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단 말인가?’
절망이 끝나자,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목숨을 저울질당하는 건 한 번만으로 족하다.
더 이상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헌터가 되지 않았는가.
덥석.
천해선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키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는…… 안 돼…….”
“그래?”
키릴의 눈물 번진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의 천해선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살아남겠어……!!”
부우우웅-
스스스스……
화아악!
천해선의 몸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잔뜩 빼앗겨 텅 빈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불러들일 기운이 있었다.
천해선은 이를 악물고 키릴의 기운에 대항했다.
밀물과 썰물처럼, 키릴과 천해선의 기운이 몸을 타고 넘나들었다.
파캉.
그 기운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퀴스케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힐 정도였다.
얼마 동안 시간이 지났을까.
스……
스스……
스스스스스스……
숲속을 산책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에테르도, 메루스도, 암흑 물질도 두 사람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평화롭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한 바람 소리만이 스쳐 지나갈 뿐.
“……어째서.”
천해선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모든 과정이 끝난 이후에야 키릴의 속마음을 읽은 것이다.
키릴이 크라수스 드래곤과 나눈 대화는 대부분 진심이었다.
포이즈너 한 명이 퀴스케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도, 그래서 두 명의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심지어 천해선을 살찌워야 한다는 말도 전부.
그녀가 한 말 중 진심이 아닌 것은 딱 하나, ‘방향’이었다.
키릴은 처음부터 천해선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
키릴이 죽었다.
눈앞에 숨이 끊어진 반인 반마의 존재가 천해선의 품 안에서 싸늘히 식어 버렸다.
서로의 기운이 오가는 동안 천해선은 느낄 수 있었다.
암흑 물질을 오래 담고 있던 탓에, 키릴은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숨어 지내며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자신이 갈무리한 힘을 천해선에게 전달해 줄 때를.
만약.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 천해선은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몸 안의 독을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기 싫어 평생 속으로 삭여 온 착한 아이니까.
그래서, 빼앗는 척 가져가도록 만든 것이다.
스윽.
천해선이 키릴의 시신을 천천히 옆에 뉘었다.
그러고는 먹먹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얄궂게도 파란 하늘 대신 어두운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되찾아야지.”
파란 하늘도.
인류가 살아갈 권리도.
천해선은 그 모든 것을 되찾아오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
시종일관 소란스러웠던 바깥 소리가 잦아들었다.
인간과 마물 중 어느 한쪽은 결과가 난 것 같았다.
이제 이 세상에서 남은 싸움이라고는, 자신과 퀴스케 둘밖에 없었다.
“끝을 내자. 퀴스케.”
스스스스스…….
천해선의 주변에서 또다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